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백산(백두산)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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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02-26 14:06본문
장백산(백두산) 여행기
재부 군성산악회가 주최한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 등정 여행에 31명의 동문들과 가족들이 참가하여 여행기간동안 여러가지 고생도 많았지만 쾌청한 기상하에 백두산과 천지를 관경하고 장백폭포 지하산림과 용정 윤동주시인의 시비를 구경하는 행운을 맛보고 그 가운데 동문들간에 더 뜨거운 정들을 나누며 아름다운 여행을 하게됨을 정말 기쁘고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이 벅찬 감격을 이 여행기에 담아 두려고 이 글을 쓴다.
1. 출 발
2000.8.4.아침 10시20분에 약속된 김해공항 국제선 약국앞에 집결하여 모두 들뜬 기분으로 함께 여행에 참가한 동문 일행간에 따뜻한 인사를 나누고 출국을 위한 절차를 밟는 중 주관 여행사인 동방여행사 이과장으로부터 12시 20분에 출발한다던 중국 민항이 도착지인 장춘의 기상악화로 부산도착이 늦어져 오후 5시경에야 출발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번 여행이 처음부터 차질이 생겨 모두 기분이 좀 언짢았다. 기내식으로 점심을 하려던 것이 여행사의 부담으로 공항근처 한정식집으로 가 점심에 곁들여 소주 몆 잔이 오고 가는 가운데 기분이 좀 풀어졌다. 이어 공항으로 와 군성회 박국홍 회장의 제의로 공항식당에서 이재륜 등산대장 권헌대 김지현 지창준 남상숭 김종명 동문들과 함께 맥주를 마시면서 지루함을 달랬다.
2. 장춘을 거쳐 연길로
오후 3시경 출국수속을 다 밟고 5시에 장춘행 비행기에 올라 중국 승무원들의 중국말 인사에 드디어 백두산 여행이 시작되는구나 생각하니 새삼 흥분이 되었다. 비행기 안에서 가까이 자리한 곽석태 선배님이 내 옆에 앉은 이응학 선배님에게 무슨 인쇄물을 건네주는 것을 받아보니 우리의 여행 목적지인 백두산 연길 용정 도문 등지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수록한 것이 아닌가. 새삼 곽선배님의 용의주도한 멋에 홀딱 반해버렸다. 1시간 20분의 비행후 길림성 수도이며 중국의 7대 도시인 장춘에 도착하니 이미 어둑어둑 해졌다. 배행기를 내리니 여행사 이과장이 이곳과 한국의 시차가 1시간 늦어지니 시계를 1시간 늦추어 놓으란다.
연길행 비행기도 언제 뜰런지 모른다는 얘기를 듣고 모두 낙심하고 있던 중 얼마후 연길행 비행기에 오르라는 희소식에 모두들 환성을 질렀다. 연길에 도착하여 현지 가이드인 이군의 안내로 동포가 경영하는 한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였다. 제법 푸짐한 반찬에다 박회장이 적극 추천하는 중국산 이과두주를 주문하여 몇순배 들이키니 기분이 꽤나 거나해졌다. 그러나 이날 최종 목적지인 백두산밑 대우호텔까지 장장 6시간 그나마 반 정도는 비포장 도로를 달려야 한다는 말을 듣고 지루한 생각에 기가 막혔다.
3. 백두산 밑으로
차에 올라 달리면서 먼저 가이드인 이군의 자기소개며 조선족 자치주인 연변 특히 주 수도인 연길 동포들의 사는 형편 탈북자 및 북한 동포들의 비참한 실상 등 여러가지 얘기를 듣고 평소 궁금했던 여러가지 질문들이 나오고 가이드의 성실한 답변을 듣는 등으로 한두시간은 그런대로 흘렀다. 지금 생각하니 이군의 이름이나 알아둘 걸 하고 후회가 된다. 이군은 나이가 28살이며 북경대학 민족대학에서 인종학을 전공하고 졸업후 북한 김일성 종합대학에서 3년간 민족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중국에서 상위 직장인 관광국 소속 관광 안내원으로 종사하고 있으며 박사학위도 받았단다. 당신의 국적은 중국이고 뿌리는 조선 족이고 북한에서 유학까지 하였는데 당신의 조국은 어디냐 라는 어느 동문의 질문에 "나의 조국은 어디까지나 내가 태어나고 나를 현재까지 키워준 중국이고 나의 민족은 조선족" 이란 대답이 매우 감명깊었다. 그동안 준비하여 버스 뒷좌석에 실어둔 소주를 꺼내어 돌려 마시며 떠들고 얘기하고 하는 것도 2시간 정도 지나니 모두 피곤에 지쳐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새로 소주 한병을 꺼내어 다 마신 탓인지 비포장 도로라 흔들리는 가운데서도 중간중간 잠이 들었다. 8 .5 .새벽 3시경에야 1950m 고지인 대우호텔에 들었다.
