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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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철호| 작성일 :12-12-05 06:35|본문
연변각지에서 무고한 조선인을 마구 학살하는 일본군 “토벌대”
제20장 경신년대학살사건
잔악한 일본강도 연변땅 피로 물들이고
조선인 백성 친인 잃고 삶의 터전 잃어
무고한 백성들을 “토벌”
“일본침략군은 중국땅에 들어온 그날부터 반일부대는 물론 무고한 백성들까지 ‘토벌’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백운평전투때에도 적들은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마을사람들을 젖먹이까지도 빼놓지 않고 죄다 집안에 가두어놓고 불을 질렀으며 뛰쳐나오면 총창으로 찌르고 기관총을 휘둘러 쏴죽이고는 시체를 불속에 집어넣었습니다. 청산리전역에서 대패한 일본침략군은 보복을 무고한 백성에게 감행했는데 그 잔인성과 참혹성은 인류력사상 찾아보기 힘든 사례입니다.”
연변대학 력사학 교수 박창욱선생은 “경신년대토벌”은 사실상 “경신년대학살사건”이라고 피력했다. 청산리전역후 반일부대가 안전하게 로령일대로 전이한후 일제는 약 8개월간 중국의 조선인사회를 마음대로 유린하면서 무고한 백성들을 닥치는대로 학살하고 조선인학교와 교회당 심지어 식량, 가옥마저 무차별 소각하는 천인공노할 참변을 빚어냈다.
“일본군은 10월 26일 간도총령사관에서 작성한 ‘배일부락 및 학교조사표’에 근거하여 연길현내에서는 동불사, 태평구, 와룡동, 소영자, 의란구를 비롯한 23개 마을과 흥동학교, 영신학교, 명신학교 등 18개 학교, 화룡현내에서는 상광포, 어랑촌, 류동, 청산리, 청파호, 장재촌, 걸만동 등을 비롯한 12개 마을과 명동학교, 창동학교, 광동학교, 정동학교 등 19개 학교, 왕청내에서는 류수하, 대감자, 덕원리, 서대파, 봉오동, 합수평, 라자구 등을 비롯한 11개 마을과 명동소학교, 원동소학교 등 5개 학교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소탕’과 학살을 감행하였다.”(김춘선 “경신참변연구”)
중국지방관원 장순사(張巡師)와 포대사(鮑大師) 등이 1920년 11월 5일 외교총장에게 한 보고에서는 “간민들이 모여사는 부락을 한당들의 근거지라고 하면서 온 마을을 불살라버렸으며 조선인농민들 대부분을 살해했다.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마을을 골라서 몇집 또는 몇십집씩 불살랐고 몇명 또는 몇십명씩 죽여버렸는데 가는곳마다 불타버린 집과 시체가 있었다. 이들 태반이 밭가는 농민들이였지 결코 무기를 들고 떼를 지어 소란을 피우는 무리가 아니였다. 이렇게 마음대로 참살하는것은 실로 인간성이라곤 털끝만치도 없는 일이다”고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였다.
피로 물든 연변땅
“경신년대학살사건 하면 흔히 ‘장암동(獐岩洞)참안’을 전형으로 렬거하고있는데 그것은 당시 가나다 목사들이 조사한 자료를 신문을 통하여 세상에 공포하였고 지금도 그 기록들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연변에는 ‘장암동참안’같은 사건이 아주 많습니다. 의란구는 여러차례 토벌을 당했는데 구룡평, 고성촌, 류채촌, 태양촌, 련화촌은 일제의 살인현장이였습니다.”
박창욱교수는 일제가 마수를 뻗치지 않은 곳이 연변 어디에도 없을것이라고 한다.
