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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고대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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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dmin 작성일11-07-18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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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明)

한족(漢族)이 몽골족이 세운 원(元)나라를 멸망시키고 세운 통일왕조(1368∼1644). 한족의 지배를 회복한 왕조로, 뒤에 만주족(滿洲族)이 세운 청(淸)나라에 멸망되었다. 명대(明代)는 중국이 근대화하는 시기와 직접 접속되는 시대로서 중요한 성장·변혁기였다.

  <정치>
14세기 중엽, 몽골지상주의(至上主義)를 표방하고 약 100년에 걸쳐 압정(壓政)을 펴온 원조에 항거한 한족 중 가장 큰 집단을 이루었던 홍건적(紅巾賊)에 가담하여 두각을 나타낸 주원장(朱元璋)은 백련교도(白蓮敎徒)의 뒷받침으로 세력을 펴 양쯔강[揚子江] 하류의 곡창지대를 점령하여 군웅(群雄)을 정복하고, 1368년 금릉(金陵:南京)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명’, 연호를 ‘홍무(洪武)’라 하였다. 그가 명의 태조(太祖:洪武帝)이며, 처음으로 일세일원제(一世一元制)를 채택하고 시정(施政)의 기본방침을 ‘한족의 부흥’으로 삼았다. 같은 해 가을에는 원나라의 수도인 대도(大都:北京)를 함락하여 원의 세력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71년 쓰촨[四川]을 평정하여 전국토를 정복함으로써 사상(史上) 강남(江南)에서 일어나 전국토를 통일한 최초의 왕조가 되었다. 또한 외몽골로 쫓겨 북원(北元)을 세운 몽골민족의 재기(再起)에 대비하여, 다시 둥베이[東北]의 요동(遼東)을 경략하여 몽골과 고려의 연결을 단절하고, 81년 윈난[雲南]을 평정하여 몽골과 티베트의 제휴를 막았다. 88년 남옥(藍玉)을 파견해 지금의 노몬한 부근에서 몽골군을 대파하였고, 그 뒤에도 거듭 이를 경략하여 북원을 쇠망시켰다. 이와 같은 건국사정으로 그의 행정은 몽골적 요소의 제거와 한족 사회에의 적응을 목표로 하고 권력이 일부 관료에 집중하는 것을 피하여 호유용(胡惟庸)·남옥 이하 노련한 공신(功臣)들을 대거 숙청(胡藍의 獄)하였다. 또한 중앙행정관청인 이(吏)·호(戶)·예(禮)·병(兵)·형(刑)·공(工)의 6부를 각각 독립시켜 이를 황제직속으로 하였고, 군사는 오군도독부(五軍都督府), 감찰은 도찰원(都察院)을 거쳐 황제에 직결되도록 하는 등 3권을 분립시켰다. 지방에 있어서도 행정은 포정사사(布政使司), 군사는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 감찰은 안찰사사(按察使司)에서 관장하게 하여 3권이 동등한 권한으로 중앙에 직속되었다. 이와 함께 궁중제도도 간소하게 정비하고 특히 환관세력의 팽창을 억제하였다. 이로써 송(宋)나라 이래의 황제 독재권은 더욱 강화되고 율령(律令)·병제(兵制)도 모두 이러한 방향으로 개정되었다. 당(唐)나라 때 집대성된 율령을 형식·내용 등에서 면목을 일신하여 《명률(明律)》 《명회전(明會典)》을 공포, 근대법전의 시행기까지 존속된 법전의 기초를 만들었다. 병제는 당나라 이래의 모병제(募兵制)를 개선하여 징병할 군호(軍戶)를 정하고 위소제(衛所制)를 채택하였다. 이에 따라 도지휘사사 밑에 전국의 요소(要所)에 위(衛)·소(所)를 설치, 여기에 군호의 장정을 분속시켰는데, 1위의 군인은 5,600명이고, 1위는 5개의 천호소(千戶所), 천호소는 10개의 백호소(百戶所)로 구성되어 이를 지휘사·천호·백호 등이 관장하였다. 그러나 이 새로운 제도 가운데 특징을 이룬 것은 몽골의 남침에 대비해서 태조의 아들 등 24명을 왕으로 삼아 요지(要地)에 배치하여 이를 봉건제후(封建諸侯)와 같이 대우한 일이다. 