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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성 낙양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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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dmin 작성일11-12-23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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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양은 ‘천하의 명도(名都)’로 불릴 만큼 유명한 고도(古都)다. 한 국가의 수도가 되기 위해서는 전국 각지로 연결되는 교통이 편리해야 하고 외침을 막는 데 유리한 지형 조건을 갖추어야 하며, 또 산물이 쉽게 집결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이런 면에서 낙양은 천혜의 입지 조건을 가지고 있다. 황하가 낙양의 북방 지역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고, 낙하(洛河)와 이하(伊河)가 남쪽 지역을 관통하므로 외침에 대비하고 아울러 수로를 통해 사방으로 뻗어나가기에는 더 없이 좋은 길지다. 또 낙양 서남쪽으로는 복우산맥(伏牛山脈)이 뻗어있고, 동쪽으로는 대평원이 펼쳐져 있어서 산과 평원에서 나오는 산물들이 낙양에 산더미처럼 쌓이는 것이다. 이런 지리적 장점 덕분에 중국 역사상 13개 왕조가 낙양에 도읍을 정하고, 8개 왕조가 이곳을 제 2의 수도로 삼은 것이다. 역사학자 사마광(司馬光)은 이렇게 읊조렸다.
“그대가 고금의 흥망성쇠를 알고 싶다면, 낙양성에 한 번 가보게나.”
낙양에는 수많은 유적지와 문물들이 산재해 있다. 그 가운데 으뜸은 역시 용문석굴(龍門石窟)인데, 불교 신자는 말할 것도 없고 불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불상들을 통해 서역의 간다라미술이 어떻게 중국에 전래되었으며, 또 그것이 신라의 석굴암으로 어떻게 체현되었는지를 알게 하는 문명 교류사의 귀중한 세계 문화유산인 것이다.
지난 6월 중순 학교 관계자들과 함께 용문석굴에 갔다. 용문은 낙양 시내에서 13㎞ 떨어진 곳에 있다. 야트막한 향산(香山)과 용문산 사이에 이하가 흐르고 있는데, 양안(兩岸)의 암벽을 조각하여 만든 것이 바로 용문석굴이다. 입장료는 80위안이다. 입구는 여느 관광지와 다르지 않게 기념품, 수석 등을 파는 상가들이 조성되어 있다. 정교하게 조각한 배추 모양의 조각품이 눈길을 끈다. ‘소심(小心)’이라고 쓰여 있다.
소심이란 ‘마음이 작다’는 뜻이 아니라 ‘조심하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비싼 조각품을 함부로 만지지 말라는 뜻일 게다. 용문석굴에 현존하는 불감(佛龕)은 2345개이며, 불탑이 70여 좌, 조상(造像)이 근 11만 존(尊)인데, 모두 한 시대에 만든 것들이 아니고 북위(北魏) 태화(太和) 17년(493)부터 시작하여 오랜 세월 동안 조성한 것이다.
그 가운데 백미는 봉선사(奉先寺)의 노사나불(盧舍那佛)이다. 『하락상도용문지양대노사나불상감기(河洛上都龍門之陽大盧舍那佛龕記)』의 기록에 의하면, 봉선사는 당(唐)나라 황후 무측천(武則天)이 고종 함형(咸亨) 3년(672년)에 지분전(脂粉錢) 2만관(貫)을 희사하여 축조하기 시작했으며 고종(高宗) 상원(上元) 2년(675)에 낙성했다. 오늘날 봉선사의 건물들은 소실되었고 석굴만이 남아 있다.
주존(主尊) 노사나불 좌상은 높이 17,14m, 두상은 4m, 귀는 1,9m다. 얼굴은 풍만하고 눈썹은 그믐달 모양이며 눈은 아래를 향해 있고, 꼭 다문 입술은 단정하면서도 우아하다. 인자하면서도 위엄이 서려 있고 고요하면서도 생동감이 넘친다. 부처님의 은은한 미소는 세상의 모든 번뇌를 한순간에 사라지게 하는 것 같다. 좌측은 부처님의 제자 가섭(迦葉)이다. 체구는 왜소하게 표현되었으나 세상의 모든 풍파를 한 몸에 겪은 노승의 형상이다. 우측은 부처님의 또 다른 제자, 아난다(阿難陀)이다.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이다. 보살, 천왕(天王), 역사(力士)들이 부처님을 호위하며 서 있다. 130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불상들이 모진 풍상을 겪으면서 일부가 훼손되었지만, 부처님의 대자대비(大慈大悲)는 조금도 변하지 않고 여전히 중생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고 있다.
