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량이 많이 나는 산동네로 불리우는 노관(老館, Laoguan)
페이지 정보
작성자 admin 작성일11-05-19 08:39본문
식량이 많이 나는 산동네로 불리우는 노관(老館, Laoguan)은 해발고가 700m에 달하고 그 때문에 항상 운무가 자욱해서 작은 아미산(峨眉山)으로 불리운다.
교통중심지에 위치한 노관은 예로부터 군사적으로나 상업적으로 모두가 찾아드는 요충지이다. 육로의 교통중심에 속한 위치한 노관은 1500여년전부터 지역 소재지의 역할을 했다.
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노관에는 고대 장성 유적도 있고 1km에 달하는 옛 거리가 오늘날까지 보존되며 거리 양켠에는 특이한 모양의 가옥과 독특한 절, 웅장한 누각, 장엄한 비석 등이 자리잡고 있다.
소박하면서도 정교하고 색이 바래면서도 찬란함을 갖춘 이런 역사적 흔적들은 고건물과 사천(四川, Sichuan)지역의 파촉(巴蜀)문화를 연구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문화재이다.
오랜 세월 사람들의 발길에 치여 반들반들해진 돌계단을 따라 걸으면 사극에서나 볼수 있는 화면이 눈앞에 나타난다. 푸른 기와를 얹은 건물의 색바랜 나무문 앞에는 노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환담을 나누거나 지나가는 행인을 다정하게 바라본다.
풍구를 돌리며 쇠를 만드는 철공소의 주인내외도 행인을 보며 미소를 짓는데 검은 얼굴에서 하얀 이가 유난히 눈에 띄며 그토록 고요하고 안온함을 안겨준다.
노관에는 중국에서 보기 드문 청(淸)조의 옛 식량창고가 남아 있다. 일조시간이 긴 노관에서 나는 벼가 질이 좋아 황궁의 공물로 선정되었기 때문에 이 곳에 식량창고를 만들었던 것이다.
길이가 9m, 너비가 4m에 달하는 이 나무창고에는 200여톤의 식량을 저장할수 있다. 이 건물의 대들보에는 청조때의 글자가 아직도 남아 160여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이 창고는 설계가 아주 교묘하게 되어 있다. 사면에 기둥을 세우고 건물사이에는 이중벽을 설치했으며 기둥위에 대들보로 육교를 만들어 사람들은 천정의 육교를 통해 편하게 창고를 오갈수 있다.
그리고 창고마다 계단과 누두를 만들어 필요할 때마다 막아놓은 판넬을 빼면 식량이 자동으로 흘러나와 쌀을 쉽게 받을수 있다. 또한 습기와 쥐를 막기 위해 창고의 하단에 40cm 높이로 돌을 부착하고 돌위에 바닥을 깔아 전반 창고가 지상으로부터 약 1m 높이에 처하게 했다.
창고 바닥이 땅에서 1m 떨어졌기 때문에 그 공간으로 통풍이 잘 되어 창고는 일년 사계절 최저의 습도를 유지한다. 창고벽의 나무에는 기름을 발라 부식을 방지하면서 옛 사람들의 근면과 지혜를 잘 보여준다.
노관에는 이천여년전 한(漢)조때의 명관료인 초현(譙玄)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초현묘가 있었다. 초현이 고향인 노관에서 타계한 후 한조의 황제가 지방관료에 어명을 내려 절을 지었는데 오늘날 절은 오간데 없고 초현의 이름만 남아 전해진다.
노관의 민요 또한 다양하고 유명해 노관은 민요의 고향으로 인정된다. "이른 아침 산 마루에 올라 나뭇잎을 따서 삐리리 피리를 부니 처녀가 옷 말리러 나온 양 집에서 나오네"라는 민요가 가장 대표적이다.
노관 사람들은 맑으면서도 넓은 음역으로 이 노래를 불러 <옷을 말리다>라는 이 민요는 중국 음악대학의 교과서에 편입될 정도로 중국의 대표적인 민요로 공인된다.
노관에서는 민요를 듣고 대나무 말을 타는 등 다양한 민속을 체험할 수 있다. 노관의 풍부한 민속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4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극목인 천북등희(川北燈戱)이다.
노관에서 시작된 이 극목은 노관인의 자랑이고 노관의 브랜드로써 노관인들은 예로부터 끊임없이 천북등희를 하고 천북등희를 보며 천북등희를 연구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