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 호위대" 어떻게 알려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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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11-01-31 08:56본문
1972년 3월 29일. 시안 교외 들판에는 아지랑이 물결 따라 봄이 잠뿍 내려앉고 있었다.
농부 한사람이 그의 밭에서 땅을 파고 있었다.
완만한 골짜기에 자리잡은 그의 밭은 이상하게도 둔덕 위에 있는 밭보다도 가뭄이 더 심하게 와서 매년 농사를 망쳤다.
가장 낮은 곳에 저수조를 만들어 가뭄에 대처하기 위해 우물을 팠던 것이다.
4m쯤 파내려 갔을 때 그 농부는 삽 끝에서 전해오는 이상한 촉감을 느꼈다.
지하 그 깊은 곳에 빈 공간이 나오며 그의 밭이 그토록 가뭄에 시달린 이유가 명쾌해졌다.
그 지하공간에서 두 눈을 부릅뜬 실물크기의 흙으로 구운 사람 형상이 나타난 것이다.
깜짝 놀란 농부는 삽을 던지고 동네로 달려 내려갔다.
마을 사람들은 동네의 흉조라고 액땜 굿을 했다.
이 심상치 않은 사건은 때마침 고향을 찾은 신화사 통신기자 린안인의 눈에 띄어 인민일보를 통해 알려져 고고학팀이 본격적으로 발굴을 시작하게 된다.
길이 230m, 너비 62m에 군사 8000여 명과 말 500필, 전차 130대의 진시황 호위부대가 열한 줄로 늘어서서 명령만 떨어지면 당장 달려나갈 듯 대기하고 있었다.
전투 대형의 병마용갱이 2200년 만에 모습을 드러내자 중국뿐 아니라 온 세계가 깜짝 놀랐다.
흙으로 구워낸 살아 움직이는 듯 생동감 넘치는 이 실물대 토용들 하나하나가 표정과 얼굴 모습이 다르다는걸 알고 온 세계는 또 한 번 놀랐다.
잠자던 지하군단을 깨운 농부, 양취안은 지금 호호백발 노인이 되어 정부에서 마련해 준 병마용 앞 기념품 가게에서 병마용 사진첩에 자신의 사인을 해주고 있다.
농부 한사람이 그의 밭에서 땅을 파고 있었다.
완만한 골짜기에 자리잡은 그의 밭은 이상하게도 둔덕 위에 있는 밭보다도 가뭄이 더 심하게 와서 매년 농사를 망쳤다.
가장 낮은 곳에 저수조를 만들어 가뭄에 대처하기 위해 우물을 팠던 것이다.
4m쯤 파내려 갔을 때 그 농부는 삽 끝에서 전해오는 이상한 촉감을 느꼈다.
지하 그 깊은 곳에 빈 공간이 나오며 그의 밭이 그토록 가뭄에 시달린 이유가 명쾌해졌다.
그 지하공간에서 두 눈을 부릅뜬 실물크기의 흙으로 구운 사람 형상이 나타난 것이다.
깜짝 놀란 농부는 삽을 던지고 동네로 달려 내려갔다.
마을 사람들은 동네의 흉조라고 액땜 굿을 했다.
이 심상치 않은 사건은 때마침 고향을 찾은 신화사 통신기자 린안인의 눈에 띄어 인민일보를 통해 알려져 고고학팀이 본격적으로 발굴을 시작하게 된다.
길이 230m, 너비 62m에 군사 8000여 명과 말 500필, 전차 130대의 진시황 호위부대가 열한 줄로 늘어서서 명령만 떨어지면 당장 달려나갈 듯 대기하고 있었다.
전투 대형의 병마용갱이 2200년 만에 모습을 드러내자 중국뿐 아니라 온 세계가 깜짝 놀랐다.
흙으로 구워낸 살아 움직이는 듯 생동감 넘치는 이 실물대 토용들 하나하나가 표정과 얼굴 모습이 다르다는걸 알고 온 세계는 또 한 번 놀랐다.
잠자던 지하군단을 깨운 농부, 양취안은 지금 호호백발 노인이 되어 정부에서 마련해 준 병마용 앞 기념품 가게에서 병마용 사진첩에 자신의 사인을 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