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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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철호| 작성일 :12-11-25 06:01|본문
명동과 명동학교
중국조선인근대문화의 발상지
반일민족교육인재양성의 요람
명동의 5대가족
선바위는 장려한 바위산이다. 지신진 신동골어구에 우뚝 솟은 선바위는 아무때 보아도 그렇다. 대지주 동한(董閑)이가 이곳 땅을 차지하고있을 때만 하여도 선바위를 비둘기바위라고 불리웠다고 한다. 깎아지른 층암절벽사이에 비둘기들이 둥지를 틀고 살았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였던것이다.
1899년 2월 18일, 김약연 등 회령과 종성에서 유학자로 소문높던 4대가족 142명이 하루사이에 여기에 이사왔다. 그때부터 비둘기바위를 선바위로 이름을 고쳤는데 아마 민족의 강한 절개와 굳은 신념의 표현이였을것이다. 선바위에 오르면 오랑캐령에서 발원하는 륙도하 량켠의 마을들이 한눈에 안겨온다. 장재촌, 동거우, 룡암촌(지금의 명동촌), 중영촌, 성교촌, 퐁락촌, 수남촌...
“명동지방의 민족공동체와 반일기지의 형성에 있어서 지도적이고도 핵심적인 역할을 한것은 김약연을 위수로 한 5대가족인데 이들은 새로운 민족공동체를 건립하고 반일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조선에서부터 계획적으로 이곳에 이주하여 왔습니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을 바라보노라니 떠날 때 들려주던 연변대학 력사교수 박창욱선생의 말이 떠오른다. 박교수는 5대가족에 대하여 하나하나 소개해주었다.
남종구는 종성5현의 한분인 남명학의 손자인데 이주시엔 환갑이 넘은 로인이였다. 그는 7명의 가족을 거느리고 제자인 김약연을 따라 명동지구로 이사해온것이다.
김약연은 일족 31명을 거느리고 명동에 이주, 처음에는 경제형편이 너무도 빈궁하여 땅도 없었으나 동생 유연이와 함께 7도구의 산골에 가서 황무지를 개간하여 거기에서 얻은 수확고로 동한지주의 집과 림야를 사서 1901년 규암재를 꾸렸다. 김하규는 일가족 63명과 함께 명동에 이주, 명동마을 건설에 큰 공헌을 하였다.
문병규는 일가족 40명을 거느리고 명동에 이주하여 왔다. 로동력이 많고 재력이 있어서 4대가족중 제일 부유했는바 룡암촌과 중앙촌에 이르는 넓은 벌을 가지고있었고 대사동에도 밭과 가산이 있었다.
윤하현은 1900년에 명동으로 이사하여왔으니 4대가족 집단이주에는 속하지 않는다. 부친 윤재옥의 인솔하에 1886년 종성에서 광개향 자동에 이주하여와서 황무지를 개간하여 돈을 모았다. 후에 일가족 18명을 거느리고 명동으로 이사와서 룡암촌에 정착, 토지와 재산이 꽤 되었다.
“명동에 집단이주한 5대가족은 북부조선에서 빈궁하여 살길을 찾아온 기타 류랑민과는 달리 세대로 내려오면서 관북에서 변경방술에 종사하던 무반출신의 후손들이였다. 그들은 모두 종성5현의 후예들이거나 문하사람으로서 학식이 있고 다소나마 재력도 있는 유학자들이였지요. 그들이 집단이주한 목적은 척박하고도 값이 비싼 조선의 땅을 팔고 비옥하고도 값눅은 연변의 땅을 많이 사서 개간하여 잘살아보자는것이였고 썩어빠진 조선에서는 어찌할수 없으니 중국의 연변땅에 가서 조선민족의 ‘밝은 사회’를 건설하고 새 살림을 하자는것이였지요. 그리고 새로운 환경에서 구국구민(救國救民)을 위한 후대양성을 하자는것이였습니다.”
이들의 이주목적에 대해 박창욱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명동학교
선바위에서 내려 륙도하를 거슬러 포장도로를 따라 조금 걸으니 장재촌이다. 장재촌마을 뒤산기슭에 멀리서도 유표한 보이는 봉분 세 개가 있다. 김약연과 부인 안연, 장자 김정근의 묘소이다.
