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사대미녀와 그 별칭 – 수화羞花 양귀비楊貴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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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두넷 작성일19-04-25 13:01본문
중국 사대미녀와 그 별칭 – 수화羞花 양귀비楊貴妃
사대미녀의 마지막은 양귀비다. 어릴 적 이름은 ‘옥환玉環’이고 ‘양태진楊太眞’이란 도교식 별칭도 있다.
716년에 태어나 756년 41세로 피살당했다.
그녀는 당 현종玄宗 이융기李隆基의 황후로 갖은 부귀영화를 누렸다. 현종의 귀비로 책봉되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흔히 ‘양귀비’라 부른다. 아버지가 일찍 죽어 숙부 집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음률에 눈을 떠서 그 가무 방면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당초 양옥환은 현종의 아들 수왕壽王 이모李瑁의 비로 뽑혀 궁중에 들어왔다. 그러니까 현종의 며느리였다. 그런데 그녀의 미모에 반한 현종이 그녀를 차지할 요량으로 일단 도관道觀의 여도사로 보냈다.(여도사 노릇을 할 때 호를 태진이라 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현종은 그녀를 불러 귀비에 책봉했다. 그 해가 천보 4년인 745년이다.(이 때 그녀의 나이 서른이었고, 현종은 60을 넘겼다.) 이후 그녀의 세 자매도 각각 한부인, 괵부인, 진부인으로 책봉되었다. 사촌 오라비 양국충楊國忠도 조정에 참여하여 재상까지 승진하면서 조정 대권을 독차지함으로써 양씨 집안이 천하에 위세를 떨쳤다. 이들은 현종을 깊디깊은 향락 속으로 빠뜨렸다.
천보 14년인 755년, 양국충과 갈등 관계에 있던 안록산安祿山이 군왕을 어지럽히는 측근(양국충)을 청산해야 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쿠데타를 일으켰다. 현종은 서쪽 사천(촉 지방)으로 도망쳤다. 일행이 마외역馬嵬驛[지금의 산시성(陝西省, 섬서성) 씽핑(興平, 흥평) 서쪽으로 흔히 마웨이포(馬嵬坡, 마외파)로 알려져 있는 곳]에 이르렀을 때 병사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양국충을 죽였다. 금군의 장수 진현례陳玄禮 등은 양귀비를 죽이지 않으면 황제의 어가를 호위하지 않겠노라 협박했다. 현종은 하는 수 없이 불당에서 그녀를 목 졸라 죽이게 했다.
양귀비는 세계적인 제국으로 최고 전성기를 누리던 당의 몰락을 부채질한 장본인으로 대대로 손가락질을 받아왔다. 동시에 현종 이융기와 애틋한 로맨스를 연출한 주인공으로 수많은 문학 작품에 오르내렸다. 백거이白居易의 장편 서사시 <장한가長恨歌>는 그 중에서도 대표작이다. 그러나 그녀의 행적은 현종 시대를 전후로 제국 전반에 짙게 드리워져 있던 어두운 그림자의 한 자락에 닿아 있을 뿐이다.
거대한 제국을 원활하게 움직일 통치 시스템이 삐걱거리고 시작했고, 여기에 재정 상황도 악화일로를 걷고 있던 상황에서 안록산이나 양국충의 발호는 필연적이었다.
여기에 풍요로움 속에 살던 예술가적 기질이 농후했던 현종과 양옥환의 결합 또한 예견된 일이었는지 모른다. 마외역에 남아 있는 그녀의 무덤을 비롯하여 몇 군데 관련 유적이 있다.
훗날 양귀비에게 붙은 별칭으로는 ‘수화’가 가장 유명하다. 그녀가 등장하면 활짝 피어 있던 꽃들이 그녀의 미모에 모두 꽃잎을 오므리고 부끄러워했다고 해서 붙여진 별칭이다. ‘꽃들도 부끄럽게 만든다’는 뜻이리라. <장한가> 중 안록산의 난으로 몽진하던 현종에 의해 피살되는 장면을 묘사한 한 대목을 소개해둔다.
깊고 깊은 구중궁궐에도 난리 바람 불어 닥치니
황제와 병사들 모두 서남으로 줄행랑쳤네.
높다란 천자의 깃발 힘없이 나부낄 제
가던 발걸음 얼어붙은 듯 멈추고 말았네.
여섯 부대 호위병들 떠나려 아니하니
그들 요구 받아들이지 않고 어이 할까?
절세미인, 마외역에서 끝내 죽고 말았네.
(<장한가> 중 일부)
사마천학회 이사장 김영수 저서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