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왕 장보고전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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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03-24 13:41본문
그는 시대를앞선 해양개척의 선구자입니다. 천이백년전 해상왕 장보고는 해양진출을 통한 교역이 부국의원천임을 인식하고 바다를통해 세계를 제패한 해양개척의 선구자입니다. 그는 청해진을 중심으로 호율적이고 체계적인교역망을 구축하고 새로운 해상무역항로를 개척하는등 무역은 물론 문화, 외교적으로도 큰업적을 남긴 진정한 세계인이며 해양인입니다.
<해상왕 장보고의 생애>
일명 궁복(弓福)·궁파(弓巴). 일찍이 당나라 서주(徐州)에 건너가 무령군소장(武寧君小將)이되었으나 신라에서잡혀간 노비(奴婢)의 비참한 처우에 분개하여 사직하고귀국했다. 해적들의 인신매매를 근절시키기위해 왕의허락을얻어 1만의군사로 해로의 요충지 청해(淸海:莞島)에 진을 설치하고 가리포(加利浦)에 성책을쌓아 항만시설을 보수, 전략적거점을 마련했다. 그리고 청해진 대사(淸海鎭大使)가되자 휘하수병을 훈련시켜 해적을 완전소탕했다.
837년(희강왕 3)왕위계승 다툼에서밀려난 우징(祐徵:神武王)이 청해진에오자 이듬해 우징과함께 반란을일으켜 839년 민애왕(閔哀王)을죽이고 우징을 왕위에 오르게하여 감의군사(感義軍使)가 되었다. 신무왕이 죽고 문성왕(文聖王)이 즉위하자 진해장군(鎭海將軍)이되었다. 840년(문성왕 2) 일본에 무역사절을, 당나라에 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를보내어 삼각무역을했다. 845년(문성왕 7) 딸을 왕의 차비(次妃)로보내려했으나 군신들의 반대로좌절되었다.
846년(문성왕 8) 그의세력에 불안을느낀 조정에서 보낸 자객 염장(閻長)에게 살해되었다. 막강한 군사력과 부를 보유한 장보고의 세력확대를 우려한 중앙귀족들은 문성왕의 차비 간택문제를 계기로 장보고를 제거할계획을 세우고 장보고의부하였으나 장보고를 시기하고 중앙정치무대에서의 신분상의 지위향상을 노리고있던 염장을 보내 문성왕 8년인 서기 846년 장보고를 암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