구룡평은 의란구의 중심지이고 고성촌은 구룡평에서 서북쪽 15.5키로메터 떨어진 주위가 산으로 둘러싸인 자그마한 분지에 자리잡고있으며 류채촌은 구룡평에서 동북쪽 3.5키로메터 떨어진 산지대에 자리잡고있다. 태양촌은 구룡평에서 서북쪽 5키로메터 떨어진 산골짜기에 있고 남동이라고도 불리우는 련화촌은 구룡평에서 15.3키로메터 떨어진 산지대에 자리잡고있다. 의란구에는 당시 간도국민회와 의군부가 있었는데 방초령에다 국민회군의 사관훈련소까지 설치하고있었다. 의군부가 고성촌, 련화촌 등지에 자리잡고있어 의란구는 반일부대의 탄탄한 후방기지이기도 했다.
1920년 10월부터 일본군은 의란구일대를 여러차례 “토벌”하였다. 1920년 10월 20일 일본군 제19사단 이시쯔가대대는 의란구“토벌”을 감행하여 리동근, 리종옹, 김득산, 윤남극, 강경성, 김해룡, 김순지, 김락세, 리붕재 등을 살해하였다. 며칠후인 24일에는 일본군 74련대가 의란구를 토벌, 양만홍, 리태미, 리근치, 리렬 등 10여명을 살해하고 학교 1채와 민가 5채를 소각해버렸다.
11월 3일에는 반일사상을 고취하고 반일부대의 군자금모집과 정보수송을 하였다는 리유로 일본군 76련대가 재차 의란구를 토벌하여 리국화, 리일재, 김렬, 리명초, 리진철, 리창옥, 김성운, 리종란, 리종눌, 리여익, 리여영, 리병재, 허익, 최병조 등 16명을 살해하였다.
11월 3일, 5일 일본군 76련대는 불령선인가족이라는 리유로 북의란구에서 김창홍, 로우선, 김렬의집을 비롯한 31채의 민가를 불살라버렸으며 3일과 4일에는 태양촌에서 반일단체를 조직하고 반일사상을 고취하였다는 리유로 교원 리우선 등 2명과 농민 리주향, 리수악 등 13명을 살해하였다. 11월 5일 의군부 총무 리우익, 서무부장,리을, 홍정필을 비롯한 10여명이 일본군에 의해 살해되였다.
당시 연변에 파견되여 현지조사를 한 “대한신보” 기자는 “독립신문”(1920년 12월 19일)에 이렇게 보도했다.
“의란구 남쪽은 전부 30여호 되는 리성(李姓)촌인데 3명이 근히 성명을 변하여 해탈되고 그 여의 전수가 학살되였으며 모씨의 4형제는 소화(燒火)되는 가옥중에 던져넣어 분살(焚殺)하였다 합니다. 그외에 수 3명, 혹은 10여명의 학살은 없는데가 없습니다, 방화도 그러합니다.”
당시 연변주재 림시정부 통신원이 “독립신문”(1920년 12월 8일)에 투고한 조사자료에 의하면 26,265명이 학살되고 71명이 강간당했으며 3,208채의 민가, 39개의 학교, 15개소의 교회당, 53,265섬의 곡식이 소각되였다. “독립신문”은 1920년 12월 19일자 보도에 상기 조사통계의 추가조사에서 연변지구에서 146명이 더 학살되고 민가 78채와 학교 2개소, 교회당 4개소가 더 소각되였다고 했다.
침략자의 야수적 만행
당시 룡정에 거주하고있던 카나다장로파 장로교회의 의사인 말틴이 쓴 연변참안 “견문기”가 서방 각 나라 신문에 보도되여 세계를 들썽해놓았다. 하여 일본침략자의 야수적죄행이 세계여론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견문기”에는 이런 대목이 적혀있었다.
나는 10월 31일 일요일, 북경식마차로 12마일 떨어져있는 비암촌을 향해 룡정에서 출발했다. 10월 30일에 벌어진 일을 조사해보려는데서였다. 그날 날이 채 밝기전 무장한 일본군이 이 촌락을 포위하고 쌓아놓은 낟가리에 불을 지르고 집안의 사람들더러 밖으로 나오라고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밖으로 나온 사람들은 모두 총살당하였다. 채 죽지 않으면 그우에다 불붙는 곡식단을 들어다 무지군 하였다.
