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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비 (廣開土大王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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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09-02-26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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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에 있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의 능비(陵碑)이다. 비신(碑身) 높이 5.34m. 각 면 너비 1.5m.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광개토왕의 시호(諡號)를 줄여서 '호태왕비'라고도 한다. 
 
현재 비의 서남쪽 약 300m 지점에 있는 태왕릉(太王陵)을 광개토왕의 능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부근에서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벽돌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비는 커다란 각력응회암(角礫凝灰岩)으로 된 불규칙한 직4각형의 기둥 모양으로 된 4면비로, 남에서 동쪽으로 약간 치우쳐서 세워져 있다. 비는 발견된 이후부터 주목을 받아, 지안 현 지사였던 유천성(劉天成) 등의 모금으로 비바람의 침식을 막기 위해 1928년에 2층으로 된 비각을 설치했다. 이 비각은 1976년에 낡아서 붕괴의 위험이 있다고 하여 철거되고, 1982년에는 중국 당국에 의해 대형 비각이 세워져 지금에 이른다.
 
414년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운 것으로, 한국에서 가장 큰 비석이다. 높이는 6.39m로 윗면과 아랫면은 약간 넓고 중간부분이 약간 좁다. 아랫부분의 너비는 제1면이 1.48m, 제2면이 1.35m, 제3면이 2m, 제4면이 1.46m이다. 아래에 화강암의 받침대를 만들었는데 길이 3.35m, 너비 2.7m의 불규칙한 직4각형이고, 두께는 약 20cm이나 고르지 않다. 문자의 크기와 간격을 고르게 하기 위해 비면에 가로·세로의 선을 긋고 문자를 새겼다. 
 
제1면 11행, 제2면 10행, 제3면 14행, 제4면 9행이고, 각 행이 41자(제1면만 39자)로 총 1,802자인 이 비문은 상고사(上古史), 특히 삼국의 정세와 일본과의 관계를 알려 주는 금석문이다. 
 
내용은 크게, ① 서언(序言)격으로 고구려의 건국 내력을, ②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뒤의 대외 정복사업의 구체적 사실을 연대순으로 담았으며, ③ 수묘인연호(守墓人烟戶)를 서술하여 묘의 관리 문제를 적었다. 
 
한·일 고대사학계의 최대 쟁점이 되어 온 구절은 "신묘년 왜가 바다를 건너 와서 백제와 신라를 파해 신민으로 삼았다(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以爲臣)"로서, 여기에서 문맥과 전혀 관계없이 왜(倭)가 나온다. 
 
이를 근거로 일제의 학자는, 4세기에 한반도 남단에 일본의 식민지를 건설하였고,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오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가 그것이라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이런 해석은 1884년 일본군 대위 사코 가게노부[酒勾景信]가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을 가지고 귀국한 뒤, 일본육군참모본부가 비밀리에 해독작업을 진행하여 1889년 《회여록(會餘錄)》 5집에 요코이 다다나오[橫井忠直]의 〈고구려고비고(高句麗古碑考)〉 등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즉, 압록강 북쪽에 큰 비가 있다는 사실은 〈용비어천가〉를 비롯해 조선 전기의 문헌에서 간혹 언급한 경우가 있으나 비문을 확인한 적은 없었다. 17세기 이후 청(淸)에서 이 지역을 만주족의 발상지로 간주하여 봉금제도(封禁制度 : 거주금지 조치)를 시행하자 인적이 뜸해져 잊혀진 상태로 있다가, 봉금제도가 해제되고 회인현(懷仁縣)이 설치된 뒤 1880년을 전후해서 재발견되었다. 당시 비가 재발견된 경위는 불분명한 점이 많다. 비 발견의 소식이 알려지자 당시 회인현의 지현(知縣)이던 장월(章)이 관월산(關月山)을 보내어 탁본을 만들게 했고, 그후 중국의 서예가나 금석학자들에 의해 많은 탁본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비문의 내용을 자료로 구체적인 역사연구를 한 것은 아니었고, 초기의 탁본은 대개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이었다. 비가 재발견된 초기에 탁본을 만드는 과정에서 이끼를 제거하기 위해 불을 질러 비면의 일부가 탈락되었고, 정교한 탁본을 만들기 위해 석회를 발라 비면을 손상시킴으로써 이후 연구에 논란을 일으켰다.
 
