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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고대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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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dmin 작성일11-07-18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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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隋)나라에 이은 중국의 왕조. 
618년 이연(李淵)이 건국하여 907년 애제(哀帝) 때 후량(後梁) 주전충(朱全忠)에게 멸망하기까지 290년간 20대의 황제에 의하여 통치되었다. 중국의 통일제국(統一帝國)으로는 한(漢)나라에 이어 제2의 최성기(最盛期)를 이루어, 당에서 발달한 문물(文物) 및 정비된 제도는 한국을 비롯하여 동(東)아시아 여러 나라에 많은 영향을 끼쳐 그 주변 민족이 정치·문화적으로 성장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한국의 경우 삼국체제(三國體制)가 붕괴되고 정치세력 판도가 크게 바뀌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중기 안녹산(安祿山)의 난(亂) 이후 이민족(異民族)의 흥기(興起)와 국내 지배체제의 모순이 드러나 중앙집권체제의 동요는 물론 사회 및 경제적으로도 불안이 가중되어 쇠퇴의 길을 밟았다.

<정치>
수나라 말기 내란이 한창이던 617년, 진양(晉陽:太原)에서 반란진압을 하고 있던 태원 방면 사령관 이연은 둘째아들 세민(世民) 등과 더불어 거병(擧兵)하여 장안(長安)을 점령하고, 618년 수(隋)의 양제(煬帝)가 반란군의 우문화급(宇文化及)에게 살해되자 양제의 손자 공제(恭帝)를 협박하여 선위(禪位)받아 즉위하고 국호를 당이라 하였다. 건국 초에는 각지에 군웅(群雄)이 할거하고 있었으나, 차례로 이들을 평정하고 천하를 통일하였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최대의 공로자는 세민이었는데, 형이며 태자(太子)인 건성(建成)과 동생 원길(元吉)이 시기하자, 세민은 이들 형제를 죽이고 626년 제2대 황제에 올랐다. 이를 ‘현무문(玄武門)의 난’이라 하며, 세민이 곧 태종(太宗)이다. 태종은 즉위하자 최대의 외적(外敵)이던 돌궐(突厥)을 평정하였으며, 주변의 여러 종족도 조공(朝貢)하게 되어 국위(國威)를 크게 떨쳐서, 한(漢)나라를 능가하는 대제국(大帝國)이 되었다. 태종은 내치(內治)에도 힘써 치세 20여 년은 ‘정관(貞觀)의 치(治)’라고 하는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태종의 후광(後光)은 뒤를 이은 고종 때까지 미쳤으나, 고종이 말년에 황후를 폐하고 태종의 궁인(宮人)이었던 무씨(武氏:則天武后)를 황후로 세움으로써 이른바 ‘여화(女禍)’의 길을 열게 되었다. 무후는 고종에 이어 즉위한 자기 아들인 중종(中宗)과 예종(睿宗)을 폐하고 즉위하여 국호를 주(周)로 개칭[武周革命]하였으며,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제(女帝)로서, 재위 16년간은 악랄한 책략과 잔혹한 탄압의 공포정치가 계속되었다. 