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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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철호| 작성일 :12-11-18 08:15|본문
룡정시 개산툰진 선구촌 제6촌민소조에서 보이는 꼬리섬.
“간 도”
“월강죄” 두려워한 거짓말 “간도농사”
향연짙은 력사의 지명ㅡ“간도”로
하산봉 농사군 리영수형제
강건너 땅이 얼마나 기름졌으면 버들이 우거지고 풀들이 키를 넘을가. 대한재로 하여 말라빠진 자신들의 밭을 바라보면서 조선의 리재민들은 마른 침을 삼키면서 이렇게 탄식했으리라. 그리고 고양이 기름종지 노리듯 북안기슭을 향해 살금살금 다가섰을것이다.
19세기 60년대 조선 종성군 하산봉에 사는 농사군 리영수형제가 끝내 죽음을 자초하는 기아와 맞서 도발적인 행동을 감행한다. 떼목을 타고 용감히 강을 건넌것이다. 그리고 버드나무를 찍어내고 풀을 베여내여 밭을 일구었다.
그때를 선구촌 제1촌민소조의 농민시인 심정호씨는 이렇게 말한다.
“로인들한테서 들은 얘긴데 130년전에 종성 하산봉의 리영수형제가 떼목을 타고 강을 건너와 이 천평벌에 첫괭이를 박았다고 그럽니다. 그 먼저 종성사람들은 저 뚝너머 사이섬에서 농사질을 했다는군요. 리영수형제는 월강죄가 무서워 사이섬에 가서 농사를 지었다고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 다음부터 저기 산너머 마늘골이랑, 애끼골이랑에 가서 밭을 일구었고 석정골이며 연집골까지 들어가 화전을 일구면서도 사이섬에 가서 농사짓는다고 거짓말을 하잖으면 않됐다더군요.”
선구촌 제6촌민소조 마을앞 두만강언제에 올라서면 심정호씨가 말하는 사이섬이 한눈에 안겨온다. 마을사람들은 이 섬을 “미도(尾島)” 혹은 정답게 “꼬리섬”이라고 부른다. 얼마전까지도 사이섬에는 조선농민들의 농막이 있었으며 조선농민들이 나룻배를 타고 건너와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이런 섬이 두만강에는 아주 많았는데 “꼬리섬”은 그중 큰 섬이였다. 조선 농민들은 감히 륙지를 범하지는 못하고 그저 이런 섬들을 개간하여 왔댔는데 이번에 리영수형제가 담도 크게 이 벌에 첫괭이를 박은것이다.
물론 가을이면 곡식을 떼목에 싣고 돌아가서는 정부의 눈을 속이기 위해 여유작작 사이섬 즉 “간도(間島)”에 가서 농사를 지어왔다고 거짓말을 했을것이다. 그후 농사군들은 절골(애민촌), 애끼골(제동), 자동, 후동 등 광제욕지역은 물론 석정과 연집 등지에까지 파고 들어와 화전을 일구어 가면서도 “간도”에 가서 농사를 짓는다고 했다. 그때로부터 “간도”란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면서 아예 강건너 땅을 “간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간도(間島)”와 “간토(墾土)”
1883년 청나라와 조선 두 나라의 변계가 “길림조선상민무역지방장정”에 의해 개방되고 연변지구에 대한 봉금령이 페제되면서 월간국이 설치되게 되었다. 하여 많은 조선농민들이 연변땅에 들어와 황무지를 개간하게 된다. 땅을 개간한다고 하여 연변지구를 “간토(墾土)”라고 부르게 되였는데 조선말의 “간(墾)”자와 “간(間)”자가 같은 음이고 “도(島)”자와 “토(土)”는 근사한 음이여서 민간에서는 구별없이 “간도”라고 불렀다. 조선 리재민들이 끝임없이 두만강을 건너 내지로 깊숙히 들어와 거주하는 범위가 넓어짐에 따라 간도라는 범위도 커졌다. 두만강이북인 연길, 화룡, 왕청, 훈춘 등 지역을 “북간도”라고 불렀고 압록강이북지구를 “서간도”라고 불렀다.
“중조량국간에 간도문제를 둘러싸고 시비가 생긴 것은 1903년 ‘간도시찰사’로 임명된 리볌윤이 중국측 월간국에 ‘간도’는 ‘땅이 50결(結, 1결은 약 10상)이나 되는데 강복판에 있고 원래부터 조선인들이 개간, 경작했기에 조선의 령토이다’라고 주장하면서 부터서였습니다. 이때로부터 ‘간도’란 낱말이 외교에서 사용되였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이렇게 말하면서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1》에 기재된 자신의 글 “ ‘간도문제’의 발생과 일제의 ‘통감부 간도림시파출소’ ” 라는 제목의 글을 상기시킨다. 그 글에서 박교수는 이렇게 지적하고있다.