비문을 해독하고 연구를 독점한 것은 일본인이었다. 일본에서 처음 입수한 비문은 만주지역에서 정보수집활동을 수행하던 포병중위 사쿠오[酒句景信]가 1883년에 가져온 쌍구가묵본이었다. 이를 기초로 참모본부에서 해독작업을 진행했고, 1888년에 그 내용이 아세아협회의 기관지인 〈회여록 會餘錄〉 5집에 실려 일반에게 알려졌다. 이후 속속 연구물들이 나오기 시작했으나, 그 대부분은 '신묘년기사'(辛卯年記事)와 〈니혼쇼키 日本書記〉의 신공황후(神功皇后)가 4세기 후반에 한반도 남부지역을 정벌했다는 전설적 내용을 관련지어 그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이러한 연구 속에서 소위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이 정설로 정착되었다. 그뒤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고 나서는 본격적인 현지조사가 이루어져, 1913년에는 세키노[關野貞]·이마니시[今西龍]가 자세한 조사를 실시했다. 그리고 만주사변 이후 1935년에는 이케우치[池內宏]를 비롯한 조사단이 현지에 가서 고분을 비롯한 유적을 자세히 조사했다.
 
일본인에 의해 연구가 독점되고 있는 동안 한국인들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908년 간행된 〈증보문헌비고〉에 비문이 수록되었고, 1909년에 박은식과 신채호가 언론에 간단히 소개하기도 했다. 그리고 중국으로 망명한 뒤 신채호가 1914년 현지에 가서 직접 확인하고, 〈조선상고사〉에서 비문의 "결자(缺字)에 석회를 발라 첨작(添作)한 곳이 있으므로 학자가 그 진(眞)을 실(失)함을 한(恨)한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도구가 없어 비를 실측하지도 못했고 탁본을 자료로 연구에 이용하지도 못했다. 해방 전 한국인에 의한 비문연구로 가장 주목받는 것은 정인보의 〈광개토경평안호태왕릉비문석략 廣開土境平安好太王陵碑文釋略〉이라 할 수 있다. 이는 1930년대말 무렵에 집필된 것으로, 신묘년기사에 대해 일본인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해석을 내렸다. 즉 기존의 일본인은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을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신라 등을 깨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그는 '도해파'(渡海破)의 주어를 고구려로 보아 "고구려가 왜를 깨뜨리고 백제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전혀 상반되는 견해를 제시했던 것이다. 해방 이후 일본에서는 1959년 데이지로[水谷悌二郞]가 여러 탁본들을 대조하여 각각 차이가 있음을 지적하고, 석회를 바르기 전의 탁본과 바른 뒤의 탁본을 구별할 것을 주장했다. 이는 그동안 일본에서 진행된 연구에 근본적인 재검토를 요하는 문제제기였다.
 
한편, 북한에서는 1963년에 중국과 합동으로 능비가 있는 현지를 찾아가서 조사를 실시했고, 1966년에는박시형의 〈광개토왕릉비〉가 간행되었다. 여기서는 능비에 관한 우리쪽 문헌을 거의 망라하여 찾아내고, 또 비의 재발견 경로를 상세히 검토했다. 또 문제가 되는 '신묘년기사'에 대해서는 정인보의 해석법을 받아들여 기존에 일본인들이 주장해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연구의 일환으로 1966년에 김석형이 〈초기 조·일관계사 연구〉를 간행하여 일본 식민주의 사학자들이 주장해온 임나일본부설을 전면 부정했다. 그리고 정반대로 삼한 삼국의 이주민들이 일본열도로 이주해 분국(分國)을 수립했다는 새로운 학설을 주장해, 이후 북한 학계의 정설로 굳어졌다. 그는 신묘년기사에 대해 "왜가 신묘년에 와서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백제를 깨고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한 박시형과는 약간 해석을 달리했다. 그러나 북한의 연구가 국내에 전면적으로 소개된 것은 1980년대 후반으로 남한의 연구에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1970년대초에 재일 연구자 이진희(李進熙)는 1900년 전후해 참모본부에 의해 비문의 문자가 석회로 조작되었다는, 이른바 '석회도부작전설'(石灰塗付作戰說)을 주장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에 대해 일본 학계의 일부는 근대 일본 역사학의 체질문제를 거론하여 자기반성을 행하기도 하고, 일부에서는 반론을 펴기도 했으나 자체적으로 기존의 임나일본부설을 재검토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즈음부터 국내에서 비로소 정밀한 검토가 이루어지기 시작해, 80년대 들어 다수의 정밀한 연구가 나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지금은 신묘년기사가 왜를 주체로 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가 주체가 된 것이라는 전제 아래, 비문 속의 왜는 백제나 가야의 활동에 종속적 역할을 하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1984년에는 왕젠췬이 장기간의 실지조사를 토대로 〈호태왕비연구〉를 발표해 다시 한번 활발한 논의가 이어졌다. 왕젠췬은 현지조사의 이점을 살려 기왕의 잘못 읽은 부분은 시정하고 탈락된 문자를 복원했으며, 문자의 총수를 1,775자로 확정했다. 그리고 비문의 왜를 일본 기타큐슈[北九州]의 해적집단으로 보아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하는 한편 이진희의 석회조작설도 비판한 점에서 연구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여 다시금 논의가 활기를 띠었다.
 
