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윈난,시간이 멈춘 원시속으로] 제갈량과 맹획이 일전을 겨루던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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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dmin 작성일11-06-16 08:25본문
[곽인찬기자]윈난은 삼국시대 제갈량이 맹획과 일전을 겨루던 땅이다. 그러나 현존하는 전통과 유물의 대부분은 남조대리국(南詔大理國)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엄격히 말하면 남조국과 대리국은 별개다. 그러나 다리에 도성을 두고 잇따라 세워진 나라이기 때문에 통상 남조대리국이라 부른다. 대략 남조국(738∼902년)은 통일신라, 대리국(937∼1253년)은 고려 시대와 겹친다.
이족(彛族)이 지배하던 남조국은 동쪽으로 당(唐), 서쪽으로 토번(티베트)과 3각 체제를 유지했다. 당 현종 때 잇따라 침략을 격퇴하는 등 만만찮은 세력을 과시했다. 당시의 시대상은 776년에 세워진 남조덕화비에 잘 새겨져 있다.
남조국이 내부 반란으로 멸망한 뒤 혼란기를 거쳐 백족(白族)이 통치하는 대리국이 출범했다. 대리국은 원(元)나라 쿠빌라이의 침공으로 망할 때까지 독특한 문화유산을 남겼다. 316년 통치 기간 22명의 왕이 재위했는데 그중 9명이 황가사찰인 숭성사(崇聖寺)로 출가해 승려가 될 정도로 불교가 융성했다.
이후 원·명·청의 지배하에 들어간 윈난은 국공 내전 때 마오쩌둥 편에 서서 공산당을 적극 돕는다. 마오는 당시 국민당군에 쫓기던 인민해방군의 도강을 위해 희생을 아끼지 않은 리장 나시(納西)족의 공적을 기려 나시족의 전통 모자를 인민해방군 모자로 삼았다. 1950년 티베트를 점령한 중국은 샹그릴라(옛 중뎬·中甸) 등 과거 티베트 땅의 일부를 윈난성으로 편입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개혁·개방 이후에는 한족·외국인 관광객이 대거 몰려드는 등 윈난 땅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