1901년 김약연은 자기 동생과 함께 장재촌에 있는 80평방 되는 한족집을 사서 “규암재”란 서재를 꾸린 다음 20여명의 학생을 받아들인 뒤를 이어 대사동에서는 김하규가 “소암재”, 중영촌에서는 남위원이 “함한서재” 등을 세웠다. 그들은 모두 스승과 제자가 힘을 모아 자체로 학전(學田)을 개간하였으며 학전에서 나는 소출로 서재를 꾸려나갔다.
1908년 명동에서는 근대지향의 신형의 학교를 꾸리려고 규암재, 소암재, 중영촌 함한서재를 합쳐서 명동서숙을 세웠는데 룡정의 서전서숙의 근대지향인 반일민족교육방침을 계승했다. 세개의 서숙이 합쳐서 꾸려졌기에 부근의 10여개 마을이 련합하여 더욱 큰 명동공동체를 이룰수 있는 계기를 마련, 금후 투철한 민족리념, 민족정신, 민족의지로 근대화한 반일민족교육을 진행할수 있는 토대를 닦아놓았다. 이때로부터 주위의 마을을 망라하여 명동이라 통칭했는데 “밝은 조선민족의 새 민족공동체라는 뜻”(박창욱)이다.
1909년 북간도교육단 단장 정재면이 명동에 왔다. 그의 영향하에 김약연 등은 근대화한 신형의 학교를 꾸리고저 명동서숙을 “명동학교”라고 개칭하였으며 김약연을 교장으로, 정재면을 교감으로 문치정을 재무원으로, 최봉기를 서기로 하는 학교의 지도부를 내왔으며 유가사상을 버리고 기독교를 신앙하면서 근대적인 민주, 민권, 자유, 평등 사상을 수용하게 되었다.
1910년 3월에는 연변에서의 첫 민족중학교를 병설하여으며 황의돈, 장지영, 박태환, 김철, 김성환, 김승근, 박경철, 김순문, 김치관 등 학식이 연박한 반일지사들을 교원으로 초빙하여 교육의 질을 높였다.
1911년에는 또 리희순, 정신태, 조선에서의 첫 녀기자인 우봉운 등을 초빙하여 연변에서의 첫 녀자민족학교를 병설했다. 그리고 마을에는 야학부를 꾸려 어른들의 문맹을 퇴치해주었다.
장재촌을 지나 계속 걸으면 길옆에 “윤동주생가”라고 새긴 자연석으로 된 석비가 한눈에 안겨오는데 길아래마을이 바로 명동촌이다. 마을에 들어서니 커다란 기와집이 한눈에 안겨온다. 새로 복원된 명동교회당이다. 교회종각이나 십자가는 보이지 않지만 그 옛날의 종교적분위기가 다분이 안겨오는 교회당이다. 마당 한쪽의 기와비각속에 김약연공덕비가 모셔져있었는데 공덕비는 모진 세월속에서 깊은 상처를 입고있었다. 웃모서리가 사정없이 끊기여버린것이다. 교회당옆에 마을의 정미소가 있고 정미소 왼켠에 난 길에 들어서면 금방 윤동주생가에 닿을수 있다. 8간기와집으로 된 윤동주생가 마당은 언제보나 깨끗하다.
몇 년전에 찾아왔을 때만 하여도 물을 기러 마셨댔는데 우물은 작년 장마에 꺼져버려 볼품없이 되어있었다.
명동학교자리는 마을의 중심지에 위치해있는데 지금은 다 허물어지고 밭으로 쓰고있었다. 룡정시문화유물조사자료에 따르면 명동학교는 원래 4채의 단층건물로 되어있었다. 학교본부가 차지한 집은 길이 33메터, 너비 6.5메터였는데 서남향으로 앉은 단층벽돌집이였다. 이 건물 서북쪽 50여메터되는 곳에 동남향에 길이 24메터, 너비 6메터되는 단층집이 있었는데 남자중학부였고 본부 동쪽 150메터되는 곳에 서남향으로 길이 26메터, 너비 6메터되는 단층건물이 있었는데 녀자중학부였다고 한다. 학교의 운동장은 본부의 동북쪽에 있었다.
흰 뫼(백두산)가 우뚝 솟아 은택이 호대한
한배검(단군의 검)이 깃 치신 이 터에
그 씨앗 크신 뜻 넓히고 기르는 나의 명동...