12월 6일 아침 6시 50분, 정주역 앞 버스터미널에서 낙양 가는 다바(大巴: 대형 고속버스)에 올라탔다. 20분 전에 중바(中巴: 중형 완행버스)가 손님을 가득 태우고 떠난 까닭에 승객이 여남은 명뿐이다. 중바는 40위안, 다바는 50위안이다. 10위안 차이가 다바의 좌석을 넉넉하게 한 것이다. 정주 외곽의 구조참(溝趙站) 톨게이트에 접어들자, 강소성 연운항에서 섬서성 서안으로 연결되는 연곽(連霍) 고속도로가 시원스럽게 뻗어있다.
운전석 옆자리에 앉은 안내양이 내가 사진을 잘 찍을 수 있도록 자리를 양보한다. 이윽고 공의시(鞏義市)가 시야에 들어온다. 시성(詩聖) 두보(杜甫)의 고향이다. 황토 언덕 골짜기마다 민가들이 드문드문 보인다.
중국문학사상 두보만큼 시로써 민초들의 고통과 애환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시인이 또 있을까? 그는 한 평생 우울하게 살면서도 언제나 백성의 아픔을 아름다운 시어로 읊조리고 위정자들을 신랄하게 풍자했다.
석호리(石壕吏)
날 저물어 석호촌에 투숙했는데
아전이 밤에 사람을 잡아 가네
할아비는 담을 넘어 달아나고
할멈은 문을 나와 지켜보네
아전의 호통은 어찌 그리 사나우며
할멈의 울음은 어찌 그리 괴로운가
할멈이 하소연하는 말 들어보니
세 아들 모두 변경으로 끌려 갔다네
한 아들에게 편지가 왔는데
두 아들은 최근 싸움에서 죽었다고
남은 사람이야 구차스레 살겠지만
죽은 사람은 영영 불귀의 객이 되었네
집안에는 더 이상 끌려 갈 남자 없고
오직 젖먹이 손자뿐이오
손자 있으니 제 어미는 가지 못하고
입고 다닐 변변한 치마 한 벌도 없다네
내 늙어 힘은 빠졌지만
이 밤이라도 아전을 따라 대신 가겠소.
‘개원(開元)의 치(治)’를 열었던 당현종(唐玄宗)도 말년에 총기가 흐려져 사치와 방탕을 일삼다가 천하 대란을 겪어야 했다. 당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장정이라면 닥치는 대로 전장으로 끌고 갔는데, 나중에는 장정이 부족하자 노인, 부녀자들도 잡아갔다고 한다. 두보는 석호촌의 비극을 막을 수 있는 고위 관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시종일관 방관자의 자세로 민초들의 비극을 읊조렸지만, 그의 애민 정신과 후세에 전하는 교훈은 천고에 길이 남게 된 것이다.
또 공의에는 청(淸) 나라 때 중국 제일의 갑부였던 강백만(康百萬) 집안의 대저택이 있다.
강백만 집안이 400년 넘게 부귀를 누릴 수 있었던 데에는 그 집안 나름의 인생 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경도인(留耕道人)의 사류명(四留銘)
"남겨 여유가 있어야 하는데, 공교로움을 다하지 않음으로써 자연의 조화(造化)에 돌려주는 것이다. 남겨 여유가 있어야 하는데, 복록(福祿)을 다 쓰지 않음으로써 조정(朝廷)에 돌려주는 것이다. 남겨 여유가 있어야 하는데, 재산을 다 쓰지 않음으로써 백성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남겨 여유가 있어야 하는데, 복을 다 누리지 않음으로써 자손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오늘날 가진 자들이 한 번 쯤은 가슴에 새겨들을 만한 명언이다.