반대파의 쿠데타로 황제에 복위한 중종은 국호를 당으로 복구시켰으나 황후 위씨[韋后] 또한 실권을 쥐고 중종을 독살한 뒤, 권력을 휘두르는 등 무후시대의 정정(政情)이 재현되었다. 위씨 일파를 무력으로 무너뜨리고 예종을 복위시켜 당조(唐朝)를 명실공히 정상적인 궤도에 올려놓은 자가 이융기(李隆基), 즉 현종(玄宗)이다. 그는 정치를 쇄신하고 사회안정에 힘써서 ‘정관의 치세’에 비길 만한 ‘개원(開元)의 치세’를 열어 당의 최성기(最盛期)를 이루었다. 현종의 치세는 선천(先天) 1년, 개원 29년, 천보(天寶) 15년을 합쳐 45년간(712∼756)인데, 이 시기에 문화의 꽃이 만발하여 서울 장안(長安)은 명실공히 정치·문화의 중심지로서 태평성대를 누렸다. 그러나 번영은 궁중이나 상류층의 전유물일 뿐, 그 이면에는 균전제(均田制)의 모순이 격심해지고, 농민은 변경(邊境)으로 강제 출병(出兵)되고 중세(重稅)로 시달리는 등 현종 말기의 천보시대에는 당조 와해의 징조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오랜 통치에 권태를 느낀 현종은 양귀비(楊貴妃)를 얻어 연유(宴遊)를 일삼고 양귀비의 일족인 양국충(楊國忠)을 재상(宰相)으로 삼아 국사를 맡겼는데, 755년 평로(平盧) 등 3지구의 절도사(節度使)를 겸하고 있던 안녹산(安祿山)이 양국충의 제거를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켜 뤄양[洛陽]에 이어 장안을 점령하였다. 현종은 쓰촨[四川]에 피란하고 그 도중에 양귀비는 살해되었다. 안녹산의 부장(部將) 사사명(史思明)에 이어진 이 반란은 9년 동안 계속된 끝에 이민족(異民族)의 도움으로 겨우 그 예봉(銳鋒)을 꺾을 수 있었으나, 조정측에서 완전히 평정할 힘은 없었다. 이 반란으로 균전법을 기반으로 하였던 고대(古代) 중국사회는 몰락의 첫발을 내디뎠으며, 반란 후 당조(唐朝)의 정치체제도 일변하였다. 반란에 가담한 부장들은 허베이[河北]·산둥[山東]을 점거, 조정으로 하여금 절도사의 지위를 승인하게 하였다. 또한 반란 중에 조정에서 전국 곳곳에 절도사를 둠으로써 번진체제(藩鎭體制)가 전국에 미쳐 조정 자체가 하나의 번진으로 격하되는 듯한 경향마저 띠게 되었다. 번진의 절도사란 몇 개의 군진(軍鎭)을 관할하는 지휘관인데, 현종 때 모병제(募兵制)가 실시되자 많은 병사를 마음대로 모집하여 강력한 세력을 가지게 되어 대종(代宗)·덕종(德宗) 때는 이들의 횡포와 반란에 시달려 덕종은 조명(朝命)을 거역하는 허베이 제진(諸鎭)의 토벌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헌종(憲宗)은 절도사의 권한을 축소함으로써 한동안 중앙집권(中央集權)에 성공하였으나, 중앙집권의 강화책, 특히 재정강화는 일반민중에 가혹한 부담을 주어 숱한 유민(流民)이 생겼다. 또한 조세의 중앙집중은 일반 농민뿐만 아니라 지주호족층(地主豪族層)에게도 고통을 주고 번진병사의 대우를 악화시켜 절도사와 병사 간의 분쟁 및 지주·농민·유민을 주체로 한 반항은 859년 구보(甫)의 난을 일으켰고, 868∼875년의 방훈(龐勛)의 난에 이어 875∼884년에는 황소(黃巢)의 대란을 겪었다. 물론 이 반란도 실패로 끝났으나, 이 전란으로 강회(江淮)의 곡창지대가 황폐되어 국가재정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또한 중앙의 통제력도 약화되어 조정 내부는 환관파(宦官派)와 재상파(宰相派)로 갈려져 각기 외부의 번진을 자파 세력으로 끌어들여 싸우던 중 재상파와 내응한 황소의 구장(舊將) 주온(朱溫:朱全忠)이 장안에 들어가 소종(昭宗)을 살해한 다음 애종(哀宗)을 폐위시키고, 907년 스스로 즉위하니 당은 이로써 20대, 약 290년 만에 멸망하였다.