태조는 이들을 교묘하게 조정하여 일단 혈연에 따른 정권보전은 달성하였으나, 북변(北邊)의 왕들에게는 병권(兵權)도 부여하였기 때문에 그 세력이 강대해져서, 특히 베이징[北京]에 있던 넷째 왕자인 연왕(燕王)은 병력을 강화하여 그의 기반을 지방정권화하였다. 태조가 죽고 그의 손자 혜제(惠帝)가 16세로 즉위하여 중앙집권 강화책으로 왕들의 세력을 감축하기 시작하자 연왕은 반란(靖難의 變)을 일으켜 4년 뒤 즉위하였는데, 그가 성조(成祖:처음에는 太宗) 영락제(永樂帝)이다. 그는 대(對)몽골 전략상, 또한 전통적 적대세력의 중심지인 난징[南京]을 피해 베이핑[北平]을 베이징[北京]이라 개칭하여 천도하고 경제적 중심지인 강남지방과의 연결을 위해 대운하(大運河)를 개수하여 대규모 조운법(漕運法)을 확립, 재정적 기반을 굳혔다. 그러나 ‘정난의 변’에 대한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따라 환관을 중용하여 밀정정치(密偵政治)를 시행하였기 때문에 이것이 뒤에 화근이 되었다. 그는 내란으로 동요된 외정(外政)을 바로잡기 위해 몽골·만주를 여러 차례 공략하여 헤이룽강[黑龍江]까지 위세를 떨쳤고, 구이저우[貴州]를 내지화(內地化)하였으며, 티베트·윈난을 정복하고 안남(安南:越南)을 병합하였으나, 큰 업적은 남해의 원정이었다. 1405∼24년 사이 정화(鄭和)·왕경홍(王景弘)에게 선박 60척, 선원 3만을 주어 전후 6회에 걸쳐 인도양안(印度洋岸)에서 아프리카 동안(東岸)까지의 여러 나라에 파견하여 국위(國威) 선양과 무역진흥에 힘써 30개국에서 입공(入貢)하고 한인(漢人)들에게 해외를 보는 눈을 뜨게 하였다. 명나라의 기반은 이 2대 사이에 확립되어 15세기 중반 이후는 내정(內政)에 힘을 기울여 왕들의 세력 감축에 성공하였으나 외정에서는 수세(守勢)에 몰렸다. 1449년 몽골의 한 부족인 오이라트부(部)의 남침으로 친정(親征)에 나선 영종(英宗)이 포로가 되고(土木의 變), 수도도 포위되어 명신(名臣) 우겸(于謙)의 책략으로 멸망의 위기는 벗어났으나, 이후 장성(長城)을 수축하고 9변진(邊鎭)을 설치하여 다수의 병력을 배치하는 등 방위에 힘을 기울였다. 16세기에 들어서 즉위한 무종(武宗:正德帝)은 환관 유근(劉瑾)에게 전권(專權)을 맡김으로써 그의 치세는 내란으로 일관하였다. 다음의 세종(世宗:嘉靖帝)은 도교(道敎)를 광신하였기 때문에 여러 대에 걸쳐 축적한 국고를 탕진하여 재정궁핍 속에 30년간 알탄이 이끄는 몽골족에게 수도 근교까지 침탈되었고, 남동해안 지방에는 왜구(倭寇)가 횡행하여 ‘북로남왜환(北虜南倭患)’에 시달렸다. 16세기 말에 이르러 신종(神宗:萬曆帝)은 명조의 퇴세를 만회하기 위해 장거정(張居正)을 등용해 내정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는 전국적으로 토지를 측량·검사하고, 이미 지방에서 시행하던 전세(田稅)와 정세(丁稅)를 일원화하여 은납세법(銀納稅法:一條鞭法)을 확립해서 재정을 건전화하고 화이허강[淮河]·황허강[黃河]의 치수공사를 진행하는 등 치적을 쌓았으나 시정 10년 만에 장거정이 죽자 환관을 중용하여 내정은 다시 문란해졌다. 이와 함께 발배(拜)·양응룡(楊應龍)의 난 및 임진왜란에 따른 조선에의 원병(援兵)으로 국가재정이 악화되어 이를 광산개발에 의한 상세(商稅)의 증수(增收)로 보충하려 했으나 그것은 단지 주구(誅求)의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이 당시 일어난 만주족(淸)의 정토비(征討費)로서 요향(遼餉)이라는 부가세를 두었으며 초향(剿餉)·연향(練餉) 등 갖은 명목의 부가세를 징수함으로써 민폐는 극에 달했다. 한편 정계에서는 재야의 비판세력인 동림당(東林黨)과 정신(廷臣)과의 당쟁(黨爭)이 태자 책립문제로 첨예화하여 암흑의 권력투쟁 속에 내외정치는 파탄 직전에 이르렀다. 1627년 의종(毅宗:崇禎帝)이 즉위한 후 환관 위충현(魏忠賢) 일파를 제거하여 당쟁을 수습하였으나 기근농민의 반란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특히 산시[陝西]의 이자성(李自成) 등은 명나라의 수도를 함락, 의종이 자살함으로써 명나라는 멸망하였다(1644). 이자성은 급거 귀환한 명장(明將) 오삼계(吳三桂)와 청군에게 토멸되고, 명의 왕들은 청군에 항거하여 화중(華中)·화남(華南)에서 싸웠으나, 61년 영명왕(永明王)이 버마에서 잡힘으로써 잔존세력의 항쟁도 종식되어 전국토는 완전히 청나라의 세력권이 되었다. 이 44∼61년 명의 잔존세력을 남명(南明)이라고 한다.