낙양 입구에 접어들자 길가에 ‘대로(帶路)’라는 글자가 쓰인 간판을 들고 서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북경, 상해 등의 대도시 입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길을 모르는 외지인의 차량에 탑승하여 길을 안내해 주고 일정한 대가를 받는 신종 직업이다. 하지만 이용객이 거의 없다고 한다. 남모르는 사람을 태웠다가 봉변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주를 떠난 지 두어 시간 만에 낙양역 앞 버스터미널에 내렸다. 시가지가 청결하고 산뜻하다. 빽빽이 늘어선 가로수가 이곳이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황도(皇都)였음을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다. 낙양역에서 대로를 따라 남쪽으로 곧장 걸어가자 주왕성광장(周王城廣場)이 나온다. 낙양의 한 중심이자 가장 번화한 곳이다. 광장 중앙에는 서주(西周) 시대의 정치가이자 사상가였던 주공(周公) 희단(姬旦)의 동상이 있다. 주공 단이 낙양에 동도(東都)를 조영(造營)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
주무왕(周武王) 사후에 성왕(成王)의 나이가 어리자, 주공 단이 섭정(攝政)했다. 그런데 그의 형제인 관숙(管叔), 채숙(蔡叔)과 곽숙(霍叔) 등이 상나라 주왕(紂王)의 아들 무경(武庚) 등 동방의 이족(夷族)과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주공 단은 명을 받들고 출사하여 3년 만에 반란을 진압했다. 그는 나중에 주나라 낙읍(洛邑)을 건설하여 동도(東都)라고 칭했다. 그는 ‘덕을 베풀고 백성을 편안하게 함’을 제창하였고, 또 예악을 제정하고 법전과 제도를 확립했다. 훗날 그의 사상은 유교 사상의 바탕이 되었으며 공자에 의해서 성인으로 추앙받았다.

또 광장에는 유명한 주천자가육박물관(周天子駕六博物館)이 있다. 2002년 말 낙양시에서 주왕성광장을 조성할 때 우연히 지하에서 동주(東周) 시기의 묘 397기(基)와 거마갱(車馬坑) 16기를 발굴했는데, 그 유물 가운데 천자가 탔던 수레가 발견되어 고고학계를 흥분시켰다.
<일례(逸禮)·왕도기(王度記)>에 의하면 “천자는 말 여섯 필이 끄는 두 대의 수레에 탑승하고, 제후는 다섯 필, 공경은 네 필, 대부는 세 필, 선비는 두 필, 백성은 한 필의 말을 각각 몰 수 있다.”라는 엄격한 규정이 있다. 이 규정에 근거하여 발굴단이 여섯 필의 말이 나란히 순장되고 수레 두 대가 놓인 유물을 보고 이른바 ‘천자가육(天子駕六)’의 증거임을 확인했다. 이 박물관은 광장 지하에 있다. 입장료는 30위안이다. 주로 동주 시대의 청동기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고 거마갱에는 출토 당시의 거마들을 그대로 보존해 놓았다.

주왕성광장 사거리에서 서쪽으로 한 20여 분 걸어가자 낙양박물관이 나온다. 입장료는 무료다. 구석기 시대부터 명청(明淸) 시기까지의 유물들을 주제별로 전시해 놓았다. 유물들 가운데 당삼채(唐三彩)가 볼만하다. 박물관 옆에는 왕성공원(王城公園)이 있다.
매년 4월이면 목단(牧丹) 축제가 이곳에서 열린다. 낙양은 목단의 도시다. 당(唐) 나라 때 궁정에서 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목단을 지극히 애호하여 국화(國花)로 삼았다고 한다.
유우석(劉禹錫) “오직 목단만이 진정한 국색(國色)이니, 꽃필 때면 도성 전체가 들썩거린다네.”
백거이(白居易) “꽃이 피고 지는 이십여 일 동안은, 도성 사람들 모두 미쳐버린 듯하네.