4. 드디어 백두산 정상(천지)에 서다
여행기간 동안 함께 짝이된 권헌대 형과 3시간 정도 잠을 자고 6시경 모닝콜에 잠이 깨어 베란다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상쾌한 산바람과 함께 사진에서만 보던 장백폭포의 장엄한 그림이 자작나무숲 너머 한눈에 보이지 않는가. 급히 카메라를 꺼내어 한 컽 찍고 간단히 샤워를 한 후 1층으로 내려와 모두 들뜬 기분으로 아침식사를 한 후 곧 백두산 정상으로 향하는 짚차를 타기 위하여 주차장으로 이동하였다. 때마침 천만다행으로 일기가 쾌청하여 천지를 마음껏 볼 수 있다는 희망에 모두 가슴부풀어 있었다.
그곳에 가니 수많은 여행객들이 천지행 짚차를 타기 위하여 무리무리 대기하고 있었고 한편 정상에 갔다오는 짚차들이 수많은 사람들을 토해내고 있었다. 대기하는 동안 근처 간이매점에서 이응학 선배님이 사 주는 커피 한잔을 마시니 가히 꿀맛이었다. 종이컵 한잔에 한국 돈 천원이란다. 백두산에서 씨뿌려 캐내었다는 장뇌삼 한 뿌리를 1만원에 사라는가 하면 옥목걸이 천지 전경사진 등 온갖 물건을 팔고 있었다.
한 짚차에 7사람씩 그래서 나는 처와 이응학 선배 이영화씨 이재륜 권헌대 김종명 동문들과 한팀이 되어 천지행 차에 드디어 승차 하였다. 정상으로 가는 동안 좌우로 빽빽히 들어선 전나무 자작나무들의 원시림이 올라가면서 그 키가 점점 작아지더니 어느새 산림이 끊기고 이어 나무 한 그루 없는 웅장한 산들이 파아란 초원으로 뒤덮이고 군데군데 이름모를 야생화들이 군락을 이뤄 피어있지 않은가. 밑을 내려다보니 장엄한 백두의 뻗어내린 자락들이 질펀한 만주벌판이 구름속에 아득히 펼쳐져 보인다. 20여분 동안 이렇게 들뜬 기분으로 오르니 드디어 정상인 듯 싶은 능선이 보이고 수많은 사람들이 능선에 늘어서 있는 모습도, 그 위 파아란 하늘에 떠있는 하얀 뭉게구름도 장관이었다. 이 광경을 그대로 놓칠수는 없지 않은가. 한컽 사진으로 남기고 곧 5분정도 거리의 정상을 향해 잽싸게 걸어 올랐다.
정상에 오르니 이 때가 정확히 2000년 8월 5일 12시 30분. 아....발아래 한 눈에 펼쳐져 내려다 보이는 천지와 그를 병풍처럼 둘러싼 열여섯개의 크고 작은 연봉들이 태고의 신비를 지닌채 억겁의 세월을 지내오면서 말없이 이 조국의 역사를 지켜온 우리 민족의 영원한 성산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조수처럼 밀려오는 감격과 환희를 그 어찌 주체하랴. 아예 말문을 닫아 버리자. 그러나 이 벅찬 감격의 한편 옛날 고구려 발해의, 그래서 우리의 땅이었던 저 광활한 만주벌판을 잃어버리고 이 백두산마저 나뉘어 천지연봉 16개중 7봉은 중국, 6봉만 북한, 나머지 3봉은 북한과 중국의 공동 소유이고 천지는 3분의1은 중국 3분의2만 북한의 소유라는 엄연한 사실앞에 끌어오르는 통한을 금치 못하였다. 그뿐이랴. 민족의 영산인 이곳을 조국땅으로 밟아오르지 못하고 이렇게 남의 나라인 중국으로 돌아 올라야하는 분단의 비극에 또다시 가슴아픔으로 눈물흘려야 하지 않은가. 푸르다 못해 자주빛깔로 조용히 펼쳐진 호수위에 선명히 드리워진 파아란 하늘과 흰 뭉게구름, 갈색 바위와 푸른 연봉들의 그림들이 강렬한 충격과 감동으로 가슴에 다가왔다. 그리고 이곳 천지의 기상상태는 시시각각으로 변화 무쌍하여 항상 짙은 안개가 끼거나 비가 쏟아져 오늘처럼 청명한 날씨속에 천지를 볼 수 있다는 게 천운이란 말을 익히 들어왔고 가이드 이군의 말 역시 그렇단다.