쓸쓸한 터밭을 향해 서있을라니 “명동학교교가”를 부르면서 발걸음도 씩씩히 군사훈련을 하던 열혈청년들의 기세 드높은 목소리가 귀전에 울리는것 같다. 명동학교에서는 조선어문과 조선력사 교수를 학생들이 민족의식을 제고하는데 있어서의 가장 중요한 과목으로 지정하고있었다. 조선어문에 있어서 민족 글과 말을 알게 하는 것은 민족문화의 향상과 보급의 기초이며 문화 향상과 보급은 민족생존과 실력양성의 첩경이라고 인정되였다.
력사교육에서는 1915년 조선에서 편찬한 금서로 된 “유년필독”, “오수불망”, “대한사략”과 연변에서 계봉우가 편찬한 “최신동국사”, “월남망국사” 등을 교재로 하여 학생들에게 애국애민의 가치관, 침략자에 대한 반항정신을 불어넣었다. 력사학교수 황의돈, 리기창은 력사과작문에서 학생들의 작문이 아무리 좋아도 “반일”과 “민족독립”이 없으면 점수를 주지 않았는데 이는 교장 김약연을 위수로 한 학교의 전통으로 되었다.
창가 역시 명동에서는 조선어문과와 마찬가지로 중시되였는데 창가는 민족의 존엄성과 적에 대한 저항정신을 제고시키는데 작용이 켰다.
체조는 병식체조를 말하는데 앞으로의 반일무장투쟁을 위한 준비로 되었고 학생들을 일정한 군사기초지식이 있는 반일무장투쟁의 결사대, 전위대로 육성하기 위한것이였다.
민족의식에 대한 제고는 일제에 대한 증오에서 깊이 표현되였다. 교장은 “日本”을 “曰本”으로 또는 “倭놈”으로 불렀고 학생들도 따라했다. 후에 중국의 비행사로 된 서일포는 자기의 이름자에 있는 日자를 曰자로 고쳐 서왈포로 고쳤다.
학교의 명절에 사용하는 만국기에는 태극기는 있으나 일장기는 없었고 지리부도에도 조선을 독립국가로 여기면서 일본본토와 색깔을 달리 색칠했다. 명희선교원은 가끔 옷을 거꾸로 입고 다녔는데 그것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였으니 “세상이 거꾸로 되었다는것”을 학생들에게 인식시키기 위하여서였다. 1910년부터 1925년에 명동중학교가 페쇠되기까지 15년간 명동학교에서는 1200여명의 졸업생들을 배출하였는데 그들중에서 저명한 반일인사와 교육자, 수많은 반일무장투쟁이 투사들이 나타났다.
국민회와 간도청년회의 지도자들인 마진, 남세극, 최기학, 마룡하, 박창익, 윤영식, 김석관, 김정규 “3.13”반일시위운동에서 희생된 윤준희, 림국정, 한상호,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희생된 많은 결사대원들, 경신년대토벌에 학살당한 김순문을 위수로 하는 의사들 그리고 민족주의자로부터 공산주의자로 전변한 송산우, 연화혁명위원회 군사부장 마천룡, “8.1”길동폭동의 지도자 마천목 등은 다 이 학교의 종업생들이다. 20년대후에도 많은 인재들이 나타났는데 조선영화의 창시자 라운규, 비행사 서왈보, 시인 윤동주, 송몽규, 작가 김창걸 등이 그런 인물들이다.
명동학교가 반일민족교육인재양서의 요람으로 명성을 날리자 북만과 로령의 연해주와 씨비리야, 조선국내에서까지 많은 젊은이들이 류학을 왔다.
행동이 곧 나의 유서
“김약연목사님은 언제나 조용하신분이였습니다. 천둥이 쳐도 끄떡하지 않을 그런 분이시였어요. 언제나 한복차림을 정히 하고 넙적고무신을 신었습니다. 구변과 웅변에 능하셨고 사리가 밝고 인정스러운 분이시였답니다. 내가 어릴 때 부모들을 따라 교회에 나갔는데요 목사님이 나를 업어주었어요. 목사님은 남을 욕하는 법이란 없었답니다. 그분이 교장으로 계실 때 강의하시다가도 누구든지 강의에 집중하지 않으면 회초리를 들고 자기의 종아리를 쳤다고 하데요. 학생을 책망할 대신 자기가 강의를 잘못했기때문이라고 스스로 자책을 했다는겁니다.”
