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족의 첫 동네 영능(永陵, Yong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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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dmin 작성일11-04-25 09:13본문
960만 제곱 킬로미터에 달하는 넓은 중국의 땅위에는 아름다운 명소들이 수도 없이 많다. 내외에 이름난 관광지나 관광도시는 물론이고 산과 들과 물가에 산재해 있는 옛 동네 마찬가지로 비경이다.
만족의 첫 동네 영능(永陵, Yongling)은 청(淸)조의 발상지이고 만족의 고향이며 만족이 중국을 통일하기에 앞서 만리장성의 동쪽 끝인 산해관(山海關)의 서쪽 관서(關西)에 세운 세 능 중 첫번째이다.
만족의 첫 동네 영능(永陵, Yongling)은 청(淸)조의 발상지이고 만족의 고향이며 만족이 중국을 통일하기에 앞서 만리장성의 동쪽 끝인 산해관(山海關)의 서쪽 관서(關西)에 세운 세 능 중 첫번째이다.
중국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가장 완정한 체계를 보존한 제왕의 묘지 영능은 청조를 세운 만족의 창업사를 읽고 세월의 풍상고초를 느낄수 있는 동네이다.
청태조(淸太祖)인 누르하치의 원조할아버지로부터 시작해 증조 할아버지, 조부, 부친, 백부, 숙부에 이르기까지 청조의 거의 모든 조상들이 묻혀 있는 영능은 청조의 조상무덤군이라 할수 있다.
명(明)조때의 1598년에 지은 영능은 원래 이름을 경능(京陵)이라 했다가 청조때의 1659년에 이름을 영능으로 바꾸었다. 중국 고대 건물의 전통과 만족의 예술풍격을 보여주는 영능은 주변에 담과 전원(前院), 방성(方城), 보성(寶城) 등을 거느리고 있다.
청태조(淸太祖)인 누르하치의 원조할아버지로부터 시작해 증조 할아버지, 조부, 부친, 백부, 숙부에 이르기까지 청조의 거의 모든 조상들이 묻혀 있는 영능은 청조의 조상무덤군이라 할수 있다.
명(明)조때의 1598년에 지은 영능은 원래 이름을 경능(京陵)이라 했다가 청조때의 1659년에 이름을 영능으로 바꾸었다. 중국 고대 건물의 전통과 만족의 예술풍격을 보여주는 영능은 주변에 담과 전원(前院), 방성(方城), 보성(寶城) 등을 거느리고 있다.
영능의 남쪽에 위치한 전원은 중앙에 붉은 문을 두고 방 세칸을 가진, 노오란 유리기와를 떠인 건물이다. 뜰에는 청조를 세운 만족 네 황제의 공적을 기린 비석 네 개가 각자의 정자안에 있다.
가문을 일으켜 국가를 세웠다는 승가개국(承家開國) 등 송가가 만족어와 몽골어, 한문 세 가지 언어로 비문으로 새겨져 있고 비석 정자의 주변에는 다양한 건물들이 조화를 이룬다.
가문을 일으켜 국가를 세웠다는 승가개국(承家開國) 등 송가가 만족어와 몽골어, 한문 세 가지 언어로 비문으로 새겨져 있고 비석 정자의 주변에는 다양한 건물들이 조화를 이룬다.
비석의 북쪽에 네모난 성 방성이 있다. 남쪽 성의 중앙에 계운문(啓云門)이 있고 문틀에는 구슬을 가지고 노는 용이 새겨져 있으며 양쪽의 기둥에도 노오란 용들이 새겨져 있다.
계운문의 뒤에는 바로 계운전이 솟아 있다. 건물의 대들보에는 여덜마리의용이 보석을 가지고 노는 조각과 태양과 달, 다야한 짐승 등 조각이 새겨져 있다.
건물앞에는 가운데 어로(御路)를 중심으로 통로 세 개가 나 있고 건물안에는 난각(暖閣)과 보좌, 위패, 공물 등이 진열되어 있으며 계운전의 동쪽과 서쪽에는 각기 별채가 딸려 있다.
계운문의 뒤에는 바로 계운전이 솟아 있다. 건물의 대들보에는 여덜마리의용이 보석을 가지고 노는 조각과 태양과 달, 다야한 짐승 등 조각이 새겨져 있다.
건물앞에는 가운데 어로(御路)를 중심으로 통로 세 개가 나 있고 건물안에는 난각(暖閣)과 보좌, 위패, 공물 등이 진열되어 있으며 계운전의 동쪽과 서쪽에는 각기 별채가 딸려 있다.