<사회·경제>
태조는 민생안정을 위해 인구과밀한 강남에서 황폐한 강북으로 농민을 이주시키고, 부유층을 수도로 불러들여 경제부흥에 주력하였다. 이로써 사상 최초로 남에서 북으로의 인구이동현상이 일어나고, 윈난·구이저우의 호구도 늘어나서 총인구는 처음으로 6,000만을 넘어섰다. 이 호구를 군호(軍戶)·민호(民戶)·장호(匠戶)·조호(戶) 등 4종류로 구분하여 각각 군사·농상(農商)·장작(匠作)·제염(製鹽)에 종사하게 하였다. 이 호구는 그 대부분이 민호로서, 주현(州縣)의 이갑제(里甲制)라는 자치조직에 편성되었다. 이갑제는 110호를 1리로 하고, 이 가운데 부유호(富裕戶) 10호를 이장호(里長戶)로, 나머지 100호를 갑수호(甲首戶)로 해서 10호씩 10갑으로 나누어 1년 교대로 이장 1명과 갑수 10명이 출역(出役)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들이 주로 맡은 일은 부(賦)와 역(役)의 공평한 부과였다. 당시 전토(田土)에는 관전(官田)과 민전(民田)이 있었고, 국유지인 관전은 조(租:소작료)를, 민유지인 민전은 세를 바쳤다. 또한 관전에는 학전(學田)·직전(職田)·황장(皇莊), 제왕(諸王) 공신의 장전(莊田) 및 둔전(屯田)이 있었으며, 둔전은 다시 군둔(軍屯)·민둔(民屯)·상둔(商屯)의 구별이 있었다. 태조는 중국 역사상 최초로 전국 토지의 실지측량을 시행하여 ‘어린도책(魚鱗圖冊)’이라는 토지대장을 만들고, 이장으로 하여금 부역황책(賦役黃冊)이라는 조세(租稅) 겸 호적대장을 만들게 하였다. 이장 및 갑수(甲首)는 이를 바탕으로 부(賦)는 전토(田土)를, 역(役)은 16세부터 60세까지의 성정(成丁)을 대상으로 부과하였다. 또한 이(里)에서 덕망 있는 연로자를 뽑아 이를 이노인(里老人)이라 하여 이민(里民)의 교화 및 쟁송(爭訟)을 맡도록 하고, 육유(六諭)라는 교육강령을 공포하여 사학(社學) 등을 세워 교육시켰다. 태조는 권농(勸農)에도 힘써 처음에 곡물의 자급생산을 주로 한 농업도 후에는 상업적 작물의 생산으로 발전시켰다. 특히 목화(木花)는 전국적으로 보급되었으며, 면직공업은 송강부(松江府)를 중심으로 발달되어 전국적 시장을 형성하였고, 도시에는 고급품도 출하하였다. 또한 뽕나무 재배도 장쑤[江蘇]의 타이후호[太湖] 주변과 쓰촨 등지에서 성행하였고, 면직물공업도 쑤저우[蘇州]·항저우[杭州] 등에서 발달하였다. 이 밖에 장시[江西]의 도자기, 푸젠[福建]·저장[浙江]의 칠기(漆器), 광둥[廣東]의 철기, 후광[湖廣]의 쌀, 광둥·푸젠·장시의 설탕, 푸젠의 쪽[藍] 등 지방의 특산물이 상품으로 생산된 것이 특징을 이루었다.