이어 1981년 이 비문을 연구해 온 이형구(李亨求)는 비문 자형(字型)의 짜임새[結構], 좌우행과의 비교에서 나오는 자체(字體)의 불균형 등을 들어, '倭'는 '後'를, '來渡海破'는 '不貢因破'를 일본인이 위작(僞作)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럴 경우 그 신묘년 기사는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국으로 조공을 바쳐 왔는데, 그뒤 신묘년(331)부터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백제·왜구·신라를 파해 신민으로 삼았다'는 것으로 되어, 이 주장이 공인을 받으면, 일본 사학계의 '고대남조선경영론'이 근거를 잃게 된다.
 
한편, 비문은 그 내용에 의해 대체로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추모왕(鄒牟王)·유류왕(儒留王)·대주류왕(大朱留王) 등의 세계(世系)와 광개토왕의 행장(行狀)을 쓴 부분이다. 둘째는 광개토왕 때 이루어진 정복활동을 연도에 따라 적고 그 성과를 적은 부분이다. 그리고 셋째는 광개토왕 생시의 명령에 근거하여 능을 관리하는 수묘인연호의 수와 차출방식, 수묘인의 매매금지에 대한 규정을 적은 부분이다. 이중 가장 중요한 것은 둘째 부분으로,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특히 신묘년기사가 논쟁의 중심이 되었다. 여기에는 모두 8개의 정복기사가 적혀 있는데, 연대에 따라 간단히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영락(永樂) 5년(395)조는 비려(稗麗) 정벌에 관한 것이다. 그해에 왕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염수(鹽水)까지 가서 그 부락 600~700영(營)을 깨뜨리고 헤아리기 힘들 정도의 우마군양(牛馬群羊)을 노획하여 북풍(北豊) 등지를 거쳐 돌아왔다. 이 비려는 시라무렌강 방면의 유목민인 거란[契丹]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영락 6년(396)조는 백제정벌에 관한 것이다. 왕은 직접 수군을 끌고 백제를 쳐서 58성(城)과 700촌을 공파하고, "영원히 노객(奴客)이 되겠다"는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낸 뒤 왕제(王弟)와 대신(大臣) 10인을 비롯한 포로 1,000명을 얻어 돌아왔다. 이 작전의 대상지역은 대개 임진강 하류, 한강 하류 일대로 비정된다. 비문은 여기서 영락 6년조를 적기 전에 그간의 경위를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이 신묘년 기사로서 영락 6년에 이루어진 작전의 배경을 설명한 것이다. 다음 영락 8년(398)에 왕은 소규모 군사를 보내 식신토곡(息愼土谷)을 관(觀)하고 부근의 가태라곡(加太羅谷) 등에서 남녀 300명을 얻었고, 이후 이 지역으로 하여금 조공하게 했다. 이 식신은 숙신(肅愼)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며, 그 지역은 만주의 영안(寧安) 부근으로 비정된다. 그러나 이를 2개의 작전으로 나누어보고 강원도 일대의 예(濊) 및 신라와 관련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영락 10년(400)조는 문자의 탈락이 심하여 이설이 많으나, 신라 구원을 위해 보기(步騎) 5만을 파견해 임나가라(任那加羅)까지 가서 왜를 토멸한 것이 주내용이다. 여기서도 영락 10년 작전의 배경을 설명하는 부분이 있다. 즉 영락 9년에 백제가 이전의 맹세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여 왕이 평양에 내려왔을 때 신라 사신이 구원을 요청하여 밀계(密計)를 약속했다. 따라서 영락 10년의 작전은 그 밀계에 따른 것이었고, 신라왕은 이를 계기로 직접 고구려에 조공했다. 영락 14년(404)조는 백제군을 따라 대방계(帶方界:황해도)에 침입한 왜를 궤멸시킨 기사이다. 고구려의 왕당(王幢 : 친위군)이 길을 끊고 사방에서 추격하여 무수한 적을 참살하여 궤멸시켰다. 영락 17년(407)조는 문자의 탈락이 심해 구체적인 실상을 알기 힘들다. 고구려군은 적군을 섬멸하여 개갑(鎧甲) 1만여 개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군수품을 얻었고, 돌아오는 길에도 많은 성을 격파했다. 이 작전을 보기(步騎) 5만을 보내 후연(後燕)의 숙군성(宿軍城)을 공격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백제를 공격한 내용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영락 20년(401)조는 동부여(東夫餘) 정벌기사이다. 비문에 따르면 동부여는 이전에 추모왕(鄒牟王)의 속민(屬民)이었는데 조공을 끊어버리고 반항한 것에 대해 왕이 직접 토벌하자 곧 투항하고 말았다. 왕은 이를 가상히 여겨 은택(恩澤)을 베풀었다고 한다. 이 동부여는 두만강 하류에 있는 부여족의 일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훈적을 적은 끝부분에서 비문은 왕이 공파한 성이 64개, 촌이 1,400개였다고 적고 있다.
 
