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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노 기행문]서울 촌닭 중국 귀주를 가다.
  글쓴이 : 관리자     날짜 : 16-02-06 02:08     조회 : 1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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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노 기행문]
 
누군가 여자로 산다는 것은 사막을 건너는 것과 같다고 했다.

  사막이란 뭔가! 수시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모래산만이 있는 게 아닌 눈도 뜰 수 없을 만큼 휘몰아치는 지독한 모레바람과 하늘아래 작열하는 태양빛으로 온몸이 타듯 달아올라 누구라도 순간순간 숨이 막힌다는 그런 곳. 무엇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가도 가도 끝이 없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라고 했다. 나의 한국에서의 삶도 가물가물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그래서 죽어야 끝이 날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오랫동안 수인(囚人)생활을 하듯 그야말로 어두운 우물 안 개구리로 살다가 우여곡절 끝에 이십여 년 만에 그토록 갈망하던 바깥세상을 뛰쳐나오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나의 마지노선, 심신이 지칠대로 지친 나머지 마지막 나의 몸부림의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어느 중견작가 선생님이 대놓고 저를 16세 문학소녀, 지력(智力)은 12세, 사회경험은 8세라고 했을까. 그만큼 나는 단절된 바깥세상이 많이 낯설고 그에 대한 두려움도 없지 않았으나 불행 중 다행이랄까, 그 무렵 자유만큼 인간의 참된 삶의 권리를 보장받는 일도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의식개혁에 의한 나의 정신혁명이라고 말하고 싶다.


       
                ▲ 중국 소수민족의 옷을 입고 기념사진 남기다   
출소하듯 바깥세상으로 첫 발을 내딛은 그날, 아! 나는 가벼운 현기증과 함께 나도 모르게 신음하듯 자유부터 내뱉었다. 그날따라 햇빛도 나를 반기듯 찬란했고 세상의 공기는 마치 산소로 가득 찬 듯 숨을 들이키는 내내 시원하고 상쾌했다. 비록 20여년의 시간들을 뒤로하고 빈털터리로 나왔지만 자유를 얻은 기쁨으로 마음은 한없이 홀가분했다.

  그리고 자유가 주는 첫 선물까지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다름 아닌 장춘의 장백산 잡지사에서 조직한 이번 귀주문학 답사팀의 일원으로 이여천선생님으로부터 초대받은 일이었다. 선물치고는 두 번 받기 힘든 행운의 큰 선물이었다. 이여천선생님께서 보답차원에서 이번여행을 계기로 좋은 작품 많이 기대한다고 했을 때 나는 조금은 부담스러웠지만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남영전사장님을 위시(爲首)하여 엄선된 문학인들과 함께하는 여행이라니, 그 기쁨은 말할 수 없이 컸다.

  풀 한포기 나무한그루가 곤충들에겐 우주이듯이 내게 문학은 어떻게 보면 그동안 나의 삶을 지탱해준 가장 강력한 힘이었는지도 모른다.

  일단 여행을 결정하고 나니 마음부터 들뜨기 시작했다. 아직 여행일자가 한 달 가까이 남았지만 여행에 필요한 목록을 만들어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냥 단지 해외여행일 테지만 나한테는 단순 여행이 아닌 자유 그 자체였기 때문에 이번 여행의 의미는 각별했다. 소박한 셋집이지만 나의 절대 공간에서 당당하게 내 이름으로 비자를 신청하고 가격비교해서 항공권도 알아보고... 무리를 해서 외출옷도 준비하고... 트렁크까지 사놓으니 제법 떠날 수 있는 분위기가 되었다. 이 모든 것들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 누구의 방해와 반대나 부딪침이 없었다는 것이 실로 이상하리만치 자유스러워서 새삼스럽기까지 했다.

  그사이 차질이 생기면 전체 팀으로 이어지니 이여천선생님께서 위쳇을 통해 수차례 출국준비 확인 문자가 있었다. 위쳇은 한국과 중국으로 이어지는 문우애의 끈이었다.

  즐거운 마음이다 보니 여행일자가 금방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근처에 사는 여동생이 일 다니느라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 시간을 내어 나를 보러왔다. 그러잖아도 부탁하고 싶은 말이 있어 문자로 보내주려고 하던 참이었다. 나는 이제 혼자의 몸으로 먼 길을 떠나 당분간 집을 비워야 되니 나의 채무채권관계 및 기타 자질구레한 것들을 동생한테 말했다. 그랬더니 동생이 고작 10여 일간 집을 비우면서 마치 다시 안돌아 올 것처럼 심각한 소리만 한다면서 몹시 화를 냈다. 그리고 이어지는 흐느낌소리...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것은 너무 일찍 죽음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라는데 나는 30세의 젊은 나이에 갑작스레 첫 남편을 위암으로 잃고 그 충격의 후유증으로 매사를 죽음으로 연관시키는 일이 많아 어느 듯 버릇처럼 굳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아무튼 이튿날 새벽차를 놓칠까 알람을 작동시켜놓았지만 새벽 두 세 시쯤 잠드는 잠버릇 때문에 나는 밤새 뜬눈으로 지샌 후 새벽5시30분 행 시간에 맞춰 인천공항 리무진을 탔다. 그때부터 긴장이 이어졌다. 괜히 여권을 꺼내 확인해보고 여행관련 서류를 체크하는 등 공항에 내려서도 알아보고 찾아간 자동탑승권 앞에서 이 삼 분간 멍하니 서 있기도 했다. 힘들게 탑승권을 내려받아들고 그길로 짐을 부치고 검색대를 거쳐 드디어 출국신고를 할 때쯤에는 괜히 죄인처럼 알 수 없는 어떤 두려움에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모든 수속이 끝이 나고 비행기 탑승만 남겨뒀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편안한 마음을 되찾을 수 있었다. 탑승시간이 아직 여유가 있어 하릴없이 몇 군데 면세점을 둘러보고 탑승자 대기 쪽으로 갔다. 장춘방향 탑승출구 앞에 벌써부터 사람들이 행을 지어 줄이 형성돼 있었다. 가끔 TV에서 봤던 그대로 인천공항의 출국 여행자들 속에 나도 가서 섰다.