반달모양의 성 보성은 계운전의 뒷쪽에 위치해 있다. 흙으로 쌓은 봉분이 봉긋한 보성의 첫번째 층에는 누르하치의 두 숙부가 오른쪽과 왼쪽에 각기묻혀 있다. 보성의 두번째 층에는 증조부를 가운데 두고 양쪽에 조부와 부친이 묻혀 있으며 그 주변에 6세 원조의 옷을 묻은 무덤이 위치해 있다.
평평한 산언덕이라는 의미의 허투아라(赫圖阿拉) 성은 중국역사적으로 마지막 남은 산의 도읍이며 지금까지 가장 완정하게 보존된 여진족의 도시로 정치와 경제, 군사, 문화, 외교의 허브역할을 하면서 청조의 발상지, 만족의 요람으로 인정된다.
하지만 청조의 첫 도시 허투아라는 러일전쟁에서 제정러시아군의 파괴로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지금 볼수 있는 것은 현지정부의 보수를 거친 것이다.
평평한 산언덕이라는 의미의 허투아라(赫圖阿拉) 성은 중국역사적으로 마지막 남은 산의 도읍이며 지금까지 가장 완정하게 보존된 여진족의 도시로 정치와 경제, 군사, 문화, 외교의 허브역할을 하면서 청조의 발상지, 만족의 요람으로 인정된다.
하지만 청조의 첫 도시 허투아라는 러일전쟁에서 제정러시아군의 파괴로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지금 볼수 있는 것은 현지정부의 보수를 거친 것이다.
허투아라는 흙과 돌, 나무로 쌓은 내성과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성(內城)에는 대궐과 관아, 관제묘, 만족의 가옥, 문묘, 소충사(昭忠寺), 계운서원, 성황묘 등 많은 고건물과 문화유적들이 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명소는 오백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명(明)조때의 건국기법으로 만들어진 우물 한왕정(汗王井)이다. 이 우물은 청조의 도시급별을 보여준다.
그 중 가장 유명한 명소는 오백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명(明)조때의 건국기법으로 만들어진 우물 한왕정(汗王井)이다. 이 우물은 청조의 도시급별을 보여준다.
외성(外城)에는 부마관저와 갑옷 제조실, 활제조실, 창고 등 터가 있다. 한왕전(罕王殿)은 누르하치의 집무실이다. 1619년에 누르하치는 바로 이 곳에서 청조의 역사를 연 운명적인 사라쉬전투를 지휘했다.
만족의 옛 거리는 허투아라의 동남쪽에 위치해 있다. 과거의 시장이었던 이 곳은 현재 음식점과 여관, 쇼핑센터, 오락장소 등이 집결된 상업문화거리로 부상했다.
만족의 옛 거리는 허투아라의 동남쪽에 위치해 있다. 과거의 시장이었던 이 곳은 현재 음식점과 여관, 쇼핑센터, 오락장소 등이 집결된 상업문화거리로 부상했다.
2002년에 조성한 만족역사문화장랑은 중국 만족의 역사를 보여주는 첫 복도로써 만족의 흥성과 청조의 역사, 만족의 민속풍토 등을 전면적이고 생동하게 보여준다.
기존의 흙길이 청석길로 바뀌고 어젯날의 고목과 오늘날의 파아란 잔디가 어울려 옛동네에 새로운 분위기를 가미한 영능은 유구한 역사와 풍부한 인문유적, 짙은 만족의 민속풍토로 만족특색의 관광지로 부상했다.
기존의 흙길이 청석길로 바뀌고 어젯날의 고목과 오늘날의 파아란 잔디가 어울려 옛동네에 새로운 분위기를 가미한 영능은 유구한 역사와 풍부한 인문유적, 짙은 만족의 민속풍토로 만족특색의 관광지로 부상했다.
만족의 시골에서는 해마다 음력으로 정월과 2월이 되면 여성과 어린이들이 삼삼오오 온돌에 둘러앉아 "가라하"라는 놀이를 즐긴다. 그밖에 여름과 가을이면 영능에서는 자연산 무공해 음식을 맛볼수도 있다.
요녕(遼寧, Liaoning)성 무순(撫順, Mushun)시에 위치한 영능은 교통이 편리하다. 심양(沈陽, Shenyang)과 무순에서 신빈(新賓, Xinbin)행 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요녕(遼寧, Liaoning)성 무순(撫順, Mushun)시에 위치한 영능은 교통이 편리하다. 심양(沈陽, Shenyang)과 무순에서 신빈(新賓, Xinbin)행 버스를 이용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