당대(唐代)의 유명한 두 시인이 낙양의 목단을 보고 읊은 시구이다. 그래서 ‘낙양 목단은 천하제일’라고 한다. 하지만 계절이 한 겨울이라 공원에 걸린 목단 사진 몇 장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만 했다. 목단이 절정을 이루었던 지난 봄 학생들을 데리고 왕성공원에 갔을 때는 입장료 40위안이 부담스러워 입구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는데, 이번에는 계절이 맞지 않아 목단을 감상하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나올 수밖에 없었다.
박물관 앞에서 무궤도 전차(電車)를 타고 서관(西關)으로 갔다.
가는 도중 신장개업한 상가에서 터뜨리는 폭죽 소리가 요란하다. 서관 네거리에는 원통 모양의 탑이 있다. 최근에 만든 탑인 듯하다.
서관 근처에는 여경문(麗京門)이 있다. “낙양에 와서 여경문에 가보지 않았다면, 낙양성은 헛 구경한 셈이다.”라는 약간은 과장된 말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성문이다.
수(隋) 나라 때 처음 축조된 성문인데 낙양 고성(古城)의 서대문(西大門)이었다. 수당(隋唐) 시대에는 여경문 안에 조정의 여러 성(省), 부(府), 아(衙), 위(衛) 등의 관청들이 있었다. 내방(內房), 좌춘방(左春房), 우춘방(右春房) 등은 관리들이 거주했던 곳이다. 오른쪽에는 큰 사원이 있는데, 관리들과 백성이 토지신과 곡신(穀神)에게 제사를 지낸 곳이다.
오늘날의 여경문은 성문루(城門樓), 옹성(甕城), 전루(箭樓), 성벽, 여경교(麗京橋) 등으로 이루어졌다. 성문 곳곳에 수당성(隋唐城), 관음전(觀音殿), 삼신전(三神殿), 구룡전(九龍殿), 현양묘(賢良廟) 등의 현판들이 뒤섞여 걸려있는 것으로 보아, 여경문은 중국 역사의 다양하고 복잡한 문화적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여경문 안으로 들어가자 시공을 뛰어넘은 옛날 거리가 나온다. 낙양에서 가장 낙양다운 곳이다. 상호를 알리는 깃발들이 어지러이 걸려있다.
낙양의 대표적인 요리인 ‘수석(水席)’을 파는 집도 눈에 띈다. 수석이란 탕 요리의 총칭인데, 각종 야채, 고기 등을 넣고 끓인 것이다. 낙양은 기후가 춥고 건조하며 강우량이 비교적 적은 까닭에, 수분을 많이 섭취할 수 있는 탕 요리가 발달했다. 수석, 목단, 용문석굴이 낙양삼절(洛陽三絶)이라고 한다. 수석을 한 번 맛보고 싶었지만 혼자 들어가 먹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더구나 느긋하게 점심을 먹다가는 중국 최초의 사찰, 백마사(白馬寺)에 가는 시간을 놓칠 수 있다는 불안감도 들었기 때문이다.

여경문에서 58번 시내버스를 타고 백마사(白馬寺)로 갔다. 차비는 1.5위안이다. 도심을 벗어난 지 30여분 쯤 지나자 너른 벌판에 자리 잡은 백마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동한(東漢) 영평(永平) 7년(64) 어느 날 밤, 명제(明帝) 유장(劉壯)이 키가 크고 머리에서 광채가 나는 한 금인(金人)이 서쪽에서 궁궐로 오는 신기한 꿈을 꾸었다. 다음 날 아침 명제가 대신들을 소집하여 꿈 이야기를 해 주자, 박사(博士) 부의(傅毅)가 이렇게 아뢰었다.
“신이 듣건대 서방에는 신(神)이 있다고 하옵니다. 사람들은 그를 부처님이라고 부릅니다. 폐하께서 아마 부처님을 보신 게 아닌지요.”
