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조선순사장 "베풀고 나누는 멋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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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3-10-21 06:41본문
한국인으로서 장장 20년간 연변에 와서 현지 조선족들의 생활 및 문화의 질향상을 위해 모지름을 써온 녀인이 있다. 그가 바로 연길진선미생활문화연구소 리사장 조선순이다.
중국진출한국인들을 놓고볼 때 현지 조선족들에 대한 시각은 여러가지이다. 친구로 사업파트너로 미래지향적으로 손잡은 한국인들이 있는가 하면 아직도 조선족을 비문명하고 거칠며 례의도 모르는 군체로 여기며 기시하고 비하하는 한국인도 적지 않다. 그렇다면 조선순리사장은 그 전자에 속한다.
지난 세기 90년대초, 조선순씨가 연변에 처음 왔을 때 이곳은 지금과는 비할수도 없이 어수선한 풍경이였다. 하지만 조선순씨는 이를 개의치 않았다. 생활문화가 잘 보급된 지구보다 이런곳에서 사업을 펼치면 어딘가 보람이 더 있다고 여겼기때문이다. 이는 또한 그가 북경이나 상해같은 대도시보다 조선족이 집거한 연변을 선택한 리유이기도 했다.
그녀는 우선 거칠고 비문명하고 례의도 모른다는 조선족들을 기시하기에 앞서 그들의 생활문화를 바로잡아주기로 했다. 그래서 몇년간의 시장조사를 거쳐 1999년에 세운것이 연길진선미생활문화연구소였다.
연구소에서 조선순씨는 한식료리, 직장교육, 례절교육, 퀼트(손바느질), 한지공예, 홈패션, 상담(부부상담, 자녀상담) 등 코너를 설치해 현지 조선족 특히 녀성들한테 강의해주기 시작했다.
조선순에 따르면 당시 한국에 가 돈을 벌어온 조선족은 많으나 기술을 배워온 사람은 극히 적은 상황, 돈은 써버리면 없어지나 기술은 없어지는것이 아니며 기술은 써먹을수록 더욱 련마되는것이였다. 다시 말해서 조선족들한테 돈을 벌게 하면서도 기술을 장악하게 하는것이 바로 조선순의 사업취지였다.
그외 조선순은 연변의 지역상특점으로 조선족들이 한국인들과 많이 접촉하기에 한국인을 보다 잘 알게 하고 한국의 례의범절을 보급시킬 필요가 있다고 인정, 문화연구소내 코너와 연길시TV방송을 통해 몇차례 강의한 결과 사회상의 반향이 아주 좋았다. 다음 생활상담 또한 일깨워줄것이 많았다. 례하면 가정에서의 고부사이, 부부사이 등에서 바로잡아줄것이 있었는가 하면 지어 부자사이와 모자사이에도 풀어줘야 할 애로사항도 있었다.
한번은 조선족녀성 한명이 찾아와 아들이 대학입시에서 미끌어져 속이 탄다면서 실망한 나머지 집밖에 나가기도 싫고 남과의 대면도 싫으며 전화를 받기도 짜증난다고 했다.
이에 조선순은 2시간정도 그녀와 상담을 진행, 《자식을 부모의 부속물로 생각치 말라》로 시작해 《반대로 자식의 립장에서 생각해보라》, 《어머니로서 인생의 선배로 돼보라》는 등으로 풀어나가면서 때로는 그녀의 심정을 아우르기도 하고 때로는 생활지향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주었더니 과연 그녀는 설득되였고 이듬해 아들을 다시 공부시키기로 결심했다.
한편 지난 세기 90년대초부터 2000년초반 당시 연변에는 한국인들로부터 사기피해를 당한 조선족이 많았었다. 이는 전반 한국인이미지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그때 어느 한국인이 중국조선족한테 피해를 줬다면 다른 어느 한 한국인은 자신의 희생으로 꼭 이를 보상해줘야 한다고 인정, 련속 3년간 150여명에 달하는 당지 피해가족 자녀들에게 장학금을 지급(인민페로 년평균 30만원)하였다. 돈이 많아서가 아니였다. 한국에 돌아가서는 기업인과 유지인사 등을 동원해서는 《한국은 나라지만 연변은 중국의 한 지역이고 구석에 불과하다. 연변을 상대로 우리 한국이 어른다워야 한다. 연변조선족을 돕는데는 조건이 따로 없다. 무조건 도와야 한다》면서 모금해서는 그 행사를 만들고 견지해왔다.
