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이션과 신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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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10-03-08 09:35본문
세계 경제가 연초부터 중국의 금리인상설에 널뛰기를 하고 있다.
새해가 밝자마자 중국 중앙은행의 지급준비율을 50bp 인상한다는 발표를 시작으로 한달새 두차례나 지급준비율을 0.5%씩 상향조정했다. 이번 조치로 중국 대형은행의 지급준비율은 16.5%, 중소형 은행은 14.5%가 됐다. 금융당국은 또 지급준비율 상향조정과 함께 개인과 기업에 대한 은행 대출에도 고삐를 죄고 있다. 이를 통해 유동성에 대한 강력한 제동 신호를 시장에 내보내고 있는 중국 금융당국은 특히 금리인상 여부를 놓고 내부적으로 심각한 논쟁과 함께 시행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다.
모두가 경제성장 속에서 빚어지는 인플레이션의 압박 때문이다.
중국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느슨한 통화정책으로 인한 신용대출 확대와 외자유입 등 통화공급량을 급속히 늘려오면서 과도한유동성으로 각종 물가가 오르는 등 인플레이션 압박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경제전문가들은 물론 최근 호주 시드니에서 열렸던중앙은행장 회의에 참석한 중국 중앙은행장인 저우샤오촨(周小川) 조차도 “아직 심각한 정도까지 이르지는 않았지만 중국은이미 인플레이션이 나타났다”면서 인플레이션 경계에 초조해하고 있다.
물가 상승을 두려워하지 않는 어떤 나라도 없지만 신중국은 인플레이션에 관한한 아픈 기억이 유난히 많다. 가깝게는 1990년대전후이다. 톈안먼(天安門)사태 발발 1년전인 1988년 18.5%를 기록한 전국의 소매물가총지수 상승률은 간부 자녀에 의한 빈번해진 관다오(官倒·공무원 브로커가 되어 물건 횡령 등을 행하는것) 등과 함께 인민들의 당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면서 1989년 6월톈안먼 사태를 촉발시킨 원인의 하나가 됐다.
3년 뒤인 1992년에는 덩샤오핑(鄧小平)의 남순강화 이후 배금주의가 판을 치면서 또 다시 경제가 과열되기 시작했다. 물가가 급등하고 간부의 부패가 다시 눈에 띄게 된다. 1993년 연료의 소매물가가 35%, 식량이 27.7% 상승하는 비상사태가 발생했다. 결국1993년 5월 주룽지(朱鎔基) 부총리를 총리대행으로 임명하고 곧바로 인플레이션과 개발붐을 억제하기 위해 새로운 경제정책을 마련했다.
그러나 이보다 직접적인 다급함은 중국 지도부가 공산 혁명 당시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정권 몰락과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다는 데서 기인한다. 국민당 정권의 붕괴와 관련, 정치적, 정책적 실패 등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직접적인 원인으로 초인플레 현상을 꼽는데 주저하는 학자들은 거의 없다. 실제 1937년부터 1949년까지 12년동안, 즉 중일전쟁과 국공(國共)내전의 시대에중국은 인플레로 고통받았다.
1937년 560위안이던 국민당 정부의 재정적자는 이후 만성적인 현상이 되었으며 1945년 이후 급속도로 악화되면서 1948년 6월에는 4억3456만5612위안으로 늘어났다. 과중한 군사비를 충당하고 재정부족분을 보충하기 위해 지폐를 마구잡이로 발행한 결과였다. 상하이(上海) 도매물가지수의 경우 1945년 9월의 도매물가지수를 100으로 기준하면 1948년 8월물가지수는 136만8049로 무려 1만4000배나 올랐다. 1
937년 6월을100으로 하면 1948년 8월에는 5억6000만이라는 천문학적인 수치에 달한다. 이같은 초인플레는 국민당 지배 지역의 경제를 완전히 마비시켰을 뿐 아니라 국민당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과 절망감을 극도로 증폭시킴으로써 국민당 정부가 스스로 붕괴되는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이다. 이 때문에 1940년대 말 국민당을 몰락시키고, 1980년대 말 톈안먼 사태를 촉발시킨 원인의 하나로꼽히는 인플레이션과 자산거품을 어떻게 걷어낼지에 세계의 눈이중국으로 쏠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