명제는 그의 말을 믿고 대신(大臣) 채음(蔡愔), 진경(秦景) 등을 서역에 파견하여 불경과 불법을 구해 가져오게 했다. 황제의 명을 받은 채음 등의 사절단은 ‘서천취경(西天取經)’의 만리 여정에 올랐다. 그들은 대월씨국(大月氏國: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일대)에서 천축의 고승, 가섭마등(迦葉眠)과 축법란(竺法蘭)을 만나 불경과 불상을 얻을 수 있었다. 영평 10년(67)에 사절단과 두 스님은 백마에 불경과 불상을 싣고 낙양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명제는 크게 기뻐하여 두 고승을 정중히 모시고 불법을 들었으며, 영평 11년(68)에 백마사를 지은 것이다. 백마가 불경을 싣고 왔다고 하여 사원의 이름을 백마사라고 지었다. 중국 불교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중국 전역에 전파되기 시작한 것이다.
백마사는 중국은 물론 한국,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최초의 불교 사원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불교계에서는 백마사를 ‘석원(釋源)’과 ‘조정(祖庭)’이라고 존칭했는데, 전자는 불교의 발상지라는 뜻이며, 후자는 조사(祖師)의 정원(庭院)이라는 뜻이다. 평야에 자리 잡은 백마사는 장방형(長方形)이며 총면적이 6만㎡나 되는 큰 사원이다.
천왕전, 대불전, 대웅보전, 접인전(接引殿) 비로각(毘盧閣)의 다섯 채 건물이 남북으로 중심축을 이루고 있고, 동서 양측에 종루, 고루, 장경각 등 부속 건물들이 있다. 백마사는 가람배치가 중국 고대의 황궁 양식과 비슷한데, 이는 이 사원이 명제의 어명에 의하여 관부(官府)에서 창건한 까닭이 아닌가 한다.
대불전에는 명대(明代)의 대종(大鐘)이 있다. 전설에 따르면 이 종이 울리면 10여㎞ 밖에 있는 낙양성 종루의 대종도 호응하여 울리며, 또 종루의 대종이 울리면 대불전의 대종도 울린다고 한다. 그래서 민간에서는 “동쪽에서 종을 치면 서쪽에서 울리고, 서쪽에서 종을 치면 동쪽에서 울린다네.”라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이 ‘백마사의 종소리’는 ‘낙양 8대 경관’ 중의 하나다.
백마사 동쪽에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불탑인 제원탑(齊元塔)이 있다.
이 탑은 13층 25m의 방형(方形)의 전탑(塼塔)인데, 영평 12년(69)에 건축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원래의 탑은 없어지고 현존하는 탑은 금(金) 대정(大定) 15년(1175)에 지어진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 탑이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탑이 아닌데도 중국인들은 이 탑에 ‘가장 오래된 탑’이라는 영예를 수여했다. 현재 이 탑은 800여 년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한창 수리 중이다. 제원탑 옆에는 근년에 새로 지은 대웅보전이 있다.
백마사 앞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시내에 있는 낙양민속박물관으로 갔다. 그런데 버스 안에서 이곳을 아는 사람이 없다. 다들 이런 박물관은 처음 들어본다고 한다. 버스에서 내려 행인들에게 물어보아도 마찬가지다. 어떤 이는 “낙양에 무슨 민속박물관이 있나?” 반문하며 지나간다. 마침 교통경찰이 있다.
“아! 노택회관(潞泽會館), 구도로(九都路)에 있어요. 원래는 노택회관인데 지금은 개조해서 민속박물관으로 쓰는 거요.”
하남성 경내를 여행할 때면 어느 한 곳을 지칭하는 이름이 여러 개여서 여간 여행자에게는 여간 혼란스러운 게 아니다. 오전에 가보았던 ‘여경문’도 어떤 이는 ‘수당성’이라고 말해야 알아듣는다. 특히 산 이름은 정말 가관인데, 책자에서 나오는 이름과 지역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이 다른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어쨌든 친절한 교통경찰 덕분에 쉽게 찾아갈 수 있었다.