이 특산물은 북방 및 내륙의 쌀·보리·무명 등과 교환되기도 하고 수도와 구변진 등 큰 소비지에도 유통되었다. 이들 상품의 중개자는 산시[山西]와 신안[新安]의 상인들로, 이들은 16세기 후반 이후 중국의 상권(商圈)을 양분(兩分)한 형태로서 동향(同鄕)의 동업자가 결합하여 요지(要地)에 설치한 회관·공소(公所)를 거점으로 활약하였다. 활발한 상품유통에 대해서 정부는 전국 수백 개소에 세과사국(稅課司局)을 설치하여 과세를 하고, 특히 보초(寶:紙幣)의 유통을 위해 수도의 성문이나 대운하의 연안에 초관(關)을 설치하여 보초로써 징세(徵稅)하였다. 보초는 주요 통화이고 동전은 보조통화였으나, 불환지폐인 보초는 유통이 잘 안 되고 민간에서는 은(銀)을 많이 사용하여 1436년에는 조세의 은납(銀納)도 공인되어 금화은(金花銀)이 유통되기 시작하였으며, 16세기에는 요역(役)의 은납도 시행되어 은의 화폐적 기능이 확립되었다. 대외무역은 처음에 배외(排外)·국수정책(國粹政策)에 따라 거의 단절되었으나 영락제의 외정(外征) 및 정화(鄭和)의 서정(西征) 이후 여러 나라와의 조공무역(朝貢貿易)이 열려, 북변에서는 마시(馬市)·목시(木市)가 번창하였고, 남동연해에서는 닝보[寧波:浙江]·취안저우[泉州:福建]·광저우[廣州:廣東]·운둔(雲屯:越南)에 시박사(市舶司)를 설치하여 일본과 류큐[琉球] 및 남해 여러 나라와 교역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무역은 모두 정부통제하의 이민족 회유책의 색채가 짙었고, 왜구의 방해도 있었으며 이익을 정부가 독점한 것 등으로 쇠퇴하였다. 15세기 후반 이후에는 이에 대신해서 저장·푸젠·광둥 등의 향신(鄕紳:퇴직관리) 등에 의한 밀무역이 정부의 통제무역·해금책(海禁策)에 저항하면서 번영하였고, 그 저항은 중소 상인과 고용인 등에까지 파급되어 1567년 해금령을 해제하였다. 이에 앞서 17년 이후 포르투갈인(人)이 내항하여 마카오에 무역근거지를 잡고, 이보다 조금 늦게 에스파냐도 마닐라시(市)를 건설하여 극동 무역을 시작하게 되어 명의 생사(生絲)·견직물·면포·자기·철기 등이 많이 수출되고, 대신 대량의 은이 수입되었다. 이러한 상공업의 발달에 따라 도시도 새로이 일어나고 경제도시라 할 수 있는 것도 주로 강남을 중심으로 속출하였는데, 대도시 가운데에는 상공업 노동자만 수만에 이르는 곳도 있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농촌에서의 부역(賦役)이 은납제(銀納制:一條鞭法)로 바뀜에 따라 부역황책(賦役黃冊)이 무용지물이 되고 이갑제도 붕괴되어 농촌노동력이 도시로 유출되었기 때문이다. 이갑제에 대신해서 10호를 단위로 연대책임을 지는, 부락의 자경조직(自警組織)인 십가패법(十家牌法)이 채택되고, 이것은 다시 부락의 상호부조·수양 등을 목적으로 하는 향약(鄕約)과 함께 보갑법(保甲法)으로 발전하였다. 한편 전토(田土)는 도시에 사는 상인·관료 등 부재지주에 많이 점유되고, 전호(佃戶:소작인)들은 생존권을 위한 항조운동(抗租運動)을 전개하고 고공(雇工)·용공(傭工) 등 고용노무자와 결합해서 노변(奴變)을 일으키는 일도 많았다. 또한 도시의 수공업 노동자들도 민변(民變)이라 불린 반세운동(反稅運動)을 일으켰는데, 노변·민변은 15세기 후반 등무칠(鄧茂七) 등이 일으킨 농민반란과 함께 하층민이 농공일체가 되어 사회적 자각을 표출한 것으로 시대의 전환을 암시하는 현상이기도 하였다.

