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진출, 고난과 좌절 그리고 용기와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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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11-02-24 09:38본문
시안(西安)에서 처음 선정한 미용실 위치는 대형 백화점 오픈을 준비하고 있는 곳이었다. 백화점 공사 때문에 유동 인구가 많지는 않지만 백화점 완공과 더불어 번화가로 변할게 틀림없어 보였다.
나를 포함해 아홉 병의 한국 직원이 시안으로 들어왔다. 조선족 직원 3명, 한족 직원 50명이 현지에서 합세했다. 기자재 및 헤어 관련 용품은 전량 한국에서 들여왔다. 중국 진출이 처음이기에 한국 인테리어팀도 함께 왔었고, 입지 조건도 상당히 유리하다고 생각되어 자신감에 차 있었다.
하지만 가장 유리하다고 생각했던 입지 조건은 백화점의 공사 중단으로 망망대해에서 빙산에 부딪히는 것과 같은 악재가 되었다. 미용실은 개업 준비가 이미 끝난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영업을 시작하긴 했으나 1년여 동안 하루 고객이 3~10명에 그칠 정도로 힘들었다.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들이 벌어진 것이다.
한국에서의 40여 개의 직영점, 1,500명의 직원이 중국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미용업계에서 저가 브랜드라는 손가락질과 질타 속에서도 중국에서 1,000개 매장 10,000개 매장을 만들 수 있는 미용실은 우리 브랜드와 같은 시스템을 가진 미용실만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는데…….
물론 다시 시작하면 되겠지만 개인적으로 4년 간 중국 진출을 위해 쉼 없이 지낸 날들, 모진 대가들이 허무하기만 해 너무 지쳐 버리고 말았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술에 의지해 하루하루를 살았다. 하지만 한국 직원들과 조선족 직원들은 나처럼 무기력하지 않았다. 고맙게도 참 열심히 해주었다.
난방도 없는 숙소에서 이불만 덮고 잠을 잤고, 영하의 추운 날씨에 얼어버린 손을 후후 불어가며 거리에서 헤어쇼, 가위쇼를 해주었고 기약도 없는 상황 속에서도 자발적으로 하루 12시간씩 혹독하게 중국 직원들을 교육시켜 나갔다.
고참 직원들의 노력과 열의 때문인지 손님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직원들의 이직이 거의 없었고 이러한 노력 덕분인지 일년쯤 지나자 고객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성수기 때에는 하루 세팅 파마만 200명이 올 정도로 손님이 넘쳐났다. 아직 백화점이 오픈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손님들이 넘쳐났기에 사람들은 더욱 더 우리를 주목했다. 그때부터 체인 문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초창기 1년간 3억원 정도의 손실은 일반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돈이었을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이었던 것은 1년간 손님이 없는 기회를 활용하여 대대적이고 집중적인 교육을 할 수 있었기에 직원들의 기술과 마인드가 업그레이드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오히려 득이 되었다.
"사랑합니다. 이훈 헤어칼라입니다"라는 인사말은 그때 생겨난 것이고, 한국어로 직원들이 손님을 반기고, 한국어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오성홍기와 태극기가 나란히 걸리고 한국 음악이 흘러나오는 50여 개의 매장은 그때 그 직원들의 땀의 결실이 아니었을까. 열정적으로 일해준 한국 직원들, 성실한 조선족 직원들, 착한 한족 직원들. 오늘도 나는 그들이 가진 열정의 반만큼이라도 해보자고 다짐해 본다.
나를 포함해 아홉 병의 한국 직원이 시안으로 들어왔다. 조선족 직원 3명, 한족 직원 50명이 현지에서 합세했다. 기자재 및 헤어 관련 용품은 전량 한국에서 들여왔다. 중국 진출이 처음이기에 한국 인테리어팀도 함께 왔었고, 입지 조건도 상당히 유리하다고 생각되어 자신감에 차 있었다.
하지만 가장 유리하다고 생각했던 입지 조건은 백화점의 공사 중단으로 망망대해에서 빙산에 부딪히는 것과 같은 악재가 되었다. 미용실은 개업 준비가 이미 끝난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영업을 시작하긴 했으나 1년여 동안 하루 고객이 3~10명에 그칠 정도로 힘들었다.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들이 벌어진 것이다.
한국에서의 40여 개의 직영점, 1,500명의 직원이 중국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미용업계에서 저가 브랜드라는 손가락질과 질타 속에서도 중국에서 1,000개 매장 10,000개 매장을 만들 수 있는 미용실은 우리 브랜드와 같은 시스템을 가진 미용실만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는데…….
물론 다시 시작하면 되겠지만 개인적으로 4년 간 중국 진출을 위해 쉼 없이 지낸 날들, 모진 대가들이 허무하기만 해 너무 지쳐 버리고 말았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술에 의지해 하루하루를 살았다. 하지만 한국 직원들과 조선족 직원들은 나처럼 무기력하지 않았다. 고맙게도 참 열심히 해주었다.
난방도 없는 숙소에서 이불만 덮고 잠을 잤고, 영하의 추운 날씨에 얼어버린 손을 후후 불어가며 거리에서 헤어쇼, 가위쇼를 해주었고 기약도 없는 상황 속에서도 자발적으로 하루 12시간씩 혹독하게 중국 직원들을 교육시켜 나갔다.
고참 직원들의 노력과 열의 때문인지 손님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직원들의 이직이 거의 없었고 이러한 노력 덕분인지 일년쯤 지나자 고객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성수기 때에는 하루 세팅 파마만 200명이 올 정도로 손님이 넘쳐났다. 아직 백화점이 오픈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손님들이 넘쳐났기에 사람들은 더욱 더 우리를 주목했다. 그때부터 체인 문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초창기 1년간 3억원 정도의 손실은 일반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돈이었을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이었던 것은 1년간 손님이 없는 기회를 활용하여 대대적이고 집중적인 교육을 할 수 있었기에 직원들의 기술과 마인드가 업그레이드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오히려 득이 되었다.
"사랑합니다. 이훈 헤어칼라입니다"라는 인사말은 그때 생겨난 것이고, 한국어로 직원들이 손님을 반기고, 한국어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오성홍기와 태극기가 나란히 걸리고 한국 음악이 흘러나오는 50여 개의 매장은 그때 그 직원들의 땀의 결실이 아니었을까. 열정적으로 일해준 한국 직원들, 성실한 조선족 직원들, 착한 한족 직원들. 오늘도 나는 그들이 가진 열정의 반만큼이라도 해보자고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