명청(明清) 시대에 장사와 사업에 능한 두 상인 집단이 있었는데, 바로 산서성의 진상(晋商)과 안휘성의 휘상(徽商)이다. 진상은 북방의 상권을, 휘상은 남방의 상권을 장악하여 치부했다. 지리적으로 낙양은 진상이 남방으로, 휘상이 북방으로 진출하는 경제적 요충지였다.

이런 연유로 청(淸) 나라 건륭(乾隆) 9년(1774) 산서성 노안부(潞安府)와 택주부(澤州府) 출신 상인들이 공동 출자하여 낙양에 노택회관을 지어 정보 교류의 장소와 숙소로 활용했다. 노안은 지금의 산서성 장치시(長治市), 택주는 산서성 진성시(晋城市)다.

얼마 전 한국 신문에 산서성 사람들이 대거 비행기를 타고 북경에 가서 대폭락한 부동산을 싹쓸이하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 산서성 사람들은 이재(理財)에 아주 밝다고 한다. 그래서 오늘날 중앙정부의 자금 담당자나 은행장은 산서성 출신이 많다고 한다.

노택회관은 회관치고는 규모가 엄청 크다. 희루(戱樓), 대전(大殿), 후전(後殿), 상반(廂房) 등의 건물들이 있다. 지금은 건물 안에 민속품들을 주제별로 다양하게 전시해 놓았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옛날에 전족(纏足)을 한 여성들이 신었다는 신발이다.
전족은 중국 여성 잔혹사의 상징이다. 진열장 벽에 걸린 사진을 보니 여성의 발이 영락없이 염소 발처럼 생겼다. 전족을 한 성인 여성이 아기 신발 크기의 신발을 신고 다녔다는 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노택회관 앞에는 낙하(洛河)가 낙양 시내를 관통하여 흐르고 있다. 동서로 뻗은 낙하의 제방에 공원을 조성해 놓았는데 낙포공원(洛浦公園)이다.
한강의 시민공원 같은 곳이다. 강태공들이 차가운 강바람을 맞으며 세월을 낚고 있다. 강폭은 한강처럼 넓지만 물이 오염되어 이곳에서 잡은 물고기를 먹어도 괜찮은 지, 괜히 내가 걱정이다. 거대한 수중보가 물의 흐름을 차단했기 때문에 물이 오염된 것 같다.
그런데 한쪽에서는 노인들이 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수영을 즐기고 있다.
낙양은 볼거리가 참 많다. 적어도 이틀은 소요되는 것 같다. 하지만 지난봄에 용문석굴에 갔다 왔으므로 지금 정주로 돌아가도 낙양의 명소들은 대충 둘러본 셈이다. 아침, 점심을 연속 거른 탓인지 허기가 밀려온다. 시내에 나가 간단히 요기를 하고 저녁 차를 타면 오늘 일정은 끝이다. 낙포공원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하며 카메라를 열어보았다.
‘오늘 하루 찍은 사진이 얼마나 잘 나왔을까?’
‘아이고, 이게 웬일이냐!’
어렵사리 찍은 사진, 반절 이상이 희뿌옇게 나왔다. 한 7∼8년 쓴 고물 카메라인지라 아마 카메라가 작동하다 수시로 멈춰 빛이 들어간 것 같다. 특히 박물관 안에서 찍은 사진은 한 장도 안 나왔다. 정말 황당하다. 택시를 잡아타고 다시 박물관으로 달려갔지만 허사였다. 관람 시간이 끝나 문을 닫은 것이다. 그런데 주왕성광장은 인산인해다. 한국에 판소리가 있다면, 하남성에는 예극(豫劇)이 있다. 한 젊은이가 예극을 부르고 있다. 나로선 노래 한 가락도 못 알아듣는 소리다.
그런데 노인들이 함성을 지르며 젊은이의 노랫가락에 신명을 불어넣는다. 하남성 사람들의 혼과 정서를 담은 노래일 것이다. 다시 왕성공원, 여경문으로 가서 사진 몇 장 찍고 서둘러 버스터미널로 달려갔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정주 가는 차 한 대가 막 시동을 걸고 있다. 느긋이 저녁을 먹고 다음 차를 타고 가려고 했는데 차장이 달려와 얼른 올라타라고 한다.