<문화>
문화정책은 처음에는 복고국수주의(復古國粹主義)·몽골색 불식에 힘을 기울였으나 뒤에는 경제발달, 서민생활의 향상, 도시의 번영, 교육의 보급에 따라 대중적 색채가 짙어졌다. 또한 유럽의 과학사조가 들어와 그 영향도 받았다. 먼저 사상면에서는 몽골인에 압박을 받은 유학(儒學)의 전통적 지위를 회복하고자 영락제 때에는 송나라 주자학(朱子學)의 부흥에 힘써 송학(宋學)을 집대성해서 《성리대전(性理大全)》 《사서대전(四書大全)》 《오경대전(五經大全)》의 주석서(注釋書)를 칙찬(勅撰)하였는데, 이것은 과거(科擧)의 참고서가 되어 사상통제적 경향이 나타났다. 그러나 중기에 왕수인(王守仁:陽明)이 송나라 육구연(陸九淵)의 학설을 계승하여 실천을 중시하는 인격주의의 이상철학(理想哲學)을 주창, 유학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은 뒤 그 학설은 양명학(陽明學)으로서 크게 번져 명말에는 사상계를 주도하였다. 불교는 원대(元代)에 라마교(敎)가 성행하여 침체에 빠졌으나 명대에는 국가적 보호를 받아 대장경(大藏經)도 간행되었다. 뒤에 도교(道敎)가 보호를 받아 불교는 강력한 압력을 받았으나, 침잠(沈潛) 속에 사상적으로는 활기를 띠어 교의상(敎義上) 각 종파를 통합하려는 혼융불교(混融佛敎)가 주창되었으며 또한 유·불·도 3교의 조화설도 발달하였다. 도교도 크게 성행하여 《도장(道藏)》을 집성하였고, 가경제(嘉慶帝)의 열광적 신앙에 힘입어 전성기를 이루었으나 일반적으로는 미신적 형태로 민간에 보급되었다. 학문 숭상의 기풍도 짙어 성조(成祖) 때는 방대한 백과사전인 《영락대전(永樂大典》 등 많은 칙찬서(勅撰書)가 간행되고, 민간에서도 저장[浙江] 범씨(范氏)의 천일각(天一閣), 장쑤[江蘇] 모씨(毛氏)의 급고각(汲古閣)과 같은 대장서가(大藏書家)가 나와 역대의 정사(正史)가 합각(合刻)되어 남감본(南監本)·북감본(北監本)·급고각본(汲古閣本) 등이 간행되었다. 또한 《사기평림(史記評林)》 《한서평림(漢書評林)》 《십팔사략(十八史略)》 《당송팔대가문(唐宋八大家文)》 《당시선(唐詩選)》 등 계몽서도 유행되어 학문은 민간에 널리 보급되었고, 《천하일통지(天下一統志)》 《광여도(廣輿圖)》 《직방지도(職方地圖)》 등 지리서와 각 지방지(地方志)도 많이 간행되었다. 그러나 특히 이채를 띤 것은 경세실용학(經世實用學)과 유럽 학술의 유입이었다. 전자는 양명학이 좌·우 2파로 갈라진 뒤 우파가 제창한 실학주의(實學主義)에서 나온 것으로, 고염무(顧炎武)·황종희(黃宗羲) 등은 공소(空疎)한 양명학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입장에서 정치와 사회에 실제적으로 도움이 될 학문을 확립하였는데, 이 학파는 후에 청대에서 성행한 고증학(考證學)의 선구가 되었다. 후자는 특히 예수회의 선교사가 포교수단으로 전한 유럽의 과학이다. 마테오리치[利瑪竇]·아담샬[湯若望] 등의 천문·역법(曆法)·수학·지리학·포술학(砲術學)은 환영받았으며 그 중에서도 포술은 청군과의 싸움에서도 활용되었다. 또한 그리스도교의 세례를 받고 그 학문을 배운 서광계(徐光啓)·이지조(李之藻) 등 지식인들은 재래의 학문이나 종교에 자극을 주었다. 서광계의 《농정전서(農政全書)》 《기하원본(幾何原本)》, 이시진(李時珍)의 《본초강목(本草綱目)》, 송응성(宋應星)의 농공업을 도해(圖解)한 《천공개물(天空開物)》, 조사정(趙士禎)의 총포구조를 기술한 《신기보(神器譜)》 등은 모두 유럽 과학의 많은 영향을 받은 저서이다. 또한 리치가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를 소개하자 중화사상(中華思想)을 믿고 있던 한족에게 미지의 세계를 알려 줌으로써 세계관에 영향을 끼쳤다. 문학에서는 복고조(復古調)의 시문, 서민적인 색채가 짙은 소설과 희곡이 특징을 보여 사회계층의 상·하 구별 없이 문화적 융합을 이루었는데, 특히 소설과 희곡은 대표적인 명대문학으로, 한(漢)의 문(文), 당(唐)의 시(詩), 송의 사(詞), 원(元)의 곡(曲)과 견줄 만하다. 이 중 소설은 문어체(文語體)보다는 백화체(白話體)의 장편(長篇)이 주류를 이루어 사대기서(四大奇書)라 일컫는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수호전(水滸傳)》 《금병매(金甁梅)》 등은 모두 명대에 완성된 것이고, 《금고기관(今古奇觀)》은 송·원·명 3대의 단편명작 40편을 집성한 것이다. 이 소설들은 모두 유·불·도 3교의 사상이 융합되어 있는 점이 특징이다. 