“두만강류역에는 크고 작은 허다한 ‘섬’들이 있었는데 그중 제일 큰 섬을 ‘간도’라 하였다. 《동삼성정략》이나 《연길변무보고》의 기재에 의하면 ‘간도’는 원래 ‘섬’이 아니다. 지금의 룡정시 광개향의 선구, 광소촌과 조선 종성 사이로 흐르는 두만강의 중국측강안에 길이 약 10리, 너비 1리가 되는 2,000여무의 ‘복새험’이 있었는데 그 복새험은 광제욕(光霽)에 잇대여 있는 륙지였다. 이 ‘복새험’이 어느때부터 개간되였는지는 알수 없으나 1881년 연변지구의 봉금제가 페지되자 월경한 조선족간민들이 광제욕앞을 개간하느라고 물길을 뺀후부터 ‘복새험’은 사방이 강물에 둘러싸인 ‘섬’으로 되었다. 당시 한족들은 이 ‘섬’을 ‘가강(假江)’ 또는 ‘강통(江通)’이라고 불렀고 조선족간민들은 ‘간토(墾土)’ 또는 ‘간도(間島)’라고 불렀다. 이로부터 조선족간민들에게서 ‘간도’란 칭호가 나왔다. ‘간도’땅은 주로 조선의 종성농민들이 중국의 월간국에 조세를 바치면서 경작하였는데 매년의 조세총액은 800여냥에 달하였고 월간국에서는 조세를 받아 월간사무비로 사용하였다.”
일제가 조작한 “간도문제”
“봉금령”이 취소되고 “월강금지령”이 페지되자 수천수만의 조선인들이 터진 홍수마냥 연변으로 밀려들었다. 하여 각지에 조선족마을이 생겨나게 되였다. 1883년, 청나라 조정에서는 화룡욕(지금의 룡정시 지신향소재지)에 통상국을 앉히고 두만강이북 길이 700여리, 너비 50여리에 달하는 구역을 조선족간민의 개간구역으로 확정하고 행정관리를 강화하였다.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원 연변력사연구소 소장 권립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당시 청나라는 변방보위 수요로부터 출발하여 군량을 해결하기 위하여 조선족이주민들을 받아들이고 관리하는 기구인 월강국을 세우고 전문 조선족의 개간사무를 맡아보았습니다. 연변을 조선족의 전문개간구로 확정한 이것은 우리 연변력사와 조선족의 력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1905년 일로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료동반도와 남만철도 및 그 부속지를 강점하였을뿐만아니라 저들의 기정된 “대륙침략방침”을 실현하기 위하여 연변침략을 정식으로 확정하였다. 하여 리범윤이 제기해오던 “간도”가 조선땅이라고 하면서 조선보호국으로 자처, 조선을 대신하여 “간도문제”를 해결한다고 하면서 “압록강, 송화강과 두만강 등 3개 강의 발원지일대에는 ‘독립소국’이 엄연하게 존재하며 이를 ‘간도’라고 부르는데” “ ‘간도’는 동서 760리, 남북 350리나되며 모아산(帽兒山, 길림성 림강현 소속)을 따라 흐르는 휘발하(輝發河)로부터 송화강이남일대의 지역까지 모두 ‘간도’지역에 속하는바 그 광활함은 우리 나라(일본)의 규슈(九州)지방에 해당된다. 이렇게 넓은 지역이 도대체 중국에 속하느냐 아니면 조선에 속하느냐 하는것은 아직도 단정하기 어렵다”고 했다.
당시 일본에서 “대륙침략의 선봉”이라고 할수 있는 구니도모는 《간도탐험기》에서 “간도란 압록강상류와 백두산구간에 있는데 백여년래 청국의 지배를 받지 않은 독립지역이며 지금의 인구 25만중 조선인이 약 20만을 차지하고 토지도 대부분 조선인이 차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간도”는 “응당 조선의 소속이 되어야 한다”고 떠들어대기도 했다. 한편 일제는 조선친일괴뢰정부를 사촉하여 “간도를 찾아줄것”과 “조선인을 보호해줄것”을 정식으로 일본에 제기하도록 사촉했다. 일본은 로씨야와 “비밀협약”을 맺는 등 교활한 수단을 피우면서 로씨야와 기타 렬강들의 “입을 막아”놓고는 1907년 8월 군경들을 간도에 파견하였다. 한편 일본군 소장 사이또 일행 63명을 룡정에 파견, 8월 23일부터 “조선총감부간도림시파출소”의 간판을 걸게 하고 이른바 간도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의 생명, 재산을 보호하는 사무를 보게 하였다.
그후 일제는 자의로 간도를 북도소, 회령간도, 종성간도와 무산간도로 행정구역을 획분하고 4개 구역에는 “도사장”을 임명하고 그 관할하에 41개 사, 290개 촌을 두고 사장, 촌장을 임명하였으며 신흥평, 국자가 등 14개소에는 일본헌병대분견소를 설치하고 헌병과 조선경찰을 배치하였다.
결국 일제는 력사문헌과 실지조사를 통하여 “간도는 조선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두만강변계문제를 리용하여 저들의 대륙침략방침을 실현하기 위하여 연변에 침입하였던것이다. 조선사람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연변에 들어온 일제는 그후 조선족들을 탄압하고 략탈하는 야수의 무리로 된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