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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건국초기의 조선민족 서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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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 :10-05-05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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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社會變動과 政治 環境

광복이후의 國共內戰이 1949년에 共産黨의 승리로 전쟁이 끝나고 10월 1일에 社會主義 새 중국을 建立하게 되었으나, 建國 후인 1950년에 韓國戰爭의 勃發로 朝鮮族 志願兵을 파병하게 되었고 그 결과 南北分斷과 수많은 민족 희생자를 낳게 된다.

1953년에 시작된 整風運動이 1957년에는 反右派鬪爭으로 발전하여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진 1958년에 시작된 大躍進 운동과 3년간 지속된 大凶年으로 朝鮮民族들은 굶주림에 허덕이다가 1963년에 겨우 회복되는가 싶더니 바로 10년 大動亂인 文化大革命으로 이어졌다.

現代 중국의 문화는 社會主義 체제 속에서 엄격하게 통제된 문화이다. 중국 성립 후 중국 共産黨이 주도한 政治路線鬪爭은 文學·演劇·映畵를 비롯한 모든 文化領域의 활동 방향을 좌우하였고 문화는 각 시기마다 흔들리는 社會政策의 여러 모습을 여실히 반영했다. 특히 文學·藝術의 領域에서는 毛澤東의 문예강화가 오랫동안 共産黨 중앙 정책의 지침이 되었고, 모든 문예작품과 활동에는 사상개조와 사회교육이라는 社會主義의 임무가 부여되었다. 그러나 黨의 지도가 너무 강경해지면서 문예창작이 침체되어 실제로는 단속과 자유화의 정책이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따라서 새 중국 성립 후의 변동기에 문예영역에 나타난 경향은 그 당시 노선투쟁 방향을 알려주는 확실한 지표가 되기도 하였다. 58년 大躍進運動 때 百家爭鳴·百花齊放이 제창되면서 한때 자유로운 氣風이 생겨났으나 反右派鬪爭으로 상황이 역전됨으로써 많은 文化人·學者가 右派分子로 몰려 追放된 것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가깝게는 文化大革命 때 모두 否定되면서 전통적인 京劇이 금지되고 革命模範劇으로 바뀐 적도 있었다. 또한 『紅樓夢』과 『水滸傳』 비판, 批林批孔 운동과 같이 역사상의 인물이나 문학작품을 비판하면서 그 이면에 현재의 특정 정치가나 政治 路線 세력에 대한 批判이 담겨 있는 中層構造的運動이 자주 실행되는 것도 중국 문예계의 특유한 경향이다.

2) 文聯의 成立

1949년 10월 1일 새 中國 즉 中華人民共和國이 創建되고 그 뒤를 이어 1952년 9월 3일에 延邊朝鮮族自治區 人民政府 성립을 공포하였는데, 이때로부터 朝鮮民族은 小數民族의 신분으로 중국 땅에서 自治權을 행사하면서 민족 문화를 계승하고 보급할 수 있게 되었다. 延邊朝鮮族自治區를 성립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은 바로 주덕해이다.

延邊文學藝術界聯合會(이하 文聯)의 전신인 延邊文藝硏究會가 1950年 1월에 창립되어 崔采가 주임으로 선출되었다. 1951년에 準備事業을 거쳐 文學, 戱曲, 무용, 美術, 音樂部를 설치하고 6월에 機關誌인 延邊文藝를 창간하였다. 1953년 7월 10일에 延邊文學藝術界聯合會로 개칭하고 初代主席으로 裴克(漢族)이 선출되었다. 이로서 건국 이후 朝鮮族 문화예술은 단체 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朝鮮族 文學家인 部主席 金學哲은 延邊文藝와 長白山 등 朝鮮文 文藝月刊誌를 創刊하여 文學, 音樂, 美術, 무용, 演劇, 촬영 등 창작성과를 교류할 수 있게 하여 朝鮮民族의 문학예술 보급에 앞장섰다.

1959년 8월에 中國作家協會 延邊分會가 성립된 뒤를 이어 1959년에는 音樂, 美術, 演劇, 撮影 등 협회가 성립되었다. 즉 延邊의 각 藝術團體는 中央會 直屬 分會로 成立되는 것으로서, 中央에 협회가 있어야만 분회 설립이 가능했다. 이 시기에는 아직 中國書法家協會가 성립되지 않았기에 延邊에도 書藝家協會는 成立될 수 없었다. 서예는 미술의 한 개 분야로 분류되어 美術家協會에 포함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작품전시를 하여도 書藝作品을 출품하는 사람은 없었다.

