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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공과 그의 산문(고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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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dmin 작성일11-08-18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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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공(曾鞏)은 당송팔대가 중의 한 사람으로 북송 진종(眞宗) 천희(天禧) 3년(1019)에 건창군(建昌郡) 남풍현(南豊縣: 지금의 강서성 남풍현)에서 아버지 역점(易占)과 어머니 오씨(吳氏)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 역치요(易致堯)는 상서호부낭중(尙書戶部郞中)을 지냈고, 부친 역점은 태상박사(太常博士)를 지냈다. 이렇듯 전통적인 유가집안에서 태어난 증공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20세 후에는 학문적 재능이 출중하여 구양수(歐陽修)의 인정을 받았다. 이때부터 구양수에게 사사하여 그의 가르침을 따르고, 도덕적인 문장은 구양수를 모범으로 삼았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은 항상 "구증(歐曾)"이라 칭하였다.

증공은 소년시절부터 왕안석(王安石)과 친밀하였기에 그가 구양수의 문하에 들어간 후에는 왕안석을 구양수에게 추천하기도 하였다.

가우(嘉祐) 2년(1057), 39세에 증공은 진사에 급제하였다. 당시에 구양수는 지공거(知貢擧)로서 그때까지 중시하던 변려문(騈儷文)으로 쓴 문장을 낙방시키고 증공, 소식(蘇軾), 소철(蘇轍) 등 고문가의 문장을 합격시켰는데, 이것은 이전에 추구하던 변려문을 상당히 쇠퇴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문학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그후에 증공은 태평주사법참군(太平州司法參軍, 1059, 41세), 관각교감집현교리(館閣校勘集賢校理, 1060, 42세), 실록검토관(實錄檢討官, 1068, 50세) 등을 역임하면서 사관의 생활을 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역대 서적에 대하여 많은 정리 작업을 하여, <신서목록서(新序目錄序)>, <열녀전목록서(列女傳目錄序)>, <전국책목록서(戰國策目錄序)>, <진서목록서(陳書目錄序)> 등의 목록서를 썼다.

증공은 51세(1069) 되던 해에 월주통판(越州通判)으로 나가게 되면서부터 제주(齊州, 1072, 54세), 양주(襄州, 1073, 55세), 홍주(洪州(1076, 58세), 복주(
福州, 1077, 59세), 창주(滄州, 1080, 62세) 등지에서 약 10여년간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민생을 해결하고 민의를 따르는 지방관의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였다.

원풍(元豊) 4년(1081, 63세)에 조정에서는 증공의 사학(史學)을 높이 인정하고 그를 사관수찬(史官修纂)에 임명하여 태조(太祖)에서 영종(英宗)에 이르는 오조국사(五朝國史)를 맡게 하였다. 그러나 이를 완성하지 못하고 64세에 중서사인(中書舍人)이 되었다가 그해 9월에 모친상을 당하여 관직을 사임하고 강녕(江寧)으로 돌아갔다. 이듬해(1083) 4월에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시호는 문정(文定)이라 하였으며, 후세 사람들은 그를 남풍선생(南豊先生)이라 칭하였다.

≪송사(宋史)≫ 「본전(本傳)」에 의하면 증공의 저작으로 ≪원풍유고(元豊類稿)≫50권, ≪속원풍유고(續元豊類稿)≫40권, ≪외집(外集)≫10권이 있다. 그러나 송대 조공무(晁公武)의 ≪군재독서지(郡齋讀書志)≫에는 단지 ≪원풍유고≫의 기록만 있는 것으로 보아 송이 남도한 후에 이미 ≪속원풍유고≫와 ≪외집≫은 산실된 듯하다. 이외에 후세 사람들이 편집한 것으로 ≪증남풍선생문수(曾南豊先生文粹)≫10권, ≪증남풍자고선생집(曾南豊子固先生集)≫34권, ≪증문정공전집(曾文定公全集)≫20권이 있다. 증공의 사서(史書)로 송대의 태조에서부터 영종에 이르는 오조(五朝)의 일을 기록한 ≪융평집(隆平集)≫이 전하는데, 이것이 증공의 작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확실치 않다.  

1. 증공의 산문에 나타난 문학론  

1) 명도당리(明道當理)

증공은 구양수의 적극적인 추종자이자 지지자로서 고문 창작에 있어서 구양수의 주장을 거의 전부 받아들이고 이론상에서도 "명도당리(明道當理)"를 주장하였다.