명동학교 교장으로 일하다 퇴직한 김재현씨의 말이다.
유가(儒家)사상을 숭배하던 김약연은 신앙마저 바꾸면서 근대적인 민주, 민권, 자유, 평등사상을 수용하게 된다. 그들의 영향으로 하여 유교만 고집하던 민중들은 신문화를 접수하면서 기독교를 신봉하게 되었는바 1913년의 통계에 의하면 교회와 학교가 병립된것이 36개소, 그 영향으로 세워진 사립학교가 62개소나 되었다.
김약연이 쓴 “동만료회 30년력사”라는 글에는 “3국전도회의 본부가 명동에 있다보니 각 교회와 학교의 임무가 거의 전부가 명동학교 출신으로 충당였다”고 씌여있다. 이런것을 미루어보아 연변에서의 기독교문화의 전파, 기독교를 통한 사립학교와 신문화의 발전은 명동으로부터 시작되였다고 할수 있다.
김약연은 서양문화인 기독교를 접수하면서도 민족의 리념, 사상과 의지만은 잊지 않았으며 민족정신을 언제나 주되는 위치에 놓았다.
“명동이 중국조선민족문화의 중심지로 되게 된 것은 김약연같은 훌륭한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박창욱교수는 김약연에 대한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무진장했던 김약연은 무슨 일에나 앞장섰다고 한다. 나무를 메여도 세사람몫을 담당했고 기와나 벽돌을 구울 때에도 힘든 일을 남먼저 하면서 기술을 제자와 마을 사람들에게 남김없이 배워주었다. 후학들의 교육사업을 위하여 자신들의 토지가운데서 10/1의 제일 좋은 토지를 학전(學田)으로 바쳐 공동소유로 하게 하였는데 1930년대에는 8만평으로 증가되였다.
그는 자기의 재산을 거의 전부 공동체에 바쳤다.
반일의사 안중근, 구춘선 등과 친분을 맺으면서 구국의 방도를 토의하기도 하고 독립의 꿈도 무르익히기도 하였다. 일제가 명동을 눈에든 가시처럼 여기면서 명동을 “불령선인의 소굴”로 간주하고 감시와 취제를 늦추지 않던 1919년 3월 21일, 김약연이 간도대표로 로씨야의 니꼬리스크에 파견되였다가 돌아와보니 일본경찰들은 그를 체포하려고 혈안이 되어 날뛰였다. 그러나 청나라에 입적한 김약연은 청나라 당국에 의해 2년동안 연금되여 일제의 체포망을 피할수 있었다.
1922년 연금에서 벗어난 그는 어느덧 55세의 나이가 되었다. 반일민족운동은 일제의 미친듯한 토벌로 저조기에 들어갔으며 사회주의사조가 바야흐로 일고있었다. 1924년에는 자연재해로 하여 경제가 매우 어렵게 되었다. 게다가 룡정이 새로운 문화도시로 된 형편에서 그는 마을사람들과 상론하여 중학교를 은진중학교에 넘기기로 하고 소학교만 명동에 남겨두었다. 김약연은 2년동안 정재면, 구춘선, 마진 등과 련계를 맺어 간도국민회를 다시 세우려 하였으나 실패하고말았다.
1929년 61세의 김약연은 평양신학교에 가서 1년간 수학하고 목사로 된다음 명동으로 돌아와서 명동책임목사로 되어 기독교활동에 전념하였다. 그러다가 형편이 어려워지게 되자 1937년 룡정으로 이사와서 은진중학교와 명신녀자학교의 리사, 리사장으로 있다가 1942년 광복의 날을 맞이하지 못하고 “나의 행동이 곧 나의 유언”이라는 유언을 남기고 별세하였다.
김약연의 제자 림재준은 스승을 이렇게 찬송했다.
“규암선생의 일생은 맹자가 수양했던것과 가까운바 담담하나 싫지 않고 간단하나 고상하며 온화하면서도 리지적이였습니다. 선생의 일생에서 먼것은 가까운데서 비롯됨을 알수 있고 그 행동에서 결백함을 알수 있으며 사소한것에서 현명함을 알수 있습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