1966년 9월에 無産階級文化大革命이 발발하자 文聯과 소속 각 협회는 혁명의 중점 대상이 되어 강제 해산되었다. 1978년에야 文聯과 소속 협회들이 정상을 회복하였다. 1984年에야 延邊書法家協會가 설립되어 12월 21일에 제1회 書法作品展을 개최하였다.

3) 書藝敎育

1949년 2월 성립된 延邊大學은 전국 최초의 朝鮮族 대학으로서 민족의 언어인 朝鮮語로 강의하였다. 7월에는 延邊師範學校 설립되어 소학교 교원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기지로 되었다. 1951년에 延邊師範學校에서 미술반 등 예능반 새로 설치하고 課外로 서예 등 여러 가지 예체능 활동 전개하였다. 당시 일본 留學生인 南大慶을 위주로 金永鎬 등 미술가들이 미술교육을 담당하였다. 첫해에 32명의 美術班 학생을 모집하였는데 이들은 1953년 7월에 졸업하여 延邊 각 중소학교 미술교원으로 배치 받았다.

1951년 8월에 遼寧省 靑源 朝鮮族師範學校 설립되고, 1953년에는 松江 朝鮮族師範學校 설립되었으며, 1954년 牧丹江市 朝鮮族師範學校 개교되었다. 이런 師範學校들은 모두 소학교 교원을 양성하는 학교였다. 때문에 소학교 교원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 소양을 가장 중요시하였는데 다른 과목과 더불어 ‘板書’교육을 병행하게 되었다.

1951년 8월에 延邊大學에서는 美術專科班을 창설하여 20명의 학생을 모집하였는데 石熙萬, 朴承九 등 미술가들이 교육을 받고 1953년 8월에 졸업한 후 東北三省의 각 중학교 교원으로 분배받았다.

1957년 10월에는 최초의 예술학교인 延邊藝術學校 설립되었다. 開校 초기에는 교원 13명뿐이었고, 전공으로는 음악과 무용뿐이었으나 그 후 미술전공 새로 설치하여 延邊의 미술발전에 기여하게 된다.

1957년의 整風운동과 反右派 鬪爭 그리고 1958년부터 1960년 12월까지의 大躍進운동을 거치는 동안 중국 朝鮮族 학교의 교과내용은 변화되기 시작하였는데, 고전작품이나 민족역사 등 내용은 삭제되고 당시의 정치형세를 따르는 문장들로 바뀌게 되었다. 또한 朝鮮族學校와 漢族學校를 병합하여 民族聯合學校로 개편하거나 교학언어를 한어로 교체하거나 혹은 朝鮮語敎學時間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과 같은 경향이 나타났다. 따라서 민족 서예교육 시간도 줄어들게 되었다.

1961년부터 文化大革命 직전까지는 민족교육이 다시 정상화되기도 하였다. 1963년 11월에 제정한 小學校朝鮮語文 編輯要綱에서 제시한 규정은 다음과 같다.小學校 조선어문교학의 목적은 학생들에게 본 民族의 말과 글을 정확히 이해하고 운용하게 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기본상 현대조선어문의 열독능력과 寫作 능력을 갖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교수목적에 도달하기 위하여 제기한 교학요구는 다음과 같다.

小學校 조선어문교학의 요구는 학생들이 조선어의 글자를 정확히 읽고 쓰며, 조선어 철자법을 기본상 장악하며, 상용어휘를 장악하며, 과문을 유창하고 표정적으로 읽을 뿐만 아니라 교사가 지정한 부분적 과문을 암송하여야 하며, 글씨를 단정하게 써야 하며, 일반적인 기서문과 실용문을 쓸 수 있되 중심이 명확하고 단락이 똑똑하고 조리가 있어야 하며 철자법과 띄어쓰기, 구두법이 기본상 정확하여야 한다.

이상의 교학요구에 맞춰 識字는 1학년 1학기에 기본상 완수하고 그 후 강독교학에서 계속 공고히 하며, 습자는 1학년부터 시작하여 3학년에 이르러서는 楷書體를 종합적으로 연습시키는 외 초서의 기본자형을 연습시키며, 1, 2학년에서는 연필, 3학년에서는 연필과 철필, 4학년에서는 철필을 쓰는 연습을 시키도록 요구하였다. 이처럼 초등학교 朝鮮語文 교학에서 습자교육을 병행 하도록 제정하여 서예교육의 맥을 이어갔다.