"공맹(孔孟)의 시대는 주초(周初)에서 수백년이나 떨어져 있어서 옛 법제가 없어지고 옛 풍속이 사라진지 오래되었다. 그런데 그들 두 사람만 오직 선왕의 도를 밝혀서 그것을 고쳐서는 안되는 것이라 하였으니, 어찌 그들이 천하의 군주를 강요하여 후세에 할 수 없는 일을 했다고 하겠는가? 그들은 또한 그들이 만난 시대와 변화에 따라서 당시의 법제를 제정하여 그것이 선왕의 뜻을 잃지 않도록 하였다. 이제삼왕(二帝三王)이 다스릴 때 그 변화가 다르고 법제도 달랐지만, 그들이 천하의 국가를 다스린 뜻은 처음부터 끝까지 같지 않은 적이 없었다. 공맹의 도는 이와 같을 따름이다. 법이란 이로써 변화에 적응하는 것이므로 반드시 전부 같을 필요는 없고, 도란 이로써 근본을 세우는 것이므로 하나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이치는 바뀌지 않는 것이다.(≪元豊類稿≫卷11 <戰國策目錄序>: 夫孔孟之時, 去周之初, 已數百歲, 其舊法已亡, 舊俗已熄久矣. 二子乃獨明先王之道, 以謂不可改者, 豈將强天下之主以後世之不可爲哉? 亦將因其所遇之時, 所遭之變, 而爲當世之法, 使不失乎先王之意而已. 二帝三王之治, 其變固殊, 其法固異, 而其爲國家天下之意, 本末先後, 未嘗不同也. 二子之道, 如是而已. 蓋法者, 所以適變也, 不必盡同, 道者, 所以立本也, 不可不一. 此理之不易者也.)"

여기에서 증공은 선왕과 공맹이 전한 도를 중시하여 "도는 근본을 세우는 것이므로 바뀔 수 없고, 법은 변화에 적응하는 것이므로 변통할 수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증공은 유도(儒道)의
선양과 치용(致用)의 사상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문학상 "문이명도(文以明道)"를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의 학자들이 문사(文辭)의 조탁에 치중하여 성인의 도를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문이명도(文以明道)"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귀하의 서신에서 처음에 말씀하시는 것은 도에 나아가고자 하신 것이었으나 질문하신 것은 문사(文辭)입니다. 이것은 천속한 것에 힘쓰느라 핵심을 잊고 중시해야 할 것을 오히려 소홀히 한 것은 아닐런지요! 도의 귀착점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마음에 얻어서 몸에 가득 채우고, 그것을 확충하여 국가와 천하에 펼치는 것일 뿐 문사에 급급한 것이 아닙니다. 문사를 그만두지 않는 것은 부득이해서 입니다.(≪元豊類稿≫卷18 <答李沿書>: 夫足下之書, 始所云者欲至乎道也, 而所質者則辭也. 無乃務其淺, 忘其心, 當急者反徐之歟! 夫道之大歸非他, 欲其得諸心, 充諸身, 擴而被之國家天下而已, 非汲汲乎辭也. 其所以不已乎辭者, 非得已也.)"

여기에서 그는 문장의 형식보다는 내용이 중요하며, 나아가 학자가 도를 추구하는 목적은 그것을 천하를 위하여 유용하게 쓰려고 하는데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문이재도(文以載道)"로 표현되는 유가의 공용론과 그 맥을 같이 한다.

"내 나이가 많아짐에 따라 혈기는 더욱 쇠약해져 질병으로 쉴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마음을 학문에 쏟아 고인의 말씀과 뜻을 구하여 좁은 방안에서 스스로 즐거워하였지 빈천 속에서 세월을 보내지 않았습니다.(≪元豊類稿≫卷16 <與杜相公書>: 鞏年齡益長, 血氣益衰, 疾病人事, 不得以休. 然用心於載籍之文, 以求古人之緖言餘旨, 以自樂於環堵之內, 而不流於貧賤之中.)"

이것은 증공이 힘을 다하여 "문이명도"를 몸소 실천한 증거이다. 이 "문이명도(文以明道)"의 문학관은 항상 문장에 있어서 "이치에 합당해야 하는 것(當理)"으로 나타난다.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교화가 이루어지면 도덕과 풍속이 하나가 되니, 이치를 말함에 있어서 사람과 시대가 다를지라도 그 지향점이 다르지는 않다. 왜 그러한가? 이치는 당연히 두 개가 아니기 때문이다. …… 삼대(三代)의 교육하는 법이 폐지되고 선왕의 은택이 끊어진 후로 학자들은 저마다 견해가 다르고 제자(諸子)는 각자 학파를 이루었는데, 어찌 처음부터 상반되었겠는가? 이치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元豊類稿≫卷12 <王子直文集序>: 至治之極, 敎化旣成, 道德同而風俗一. 言理者雖異人殊世, 未嘗不同其指. 何則? 理當無二也.……自三代敎養之法廢, 先王之澤熄, 學者從異見, 而諸子各自爲家, 豈其固相反哉? 不當於理, 故不能一也.)"