그렇다면 이번 등정한 재부군성 동문회는 참으로 엄청난 축복을 누리고 있지 아니한가. 이 천금같은 행운을 놓칠세라 먼저 일행이 모두한 사진을 찍고난 후 각자 사진들 찍기에 바삐 움직이는구나. 특히 지창준 동문은 비디오로 이곳저곳을 샅샅이 촬영하고 있지 않은가. 나도 비디오를 사가지고 왔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후회한들 무었하리. 그런데 보통 카메라로 찍으면 광각이 아니라서 백두산 배경이 한꺼번에 나오지 않는단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처와 이영화씨와 함께 현지 사진사에게 50불을 주고 24컽 사진을 부탁하여 찍고 필림을 받은 후 나의 카메라로 닥치는대로 셔터를 눌러댔다. 그리고 이곳의 정경을 더오래 많이 간직하려는 욕심에 춘하추동 사계절로 이곳저곳을 여러 각도에서 찍은 필림을 판다기에 처가 극구 만류하였지만 34컽에 10만원을 주고 샀다. (여행을 끝내고 집으로 온 즉시 현상을 해보았더니 사계절의 것이 아닐 뿐더러 똑같은 사진들이 서너장씩 되질않나 군데군데 긁혀있어 쓸만한 사진은 한 장도 없었다.)
이곳에 머무를 수 있는 30분의 허용된 시간이 순식간에 흐르고 곧 우리는 서둘러 하산해야 했다. 내려오면서 보니 바로 밑까지 짙은 안개가 뿌옇게 뒤덮여 올라오고 있지 않은가. 단 한번의 등정으로 천지를 마음껏 보고간다는 흥분에 들떠 뒷주머니에 늘 넣고 다니던 소주를 꺼내어 한잔씩 돌려 마시니 그 술맛 또한 기가 차구나. 주차장까지 내려와 곧 장백폭포로 향하였다.
5. 장백 폭포
약30여분 거리에 있는 장백폭포를 향하여 이동하는 버스안에서 가이드 이군의 말이 여행기간 동안 누가 우리들에게 백두산에 올라 천지를 보았느냐고 물으면 안개로 발 끝도 보지 못하고 내려왔노라고 이야기하라 하여 모두 한바탕 웃었다. 주차장에 내려 장백폭포를 향해 올라가는 도중 대우와 중국 합작으로 지은 건물에 태극기와 중국기가 나란히 나부끼고 있어 가슴 뿌듯하여 이응학 선배님과 서로 한 컽씩 사진을 찍고 조금 더 올라가니 TV에서만 보던 노천온천이 있어 잠시 머물러 뜨거운 김이 나는 노천물에 계란을 넣어 곧 삶겨져 나오는 신기한 모습을 보고 곧 바로 걸음을 재촉하면서 군데군데 숲과 함께 어우러져 피어있는 야생화와 자작나무 바위산들의 장엄함에 넋을 뺐겨 사진을 찍다보니 일행들을 놓쳐 빨리 달려 오르니 아득히 높은 양쪽 바위산 사이로 우렁차게 쏟아지는 장백폭포의 장엄한 위용이 눈앞에 다가와 보인다.
천지에서 흐르는 물이 이곳에 이르러 69미터나 되는 엄청난 낙폭으로 쏟아져 내려 그 소리와 수량이 간담을 소연케 한다. 이 장관을 어찌 그냥 지나쳐 가리. 떨어진 폭포수가 냇물되어 흐르는 물살에 손과 낯을 씻고 폭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이젠 배가 고파왔다. 내려오는 길에 다시 들른 노천온천에서 이번 여행의 총무란 중책을 맡은 21회 김진식 동문의 부인이 삶은 계란을 꾸러미로 사와 다음 목적지인 지하산림까지 이동하는 버스안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였다.