수묘인 관계기사는 비문의 후반부에 기록되어 있는데, 수묘인들의 출신지, 각 지역별 호수 배당, 수묘인의 매매금지조항 등의 내용이다. 비문에 따르면 광개토왕은 구민(舊民)이 약해질까 우려해 직접 약탈해온 신래한예(新來韓濊)로 하여금 수묘토록 명령했다. 이에 따라 장수왕은 구민 110가(家), 한예 220가를 차출하여 국연(國烟) 30, 간연(看烟) 300으로 모두 330가의 수묘가를 책정해 능을 관리하도록 했다. 그리고 선왕(先王) 이래 묘 위에 비를 세우지 않아 수묘인 연호의 관리에 차질을 빚었는데, 이제 묘비를 세우고 수묘연호를 새겨 착오가 없게 함과 아울러 수묘인의 매매를 금지시키고 위반자를 처벌하게 했다. 이 부분은 고구려 수묘제의 실상과 함께 수묘인의 신분적 성격 등 사회사연구에 중요하다.

백잔(百殘)과 신라는 옛적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서 조공을 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391)에 건너와 백잔을 파하고 신라 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영락 6년(396) 병신년에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이 하여 영팔성(寧八城), 구모로성(臼模盧城) 등을 공취하고, 그 수도를 하였다. 백잔이 의(義)에 복종치 않고 감히 나와 싸우니 왕이 크게 노하여 아리수를 건너 정병(精兵)을 보내어 그 수도에 육박하였다. [백잔군이 퇴각하니 ] 곧 그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백잔주([百]殘主)가 인핍(因逼)해져, 남녀 생구 1천명과 세포 천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구려왕의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백잔주가 저지른] 앞의 잘못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 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城) 700촌(村)을 획득하고 백잔주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영락 8년(398) 무술년에 한 부대의 군사를 파견하여 숙신(肅愼) 토곡(土谷)을 관찰 순시하였으며 그 때에 [이 지역에 살던 저항적인] 막 나성(莫 羅城) 가태라곡(加太羅谷)의 남녀 삼백여 인을 잡아왔다. 이 이후로 [숙신은 고구려 조정에] 조공을 하고 [그 내부의 일을] 보고 하며 [고구려의] 명을 받았다.
 