가까운 거리에서 세 번이나 사격하후에도 불속에서 숨이 붙어 일어나는자가 있게 되면 총창으로 찔렀다. 마을 성년남자들이 한사람도 남지 못하고 학살당하는 광경을 옆에서 보도록 부녀자들을 강박하여 끝까지 서있게 하였다. 그런후 일본군은 유유히 돌아가서 천장절(天長節)을 경축하였다.
나는 19채의 집이 불에 탄것을 사진 찍고 총살당한 시체도 사진 찍었는데 이는 일본군이 방화한지 36시간이 지난후였다.
나는 학살되고 방화당한 32개 촌의 마을 이름과 정황을 잘 알고있다. 한 마을에서는 145명이 살육되였다. 30명이상 살해된 마을이 많다. 서구동에서는 14명을 한줄로 세워놓고 총살한후 석유를 쳐서 불태웠다. 일본군사령관은 외국인에 대한 인신안전을 보장하여 주지 않기 때문에 나는 려행할 수가 없었다.
일본군의 살인수단은 극히 잔인하였는데 연길현 와룡동의 창동학교 교사 정기선은 얼굴가죽을 몽땅 벗기우고 두눈을 도리운채 처형당했다. 어떤자들은 총창에 찔려 아우성치는 참상을 보고 미친 듯이 웃으면서 기뻐했으며 2-3세 되는 어린이를 총창에 찔러들고 어린아이가 아우성치는 것을 보고 손벽을 치며 좋아했다.
투도구에서는 전선을 절단하였다는 혐의로 12살나는 조선아이를 붙잡은후 아무런 조사도 없이 목을 잘라 전선줄에 꿰여 효시했다. 연길현 춘양향(왕청현 하마탕) 일대에서는 무고한 조선인 3명을 붙잡아 쇠못으로 손바닥에 구멍을 뚫은후 쇠줄로 손과 코를 꿰여 10여리를 끌고다니다가 총살하였다.
연길현 제3구의 남녀로소는 아무런 리유도 없이 사살당하였고 의란구의 12명 조선인들은 부근의 산고개에서 기무라지대의 토벌대에게 생매장당했는데 이듬해 봄에 마을사람들이 시체를 찾아보니 온통 칼자리뿐이였다. 토벌도중 야수같은 일본군은 소영자에서 25명 부녀를 강간하였으며 이도구에서도 20여명 부녀를 강간하였다. 간악한 일본놈들은 소녀를 붙잡기만 하면 꼭 강간한 다음 학살하였다.
당시 “독립신문”은 간도학살사건을 이렇게 하소연하였다.
불쌍한 간도동포들 3천명이나 죽고
수십년 피땀 흘려 지은 집
벌어들인 량식도 다 잃어버렸다
척설이 쌓인 이 겨울에 어떻게 살아들 가나
뻔히 보고도 도와줄 힘이 없어
속절없이 가슴만 아프도다
나라 잃고 기름진 복지를 떠나
삭북의 살길을 그 동지조차 잃어버렸구나
오늘 밤 강남도 추운데
장백의 모진 바람 오죽이나 추우랴
아, 생가키우는 간도의 동포들
일본침략자들의 야수적만행에 전국인민들이 분노하여 일어났다. 북경, 심양, 장춘, 길림 등지의 학생들은 거리에 뛰쳐나와 강연회, 집회를 열어 일본침략자의 침략죄행을 성토하였으며 북경정부와 봉천당국에 대표를 파견하여 주권을 보호할것을 청원하였으며 일본침략자가 연변에서 즉각 철거할것을 요구하였다. 날로 앙양되여가는 연변지구의 여러 민족들의 반일투쟁과 전국인민들의 강력한 항의밑에 일본침략자들은 1921년 5월 할수 없이 철퇴하였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