6.비경의 지하산림
한20분 정도를 달려 지하 원시림 답사에 나섰다. 이곳은 원래의 여행 코스에 없던 곳인데 가이드 이군의 설명을 듣고 답사에 나선 것이다. 처음에는 막연히 여늬 산림처럼 그냥 울창한 나무숲이려니 생각하였는데 한참 가다보니 울창한 아름드리 나무 숲속에 낙옆이 썩어 검게 난 좁은길 군데군데 길을 막거나 길옆에 수령을 다해 쓰러져 썩거나 이끼낀 통나무들이 영겁의 세월을 침묵으로 말해 주는 듯하여 숙연해지는 마음들이었다.
총 거리가 1.5 킬로라고 쓰여져 있어 피곤하거나 몸이 불편하면 그 곳에 그대로 쉬었다 돌아오면 된다고 하여 중간에 쉴까도 생각했으나 끝까지 구경하지 않으면 천추에 한이 될까하여 끝까지 가보리라 작정하고 가는데 갑자기 물흐르는 소리가 들려 급히 가보니 밀림속에 산골 개울물같이 맑은 여울이 흐르고 그 양쪽엔 자갈들이 깔려있어 별천지에 온 느낌이었다.생각 같아선 발가벗고 목욕하고 싶은 생각이 충동질하였으나 뒤에 오는 여자 일행들의 눈이 무서워 참고 가는데 난데없이 우렁찬 폭포소리가 들려 서둘러 다가가보니 이게 왠 장관인가.
양쪽에 온통 푸른 이끼로 뒤덮인 가운데로 방금 본 그 개울물이 10여미터의 낙폭으로 폭포되어 흘러내리면서 좁디좁은 협곡을 이루어 황홀한 광경을 연출하고 있지 않은가. 다가가 밑을 내려다 보니 떨어 질까봐 소름이 끼칠 정도로 아찔하다.그 옆 철조망이 쳐져 있는 길을 따라 조심해 가면서 군데군데 내려다 보니 깊히 꺼진 계곡에 이끼낀 바위가 형형색색의 모양을 이루고 고목들이 쓰러져 엉키고 동굴이 되어 뚫린 밑으로 암간수가 흘러내리는 이 비경을 보니 황홀 바로 그겄이었다. 이 비경을 빠트릴세라 지창준 동문은 열심히 비디오를 돌려대고 있었다.
일행들이 보이지 않아 발 걸음을 재촉하니 마지막 지점에 모두 모여 경대사대부속중고등학교라고 빨간 바탕에 노오랗게 쓴 현수막을 앞에 들고 막 기념사진을 찍으려고 하는 참이었다. 소리쳐 기다리라고 한후 달려가 가까스로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이어 이응학 선배님이 가리켜 주는대로 조금 더 나아가 보니 수십미터나 푹 꺼진 단애 밑으로 광활한 지하림이 펼쳐저 있지 않은가. 아-이 벅찬 감격..
천지를 보고 느꼈던 감격과는 색다른 감동을 받았다. 이런 순간에 술 한잔 생각이 어찌 없겠는가. 누군가 술을 찾으니 아뿔사 술을 가져온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내가 허허실실로 뒷주머니를 만지니 아 그곳에 버릇처럼 넣어둔 소주 한 병이 있지 않겠나. 이응학 곽석태 선배님들로부터 시작하여 한 잔씩 돌아가며 마시니 이 술맛이 어떻겠는가.