영락 9년(399) 기해년에 백잔이 맹서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이에] 왕이 평양으로 행차하여 내려갔다. 그 때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차 성지(城池)를 부수고 노객으로 하여금 왜의 민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귀의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이 은혜롭고 자애로워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신라사신을 보내면서 [고구려측의] 계책을 [알려주어] 돌아가서 고하게 하였다.
 
10년(400) 경자년에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고구려군이] 남거성(男居城)을 거쳐 신라성(新羅城)에 이르니, 그 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고구려군이]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안라인수병(安羅人戌兵) 신라성 성(新羅城 城) ’하였고,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옛적에는 신라 매금(寐錦)이 몸소 고구려에 와서 보고를 하며 청명(廳命)을 한 일이 없었는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대에 이르러 [이번의 원정으로 신라를 도와 왜구를 격퇴하니] 신라 매금이 하여 [스스로 와서] 조공하였다.
 
14년(404) 갑진년에 왜가 법도를 지키지 않고 대방지역에 침입하였다. 석성(石城)[을 공격하고 ], 연선(連船) [이에 왕이 군대를 끌고] 평양을 [ 로 나아가] 서로 맞부딪치게 되었다. 왕의 군대가 적의 길을 끊고 막아 좌우로 공격하니, 왜구가 궤멸하였다. [왜구를] 참살한 것이 무수히 많았다.
 
17년(407) 정미년에 왕의 명령으로 보병과 기병 도합 5만명을 파견하여 합전하여 모조리 살상하여 분쇄하였다. 노획한 [적병의] 갑옷이 만여 벌이며, 그밖에 군수물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또 사구성(沙溝城), 누성(婁城) 주성( 佳城), 성( 城) 성(城)을 파하였다.