중국경제의 급성장과 더불어 현재 연변의 모습은 몰라보게 변했고 사람들 자질도 이전과는 비할수 없을 정도로 개변되였다. 지난해 9월 3일 연변조선족자치주창립 60주년 경축행사에 초청받아 참가한 조선순은 눈물이 나왔다. 행사의 성공은 연변의 주력(州力)을 말해주는것이였다. 또한 모든 사람들의 얼굴도 전례없이 밝고 명랑했다. 연변경제의 발전과 사회적 및 문명의 진보에 자신의 힘도 어느 정도 들어갔다고 하니 더욱 눈물이 나왔다.
지난 6월 한국에서 열린 2013세계한인회장대회에 참가하여 한국 박근혜대통령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왼쪽으로부터 다섯번째 조선순리사장).
지금 조선순이 운영하는 문화연구소의 규모는 늘어난것이 하나도 없다. 15년전 연변으로 진출할 때와 비슷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가 한일은 많다. 연변땅에서 불쌍한 사람들을 돕고 또한 이땅의 사람들에게 문명례의의식을 심어주는 등으로 보이지 않게, 자리가 나지 않게 한 일은 너무나도 많았다. 그런 기여로 한국 전대통령 로무현과 현임대통령 박근혜 등 정상들의 접견을 받았는가 하면 《해외에 한국의 선진문화를 전파하고 현지인들을 적극 도운 인물》로 중국내 한인회에서도 수차 인정받게 되였으며 재중한국인회 고문으로 위촉받기도 했다. 그것이 바로 그가 사는 재미였다.
현재 조선순은 연길시 공원가의 어느 한 건물에 가게를 차려놓고 현지인들로부터 기증받은 옷, 신발, 책, 놀음감, 소형가전제품 등을 재판매하고있다. 《나한테는 필요없지만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할 물건》이라며 그런 물건들이 쓰레기소각장에 들어가기보다는 꼭 필요한 사람들한테 돌아가 그들의 몸을 따뜻하게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판매수입의 40%를 불우이웃, 장애인 및 독거로인 등을 돕는데 돌린다고 한다.
다른 한편 조선순한테 아직 다른 꿈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연변에 민족문화원을 세우는것, 지금 그것이 바야흐로 준비단계에 있는것으로 알려지고있다.
금성, 김철균
조글로미디어
중국진출한국인들을 놓고볼 때 현지 조선족들에 대한 시각은 여러가지이다. 친구로 사업파트너로 미래지향적으로 손잡은 한국인들이 있는가 하면 아직도 조선족을 비문명하고 거칠며 례의도 모르는 군체로 여기며 기시하고 비하하는 한국인도 적지 않다. 그렇다면 조선순리사장은 그 전자에 속한다.
지난 세기 90년대초, 조선순씨가 연변에 처음 왔을 때 이곳은 지금과는 비할수도 없이 어수선한 풍경이였다. 하지만 조선순씨는 이를 개의치 않았다. 생활문화가 잘 보급된 지구보다 이런곳에서 사업을 펼치면 어딘가 보람이 더 있다고 여겼기때문이다. 이는 또한 그가 북경이나 상해같은 대도시보다 조선족이 집거한 연변을 선택한 리유이기도 했다.
그녀는 우선 거칠고 비문명하고 례의도 모른다는 조선족들을 기시하기에 앞서 그들의 생활문화를 바로잡아주기로 했다. 그래서 몇년간의 시장조사를 거쳐 1999년에 세운것이 연길진선미생활문화연구소였다.
연구소에서 조선순씨는 한식료리, 직장교육, 례절교육, 퀼트(손바느질), 한지공예, 홈패션, 상담(부부상담, 자녀상담) 등 코너를 설치해 현지 조선족 특히 녀성들한테 강의해주기 시작했다.
조선순에 따르면 당시 한국에 가 돈을 벌어온 조선족은 많으나 기술을 배워온 사람은 극히 적은 상황, 돈은 써버리면 없어지나 기술은 없어지는것이 아니며 기술은 써먹을수록 더욱 련마되는것이였다. 다시 말해서 조선족들한테 돈을 벌게 하면서도 기술을 장악하게 하는것이 바로 조선순의 사업취지였다.