  나는 맘속으로 언젠가 세계유럽여행이 아닌 중국여행을 꼭 해야지 했었다. 대륙에서 태어나 섬 같은 한국에 정착해 살고부터 그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지금 바로 그 기회가 온 것이다.

  비행기에 올라 창가에 자리 잡은 나는 하늘아래 조용히 떠 있는 솜 같은 구름들을 보면서 마음은 한없이 푸근해졌다. 그사이 기내에서 제공하는 식사도 하고 음료도 마시면서 신문을 보다보니 시간은 곧잘 흘러 어느새 장춘공항에 도착이 됐다. 고맙게도 이 여천 선생님께서 볼일 때문에 지체돼 뒤늦게 마중 나와 주셨다. 이 여천 선생님은 몇 년 전에 한국에서 우연히 만났었는데 그때 모습처럼 여전히 건강했다.

  택시를 타고 장춘시내로 들어왔다. 사실 가깝게 지내는 동창생이 나오기로 약속이 돼 있었지만 서로 통신착오가 생겨 어쩔 수 없이 호텔을 잡았다. 이곳에서 여독을 풀고 본격적인 귀주여행을 준비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일단 샤워부터하려고 화장실에 들어간 나는 비닐커버가 돼있는 엽서만한 메뉴판에 시선이 갔다. 그 옆에 일일이 가격이 적혀 있는걸로 봐서 호텔에서 따로 파는 상품인 것 같았다. 면도기나 세정제 따위는 쉽게 알아보겠는데 남자용 정유는 뭐고 여자용 정유란 뭔지, 그리고 중국어로 快樂雨衣(쾌락우의)란 단어가 뭘까? 잠깐 촌닭처럼 갸웃하다가 뒤늦게 그 용도를 이해하고는 혼자 깔깔거렸다. 나만의 착각인가, 중국도 호텔이 단순히 숙소용도로 잠만 자고 쉬어가는 역할만 하는 게 아니구나 싶었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이튿날 누적된 피로와 긴장감이 풀리면서 다리 힘까지 함께 풀렸는지 한국시간을 중국시간으로 착각하고 아침식사시간이 늦을까봐 서둘러 계단을 내려가다가 끝 지점에서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느낌에 뼈는 괜찮았지만 장딴지 근육과 발목 인대가 많이 놀란 듯 순간순간 깜짝 놀랄 정도로 아팠다.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게 무슨 꼴이람! 상심이 말이 아니었다. 뒤늦게 달려온 동창생이 모든 게 자기 탓이라며 몹시 미안해 했다. 동창생이 사다준 진통제 약을 먹고 소염제파스를 장단지에 덕지덕지 붙이고 운동선수들이 시합을 하다 다치면 바로 환부에 뿌린다는 분무기형 약을 사용하면서 한참을 난리를 떨었다. 그 덕분인지 친구 앞에서 워킹도 해 보면서 걷는 연습을 많이 했다.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참으로 난감했다. 다행히 이튿날 다리가 아프고 불편했지만 걸을 수는 있었다. 그렇다 해도 누가 봐도 불편해 보일 것은 확실했다. 어쨌든 곧 만나게 될 일행에게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중국은 과연 대륙의 땅이었다. 한국에서 장춘까지의 비행시간이 고작 두 시간인데 비해 국내여행임에도 장춘에서 귀양까지는 한배이상 더 많은 약 5시간이 소요됐다. 국내여행임에도 짐 수색과 더불어 몸수색 등 일련의 관문을 거치면서 많은 중국인들이 여유롭게 여행하는 모습에서 중국도 많이 발전했고 중국인들의 생활도 더불어 많이 향상됐으며 중국도 어느새 그 어떤 나라도 무시 못 할 강한 나라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중국국력이 강해야 우리들의 위상도 당연히 달라지는 만큼 중국을 응원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여행이란 낯선 사람을 친숙한 관계로 만들어주는 신기한 매력이 있었다. 답사팀 일행 중에 남영전사장님과 이여천선생님을 제외하곤 다 초면이지만 문학을 중심으로 모이다보니 낯선 느낌도 잠시 함께 라는 문우애로 서로 부담 없이 다가갈 수 있었다.