이것은 "당리(當理)"의 중요성을 설명한 것으로, 여기에서 증공이 말한 "이치(理)"는 바로 "성인의 도(聖人之道)" "성인의 뜻(聖人之意)"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그의 "명도당리(明道當理)"의 주장은 다른 사람들의 시문집을 평한 곳에서 자세히 볼 수 있다.  

"서간(徐幹)은 홀로 육예(六藝)를 궁구하고 공자와 맹자의 뜻을 미루어서 이를 서술하고 논했다. 그 문사를 추구함에 때때로 약간 잘못된 점도 있지만, 그 귀착점은 도에 맞지 않는 것이 적다.(≪元豊類稿≫卷11 <徐幹中論目錄序>: 幹獨能考六藝, 推仲尼孟軻之旨, 述而論之, 求其辭時若有小失者, 要其歸不合於道者少也.)"

"포용(鮑溶)의 시는 더욱 청약(淸約)하고 근엄하여 이치에 어긋난 것이 적으니 근세에 있어서 말에 능한 자이다.(≪元豊類稿≫卷11 <鮑溶詩集目錄序>: 溶詩尤淸約謹嚴而違理者少也, 亦近世之能言者也.)"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문장을 평하는 기준을 바로 도(道)와 이(理)의 유무에 두고 있다. 특히 그는 안진경(顔眞卿)을 평하면서, "공의 학문과 문장은 왕왕 도교와 불교의 설이 섞여 있어서 모두 이치에 맞는 것은 아니다.(≪元豊類稿≫卷18 <撫州顔魯公祠堂記>: 公之學問文章, 往往雜於神仙浮屠之說, 不皆合於理, 及其奮然自立, 能至於此者, 蓋天性然也.)"라고 한 것으로 보아, 증공이 생각한 도(道)와 이(理)의 실체는 유가 내에 한정된 개념이며, 이는 선왕이나 성인의 통치원리와 행위 등을 포괄한 다소 폭넓은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즉, 이러한 도(道)와 이(理)를 담는 문장을 쓰는 것이 증공의 "명도당리(明道當理)"의 이론이라 하겠다.  

2) 문채설(文采說)

앞서 인용한 <답이연서>에서 증공은 이연이 도를 가벼이 여기고 문사에 급급한 것을 질책하여 문장은 "명도당리(明道當理)"를 핵심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명백히 표명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문사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옛날의 훌륭한 역사가란 그 현명함은 반드시 만사의 이치를 두루 미치게 할 수 있고, 그 도는 반드시 천하의 쓰임에 적합할 수 있으며, 그 지혜는 반드시 알기 어려운 뜻을 통하게 할 수 있고, 그 문은 반드시 나타내기 어려운 정을 펴게 할 수 있으니, 그러한 후에 그 임무를 완수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元豊類稿≫卷11 <南齊書目錄序>: 古之所謂良史者, 其明必足以周萬事之理, 其道必足以適天下之用, 其智必足以通難知之意, 其文必足以發難顯之情, 然後其任可得而稱也.)"

여기에서 "그 문은 반드시 나타내기 어려운 정을 펴게 할 수 있다"는 것은 문사(文辭)를 홀시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문사가 좋지 않으면 나타내기 어려운 정을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후에 명(銘)을 지을 때는 항상 그 사람을 보아야 한다. 만약 적당하지 않는 사람에게 그것을 부탁한다면 그 글이 공정하고 정확하지 않아 당세에 유행되고 후세에 전해질 수 없을 것이다. …… 그러면 누가 그 사람이 되어 공정하고 정확함을 다할 수 있겠는가? 도덕을 갖추고 문장에 능한 자가 아니면 그것을 할 수 없을 것이다. …… 사람을 쓰는 것도 그와 마찬가지여서 도덕을 갖추지 않은 자가 어찌 사리분별에 미혹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시비평론에 사심이 없을 수 있겠는가? 미혹되지 않고 시비평론에 사심이 없으면 공정하고 정확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그의 문사가 아름답지 않으면 세상에 전해지지 않을 것이다. 이에 또한 그 문장에 있어서는 아름다움을 동시에 갖추어야 한다.(≪元豊類稿≫卷16 <寄歐陽舍人書>: 後之作銘者, 常觀其人. 苟托之非人, 書之非公與是, 則不足以行世而傳後. …… 然則孰爲其人, 而能盡公與是歟? 非畜道德而能文章者, 無以爲也. …… 猶之用人, 非畜道德者, 惡能辨之不惑, 議之不徇? 不惑不徇, 則公且是矣. 而其辭之不工, 則世猶不傳. 而其辭之不工, 則 世猶不傳, 於是又在其文章兼勝焉.)"