7. 다시 연길로
오던 길을 다시 돌아 기다리는 버스에 오르니 모두들 시장기가 드는 모양이다. 여기서 한 시간 정도 가면 가이드가 연락하여 소 바베큐를 준비해둔 식당이 있단다. 오늘 하루 지금까지의 여행은 정말 행복 했다. 그 즐거운 마음에 이어 내가 버스 뒤에 아직도 수북이 남아있는 소주병을 꺼내어 앞 좌석으로부터 술을 따라 돌리기 시작하였다. 동문인 박무서씨를 빼놓고는 술을 잘도 마셔댔다. 예정된 식당에 도착하니 중간에 연락이 잘못되었는지 바베큐는 물론 아니고 숯불갈비를 준비중인데 그나마도 한시간 정도 기다려야 한단다. 벌써 시간은 오후 3시경이라 배고픔은 물론이지만 연길까지의 여정이 4시간 이상 달려야 한다니 기다릴 것이 아니라 차라리 바로 떠나서 중간 간이식당에 들러 미리 준비해간 즉석 라면으로 요기를 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출발 하였다. 차에 오르자 일행중 막내인 24회 남상승 동문이 마이크를 잡고 우리로 하여금 점심까지 굶게한 책임은 전적으로 주관 여행사인 동방이 책임져야한다고, 이것은 그대로 넘길 수 없다고 모두를 대변하여 정곡을 찌르는 발언을 하자 우리는 쾌재를 불렀고 동방의 이과장은 이 점에 대해 깊이 사과하고 연길에서의 저녁은 동방에서 성의를 다해 접대하겠노라고 말하여 수습이 되었다. 이어 남동문은 소주병을, 같은 막내인 윤상호 동문은 안주를 각각 들고 일행들에게 돌아가며 술을 권하여 분위기가 다시 잔치기분으로 바뀌었다. 나는 맨 뒷좌석에 이응학 선배님과 함께 앉아 여러가지 인생담론을 많이 나누었다. 참으로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게 하였다. 2시간 정도 달려 어느 조그만 간이 휴계소에 들러 옥수수 수박등을 사먹고 끓는 물을 얻어 즉석라면을 만들어 간단한 요기를 하면서 이과두주를 사서 마시니 이미 날이 어두어지기 시작하였다. 라면을 먹으면서 준비하여간 김치를 먹는 것을 본 한 중국청년이 김치통을 탐내는 눈치라 먹든 김치를 모두어 주었더니 이과두주 작은병 하나를 주어 받았다. 다시 차에 올라 3시간 정도 달려 연길에 도착하였다. 연길까지 오는 동안 차창밖으로 드문드문 본 중국의 농촌 마을들은 70년대 우리 농촌마을을 보는 것같았고 가도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들녘에는 옥수수와 벼들이 탐스럽게 자라고 있었다. 이 모든 농사를 인력으로 한다면서 기계화 영농을 하는 한국이 부럽기도 하다는 가이드의 말이었다. 연길 중국식당에 들러 여러가지 중국식 요리에 50도가 넘는 중국 술을 마시니 오늘 하루의 모든 피로가 가시는 듯하였다. 연길에도 대우호텔이 있어 그곳에 투숙하니 밤 11시경이었다. 이날은 이응학 선배님 권헌대 형 김종명 동문 넷이서 트인 방을 쓰게 되었다. 이곳엔 룸 냉장고에 술도 있어 와인 한병을 꺼내 나누어 마시고 까운을 입고 사진도 같이 찍었다.
8. 용정 그리고 시인 윤동주
여행 제3일째. 우리는 오늘 1919.3.13 간도지방 독립만세운동의 진원지였고 저항시인 윤동주가 태어나 중학교까지 다녔으며 그의 시비가 있고 그 묘가 있는 용정으로 간다. 아침 9시경 연길에서 약 한시간 거리에 있는 용정으로 달려 윤동주의 시비가 건립되어 있는 대성중학교로 갔다. 정문 바로 맞은편에 윤동주 기념관이 자리하고 바로 그 앞에 윤동주의 시비가 건립되어 있었다. 그 시비에 그의 대표작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가 각인되어 해방 6 개월전 29살의 꽃다운 나이에 일본에서 옥사하여 시체되어 돌아와 용정에 묻힌 그의 피맺힌 절규를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그의 시 〈별헤는 밤〉은 어쩌면 해방을 보지 못하고 간 그의 죽음을 노래한 것같아 여기 다시 읊어 본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차 있읍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하나에 추억과, 별하나에 사랑과, 별하나에 쓸쓸함과, 별하나에 동경과, 별하나에 시와, 별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짬 라이너마리아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읍니다. 별이 아슬히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나린 언덕 우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따는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우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윤동주의 기념관에는 1917년 12월30일 나서 1945년 2월16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할 때까지의 일대기를 비롯해 그의 유고와 그가 남긴 사진들을 전시하고 있다. 문익환 김재준 목사와 중학교때 찍은 사진들도 있었다.