  귀양에 도착해서 첫 번째로 답사한곳이 息烽集中營 혁명역사기념관이다. 잿빛이 드리운 날씨에 비까지 내려 장소가 장소인 만큼 전체 분위기가 스산했다. 항일전쟁시기 장개석 軍統局이 설치한 3개의 비밀감옥중 규모가 제일 크고 등급 또한 최고로 높아 軍統내부에선 대학이라고 지칭했다고 한다. 1938년 11월에 설립해서 1946년 7월까지 중경으로 옮기기 전까지 무려 8년 가까이 감옥 9동을 지어놓고 차례로 공산당과 애국인사, 애국將領 및 기타 정치범 1200여명을 무참히 살해했으며 온갖 형언하기 어려운 고문으로 죽음을 맞이한 600여명, 그리고 400여명은 행방불명됐고 중경으로 옮길 때는 생존자가 불과 100명도 채 못 됐다고 한다. 고문 장면의 많은 사진자료들을 보면서 한동안 말을 잃었다.

  특히 猫洞이라는 내부 구역에는 천연적으로 형성된 동굴이 있었는데 이곳을 비밀동굴감옥으로 이용됐다고 한다. 역사적 현장이 그대로 잘 보존돼 있었다. 내부엔 물 감금 장소 및 수많은 종류의 잔혹 고문기구들로 당시의 참혹한 현실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워낙 은폐성이 뛰어나서 폐부를 찌르는 비명조차도 밖에선 알 길이 없다고 하니,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갑자기 알 수 없는 처연한 기운이 파장을 일으키며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그들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값진 희생으로 오늘날의 중국의 번영을 가져온 것이리라. 지난날 이 나라를 위해 희생된 애국정신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면서 경건한 마음으로 그곳의 영혼들에게 머리 숙여 묵념을 드렸다.

   다소 무거운 마음으로 찾아간 곳은 혁명의 성지 준의였다. 학교 다닐 때 주로 정치시간에 들어봤던 준의회의 개최지. 그 장소에 40여년이 지난 지금 실제로 와서 보니 감회가 남달랐다. 중국식과 서양식이 다소 혼합된 건축물로서 1931년 중국공산당이 중앙정치국 확대회의를 열어 이곳에서 모택동의 당내에서의 직위를 확고히 했고 중국공산당 혁명에 운명을 결정지은 역사적 장소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유적지로 돼 있었다. 해설자의 상세한 설명을 듣고 나니 그 의미가 더한층 새롭게 각인 되였다. 중국 근현대역사의 주축이 되는 중국공산당이 없으면 현제의 신중국도 없었을 것이다. 어렸을 때 불렀던 공산당을 찬양하는 노래가 불현듯 기억 속에서 되살아나 꿈틀거렸다.

   준의회의 건물 앞에서 이여천선생님이 미리 준비해 가져간 <장백산잡지문학답사활동> 플랜카드를 앞에 펼쳐들고 모두 단체기념촬영을 했다.

  뜻 깊은 준의회의 유적지를 돌아본 후 우리일행은 남영전사장님께서 사전에 예약해놓은 일정대로 준의시에 위치한 특급호텔로 이동했다. 형명 성지인 만큼 중앙 급 지도자들이 심심찮게 방문한다는 호텔이어서인지 외관은 물론이고 내부에 노출된 모든 시설들이 상당히 고급스러웠다. 이곳에서 준의시 소수민족문인협회와 좌담회를 가지기로 한 것이다. 회의실 벽면에는 長白山雜誌社采風與黔北作家交流座談會라는 글자가 영상물로 나와 있고 격식을 갖추어 앉을 자리마다 양측 참석자의 이름표가 놓여있었다. 우리는 안내에 따라 각자의 이름앞으로 가서 앉았다.

  좌담회는 시종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솔직히 이십여 년 동안 중국어를 접할 수 없어 중국어가 많이 서툴고 간혹 무슨 뜻인지 햇갈리는 부분도 있었지만 중국말을 알아듣는 데는 큰 지장이 없었다.

  장백산 잡지사를 대표해서 우선 남연전사장님께서 중요한 발언이 있었고 뒤이어 연변대학교수인 우상렬선생님의 발언에 이어 장백산잡지사에서 총 책임을 맡고 있는 이여천선생님과 길림시문화관관장님인 전경업선생님의 발언이 뒤따랐다. 모두가 중국어가 유창했고 좌담회의 취지에 맞게 달변가처럼 막힘없이 발언하는 모습들에 내심 큰 감동을 받았다.

  좌담회가 끝나고 모두 만찬이 준비된 장소로 이동했다. 친목차원에서 양쪽문인들이 교차하듯 사이사이 나눠 앉아 인사를 하고 서로의 관심사에 대한 얘기를 하는 사이에 현지에서 만 맛볼 수 있는 정갈하고 화려한 음식들이 연속 들어왔다. 무엇보다 극빈만찬에 오른다는 그 유명한 술, 모택동이 즐겨 마셨다는 모태주가 손님접대용으로 나왔다. 우리 일행을 위해 특별히 허가된 것이라고 했다. 다들 감동하는 눈치였다. 사실 나는 술은 못하고 싫어하지만 모태주의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었다. 이 귀한 모태주를 지금 아니면 평생 맛도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누구라도 권하면 못이긴 채 쪽쪽 받아마셨다.