“아저씨, 화장실 좀 다녀와야겠는데…….”
“그럼, 돈부터 내고 다녀와, 기다려줄게.”

하지만 화장실에 간 사이 돈만 받고 떠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남성 농촌에서 별의 별일을 다 겪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래도 먼저 화장실부터 다녀와서 돈 낼게요.”

아저씨가 화장실 입구까지 쫓아와 나를 기다리고 있다. 혹시 내가 마음이 변해 타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다. 아저씨가 하도 재촉하는 바람에 정신없이 차에 올라탔다. 그런데 나무판자를 깔아놓은 맨 뒷좌석뿐이다. ‘다바’를 타야 하는데 날이 어두워 분간을 못하고 그만 ‘중바’를 탄 것이다.

‘어쩐지, 차비가 올 때보다 10위안 싸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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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 重庆(충칭) 명… 인기글 대한민국충칭임정청사 大韓民國重慶臨政廳舍 우리 나라가 해방되던 해인 194…(2011-01-24 09:37:40)
대별산속의 붉은 동네 칠리평(七里… 인기글 960만 제곱 킬로미터에 달하는 넓은 중국의 땅위에는 아름다운 명소들이 수도 없이 많다. 내외에 이름난 관광지나 관광도시는 물론이고 산과 들과 물가에 산재해 있는 옛 동네 마찬가지로 비경이다. 대별산속의 붉은…(2015-09-14 10:23:22)
세계 최대의 온천 인기글 세계 최대의 온천 가장 아름다운 중국의 사계절 명소 100개 중 겨울 명소 등충열해(騰沖熱海)는 80여개의 온천이 집중된 세계 최대 규모의 온천군락이다. 그 중 온천물의 수온이 섭씨 90도를 넘는 온천이 10개나 된…(2015-08-24 10:04:20)
Travel for CEO - 홍… 인기글 천가지 표정이 있는 나라, 홍콩홍콩은 최상급의 수식어로 다양하게 표현되는 매우 경이로운 도시다. 세계 최대의 은행 센터가 들어서 있는 도시 중의 하나이며, 자유 무역항으로서 세계 무역의 무대에서 당당히 선두에 있는 …(2009-03-24 13:36:41)
여파: 야생매화의 고장 인기글 여파: 야생매화의 고장 가장 아름다운 중국의 사계절 명소 100개 중 겨울 명소 귀주(貴州)의 여파(荔波)는 온갖 매화가 만발하는 야행매화의 고장이다. 카르스트 지형을 자랑하는 여파의 넓은 대지에는…(2015-08-24 10:03:26)
선양 지하철 1호선 연장, 도심-… 인기글 중국 동북지방 최초의 지하철인 랴오닝(辽宁)성 …(2009-10-22 09:06:45)
[중국관광] 인민폐 뒷면에 그려진… 인기글 베이징 인민대회당(人民大会堂), 시짱(西藏, 티베트) 포탈라궁, 바이디청(白帝城)·우산(巫山)·시링샤(西陵峡) 등 창장삼협(长江三峡), …(2013-06-24 07:40:08)
언덕위의 세월속 동네 감숙(甘肅,… 인기글 960만 제곱 킬로미터에 달하는 넓은 중국의 땅위에는 아름다운 명소들이 수도 없이 많다. 내외에 이름난 관광지나 관광도시는 물론이고 산과 들과 물가에 산재해 있는 옛 동네 마찬가지로 비경이다. 언덕위의 세월속 동…(2015-09-21 11:18:13)
연변, 스키장 속속 개장...겨울… 인기글 자연 그대로 살아 숨쉬는 장백산 스키장  (흑룡강신문=하얼빈) 중국 동북지역의 겨울철 관광명소로 떠오른 연변조선족자치주 일대 스키장들이 이달 말과 다음달 초 잇따…(2012-11-29 07:03:37)
하남성 낙양 기행 인기글 낙양은 ‘천하의 명도(名都)’로 불릴 만큼 유명한 고도(古都)다. 한…(2011-12-23 08: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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