9. 다시 연길로
우리들은 애틋한 심정으로 그곳을 떠나 연길로 돌아 오면서 중간에 정부에서 직영한다는 곰 사육장에 들렀다. 반달곰을 비롯해 수백마리의 곰을 사육하면서 다자란 곰의 쓸개즙을 기술적인 방법으로 추출하여 가루로 만들어 조그만 병에 넣어 약용으로 판다고 한다. 쓸개즙을 추출한 곰은 2개월 정도면 다시 원상회복 된다고 한다. 거기서 시음용으로 주는 웅담주를 서너잔 마시고 다른 일행들도 한잔씩 마시는 것 같았다. 돌아오는길에 선물로 받은 웅담주 한병은 그날 저녁에 여자분 일행들이 마시도록 하겠다고 약속을 하였는데 이 웅담주로 인해 그날 저녁식사때 소동이 벌어지는 진풍경도 있었다. 연길시내로 들어와 동북아호텔에 있는 북한물품 전시장엘 들렀다.
북한동포를 돕기위한 기독교단체와 연변주정부가 협력하여 2개월전 개관하였다는데 세계적으로 유명한 북한 자수와 순전히 동의보감 처방대로 만들었다는 우황청심환을 비롯하여 여러가지 물품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판매하는 것은 우황청심환인데 판매 이익금은 북한동포들을 위하여 쓰여진다고 한다. 북한 어린이들이 먹는 사탕도 있는데 입에 넣어 한달동안 맛을 보아도 녹지 않는 사탕이란다. 북한의 생활단면을 보는 것같아 가슴이 아팠다. 그곳을 나와 오후 2시경쯤 중국 냉면집에 들러 냉면을 점심으로 먹었다. 아주 독특한 맛이었다. 연길에서의 공식 일정은 모두 끝나고 이제 장춘행 비행기 타는 일만 남았다. 여기서 연변 조선족 자치주와 그 수도인 연길에 관하여 간단히 살펴보고 가야겠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는 흑룡강성 요원성과 함께 중국 동북 3성중의 하나인 길림성의 동부에 자리잡고 러시아와는 우수리강을, 북한과는 대여섯 발자욱이면 건널 수 있는 두만강을 경계로 하고 그 면적은 남한면적의 절반에 가깝고 주민수 약218만 중 조선족이 약85만으로 중국내 55소수민족 중 교육정도와 문화수준 생활수준이 가장 높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족들의 일부는 구한말 일제 초기에 심각한 식량난 때문에 두만강을 넘어 비옥한 간도땅에 정착한 사람들이고 대부분은 1930년대에 일제에 의해 강제 이주된 사람들로서 연변주 공용어는 한국어이고 공무원 중 65퍼센트가 조선족이라 이곳에 오면 한국에 온것처럼 착각할 정도라고 한다. 연길시는 그 수도로서 인구 38만명 중 조선족이 22만명으로 이곳엔 소수민족 자치정부중 유일하게 방송국이 있어 조선족의 자랑거리란다.
10. 다시 장춘으로
연길 공항으로 이동하여 오후3시 30분에 장춘으로 출발한다는 것이 장춘공항의 기상악화로 언제 출발할는지 모른다고 한다. 공항 대합실에서 왔다갔다 하다가 의자에 앉아 잠을 청하기도 하다보니 4시30분경 갑자기 비행기에 오르라고 하여 그나마도 다행이구나 싶었다.40여분 비행후 장춘공항에 도착하여 버스를 기다리던 중 박국홍 회장이 나의 옷자락을 잡아 끌고 숲속 나무뒤로 가더니 비행기안에서 앞좌석에 탄 일행 몇이서 저녁식사때 여자분 일행에게 주기로 한 웅담주를 나누어 마시고 남은 술이라면서 술병을 꺼내어 억지로 마시게 하지 않은가.
같이 공범자가 되자는 것인지 아니면 직전회장인 나를 존경하는 충정에서 그렇게 한 것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가이드로 나온 사람은 장춘의 어느대학에서 금융 정보를 배우는 조선족 여학생으로 방학을 맞아 아르바이트로 일한단다. 원래는 장춘 국립영화 제작소를 구경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비행기 도착이 늦어 진데다 모두 피곤하여 바로 호텔로 가 샤워를 하고 저녁식사를 하자는 쪽으로 의견들이 모아져서 호텔로 직행하였다. 가는 도중 시가지 풍경은 중국의 7대 도시답게 도로도 넓고 고층건물이 즐비하고 차들도 많이 다닌다. 공원도 그리고 도시를 관통하는 강도 흐르고 있었다. 장춘의 인구는 213만이고 만주 한복판에 위치하여 1932년부터 1945년 일본 패망시까지 일제에 의하여 세워졌던 괴뢰정권인 만주국의 수도로서 황제 부의가 거하던 위황궁도 영화제작소와 함께 관광명소가 되고 있다고 한다.