   맛있는 음식과 더불어 그날 비록 아주 작은 잔이기는 하지만 무려 15잔이나 마셨다. 워낙 귀한 술이라 저도 모르게 헤아려졌다. 모태주는 마실 때마다 목이 살짝 따가웠고 식도에서 열이 나는 듯 후끈거렸지만 속이 불편함 없이 뒤끝이 깨끗했다. 어떠한 여행도 그곳의 특산물이라는 걸 먹음으로서 그 여행의 의미를 더한다고 본다.

  그 다음날 아침 일정대로 소수민족인 묘족의 전통문화를 보러갔다. 대기중인 버스에 올라 묘족마을로 가는 도중 옆자리에 앉은 우상렬선생님이 짓궂게 내 손등을 툭툭 쳤다. 나는 부끄럼타는 소녀도 아닌 것이 괜히 주위를 의식하며 아이참! 하며 반사적으로 두 손을 감췄다. 이 같은 나의 행동에 우상렬선생님은 더욱 재미있다는 듯이 가는 사이사이 심심할세라 농담을 하며 장난을 걸었다. 당초 사고방식이 보수적이고 유별히 촌닭처럼 경직된 나를 이 여천 선생님께서 특별히 재미있고 짓궂은 우상렬선생님을 내 옆자리로 앉게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처음 본 우상렬선생님은 다소 뚱하니 냉정해보였고 강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겪어보니 거리낌 없는 자유분방한 성향을 가진듯했다. 어쩜 교수가?... 그러나 곧 그러한 생각은 나의 편견이었고 그가 따분할세라 점잖은 우리팀원들의 여행분위기를 한껏 띄우기 위한 한 방편으로 기꺼이 한 몸 망가지는 역할을 자청했음을 알 수 있었다. 재미있고 농담 잘하기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여천선생님과 경쟁하듯 시종일관 그의 말 한마디, 익살스런 표정과 행동들이 모두를 웃게 만들었고 여행 내내 즐거운 분위기를 만들어 나갔다.

  묘족마을로 들어서자 저 멀리 광장에서 울긋불긋 소수민족복장차림을 한 현지 남녀 주민들이 들어오는 관광객을 위해 교육을 받은 듯 일관성 있게 대형 원을 지어 바람에 일렁이는 나뭇잎처럼 살랑살랑 가볍게 춤을 추고 있었다. 이미 많은 관광객들로 북적거렸다. 새로운 관광객이 들어서기 바쁘게 입구에서 긴 턱수염을 기른 묘족의 어르신께서 준비된 탁자위에 놓인 술을 연신 술잔에 부어 환영의 인사로 관광객 한 사람 한 사람 입으로 가져가 정성껏 마실 것을 권했다. 나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과 부딪친 잔에 뽀뽀하기 싫어서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수려한 산들을 배경으로 그 일대의 농경 전원풍경이 아스라이 아름답게 보였다. 계단식 밭들이 자그맣게 이어져 있었고 주위 전체가 다 멋진 풍경이었다. 나는 기념될만한 사진들을 몇 장 찍었다.

  점심식사는 묘족식으로 한다고 해서 기대가 됐다. 우리일행들은 긴 식탁이 놓여져 있는 비교적 큰 식당으로 들어가 마주하고 앉았다. 역시 관광구역답게 소수민족 복장을 한 직원들이 바쁜 몸놀림으로 전통음식을 나르고 이 마을에서 만든 민속주를 내왔다. 맛을 보니 꽤나 독했다. 여기서도 전통음식을 맛보고 먹으면서 즐거운 식사가 이어졌다.

  조금 있으려니 여행상품에 포함이 돼 있었는지 젊고 아름다운 묘족여인들이 우리식탁으로 다가와서 마치 자기네들이 산 것처럼 당당하게 우리가 주문한 민속주을 한사람씩 돌아가면서 권하고 나서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묘족풍의 노래를 불러댔다. 예고도 없이 처음부터 너무 높은 고음의 목소리에 순간 나는 화들짝 놀랐지만 이내 즐거운 마음이 되어 흥을 같이했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남자선생님들이 묘족여인들과 사이좋게 기념사진을 찍어댔다. 나는 훼방 놓듯 얼른 그들 속으로 끼어들어 몇 장의 사진 속에 내 못난 모습을 남겼다.

  우리는 묘족마을의 중심거리도 돌아봤다. 이곳의 물가도 중국물가를 감안하면 조금 비싼 느낌이었다. 거리 양쪽으로 음식점, 노점, 토산품, 민속의상, 기념품가게들로 죽 이어져있었는데 유독 棉과 麻가 섞인 원단으로 된 화려한 원피스가 내 발목을 잡았다. 나는 잠시라도 한눈팔다가 국제미아라도 될까봐 가격흥정도 제대로 못해보고 서둘러 하나를 구입하고 허겁지겁 일행들을 뒤 쫒아갔다.