희곡은 처음에 북곡(北曲:雜劇)이 성행하였으나 남곡(南曲:傳奇)에도 고명(高明)의 《비파기(琵琶記)》와 같은 명작이 있었다. 중기 이후에는 남곡의 노래양식과 악기를 통일한 곤곡(崑曲)이 만들어져 남곡은 만력(萬曆) 때 전성기를 맞아 탕현조(湯顯祖:臨川)는 당대 제일의 걸작 《옥명당사몽(玉茗堂四夢:還魂記·紫釵記·南柯記·邯鄲記)》을 만들었으며, 그 중 <환혼기>는 <모란정환혼기(牡丹亭還魂記)>라는 별칭으로 후세에 전래되어 인기를 얻었다. 회화는 명대에 들어 급속히 복고운동이 진전되어 원대에 폐지된 화원(畵院)을 재건하여 궁중화가를 양성하고 화가를 우대하여 작품활동도 활기를 띠었다. 특히 선덕제(宣德帝) 이후 많은 유명화가가 활약하여 마원(馬遠) 계통의 예단(倪端), 하규(夏珪) 계통의 주문정(周文靖), 후에 절파(浙派)의 개조(開祖)가 된 대진(戴進) 및 이재(李在) 등이 당시의 화단을 주도하였다. 절파의 화풍은 마원·하규의 송나라 원체화(院體畵)에다 원나라 초에 화승(畵僧)들이 즐겨 그린 수묵체(水墨體)를 배합한 거친 필법으로 다룬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용이 빈약하고 형식에 치우쳐 퇴색하였다. 한편 당초에는 화원의 후원자였던 명나라의 황제들은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고 화가의 자유를 속박하였기 때문에 화가의 활약도 점차 침체되었다. 이러한 화원의 어용화가(御用畵家)와는 달리 재야의 화가들이 점차 두각을 나타내 명대의 화단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는데 그 중 손꼽히는 화가는 구영(仇英)이다. 그는 남송화원(南宋畵院)의 화가 진각(陳珏)을 개조로 하는 원파(院派)에 속하여 그 정통화풍을 계승하면서도 이당(李唐)·마원·하규와 문인화가인 심주(沈周)의 그림양식을 배합하여 원파의 영역을 벗어나 일가를 이루었다. 재야 화가 속에서 문인화(文人畵)가 크게 발흥한 것도 이 시기이다. 화원이 쇠퇴하고 원파의 형식화가 굳어져 가자 이에 대항해서 문인화가들이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선두에 나선 것은 심주와 그 제자인 문징명(文徵明)으로 이들은 원대의 4대가(黃公望·吳鎭·倪讚·王蒙)와 북화(北畵)의 필법을 조화해서 명대 남화를 부흥하는 기초를 닦았다. 그러나 이들은 원대의 4대가에 비해 기술·기백에서 매우 뒤졌다. 가정제(嘉靖帝) 이후 17세기 중엽까지 문인화는 전성기를 맞아 많은 문인화가를 배출하였으나, 뛰어난 작품을 남기지 못하였다. 문징명 이후의 문인화가로는 문백인(文伯仁)·동기창(董其昌)·예원로(倪元) 등이 알려졌다. 조각은 남북조·수당(隋唐) 때와 같은 불교조각의 전통은 거의 소멸되고, 부처·보살의 조상(造像)보다는 관음(觀音)·나한(羅漢)의 조상이 눈에 띄게 되었다. 명초에는 원대의 흐름을 이어 천의관음상(天衣觀音像)과 같은 목상(木像)도 보였으나, 산시성[山西省] 타이위안[太原] 진츠전[晉祠鎭]의 봉성사(奉聖寺)에서 조상한 나한상(羅漢像)에 이르러서는 명대의 특색이 나타나 나한상 군상형성(群像形成)의 원형을 볼 수 있다. 이 밖에 베이징 시산산[西山]에 있는 와불사(臥佛寺)의 청동석가열반상(靑銅釋迦涅槃像)과 벽운사(碧雲寺)의 좌불오존상(座佛五尊像)을 들 수 있으나 모두 양감(量感)은 있어도 조각으로서는 생동감이 떨어진다. 도자기는 송대까지 성행한 양질(良質)의 청자·백자·천목(天目:찻잔의 일종) 종류는 쇠퇴하고, 화려한 무늬를 입힌 청화백자(靑華白磁)·적회(赤繪)·진사(辰砂) 종류를 만들게 되었다. 명초에 육조(六朝) 이래의 유명한 자기 생산지인 징더전[景德鎭]에 어기창(御器廠:官窯)을 설치하여 명대의 자기를 대표하는 명품은 거의 이곳에서 만들어냈는데, 청화백자·진사는 선덕제 때에, 적회는 가정시대에 각각 그 일품(逸品)이 생산되었다. 칠공(漆工)은 송·원시대의 기교를 더욱 발전시켜 도안(圖案)에도 산수·인물·화조(花烏) 등 변화를 보였다. 건축은 명초에 난징[南京]에 축조한 황성·궁성이 지금은 없어졌으나 이를 본뜬 베이징의 궁성이 남아 있어 현재도 베이징 경관(景觀)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또한 하늘에 제사지내는 천단(天壇)도 이 시대에 축조되었고, 불교건축으로는 부다가야 대탑(大塔)의 형식을 본뜬 금강보좌(金剛寶座)가 세워져 대정각사(大正覺寺:五塔寺)의 탑(1473 건립)이 그 유구(遺構)로 남아 있다.