<제도>
당나라는 수나라의 제도를 이어받아 과거의 제도를 집대성,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였다. 중앙관제로는 3성(省) 6부(部)를 두어 국정을 관장하였고, 지방은 10도(현종 때는 15도)로 나누어 그 밑에 주(州:郡으로도 개칭)·현(縣)을 두었다. 도는 행정구역이 아닌 순찰구역으로, 처음에는 장관을 두지 않았으나 후에 순찰사를 두어 지방의 감찰임무를 맡게 하였다. 또한 주에는 자사(刺使), 현에는 현령(縣令)을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일반민은 향(鄕:500家)·이(里:100家)·인보(隣保:5家) 제도에 따라 조직되어 현의 지배를 받았다. 이(里)의 책임자인 이정(里正)은 민호(民戶)의 가족 수와 토지를 호적에 올려서 토지의 환수, 부세(賦稅)의 징수 등의 사무를 맡아보았다. 일반민의 대부분은 이른바 균전농민(均田農民)으로 나라에서 일정한 토지를 지급받아 직접 국가에 조용조(租庸調)를 바쳤다. 이 밖의 의무로서 병역·잡요(雜)가 있었으며, 병사로 뽑힌 자는 병역기간 중 국도(國都)의 경비, 변경(邊境)의 방위, 향리에서의 동계교련(冬季敎練)에 종사하였다. 이들은 그 지방의 절충부(折衝府)에 소속되어 있어서 부병(府兵)이라 하였다. 관리를 임용하는 데는 고관의 자제에게 시험을 치르지 않고 선조의 관위(官位)에 따라 임명하는 은음제(恩蔭制)와 학과시험에 의한 선거(選擧:科擧)로 하였다. 이러한 여러 제도와 국가통치는 율령격식(律令格式)이라는 독특한 법체계에 의해서 시행되었다. 이 중 율은 금지법(禁止法:刑法), 영은 행정법규(行政法規:命令法), 격은 증보개정법규(增補改正法規), 식은 시행세칙(施行細則)이다. 그러나 율령제도도 후기에 와서는 무너지고, 농정(農政)의 기반을 이루었던 균전제도 역시 지배층의 장원제(莊園制)에 의해 유명무실화하여 조용조제(租庸調制)에 대신해서 대토지의 사유(私有)를 인정하는 양세법(兩稅法)을 제정하였다. 국방의 근간을 이루던 부병제도 역시 현종 때 무너지기 시작하여 이에 대신해서 실시한 병제는 절제사의 세력을 비대화해서 상대적으로 중앙집권을 약화시켰다.

<문화>
유학(儒學)에서는 공영달(孔穎達)이 태종의 명을 받아 고전에 관한 주석(註釋)을 정리·종합해서 《오경정의(五經正義)》를 편찬하였다. 역사에 있어서도 《주서(周書)》 《북제서(北齊書)》 《양서(梁書)》 《진서(陳書)》 《수서(隋書)》 《진서(晉書)》 및 《남북사(南北史)》와 같은 전대(前代)의 왕조사가 편찬되었다. 중기에 이르러 유학의 독자성을 고양(高揚)하고 여기에 선종(禪宗)의 학설을 도입한 한유(韓愈)·이고(李)의 고문운동(古文運動)은 후대의 송학(宋學)을 앞지르는 선구적인 사상을 내포한 것이었다. 당대의 문학은 귀족문학으로서 시(詩)·문(文) 모두 현저한 발전을 이루었으며, 문학사상(文學史上) 초당(初唐:국초에서 현종까지 약 100년간)·성당(盛唐:현종∼숙종 50년간)·중당(中唐:代宗∼文宗 70년간)·만당(晩唐:문종∼唐末 80년간)의 4기로 나누고 있다. 