그외 조선순은 연변의 지역상특점으로 조선족들이 한국인들과 많이 접촉하기에 한국인을 보다 잘 알게 하고 한국의 례의범절을 보급시킬 필요가 있다고 인정, 문화연구소내 코너와 연길시TV방송을 통해 몇차례 강의한 결과 사회상의 반향이 아주 좋았다. 다음 생활상담 또한 일깨워줄것이 많았다. 례하면 가정에서의 고부사이, 부부사이 등에서 바로잡아줄것이 있었는가 하면 지어 부자사이와 모자사이에도 풀어줘야 할 애로사항도 있었다.
한번은 조선족녀성 한명이 찾아와 아들이 대학입시에서 미끌어져 속이 탄다면서 실망한 나머지 집밖에 나가기도 싫고 남과의 대면도 싫으며 전화를 받기도 짜증난다고 했다.
이에 조선순은 2시간정도 그녀와 상담을 진행, 《자식을 부모의 부속물로 생각치 말라》로 시작해 《반대로 자식의 립장에서 생각해보라》, 《어머니로서 인생의 선배로 돼보라》는 등으로 풀어나가면서 때로는 그녀의 심정을 아우르기도 하고 때로는 생활지향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주었더니 과연 그녀는 설득되였고 이듬해 아들을 다시 공부시키기로 결심했다.
한편 지난 세기 90년대초부터 2000년초반 당시 연변에는 한국인들로부터 사기피해를 당한 조선족이 많았었다. 이는 전반 한국인이미지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그때 어느 한국인이 중국조선족한테 피해를 줬다면 다른 어느 한 한국인은 자신의 희생으로 꼭 이를 보상해줘야 한다고 인정, 련속 3년간 150여명에 달하는 당지 피해가족 자녀들에게 장학금을 지급(인민페로 년평균 30만원)하였다. 돈이 많아서가 아니였다. 한국에 돌아가서는 기업인과 유지인사 등을 동원해서는 《한국은 나라지만 연변은 중국의 한 지역이고 구석에 불과하다. 연변을 상대로 우리 한국이 어른다워야 한다. 연변조선족을 돕는데는 조건이 따로 없다. 무조건 도와야 한다》면서 모금해서는 그 행사를 만들고 견지해왔다.
중국경제의 급성장과 더불어 현재 연변의 모습은 몰라보게 변했고 사람들 자질도 이전과는 비할수 없을 정도로 개변되였다. 지난해 9월 3일 연변조선족자치주창립 60주년 경축행사에 초청받아 참가한 조선순은 눈물이 나왔다. 행사의 성공은 연변의 주력(州力)을 말해주는것이였다. 또한 모든 사람들의 얼굴도 전례없이 밝고 명랑했다. 연변경제의 발전과 사회적 및 문명의 진보에 자신의 힘도 어느 정도 들어갔다고 하니 더욱 눈물이 나왔다.
지난 6월 한국에서 열린 2013세계한인회장대회에 참가하여 한국 박근혜대통령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왼쪽으로부터 다섯번째 조선순리사장).
지금 조선순이 운영하는 문화연구소의 규모는 늘어난것이 하나도 없다. 15년전 연변으로 진출할 때와 비슷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가 한일은 많다. 연변땅에서 불쌍한 사람들을 돕고 또한 이땅의 사람들에게 문명례의의식을 심어주는 등으로 보이지 않게, 자리가 나지 않게 한 일은 너무나도 많았다. 그런 기여로 한국 전대통령 로무현과 현임대통령 박근혜 등 정상들의 접견을 받았는가 하면 《해외에 한국의 선진문화를 전파하고 현지인들을 적극 도운 인물》로 중국내 한인회에서도 수차 인정받게 되였으며 재중한국인회 고문으로 위촉받기도 했다. 그것이 바로 그가 사는 재미였다.
현재 조선순은 연길시 공원가의 어느 한 건물에 가게를 차려놓고 현지인들로부터 기증받은 옷, 신발, 책, 놀음감, 소형가전제품 등을 재판매하고있다. 《나한테는 필요없지만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할 물건》이라며 그런 물건들이 쓰레기소각장에 들어가기보다는 꼭 필요한 사람들한테 돌아가 그들의 몸을 따뜻하게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판매수입의 40%를 불우이웃, 장애인 및 독거로인 등을 돕는데 돌린다고 한다.
다른 한편 조선순한테 아직 다른 꿈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연변에 민족문화원을 세우는것, 지금 그것이 바야흐로 준비단계에 있는것으로 알려지고있다.
금성, 김철균
조글로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