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난성③ 유리성, 경전 '주역'의 발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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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dmin 작성일11-07-04 08:03본문
어느 시대나 그러하듯, 왕조의 말기는 어수선하기 마련이다. 중앙 권력은 점차 약해지고, 지방에서는 신흥 강호들이 출현한다.
왕은 호시탐탐 권좌를 노리는 세력에 둘러싸이지만, 좀체 타개책을 마련하지 못한다. 500년 이상 지속됐던 상나라 또한 매한가지였다.
상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은 악명이 자자한 폭군이었다. 외모가 준수하고 신체가 장대해 전장에서 공을 쌓았지만, 향락과 여색에 탐닉했다. 또한 성격이 포악하고 어리석기 그지없어서 백성들의 삶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 사이 '창(昌)'이라는 인물이 상나라의 서쪽에서 세를 넓혀갔다. '창'은 상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세운 무왕(武王)의 아버지인 문왕(文王)이다.
문왕의 움직임에 신경이 쓰였던 주왕은 그를 잡아 감옥에 가둔다. 중국사에 최초로 출현한 감옥, '유리성'이다.
문왕은 7년 동안 갇혀 있으면서 어떻게 해야 불운을 멀리하고 길운을 잡을 수 있는지에 대해 집필했다. 이는 만물이 변화하는 이치를 파악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주역(周易)'은 당시의 사상과 과학이 집대성된 산물이었다.
문왕이 고초를 겪었던 유리성에는 훗날 사당이 세워졌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들은 남쪽을 향하고 있는데, 대부분 명나라 시기인 16세기 중반에 축조됐다. 주역과 유리성은 3천 년 전에 존재했지만, 더 이상 세월의 더께가 느껴지지 않는 까닭이다.
내부는 미리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면, 평범한 공원으로 착각할 만큼 깔끔하게 단장돼 있다.
유리성의 입구를 통과하면 가지가 아래로 늘어진 버드나무와 문왕의 동상이 길손을 맞는다. 경내 곳곳에는 주역의 상징인 태극과 팔괘가 그려져 있다.
문왕의 동상은 세 개의 문을 지나면 만나는 본당에도 있다. 난세를 끝내고 태평성세의 기초를 닦은 사람답게 온화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유리성의 본당 지하에서는 고대의 조리 기구와 토기, 뼈로 만든 바늘 등이 발굴되기도 했다.
정원에는 문왕의 업적을 기린 글이 새겨진 비석과 64괘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기록된 푯돌이 서 있다. 또한 문왕이 물을 길어 마셨다는 우물과 문왕의 아들인 백읍고(伯邑考)의 묘도 있다. 전시관에는 주역에 주석을 붙인 '주역정의(周易正義)' 등의 책들이 진열돼 있다.
한편 유리성의 뒤쪽에는 사람 키보다 높은 돌담이 시야를 가로막는 미로가 있다. 그리 넓지는 않지만, 가운데의 누각까지 가는 길이 만만치 않다.
마침내 출구를 찾아내 정자에 올라 내려다보면 태극기의 모서리에 있는 '괘(卦)'를 닮았다. 주역에서 말하는 진리가 미궁으로 발현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