문장(文章)에 있어서는 중당기에 한유·유종원(柳宗元)이 출현, 고문(古文)을 부흥하여 종전에 형식미(形式美)만을 추구하였던 변려체(儷體)를 배제하자는 고문운동이 일어났으며, 《유선굴(遊仙窟)》 《회진기(會眞記)》 《이혼기(離魂記)》 《이왜전(李娃傳)》 등 문어체소설(文語體小說)이 나타나 문장의 묘미를 보여 주었다. 특히 관리를 임용하는 선거에서 작시(作詩)를 중요시하였기 때문에 시는 공전절후(空前絶後)의 성황을 이루어 오언(五言) 및 칠언(七言)의 율시(律詩)와 절구(絶句)의 형식이 완성되어 성당기에 이백(李白)·두보(杜甫)의 2대 시성(詩聖)을 비롯하여 시화일치(詩畵一致)의 묘미를 보여준 왕유(王維), 전원과 자연을 읊은 맹호연(孟浩然), 정로이별(征虜離別)을 읊은 고적(高適)·왕창령(王昌齡) 등이 나오고, 중당기에는 백거이(白居易)·원진(元), 만당기에는 두목(杜牧)·이상온(李商穩)·온정균(溫庭筠)이 나왔다. 산문 분야에서는 수대(隋代)의 괴기전설(怪奇傳說)을 원류로 하는 전기소설(傳奇小說)이 많이 나왔다. 음악분야에서는 한(漢)나라 이래의 아악(雅樂:궁중음악)·속악(俗樂:민간음악) 및 호악(胡樂:西域音樂)이 정착되고 특히 호악이 번성하였으나 말기에 가서는 서역과의 교류가 끊기면서 호악도 쇠퇴하였다. 또한 음악연주도 궁중에서 민간으로 옮겨가는 경향이 있어 신속악조(新俗樂調)라고 하는 음악이 흥성하였다. 서화(書畵)·조각(彫刻) 등의 미술에 있어서도 수대의 전통을 이어 발전시켰으나, 중기 이후 크게 변모한 면도 있다. 종교에서는 특히 불교가 발전하여 수 이래의 천태종(天台宗)과 화엄종(華嚴宗)이 종래의 여러 교의(敎義)를 집대성하고, 현장(玄)은 인도에서 가지고 온 방대한 경전(經典)의 번역사업을 일으켜 법상종(法相宗)을 확립하였으며, 당과 인도 사이에 승려의 교류도 활발하였다. 불교교리의 연구가 진전됨에 따라 천태·화엄·법상 외에 지론(地論)·섭론(攝論)·구사(俱舍)·성실(成實)·삼론(三論)·진언(眞言)·삼계(三階) 등 다수의 종파가 분립하여 제실(帝室)·귀족의 호응을 얻어 불교는 전성기를 맞았다. 이 밖에 정토교(淨土敎)와 선종(禪宗)이 개종(開宗)되어, 특히 선종은 말기에 다른 종파가 모두 쇠퇴된 뒤에도 홀로 번영하여 중국불교로 완성되었고 송학(宋學)에도 다대한 영향을 주었다. 한편 도교(道敎)는 노자(老子)의 성(姓)이 제실과 같은 이씨(李氏)였던 관계로 제실의 호응을 크게 얻어 현종은 《도덕경(道德經)》을 집집마다 비치하게 할 정도였다. 이 밖에 동서간의 교통이 발달함에 따라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敎)·마니교(摩尼敎), 아랍의 이슬람교, 그리스도교의 일파인 경교(景敎:네스토리우스派) 등의 외래종교도 들어와 이들의 사원(寺院)이 여러 곳에 세워졌다.

