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 첫 가게의 동네 사점(赊店, Shedian)
페이지 정보
작성자 admin 작성일11-04-25 09:00본문
이 세상 첫 가게의 동네 사점(赊店, Shedian)은 수로와 육로의 교통요충지로써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장사를 하면서 가게도 많이 생기고 그로 인해 많은 유적들이 지금까지 남아 내려오고 있다.
반수(潘水)와 조수(趙水) 두 갈래 강물의 합수목에 위치한 사점을 남주(南駐)도로와 방조(方棗)도로가 경유해 사점은 오늘날도 명실공히 수륙교통의 요충지이다.
전하는데 의하면 수많은 영웅들이 천하를 다투던 서한(西漢)말엽에 서한의 황실 유수회(劉秀懷)가 한나라를 되찾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가 크게 패하고 도주하는 중에 이 곳에 이르렀다고 한다.
패잔병을 이끈 유수회가 사점에 이르러 술집을 하나 발견하고 모두들 그 가게에서 취하도록 술을 마시고나서 기백을 되찾았다. 기쁜 마음의 유수회가 가게문을 나와 보니 가게앞 주기에 유(劉)자가 적혀 있었다.
마침 자신과 같은 성씨가 적혀 있는 것을 본 유수회는 크게 기뻐하며 그 주기를 자신의 군기로 삼고 용감하게 싸워 끝내 한나라를 되찾고 황제로 되었다.
황제로 된 유수회는 유씨가게의 공과 유씨가게의 주기를 외상으로 빌려온 것을 생각하고 그 가게에 사기점(赊旗店)이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그 가게의 술은 사점노주(赊店老酒), 그 동네는 사점진(赊店鎭)이라 했다.
사점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엽차로드의 중계역이었고 그로 인해 요금을 받고 물건을 운송해주던 고대의 물류업체격인 표국(镖局)이 한 때 이 곳에서 이름을 날렸다.
중국 10대 표국의 하나이며 화중(華中)지역 유일의 표국인 광성표국(廣盛镖局)이 바로 사점에 있었다. 그 뒤에 산서(山西, Shanxi)의 상인들이 최초의 은행을 만들고 사점에도 은행분원을 열면서 많은 돈을 가지고 다니면서 장사를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은행업의 개시로 표국의 업무가 적어지면서 광성표국은 1830년에 문을 닫게 되었다. 오늘날 광성표국이 복원되어 바람에 날리는 표기(镖旗)와 웅장한 건물, 큰 뜰이 관광명소로 부상했다.
오늘날 광성표국에는 손님을 맞이하던 거실과 가격을 상담하고 물건을 받던 방, 물건을 보관하던 창고, 물건을 운송하는 표사(镖師)들의 숙소, 표사들이 무예를 연마하던 곳 등이 원상복귀되어 표국의 역사를 보여준다.
사점중앙에 위치한 사기산섬회관(社旗山陝會館)은 1756년에 건설을 시작해 1892년에 공사를 마친 건물이다. 136년에 걸쳐 건설한 이 건물은 그 때 당시 이 곳에 있던 산서와 섬서(陝西, Shanxi)의 상인들이 돈을 모아 지은 회관이다.
관우를 모셨다고 해서 일명 관공사(關公祠), 혹은 산섬묘(山陝廟)로도 불리우는 산섬회관은 사당과 회관건물의 풍격을 한 몸에 모았다. 앞부분이 좁고 뒷부분이 상대적으로 넓은 건물군락은 앞쪽뜰과 가운데 뜰, 뒤뜰 등 세부분으로 나뉜다.
세 뜰을 관통하는 중심선상에는 유리조벽(照壁)과 현감루(懸鑒樓), 석패방(石牌坊), 대배전(大拜殿), 춘추루(春秋樓) 등 건물이 줄지어 있고 목기헌(木旗軒)과 문, 종루, 고루, 복도, 약왕전(藥王殿), 마왕전(馬王殿), 도방원(道坊院) 등이 동서 양쪽에 조화롭게 위치해 있다.
궁궐과 절, 상업회관, 일반가옥, 정원 등 다양한 건축기법을 한 몸에 모은 산섬회관은 또한 목각, 석각, 벽돌조각, 유리, 벽화, 용등(龍燈), 자수품 등 다양한 공예품을 집대성하기도 했다.
세 겹의 지붕을 떠인 현감루는 높이가 24m에 달한다. 남쪽으로는 문이고 북쪽으로는 무대건물로 사용된다. 한 건물이 두 가지 용도로 사용되는 점이 바로 현감루의 특징이다.
무대위에 날아갈듯한 처마를 조성함으로써 건물이 당장이라도 하늘로 날아올라갈것 같고 건물의 구석구석에 정교한 조각이 화려함의 극치를 이룬다. 또한 무대 건물의 양쪽에 오픈식의 종루와 고루가 기립해 막힌듯한 다른 고건물과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무대건물과 종루, 고루 사이에 다양한 모양의 소품들이 조화를 이루면서 세 건물은 서로 연결된 듯, 서로 떨어진 듯 미묘하게 완벽한 예술의 통일체를 이룬다. 그로 인해 사점 산섬회관의 현감루는 중국 최고의 고대 무대건물이라는 높은 평가를 받는다.
산섬회관의 서북쪽에 위치한 도방원은 회관의 도사들이 주거하는 곳과 유지들을 접대하던 곳이다. 남쪽의 문루(門樓)에 있고 그 뒤에 정자가 있으며 양쪽에 별채와 거실이 딸려 있다.
높낮이가 보기좋게 자리잡은 아담하고 우아한 도방원의 건물은 보기만 해도 친절하게 느껴진다. 중국 북방의 사합원(四合院)건물과 남방의 정원건축기법을 두루 갖춘 도방원은 회관과 관가간의 얽히고 얽힌 복잡한 관계를 보여준다.
이 회관에서 또 한 볼거리는 특이한 공법으로 조각한 유리조벽이다. 유리를 구워 길한 식물과 동물을 별도로 만들고 나서 그 유리들을 무어서 복 복(福)자와 목숨 수(壽)자를 형성했다.
각자 상대적으로 독립된 의미도 가지고 있고 전반적으로 깊은 함의도 나타내는 이 조벽은 원활한 흐름과 화려한 모양으로 사람들에게 미적 감수를 안겨주면서 "중국 최고의 건축 조벽"으로 평가된다.
산섬회관에는 청(淸)나라때의 자수품 40여점이 소장되어 있다. 그 중 5점은 중국 국가문화재국으로부터 국보 1급 문화재로 선정되었고 스위스와 덴마크 등 나라의 해외전시에도 참여했다.
그밖에 산섬회관에는 관제묘임을 보여주는 장대가 쇠로 만들어져 있다. 이 쇠장대는 중국의 현존 고건물 중 최고를 자랑한다. 청나라의 자희태후(慈禧太後)가 친필로 써준 용(龍)자와 호(虎)자, 상업윤리비석도 이 곳에만 있다.
산섬회관의 맞은켠에는 남북자기가(瓷器街)가 위치해 있다. 310m 길이의 이 거리는 이 지역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보전이 가장 잘 된 청조 거리이다. 중국 각지의 도자기를 경영하는 이 거리에는 하나같이 1960년대의 이색적인 간판이 걸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