<고려·조선과의 관계>
약 1세기 동안 원나라의 간섭을 받아온 고려 조정은 명이 건국을 선포한 1368년(공민왕 17) 이후에도 원의 잔존세력 때문에 친원(親元)·친명(親明) 양파로 갈려 확고한 외교정책을 펴지 못하고 그 후 20년 동안 대명(對明) 관계는 혼미(昏迷)를 거듭하였다. 공민왕은 즉위 초에 원나라의 쇠퇴한 기미를 알고 자신의 몽골풍 머리(剃頭髮)를 고치고, 1356년에는 원나라 기황후(奇皇后)의 오빠인 기철(奇轍) 등 원나라에 붙어 악행을 저지른 자들을 죽이고, 북방의 실지(失地) 일부를 찾았으며, 원의 연호를 폐지하는 등 진취적인 정책을 취하였으나 압력을 받아 다시 원의 연호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69년 명으로부터 개국을 알리는 사신을 보내오자 이를 환영하고 성준(成准) 등을 처음으로 명나라에 보내어 명태조의 성절(聖節:생일)을 축하하였고, 앞서 일시 정지한 원의 연호 지정(至正)을 다시 폐지하였다. 70년, 고려는 명의 홍무(洪武) 연호를 쓰기로 결정하고, 이성계(李成桂)로 하여금 원의 동녕부(東寧府)를 치게 하여 원과 절교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사이 북원(北元:1368년 이후 원을 북원이라 함)에서도 꾸준히 고려에 사신을 보내 회유를 계속하였고, 74년 공민왕이 죽고 우왕(禑王)이 즉위한 뒤 정권을 장악한 시중(侍中) 이인임(李仁任)은 친원(親元)으로 급변, 이 해 고려에 왔다가 돌아가던 명나라 사신 채빈(蔡斌)은 고려의 호송관 김의(金義)에게 살해되고, 북원은 고려에 사신을 보내 왕을 책봉하는 등 고려와의 관계를 회복하였다. 그러나 날로 강성해가는 명의 세력도 무시할 수 없어 고려는 명·북원에 등거리 외교로 대처하다가 85년에 이르러 명사(明使)가 와서 고려와의 통교(通交:通聘)를 통고하고, 공민왕에게 시호를 추증, 왕을 책봉함으로써 두 나라 관계는 정착되었으며, 87년에는 원복(元服)을 폐지하고 명제(明制)로 바꾸었다. 그러나 이렇게 정착된 양국관계도 수년 후 고려왕조의 붕괴로 끝났다. 92년 조선왕조를 세운 이태조는 즉위 직후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고려권지국사(高麗權知國事) 자격으로 새로운 왕조의 개창을 보고하여 승인을 받고 또 국호의 정정을 요청하였으나 국호와 국왕의 칭호는 허락하지 않았다. 93년 태조는 말 9,800필을 보내고 고려 때 명으로부터 받았던 고려국왕의 금인(金印)을 반환하였으나 명은 여진(女眞) 및 세공(歲貢)문제 등을 이유로 조선국왕의 인신(印信)을 쉽사리 보내 주지 않다가 태종이 즉위한 1400년에 조선국왕의 고명(誥命:왕위승인문서)과 인장을 보내와 대명(對明) 외교관계는 조선왕조 수립 후 8년 만에 정상화되었다. 1408년에는 이태조가 죽자 명은 고려 공민왕 이후 처음으로 ‘강헌(康獻)’이라는 시호를 보내와 이후 조선은 역대의 국왕이 즉위하면 반드시 명에 주청(奏請)하여 ‘책봉(冊封)’이라는 승인을 받았고, 국왕의 사후에는 이를 고하여 시호를 받는 것을 정례화하였다. 또 명의 연호를 사용하고 국가의 주요 대사를 보고하여 그 의견을 듣는 등 ‘사대(事大)’ 형식을 취하였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내정·외교에 근본적인 제약이 없고 자주적이었다. 따라서 조선과 명의 관계는 대등한 관계는 아니었으나 종주·종속관계도 아니고, 명은 명목상 종주적 위치를 유지하였다고 할 수 있다. 명에의 세공문제(歲貢問題)는 처음에 금 150냥, 은 700냥의 과중한 부담이 포함되어 있어 이를 다른 토산물로 대체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이를 듣지 않다가 29년(세종 11) 이를 면제하고 우(牛)·마(馬)·포(布)로 대신하게 하였다. 대체로 이후부터 조선과 명은 경제·문화의 교류가 본궤도에 올라 그 후 200년간 별다른 변동 없이 그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외교에 있어서도 명나라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수시로 사절(使節)을 보내왔으나 조선에서는 원단(元旦)에 보내는 정조사(正朝使), 황제부부의 탄일에 보내는 성절사(聖節使)와 천추사(千秋使), 동지에 보내는 동지사(冬至使) 등 정례적으로 연 4차 사행(使行)을 보냈다. 