여기에서 "그 문사가 아름답지 않으면 세상에 전해지지 않을 것이다"는 것은 바로 문사를 다듬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답이연서>에서는 문사에 급급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고, <남제서목록서>와 <기구양사인서>에서는 문사를 아름답게 해야 한다고 하였으니, 이 양자는 상호 모순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대체로 증공은 문장을 "명도당리(明道當理)"로써 근본을 삼고 문사의 아름다움을 겸해야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따라서 증공은 문사의 아름다움은 "부득이 할 뿐" 여전히 "명도당리(明道當理)" 해야 하며, 문사를 "지나치게 꾸며서 재능을 과시하는 것(≪元豊類稿≫卷15 <上歐陽學士第一書>: 近世學士, 飾藻궤以誇후)"으로 빠져서는 안된다고 하였던 것이다.  

2. 증공 산문의 특색

증공의 산문은 서정적인 작품이 매우 적고 의론문(議論文)과 기서문(記敍文)이 대부분이며, 기서문 속에도 언제나 의론(議論)이 있다. 증공 산문의 구체적인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설리(說理)는 경전을 근본으로 하여 곡절하고 완곡하게 그 뜻을 다하였다.

증공의 의론문은 대부분 유가의 육경(六經)을 근본으로 하면서 당대의 시사를 논한 것인데, 여기에서 그는 자신의 주장을 곡절하고 완곡하게 펼침으로써 그의 해박한 지식과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다. 예를 들면, 송대의 고과(考課), 공거전시(貢擧錢市), 부세(賦稅) 등의 문제점을 논한 <본조정요책(本朝政要策)>, 지방관리에 부임해 가는 친구에게 정치에 부지런히 힘쓰고 백성을 사랑할 것을 격려한 <송강임서(送江任序)>와 <송이재숙지유주서(送李材叔知柳州序)>, 신하가 간언할 때 갖추어야 할 품덕과 절개를 강조한 <범관지주의집서(范貫之奏議集序)>, <선대부집후서(先大夫集后序)>, <서위정공전후(書魏鄭公傳後)>, 관리의 재질을 배양하는 방법을 논술한 <의황현현학기(宜黃縣縣學記)>와 <균주학기(筠州學記)>(이상은 정치에 대하여 논한 것임), 공맹의 도와 이왕삼제(二王三帝)의 정치를 근거로 도는 고칠 수 없으나 법은 융통성있게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 <전국책목록서(戰國策目錄序)>, 예의 개혁을 긍정한 <예각신의목록서(禮閣新議目錄序)>, 당태종의 "정관지치(貞觀之治)"를 찬양한 <당론(唐論)> 등에서 그러한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둘째, 증공의 산문은 서사가 간명하고 생동감 있으며, 의론이 자세하고 분명하다.

그는 항상 "정반(正反)" 두 방면에서 논리를 진행하고 선명한 역사적 사실로써 논점을 증명하였다. 예를 들면, <의경비찰자(議經費札子)>에서는 비용을 절약하면 천하가 비록 곤궁해도 매우 부강해질 수 있다는 것을 한문제(漢文帝)와 당태종(唐太宗)을 들어 예증하고, 다시 천하가 부강하더라도 비용을 절약하지 않으면 매우 쉽게 곤궁해진다는 것을 한무제(漢武帝)와 당현종(唐玄宗)을 들어 예증하였다. 이는 "정반" 두 방면에서 양 극단의 이해(利害)를 명확하게 밝힌 것이다. 이외에도 <증여안이생서(贈黎安二生序)>, <여손사봉서(與孫司封書)> 등에 증공 산문의 이러한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셋째, 구성이 치밀하고 조리가 분명하다.