20년(410) 경술년 동부여는 옛적에 추모왕(鄒牟王)의 속민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여 [고구려에] 조공을 하지 않게 되었다. 왕이 친히 군대를 끌고 가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이 여성(餘城)에 도달하자, 동부여의 온 나라가 놀라 두려워하여 [투항하였다]. 왕의 은덕이 동부여의 모든 곳에 두루 미치게 되었다. 이에 개선을 하였다. 이 때에 왕의 교화를 사모하여 개선군을 따라 함께 온 자는 미구루압로(味仇婁鴨盧), 비시마압로(卑斯麻鴨盧), 타사루압로( 社婁鴨盧), 숙사사압로(肅斯舍鴨盧), 압로(鴨盧)였다. 무릇 공파한 성(城)이 64, 촌(村)이 1,400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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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람중]광개토대왕비 (廣開土大王碑) 인기글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에 있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의 능비(陵碑)이다. 비신(碑身) 높이 5.34m. 각 면 너비 1.5m.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광개토왕의 시호(諡號)를 줄여서 '호태왕비'라고도 한다. 현재 비의 서남쪽 약 300m 지점에 있는 태왕릉(太王陵)을 광개토왕의 능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부근에서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벽돌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비…(2009-02-26 14:15:54)
광개토대왕 릉 인기글 장군총중국 지린성[吉林省(길림성)] 지안현[集安縣(집안현)] 퉁거우[通溝(통구)]의 룽산[龍山(용산)]에 있는 고구려의 돌무지무덤[積石塚(적석총)]. 기단 1변의 길이 약 33m. 현재의 높이 약 13m.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왕릉급의 대형 돌무지무덤으로서, 본래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유일한 무덤이다. 장군총 남서쪽에는 유명한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와 태왕릉이 있다. 무덤을 축조한 재료는 화강암이며, 7층의 피라미드형으로 만들었는데, 무덤칸은…(2009-02-26 14:12:52)
연길조선족민속촌 인기글 연길조선족민속촌은 조선족의 유구한 력사와 민속을 보여주는 관광명소이다..모아산 부근에 자리잡고있는 민속촌에는 조선족특색이 넘쳐흐르는 귀틀집과,즉석에서 만드는 민족음식,공예품등이 있다.민속촌 대문으로 들어가면 한갈래 큰길이 시원하게 틔여있는데 그 길 량옆에는 우거진 나무와 작은산들이 보인다.민속촌안에는 널뛰는 녀인,떡치는 …(2009-02-25 16:37:05)
윤동주 생가, 묘지 인기글 ♧윤동주(尹東柱)♧1917년 12월 10일 만주의 북간도, 명동촌에서 부친 윤영석과 모친 김룡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명동소학교와 은진중학교를 거쳐 평양 숭실중학교에 편입했으나 신사 참배 거부 문제로 이 학교가 문을 닫는 바람에 한 학기 만에 고향으로 다시 돌아와 광명학원에 편입, 중학부를 졸업했다. 1938년 봄 연희전문 문과에 진학, 이곳에서 최현배 선생에게 우리말을, 이양하 선생에게 영시를 배웠으며 이 시절 후배 정병욱과 깊이 교우했다. 1942년 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입교대학…(2009-02-25 14:30:11)
간도일본총령사관 인기글 ♧간도일본총령사관♧연변을 침략하고 항일투쟁을 진압한 소굴 연변의 풍부한 물질자원을 수탈한 수뇌부 죄악의 붉은 담장 네귀에 삼엄한 도치까 앉힌 우중충한 붉은 벽돌 담장, 2메터도 넘는 그 붉은 담장에 옹위되여있는 미색의 건축물-룡정시 륙도하로 869번지. 룡정시인민정부사무청사로 사용되고 있는 이 건축물이 바로 악명이 자자한 간도일본총령사관유적지이다. 지금은 길림성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여 애국주의교양의 터전으로 각광받고있지만 일제치하에 시달리던 그때 누가 감히 이 건…(2009-02-25 14:11:52)
명 동 학 교 인기글 ♧명 동 학 교♧ 중국조선족근대문화의 발상지 반일민족교육의 요람 명동의 5대가족 선바위는 장려한 바위산이다. 지신진 신동골어구에 우뚝 솟은 선바위는 아무 때 보아도 그렇다. 대지주 동한(董閑)이가 이곳 땅을 차지하고있을 때만 하여도 선바위를 비둘기바위라고 불렀다 한다. 깎아지른 층암절벽사이에 비둘기들이 둥지를 틀고 살았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였던 것이다. 1899년2월18일, 김약연 등 회령과 종성에서 유학자로 소문…(2009-02-25 14:06:24)
대성중학교 인기글 ♧대 성 중 학 교♧ 1921년에 천도교 계통의 동흥중학교와 유교 계통의 대성중학교가 설립되었다. 당시 이 두 학교는 300여 명의 학생이 재학하였으며 교사와 학생들은 항일 민족 해방 교육을 받았다. 일제는 이 두 학교를 탄압하기 시작하였고 1927년 10월 용정 주재 일본 총영사관은 영사 경찰을 동원하여 이 두 학교의 교사들을 체포하자, 학생들은 영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런 탄압에도 불구하고 이들 학교에서는 「애국가」「권학가」「학도가」등 가곡과 조선 역사·조선 지리를…(2009-02-25 14:02:49)
온천 인기글 ♧ 온 천 ♧ 백두산 폭포에서 약 900m 떨어 진곳에 있다. 면적은 1000 km2 이고 평균온도는 60~70도, 최고 온도는 82도까지 된다. 온천 흑풍구에서 끊임없이 꿈틀거리는 흑석아래에는 여라문곳에서 뜨거운 약수가 솟아나오는데 어떤 곳은 사발만큼 크고,어떤 곳은 가는 물줄기가 졸졸 흐르고있는데 이것이 지면우에 분포되여있는 천여평방메터의 온천무리들이다. 온천은 오색찬란한 빛을 뿌리고 또 뭉게뭉게 피여오르는 열기를 발산하고있는데 관광객들의 특별한 눈길을 모으고있다.특히 겨울이…(2009-02-24 16:53:30)
백두산(白頭山) 인기글 백두산(白頭山) 한민족의 발상지 백두산은 중, 조 량국의 국경선에 위치한 명산으로써 200만년전에 형성되였다. 수차례 화산 폭발된 력사를 가진 나젊은 휴화산이다. 북한 양강도 삼지연군과 중국 지린 성[吉林省]에 걸쳐있는 백두산은 높이 2,750m로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중국 지린 성 안투 현[安圖縣] 얼다오바이허 진[二道白河鎭]과의 국경을 이룬다. 해방 당시까지 최고봉은 병사봉(2,744m)으로 측량되었으나, 현재는 장군봉으로 이름이 바뀌고 해발고도도 2,750m로 다시 측…(2009-02-24 16:2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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