<당나라와 한반도와의 관계>
당나라가 개국한 618년의 한반도는 삼국시대로 고구려의 영류왕(榮留王) 1년, 신라의 진평왕(眞平王) 40년, 백제 무왕(武王) 19년에 해당되며, 당나라가 멸망한 907년은 신라·후백제·마진(摩震)·발해(渤海)가 한반도 및 만주 일부지역에서 각축을 벌이던 때이다. 당나라 건국 3년 후인 621년 신라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고 당나라에서도 신라에 사신을 보내와 삼국 중 가장 먼저 국교를 튼 신라는 당나라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국경을 접한 고구려와는 사이가 나빠 결국 당나라 고종 때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에 의해 백제와 더불어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고구려는 628년 처음으로 당에 사신을 파견하여 봉역도(封域圖:국경의 경계도)를 보내는 한편, 당나라를 경계하여 631년(영류왕 14)부터 16년간에 걸쳐 동북은 부여성(夫餘城:農安)에서 서남은 발해만에 이르는 국경지대에 1,000여 리의 장성(長城)을 쌓았다. 백제에서는 651년 사신을 보내고, 당나라에서는 새서(璽書)를 주어 신라와 화해하게 했다. 당나라의 태종은 일찍이 고구려를 도모하려는 야심을 품었으나 수나라가 패한 사실을 감안하여 신중을 기하고 있었다. 642년 백제가 신라를 쳐서 대야성(大耶城:陝川) 등 40여 성을 빼앗고, 고구려와 백제가 신라의 당항성(黨項城:南陽)을 빼앗아 신라의 대당(對唐) 교통로를 끊으려 하자 신라는 당나라에 구원을 청하였다. 당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어 신라를 치지 말도록 권유하였으나, 연개소문이 두 번째 온 당나라 사신을 굴에 가둠으로써 두 나라의 숙명적 대립은 시작되었다. 645년 이래 안시성(安市城)의 혈전(血戰)을 비롯하여 여러 차례 크고 작은 전쟁을 치르고,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668년 고구려도 신라와 당에 의해 멸망하였다. 이로써 삼국의 정립시대(鼎立時代)는 막을 내리고 당나라는 백제의 고지(故地)에 웅진(熊津) 등 5도독부(都督府)를 두었으며, 고구려의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部)를 두고 전 영토를 9도독부, 42주(州), 100현으로 나누었다. 669년 고구려민 2만 8200호(戶)를 인구가 희소한 중국의 내지(內地)로 옮기는 이민정책을 써서 고구려 유민의 실질적 예속화를 꾀하였다. 이에 앞서 당나라는 신라에도 계림도독부(鷄林都督府)를 설치, 문무왕(文武王)을 계림도독으로 삼아 한반도의 완전귀속을 꾀하였다. 이로부터 당나라와 신라는 고구려·백제의 고토(故土)에서 영토 쟁탈전을 벌여 당나라는 677년(문무왕 17) 안동도호부를 신성(新城:만주 撫順 부근)으로 옮긴 후 양국관계는 거의 정상을 회복하였으며, 699년 고구려 유민 대조영(大祚榮)이 고구려의 고토에 진(震:후의 발해)을 세움으로써 당나라와 한반도의 관계는 삼국시대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당과 발해는 초기에 여러 차례의 충돌이 있었으나, 2대 무왕(武王) 때부터는 발해에서 태도를 바꾸어 당나라의 관제(官制)와 문화 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신라는 649년 처음으로 당의 의관(衣冠)을 사용하고, 650년 당의 연호(年號)를 사용함으로써 당의 문화 및 제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렇듯 처음부터 시작된 당제(唐制)의 채용은 통일 후에 더욱 성행하여 경덕왕 때에 이르러서는 여러 제도가 모두 갖추어졌다. 또한 왕권이 강화됨에 따라 당나라의 율령격식을 많이 섭취할 수 있었다. 한반도에서 최초의 중세적 전제왕국(專制王國)을 확립한 고려도 선진 전제왕국인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관제를 정비하였고 이와 같은 고려의 제도는 다음의 조선왕조에 다시 계승되었다. 교육에 있어서도 삼국이 귀족의 자제를 당나라 최고학부인 국학(國學:國子監)에 유학시켜 학문을 닦게 하였는데 신라에서는 이를 본떠 최고교육기관으로서 국학을 두었으며, 고려도 이를 계승하여 국자감(國子監:후에 국학·성균관 등으로 개칭)을 두는 등 학문 전수(傳授)와 고급관리 양성에 있어서도 당나라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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