  묘족은 청묘, 화묘, 흑묘 등 지역에 따라 소수민족중에서 분류가 제일 많은 민족이라고 한다. 우리 조선족은 지역에 따라 경상도 전라도 함경도...등 언어로 구별되지만 묘족은 언어는 물론 입는 복장이 완전 달랐다. 붉은 계통의 화려함이 있는가하면 검은색 복장을 한 주민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지역에 따라 머리스타일도 많이 달랐다.

  중국의 집시라고 불릴 만큼 묘족은 이동이 잦았다고 한다. 이들의 조상 때부터 첩첩산중으로 들어와 살게 된 데는 그 어떤 권력의 핍박에 의해 생존의 절실함이 뒤따랐을 것이다. 오지중에서도 오지라 문명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지금은 개방과 더불어 수려한 자연환경덕택에 관광수입으로 어느 정도 삶이 보장된다고 하니 다행이라 하겠다.

   전날 낮에 본 모습과 달리 아침에 본 묘족마을 풍경은 저 멀리 산을 배경으로 옅은 안개에 감싸인 잿빛건물들이 촘촘히 서로 의지하듯 마치 고대에서나 존재할법한 성곽처럼 아스라이 자리 잡고 있었다. 평화롭고 고즈넉한 풍경이 고풍스러웠다.

  귀양은 이름만큼이나 햇빛이 귀해서 실제로 머무는 동안 우중충한 날이 많았다. 비가 내리기도 했는데 이것도 비야? 아닌가? 싶을 정도로 부슬비가 간간이 내려 자갈로 된 바닥이 촉촉했다. 그래서 이곳 주민들은 3층 건물을 지어 아래층에는 가축을 기르고 위층은 곡식저장 창고로 이용하고 중간2층 공간에서 주로 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 시각으로는 다소 불편하고 고생스럽게 보였지만 자연풍광과 더불어 민족풍미가 어우러져 그네들만의 자유와 행복이 느껴졌다.

  이곳 시장 통에서 나는 의외로 우리네와 비슷한 문화를 발견하게 되어 내심 놀랐다. 서너 살 먹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자유스레 뛰어놀다가 넘어졌는데 아랫도리가 훤히 드러났다. 그 모습을 보니 비위생적이고 뭐랄까 안쓰러웠지만 옛날 우리도 그런 짜개바지를 입고 자랐기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리고 찰떡을 떡 매로 쳐서 먹는 모습도 우리와 너무 닮아서 거창한 인류를 논할 것 없이 세월을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보면 우리와 같은 조상이 아닐까싶은 생뚱맞은 생각도 해보았다. 시장 한쪽에 나무줄기로 만든 광주리 속에 아이가 계속 칭얼거려도 어느 누구도 신경 쓰는 것 같지가 않아 괜히 걱정스러웠다. 여기에선 대도시처럼 바쁜 걸음걸이도 없었고 닭들도 한가롭게 모이를 찾아 노닐고 개들도 경계심 없이 게으름을 피우며 지긋이 눈감고 퍼져있었다.

  귀주는 세계적으로 카르스트지형이 가장 많이 분포된 곳이라고 한다. 카르스트란 석회암의 주성분인 탄산칼슘이 물에 녹아들어 석회암 지대에 발달한 침식지형을 말하는데 귀주에만 80%이상이 석회암으로 덮여있다고 한다. 그래서 3평 이상의 땅이 없다는 말도 있다.

  이번여행을 통해서 알게 되었지만 수만 년 전 지구의 뒤틀림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거대한 협곡과 폭포들, 끝없이 이어지는 카르스트지대가 생겼다. 지각운동의 모든 산물들을 이곳 귀주일대에서 볼 수 있다는 게 하나의 축복으로 여겨졌다. 자연이 빚어낸 걸작품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여파장강풍경구, 대칠공풍경구, 소칠공풍경구는 유네스코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되었을 만큼 그 위용을 한껏 자랑했다.

  우리는 전용버스가 들어 갈수 없는 곳에는 내부 셔틀버스를 이용했고 걸을 수 있게 한곳은 내내 걸어서 다녔다. 물이 있는 곳에서는 수상 쪽배를 타기도 했다. 지형에 걸맞게 개발된 관광시설이 너무나 편리했고 경관에 어울리게 절벽 옆으로 굽이굽이 정교하게 만들어놓은 길 따라 설치된 난간들도 하나의 볼거리였다. 세계자연유산보호구역으로 손색이 없었다. 계단식 폭포도 이어지고 물과 돌 나무가 한데 어우러져 자연의 파노라마는 끝이 없었다. 무협영화에서 본 듯한 배경들이 수시로 입체적으로 다가왔으며 그때마다 기념사진들을 찍었다.

  중간 중간에 전통의상을 빌려주고 사진 찍는 곳이 있어서 나는 잠시지만 그때만큼은 또 다른 소수민족이 되기로 했다. 현란한 의상에는 은으로 된 장신구들이 목이며 가슴전체에 주렁주렁 달려있어서 움직일 때마다 은장식들이 서로 부딪쳐 짤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조심스럽게 전통복식으로 갈아입고 초생 달 모양의 은 장식품을 목에 걸고 그리고 은장식으로 반짝이는 은 화관을 쓰고 보니 선생님들의 칭찬이 거짓말 같지는 않고 제법 맵시가 났다. 산수화를 배경으로 사진들을 찍고 있을 때 그 와중에 현지 사진사들이 무단으로 다가와서 찰칵찰칵 사진들을 찍고서 어느새 그 사진들을 들고 와서 돈을 주면 주겠다고 눈앞에서 흔들어댔다. 나는 웃었다. 짜증보다 그네들의 상술이 귀엽고 재미있었다.

