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진은 중국 근대 대학의 발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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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dmin 작성일11-09-01 08:55본문
톈진은 중국의 通商 항구 도시로서 중국 근대공업의 요람일 뿐 아니라 중국 근대 대학 교육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중국의 첫 근대대학인 베이양(北洋)대학이 탄생했다.
1894년 중.일 갑오전쟁을 겪으면서 많은 애국지사들은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교육제도를 개혁하고 서방의 선진 과학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됐다.
이런 형세에 호응하여 양무운동(洋務運動,19세기 후반 淸朝의 증국번, 이홍장 썽쇈화이 등이 군사.과학.통신 등 제반 분야에서 근대화를 꾀한 운동)3거두 중의 한 사람인 썽쇈화이(盛宣懷)는 1895년 9월 “톈진 중.서학당 개설에 관한장정(天津中西學堂章程)”을 황제에게 올렸다.
1895년 10월 황제의 비준을 받아 ‘톈진베이양서학(西學)학당’이 설립되어 중국 대학교육의 새로운 기원을 열었다. 학당은 톈진 따잉먼와이(大營門外)의 버원쑤위엔(博文書院)에서 문을 열었다가 후에 시구타오화티(西沽桃花堤)로 이전했다. 1931년 국립 베이양 대학으로 개명되었다.
베이양대학은 107년의 역사 속에 ‘실사구시(實事求是)’의 면학기풍을 견지하면서 혁명선구자 짱타이레이(張太雷), 경제학자이며 인구 이론가인 마인추(馬仁初), 사회활동가 천리푸(陳立夫)등 저명인사를 포함한 10여만 명의 인재를 양성해 냈다.
1951년 베이양 대학은 학교 이름을 톈진대학으로 개명하고 1959년 국무원에 의해 전국 16개 중점대학의 하나로 비준되어 지금까지 국내외에서 명문 대학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곳에서 중국의 첫 근대대학인 베이양(北洋)대학이 탄생했다.
1894년 중.일 갑오전쟁을 겪으면서 많은 애국지사들은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교육제도를 개혁하고 서방의 선진 과학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됐다.
이런 형세에 호응하여 양무운동(洋務運動,19세기 후반 淸朝의 증국번, 이홍장 썽쇈화이 등이 군사.과학.통신 등 제반 분야에서 근대화를 꾀한 운동)3거두 중의 한 사람인 썽쇈화이(盛宣懷)는 1895년 9월 “톈진 중.서학당 개설에 관한장정(天津中西學堂章程)”을 황제에게 올렸다.
1895년 10월 황제의 비준을 받아 ‘톈진베이양서학(西學)학당’이 설립되어 중국 대학교육의 새로운 기원을 열었다. 학당은 톈진 따잉먼와이(大營門外)의 버원쑤위엔(博文書院)에서 문을 열었다가 후에 시구타오화티(西沽桃花堤)로 이전했다. 1931년 국립 베이양 대학으로 개명되었다.
베이양대학은 107년의 역사 속에 ‘실사구시(實事求是)’의 면학기풍을 견지하면서 혁명선구자 짱타이레이(張太雷), 경제학자이며 인구 이론가인 마인추(馬仁初), 사회활동가 천리푸(陳立夫)등 저명인사를 포함한 10여만 명의 인재를 양성해 냈다.
1951년 베이양 대학은 학교 이름을 톈진대학으로 개명하고 1959년 국무원에 의해 전국 16개 중점대학의 하나로 비준되어 지금까지 국내외에서 명문 대학으로 인정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