이 밖에 사은사(謝恩使)·주청사(奏請使)·진하사(進賀使)·진위사(陳慰使)·변무사(辨誣使) 등을 수시로 보냈는데, 사행일행은 40여 명이 공인된 인원이었다. 이 사행에 따르는 조공은 일종의 공무역(公貿易)으로 예물과 답례물 형식으로 물물 교환되었으며, 이와 별도로 사행일행이 가지고 간 물화에 의해 사무역(私貿易)이 성행하였는데, 북경에서는 조선사신이 머무는 회동관(會同館)이, 서울에서는 명사가 머무는 태평관(太平館)이 사무역의 중심지였다. 명에서 제정한 명률(明律)은 조선 초에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라는 이름으로 번역[吏讀文]되어 조선의 기본법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창제에 많은 도움을 주었고, 《경국대전》의 <형전(刑典)>을 운용하는 데 그 해당조문이 없을 때는 456개조로 되어 있는 《대명률》의 <형률>을 적용하도록 하는 등 법률운용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조선은 국초부터 특히 해마다 명나라로부터 많은 서적을 구입하고 이를 재간행하여 그 문화를 수입하는 데 적극적이었으나, 한편으로는 명의 견포(絹布) 등 고급물품을 들여와 사치풍조를 조장하고 국내의 생산을 위축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명 관계에 있어 특기할 사항은 무엇보다도 조선의 임진왜란 때 명이 3차의 원군(援軍)을 파병하여 조선을 도왔다는 사실이다. 명은 이 무렵 말기적 증세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여 도처에서 반란이 일고 재정적으로도 어려운 형편이었으나 조선원정을 단행하여 경제적 부담이 막대하였고, 이 틈에 만주의 청세력은 더욱 팽대해져 조선은 정묘호란·병자호란 등 국난을 겪게 되고 명나라는 청나라에 멸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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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가면 8 써서 팔아라 인기글 '중국시장을 숫자로 돌파하라.' 세계 소비시장 블랙홀로 떠오르고 있는 중국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숫자마케팅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지난 1월 29일 세계 최대 항공기 제작사인 보잉은 차세대 전략기…(2011-07-14 09:16:56)
중 소비력 미국 앞질러 1위 인기글 곡물·육류등 추월…1인당 소비는 휠씬 떨어져중국이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 소비국으로 등극했다. 이로써 중국은 자국 경제가 무서운 기세로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를 하나 더 얻게 됐다. 미국 워싱턴에 있는 지구…(2011-07-11 09:09:04)
"폭죽 놀이는 중국의 전통" 인기글 당국이 안전상의 이유로 강력한 단속에 나섰지만 베이징(北京)에서는 중국인들의 춘제(春節. 설) 전통이 돼버린 폭죽 놀이를 막지 못했다고 상하이 영자지인 상하이데일리가 신화통신을 인용, 14일 보도했다. 특히 변호사…(2011-07-11 09:07:09)
'세계의 지붕'… 인기글 파미르고원·히말라야산맥 난개발로 빙하 줄어 중국인들이 ‘지구의 지붕’으로 부르는 칭짱(靑藏)고원의 빙하가 매년 급속도로 녹아내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구 온난화의 영향도 있지만 인간들의 과도한 개발이 주범으로 …(2011-07-11 09: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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