  여행구간에 서유기에 나오는 손오공과 저팔계도 여행의 한 볼거리로 관광객을 반겼는데 사진 한 컷에 10원이라고 했다. 벙어리로서 국가에서 장애인 배려 차 허가한 것이라고 한다. 나는 손오공과 함께 인증 샷을 찍었다. 손오공의 체면을 살려줬다.

  그사이 나는 두 번이나 신발이 미끄러져 넘어지기도 했다. 우습게도 그 순간 아픈 것도 느끼지 못했다. 다른 여행객보다 우리일행들에 더 신경이 씌어 뒤돌아보니 아닌 게 아니라 염려한대로 뒤따라오던 남영전선생님과 이여천선생님 등 모두 웃고 계셨다. 그러잖아도 생각보다 잘 걷는다고 칭찬 아닌 칭찬을 하던 참이었다고 했다. 어쨌거나 본의 아니게 몸 개그를 두 번이나 보여줘서 나는 울상이 되었다. 여행 내내 장춘호텔 계단에서 다친 한쪽 다리가 아파서 걷는 게 불편했고 그래서 티를 안내려고 우정 앞장서서 씩씩하게 걷다가 오히려 그 바람에 넘어진 꼴이 된 것이다. 나는 아픈 다리를 쓰다듬으며 일행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한 것으로 위로받아야 했다.

  어느새 5일째가 되어 답사의 마지막코스 황과수폭포로 향했다. 날씨는 전에 없이 화창해서 여행하기 딱 좋은데 나의 발걸음은 무거웠고 속은 계속 울렁거렸다. 컨디션이 말이 아니었다. 전날 저녁 식사 때 분위기를 흐릴까봐 선생님들이 권하는 대로 전통주를 겁 없이 마셨다가 밤새 혼이 난 터라 육체적으로 몹시 괴로웠다. 하지만 새로운 자연을 만난다는 설레임에 애써 정신을 추스렸다.

  폭포로 가는 길목에 잘 가꿔진 분재정원이 있었다. 돌과 식물로 조성된 거대한 분재들을 보니 분재도 역시 중국이고 대륙다웠다.

  각종 기이한 분재들이 다 정상으로 자랄 수 없어서일까, 난쟁이처럼 키가 작았고 내 눈엔 기형으로 보였다. 둘레가 제법 굵은 해묵은 은행나무는 제대로 발 뻗고 못 자라서인지 장애인을 보는 듯 마음이 불편했다. 예술적 시각으로 본다면 더없이 아름다울 테지만 통제되고 구속받은 식물들을 보다보니 왠지 모를 안쓰러움이 느껴졌다. 제한된 공간속에서 구속받으면서 자랐지만 전문적인 집중영양공급으로 화사한 꽃이 만발한 초대형(超大型) 분재도 보았다. 그러나 꽃나무표면은 매끄럽지가 못하고 곰보얼굴만큼이나 상처투성이였다. 처절한 생존의 현장을 보는 듯 했다.

  어떤 분재는 휘어지고 꺾이어 아픈 몸을 호소하는 듯 가지들이 일제히 하늘로 뻗어 있었다. 저토록 만들어지려면 얼마의 인고의 세월이 흘렀을까! 가늠하기조차 힘든 그 세월의 아픔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나만의 느낌인걸까!

  인위적인 풍경들을 뒤로하고 천성교풍경구 쪽으로 들어갔다. 입구로부터 진을 치고 화관을 사라고 성가시게 보채는 장사꾼들의 그물망에서 빠져나온 내게 우상렬선생님이 이런 것도 다 여행의 한 재미라며 생화로 만든 화관을 몇 개나 사들고 하나 건네주었다. 보통 때 같았으면 미친 여자라고 오해받기 십상이지만 여행지니만큼 어색하지도 않았고 머리에 두르고 다니면서 기념사진들도 찍었다.

  천성교풍경구는 수상 카르스트 지형이 만들어낸 또 다른 자연 공원이었다. 살아있는 산수화가 생생히 내 눈앞에 펼쳐졌다. 화폭에 담긴 중국의 산수화가 절대로 과장이 아니라 오히려 대자연을 온전히 묘사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각종 기암과 괴석들 사이로 징검다리들이 놓여 져 있었고 무릉도원을 찾아가는 변화무쌍한 미로 같은 길들이 한없이 이어졌다. 한시도 한눈을 팔 사이가 없었다.