그는 사학가의 안목으로 소재를 선택하여 세밀하게 안배하고, 간결한 문체로써 조리정연하게 사실을 기술하는데 뛰어났다. 가장 전형적인 것으로는 <월주조공구재기(越州趙公救災記)>를 들 수 있다. 이 문장은 실록(實錄)의 수법으로 조변(趙抠)의 기근 구제정책을 기술하였는데, 모두 4개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제1부분에서는 재난이 있기 전의 조공(趙公)의 조사 준비 작업을 기술하였고, 제2부분에서는 조공이 상황에 따라 구체적인 조치를 취하여 이재민들을 구제한 것을 기술하였다. 제3부분에서는 조공의 용감하고 부지런한 기풍 및 재난을 구제한 성과를 찬양하였고, 제4부분에서는 이것을 기술한 의도를 밝히어 천하에 본보기를 제공하였다. 여기에 나타난 재난 구제 작업은 아주 복잡하지만 문장은 오히려 간결하며 구성도 치밀하다. 여기에서 바로 증공의 뛰어난 서사 기법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간결한 문체로써 일의 진행 상황을 세밀하게 서술한 문장은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서도(敍盜)>, <양주의성현장거기(襄州宜城縣長渠記)>, <학사기(學舍記)> 등이 대표적이다.

넷째, 어기(語氣)가 부드럽고 문장이 완곡하다.

증공은 구양수와 마찬가지로 "음유(陰柔)"의 미(美)를 체현하였다. 예를 들면, <기구양사인서(寄歐陽舍人書)>는 감사의 편지이지만, 처음부터 공허한 감사의 말을 쓰지 않고 오히려 묘지명(墓地銘)과 역사의 차이점으로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여 묘지명을 쓰는 어려움을 지적한 후에 제일 마지막에 감사의 뜻을 완곡하게 표현하였다.

왕안석(王安石)은 <증증자고(贈曾子固)> 시에서 증공의 문장과 인격에 대하여 적절한 비유로써 평하고 있는데, 이것은 당대의 최고 평가이다.  

"증공의 문장은 뭇사람에겐 없으니,

강으로는 강수(江水) 한수(漢水), 별로는 북두성이라.

재주를 타고나도 아첨하지 않으니,

뭇사람들 한결같이 입을 모아 헐뜯네.

내가 뭇사람들에게 헐뜯지 말라고 하였지만,

어찌 증공이 그것을 당황해 하리오?

불행히도 미천하게 죽는다 할지라도,

후일에는 반고(班固)나 양웅(揚雄)에 버금가리!"

(曾子文章衆無有, 水之江漢星之斗. 挾才乘氣不媚柔, 群兒謗傷均一口. 吾謂群兒勿謗傷, 豈有曾子終皇皇? 借令不幸賤且死, 後日猶爲班與揚.)  

남송 성리학의 대가인 주자(朱子)는 <남풍선생연보서(南豊先生年譜序)>에서, "나는 증씨의 글을 보고 일찍이 책을 덮고 세상에서 공을 잘 알지 못함을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予讀曾氏書, 未嘗不掩卷廢書而嘆, 何世之知公淺也.)" "공의 문장은 뛰어나구나. 맹자와 한유 이래로 작자는 많았지만 이런 경지에 이른 사람은 아직 없었다.(蓋公之文高矣. 自孟韓子以來, 作者之盛, 未有至於斯.)"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증공의 문장이 얼마나 뛰어났으며, 송대 성리학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증공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남송의 성리학자 이후에도 명대의 당송파(唐宋派), 청대의 동성파(桐城派)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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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의 산문과 고문운동(고대문학) 인기글 육조의 귀족사회에 의해 완성된 변려문은 중당에 이를 때까지 문장의 주류적 지위를 유지해 왔다. 조칙(詔勅)·상주문(上奏文) 등 공적인 성격을 가진 문장은 변려문으로 작성되었으며, 그 밖에 서문(序文)·묘지명(墓誌銘)…(2011-08-11 08:44:16)
고대산문의 발전과정(고대문학) 인기글 중국 고대문학은 이른바 정통문학이라는 시와 산문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이렇듯 줄곧 정통문학의 지위를 차지해 온 산문은 ≪서경(書經)≫에서 시작됐다.≪서경≫은 역사가들이 쓴 요순(堯舜)시대로부터 주대(周代)에 이르기…(2011-08-11 08:43:22)
항일전쟁(현대사) 인기글 1937년 7월 7일, 중국의 동북을 점령하고 다시 화북으로 진격한 일본 침략군은 북경 부근에서 "노구교사변(蘆溝橋事變)"을 일으켜 전면적으로 중국을 침공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에 대하여 중국의 군대도 강력한 저항을 …(2011-08-11 08:4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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