자전거 전용도로에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로 오가고 있고 반라의 여성들도 활보하고 있어 개방화된 중국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저녁식사는 박국홍 회장이 특별히 조선족 경영의 식당에서 단고기 (한국의보신탕)를 접대하기로 되어있어 기대를 안고 가보니 단고기는 나오지 않고 푸짐한 요리만 계속 나오지 않는가. 나중에 알고보니 단고기는 마지막에 수육 비슷하게 나오는 것이란다. 어쨌던 여행의 마지막 날이라 이과두주 잔을 들어 여행을 아름답게 마친 것을 축하하는 건배를 하고 좋은 요리에 화끈한 이과두주를 마시니 기분이 날아 갈 것같다.
갑자기 창원 유동문의 부인이 오더니 여자분들에게 주기로 한 웅담주를 내놓으란다. 벌써 박회장을 비롯한 몇사람 동문들의 배에서 소변으로 배설되었을 웅담주를 말이다. 박회장이 나서서 비행기안에 놓아두고 그냥 내려버렸다고 변명하고 나도 공범자인지라 맞장구를 쳤으나 벌써 눈치를 채고 따지는데야 어쩌리. 박회장이 여자분들 좌석으로가 아양(?)을 떨면서 술도 권하여 겨우 수습이 되었다.이 좋은 기분에 그대로 호텔로 갈 수 없지 않은가. 내가 2차를 부담할 생각으로 노래방에 가자고 하였더니 모두 좋다고 하여 가이드의 안내를 따라 노래방으로 가는 도중에 넓디넓은 잔디 광장이 있는 곳에 하차하여 광장을 한바퀴 돌면서 휘황한 등불아래 노래부르고 무용하고 연인들끼리 자유롭게 데이트하는 모습들을 구경하면서 활달하고 자유분방한 중국민의 현주소를 보는 것같았다. 이어 가이드가 안내한 조선족 경영의 노래방으로 갔다.
한국의 노래방처럼 옛날노래를 비롯하여 최신곡까지 모두 부를 수 있도록 되어있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응학 선배님의 노래로 시작하여 모든 일행들이 모두 동심으로 돌아가 흥겹게 노래하고 춤추며 마음껏 떠들고 노니 무척도 유쾌하구나. 특히 여자분 일행들이 즐겁게 놀아주는 것을 보고 기뻤다. 이웃방을 기웃거리니 윤상호 동문이 부인과 아들 딸과 함께 호젓이 모여 노래하며 노는 것을 보니 참으로 행복해 보였고 가족화목상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끝날 때 계산할려고 보니 벌써 박회장 부인이 계산을 마쳤다고 한다. 이래서 사람은 항상 동작이 빨라야 한다니까 ?
11. 부산으로
8.7. 아침 9시20분 정시에 우리는 부산으로 가는 중국 북방항공기에 올라 그리운 부산으로 향하였다. 김해공항에 내려 공항을 나오기전 우리는 모두 함께 모여 정다운 인사를 나누고 각자 집으로 향했다. 이번 재부군성회의 백두산 등정을 기획 입안하고 회원들 한사람 한사람들에게 일일이 연락하여 참가를 독려하였을 뿐아니라 끝까지 온갖 정성을 기울여 성공적인 여행이 되도록 힘쓴 이재륜 등산대장, 뒤에서 적극 협조하고 조언을 해주신 이응학 곽석태 선배님, 박국홍 재부군성회장, 그리고 여행단 총무를 맡아 세세한 점에까지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은 김진식 동문, 그리고 만만디의 마음으로 많은 불편함을 참고 뜨거운 동문애로서 아름다운 여행을 할 수있도록 힘을 합쳐준 여러 동문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이번 여행에 참가한 동문 및 가족들의 이름을 아래 적어 둔다.
고4회 곽석태 선배님 부부, 이응학선배님
고6회 이재륜 권헌대 동문, 나와 김지현동문 부부
고9회 박국홍 유서광 박무서동문 부부, 김종명동문
고10회 성원길 지창준동문 부부
고11회 안병국동문의 부인인 이영화씨
고14회 김수태동문 부부
고22회 김진식동문 부부
고24회 남상승동문 부부, 윤상호동문 부부와 딸 아들
이렇게 31명의 동문과 가족들이 참가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