  하늘의 별처럼 비유한 아름다운 다리를 수생보라고 했는데 디딤돌마다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365일의 날짜가 하나하나 뚜렷이 새겨져 있었다. 365일의 이미지가 일 년이니까 나는 그 구간을 다 걸으면 일 년을 여행한 기분이 들것 같았다. 그곳에서 자신의 생일날에 맞춰 사진을 찍고 소원을 빌면 행운과 복이 뒤따른다고 하니 여행객들이 심심찮게 걷다말고 멈춰 서서 다소 흥분한 목소리로 자신의 생일날을 찾았다면서 카메라를 들이대고 사진을 찍어댔다. 그들의 진지한 모습들을 보면서 뒤늦게 나도 한번 따라 해보고 싶었으나 내 생일날은 이미 몇 달을 건너 온 뒤였다. 진즉에 찾아볼 걸 하다가 해마다 음력일자에 맞춰 미역국을 먹어왔는데...쳇! 그까짓 거 그냥 무시하고 웃어버렸다. 아닌 말로 이곳에 온 것만으로도 운이 좋고 복을 받았는데 더 이상 뭘 바라랴! 욕심이리라!

  나는 하나하나 디딤돌에 발 도장을 찍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가다보니 여러 갈래의 징검다리들이 나타나서 우리를 시험하듯 또 다른 선택을 기다렸다. 누군가 어느 길로 가던 다 앞에서 만나게 돼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우리의 인생길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살아가던 종국에는 죽음으로 귀결되는 것 아니겠는가! 병적으로 늘 죽음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내겐 한시가 귀하고 하루하루가 소중할수밖에 없었다.

  나는 발길가는대로 한곳으로 향했다. 하필이면 그 길이 좁은 側身岩 안내판이 있는 좁은 통로였다. 일반인들도 몸을 옆으로 비스듬히 해야 빠져나갈 수 있었는데 때마침 어느 뚱뚱한 중국여행객이 멋모르고 들어갔다가 양쪽 바위가 지키고 있는 관문을 통과할 수 없어서 그대로 뒤돌아 나오면서 우리말 뜻으로 젠장! 하며 좁은 바위틈을 탓했다. 그 모습이 왜 그리도 우습던지 혼자 한참을 웃었다. 어쩌면 자연이 뚱뚱한 인간에게 다이어트 하라고 충격요법을 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저만치 앞서 가는 몸체 좋으신 선생님이 미리 보는 혜안이라도 있듯이 용케도 측신암을 피해 쉬운 길로 건들거리며 가고 있었다.

   나는 바위와 고목 같은 나무가 딱히 경계가 없이 서로 일체가 된 듯한 형상을 보고 그 앞에 잠깐 섰다. 할 말을 잃은 채 나는 그냥 두 손으로 어루만지고 쓰다듬었다. 인간의 근원적인 그 뭔가를 사색하게 만들었다.

  크고 작은 바위들에서 어떻게 뿌리를 내렸는지 알 수 없는 넝쿨식물들과 무성히 자라는 선인장을 보며 감탄이 절로 나오기도 했다. 선인장은 오래전에 키워봤었는데 전전긍긍하며 모시다가 어느 날 보니 밑동이 썩어 쓰러져 있었다. 식물들도 대자연의 품속에서 자라야 건강하게 자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천지 같은 징검다리 옆에 연꽃도 피어있고 대나무로 엮은 뗏목도 띄워있어 그 자리가 좋아 보여 사진을 찍으려고 올라서자 어디선가 돈을 내라는 소리에 후다닥 그 자리를 나왔다. 잠깐 설수 있는 자리 값이 돈도 돈이지만 여행객들이 계속 뒤를 이어 다니기 때문에 여유를 부릴 수가 없었다. 찰랑거리는 물은 징검다리 높이까지 에워싸고 꽉 채워져 있었다.

  동굴과 바위들이 번갈아 교차하는 가운데 암석을 뚫고 나온듯한 나무기둥들과 뻗은 줄기들이 여기저기 숨바꼭질을 하듯 나타났고 여러 형태의 자세로 강인한 생명력을 과시하며 가닥가닥 늘어 져 있는 등나무들은 두 손으로 잡아당기면 바로 그대로 그네로 이용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선인장과 수풀, 나무와 연못, 바위들이 한데 어우러져 어딘가에 신선이 숨어있을 것만 같았고 신비스러운 기운이 감도는 듯 했다. 시간과 공간의 혼돈이 오면서 잠시 나는 내 존재조차 잊을 것 같았다.

  천성호에 이르자 입구에서 어느 여행객이 실수로 핸드폰을 빠뜨렸다며 바짓단을 한껏 올려 부치고 물속을 애써 더듬으며 핸드폰을 찾고 있었다. 여행객들이 붐비는 장소라 피치 못할 사고들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이어서 그러잖아도 시원찮은 다리에 아침까지 굶은 나를 어느 힘 있는 여행자가 급히 지나치다가 실수로 내 핸드폰보다 내 몸 전체를 호수에 빠뜨릴까봐 나는 호수 옆을 피해 신경 써서 걸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우리 일행들은 이곳 한 식당에서 여행상품에 포함된 점심식사를 했다. 술이 위장을 강력하게 세척했는지 나는 속이 쓰라려 여행 도중 내내 여러 선생님들이 권하는 이런 저런 간식거리를 전혀 먹을 수가 없었다. 웃기는 소리로 앞으로 모태주가 아닌 술은 절대 입에 대지도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점심에도 나는 겨우 국물만 몇 모금 마시고는 조용히 옆의 테이블에서 식사하는 관광객들을 하릴없이 지켜보았다. 조금 전에 빨간 모자를 쓴 한 무리의 중국여행객들이 분주하게 들어와서는 배가 몹시 고픈지 큰소리로 연신 가이드에게 빨리 음식을 갖다달라고 주문했고 조급해한 만큼이나 음식이 빨리 차려지자 일행들은 아주 맛있게 그것도 아주 빠르게 밥그릇을 입에 대고 흡입하듯 먹고는 체할세라 국물도 소리가 나도록 쭉쭉 들이켰다. 그 와중에 누군가 밥이 부족하다며 더 추가를 하기도 했다. 일정상 시간에 몹시 쫒기 듯 그들은 식사가 끝나기 바쁘게 부산을 떨며 식당을 재빨리 빠져나갔다. 구경삼아 식탁을 보니 마치 한차례 허리케인이 휩쓸고 간 자리마냥 음식도 별반 남아 있지도 않았고 그릇들과 젓가락, 휴지들이 뒤죽박죽 어지럽게 늘려있었다. 단체 관광이란 시간적 여유가 없어보였다. 어쩌면 바쁘게 본 풍경들을 머릿속에 담아갔다가 집에 가서나 느껴야 할 것 같은 그런 생각에 혼자 속으로 웃었다.

  우리의 여행도 다시 이어졌다. 황과수폭포로 가는 길에 놀랍게도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물론 공짜로 탈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이 산속 오지에 관광객들의 편리를 위해 첨단 기술을 들여서 이 같은 시설을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놀랍고 대단했다. 에스컬레이터치고 상당히 길었다. 에스컬레이터 양쪽 차단벽에는 이곳 관광명소의 이름과 그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곁들인 대형 사진들이 부착이 돼 있었는데 마치 거대한 갤러리 전시장을 방불케 했다. 내려갈수록 귀가 울릴 정도로 폭포의 청량하고 우렁찬 물소리가 들렸다.

  두파당폭포를 거쳐 드디어 저 멀리 황과수 폭포가 한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인간이 만들어놓은 걸작품인 출렁다리부터 건너갔다. 출렁다리라고 불리는 이 다리를 안내한 문구처럼 조심스럽게 건넜지만 정말로 한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출렁거렸다. 문뜩 이 다리를 건설한 인부들의 수고가 그려졌다. 그러면서 얼마 전 TV에서 본 중국의 농민공들이 생각났다. 농촌의 잉여 일꾼들이 대도시로 진출해서 힘들고 열악한 공사판을 전전하며 먼지와 함께 딱딱한 식빵과 약간의 짠지를 곁들어 한 끼 식사를 해결하며 가족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돈을 벌고 있는 모습은 누가 봐도 짠했다. 중국뿐만 아니라 현재 한국에서도 많은 교포들이 한국인이 기피하는 3D업종에 종사하며 가족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수많은 터널과 도로, 지하배수관등 우리는 아름답게 건설된 그 이면에는 밑바닥을 책임지고 일하는 수많은 노동자의 피땀이 스며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황과수폭포 앞에 도착했을 때 관망대에 이미 많은 관광객들로 붐볐다. 폭포의 장대한 물줄기가 그 위용을 자랑하듯 쉼 없이 소리를 내며 맨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높이 78m 폭이 110m라니, 아세아에서는 최고의 크기이고 세계에서도 유일하게 상. 하, 좌. 우, 앞. 뒤 여섯 위치에서 바라 볼 수 있다고 했다.

  폭포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너나없이 좋은 자리를 확보하려고 관광객 사이에서도 눈치작전이 벌어졌다. 전문 사진사들도 자기들이 전세를 낸 것도 아니면서 좋은 위치를 독점하려고 관광객들과 가벼운 실랑이도 벌였다. 우리일행들도 그 틈에 끼어 추억으로 남길 기념사진들을 부지런히 찍었다. 서로서로 찍어주기도 했다.

  폭포 앞 가까이 다가갈수록 폭포에서 튀어 오르는 물보라 때문에 우산을 써야할 정도로 옷도 젖고 머리도 젖어들었다. 날아오르는 물보라 때문에 더 이상 사진도 찍을 수가 없었다. 일행들과 함께 뒤돌아 나오면서 아쉬운 마음에 다시 한 번 폭포를 보는 순간 물안개가 자욱한 폭포좌측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오색영롱한 무지개가 떠 있었다. 그 순간을 놓칠세라 부랴부랴 사진 속에 무지개를 담았다. 가이드가 우기에는 물줄기가 지금보다 더 강력하다고 자랑했다. 자랑 할만 했다.

  저 멀리 관광객들이 띠를 이루며 장엄한 폭포수를 보기위해 부지런히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인파는 계속 이어졌다...

  이번 여행에서 자연이 선사하는 비경들이 너무 많아 지면에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음을 아쉬움으로 남긴다. 무엇보다 이번 답사에서 내 인생 최고의 힐링을 경험했다. 덕분에 두고두고 내 삶의 활력소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좋은 여행이 되도록 나를 도와준 모든 선생님들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서울=동북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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