1949년 10월 1일 中華人民共和國이 창건되고 최초의 朝鮮民族 출판사인 延邊敎育出版社가 설립된 후에서도 ‘한글’교재를 出版하였는데 1952년 하반기에 와서야 ‘한글’을 ‘朝鮮語’로 고쳐 출판하였다. 그러나 건국 전에는 중시하던 습자과목이 폐지되고 독립된 科目이 아닌 朝鮮語, 圖畵 등 다른 교학시간에 곁들어 가르치는 정도로 그 중시가 약화되었다.

그나마 사범학교에서 서예교육을 중시하여 미래 교원들로 하여금 서예소질을 갖추도록 하였다. 延邊師範學校는 해방 후에 延吉師範學校, 吉林省民族學院 敎育學部, 延邊高級師範學校 등 연혁과정을 거쳐 1949년 7월에 소학교 교원양성을 위주로 하는 中等師範學校로 되었다.

1951年에 소학교 교육이 점차 정규화 됨에 따라 朝鮮民族 소학교에 예체능 교원이 대량 부족한 실정에 비추어 체육반, 음악반, 미술반, 무용반을 새로 설치하였다. 1956년에 이르러 朝鮮民族 소학교 교원 수요가 기본상 充足되었다. 그러나 소학교 재직교원의 과반수가 학력이 미달되는 실정에 비추어 2년제 재직 교원 硏修班을 개설하여 1957년과 1958년 2년 사이에 530명을 졸업시켜 원래 學校로 돌려보냈다.

이 시기에 延邊師範學校에서는 朝鮮語, 漢語, 數學, 敎育學, 心理學 등 基本 敎科目 외에도 음악, 書法, 무용 등 科目을 과외활동으로 배정하여 사범학생들마다 한 가지 이상의 기능을 갖추도록 하였다.整風과 反右派 투쟁을 거치고, 大躍進 운동을 거치는 동안 朝鮮民族의 문자인 한글은 정치에 휘말려 한동안 위기를 겪었다. 1958년 10월 전국 少數民族 敎材出版會議에서는 少數民族語文敎材의 편집원칙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중국의 것을 상세히 하고 외국의 것을 간략하게 하여야 하며 옛것을 적게 하고 오늘의 것을 많이 편집하여야 하며 통용교재를 위주로 하고 민족보충교재를 부차적으로 하여야 한다. 민족보충교재, 민족고전작품, 외국작품의 비례는 모두 합쳐서 30%를 초과하지 말아야 한다.

소학교 교재 편집 원칙의 내용에 보면 민족에 관련된 교재는 부차적으로 하되 외국의 작품과 합쳐서 30%를 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朝鮮語 교재에는 한글, 태극기 등 내용은 물론 朝鮮歷史 資料도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습자교육은 여전히 중시 하였다. 1964년 8월에 출판된 識字敎材의 교학 기본요구는 다음과 같다.

(1) 식자: 40개의 자모와 16개의 홑받침을 음절자, 단어, 문장가운데서 습득시켜야 한다. 이 가운데서 어음의 초보적인 분석종합의 개념을 형성시켜야 한다.

(4) 서법과 습자: 서법과 습자에서는 글을 쓸 때의 정확한 자세와 집필방법을 장악시키며 기본필획의 명칭을 알고 정확한 필순으로 글씨를 정확하고 단정하게, 고르고도 익숙하게 쓰며 습자용구를 아끼고 깨끗이 보전하는 습관을 길러주어야 한다.

이상의 내용에서 볼 수 있는바와 같이 이 시기에는 한글 습자교육은 識字敎育과 함께 병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집필법과 운필법, 결구, 필순은 물론 바른 자세와 습자도구를 애용하는 습관까지도 중시하였다.

건국초기 전국의 朝鮮族 미술·서예 일꾼들이라고는 延邊日報社, 延邊出版社, 東北敎育出版社와 중소학교의 몇몇 교원에 불과하였다. 그들은 모두 본 직장의 일상적인 사업에 종사하면서 잉여 시간으로 創作活動을 진행하였다.당시에는 書藝活動을 활발히 전개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다만 版畵家인 池昇元에 의해 한글서예가 빛을 보기 시작하였다.

지승원글씨-1956년 

池升元은 1946년 吉東日報 창간 시절부터 東北朝鮮人民報로 되었다가 延邊日報로 변경 된 후 1970년대까지 延邊日報社 美術編輯으로 재직하였다. 1953년에 그의 繪畵作品은 吉林省 제1회 美術展覽會에서 1등상을 수여 받았으며 1957년 全國美術展覽會에도 入選되었다. 池升元이 40여 年間 創作하여 신문에 실린 書藝, 컷, 圖案設計와 連續畵, 만화는 그 수량이 놀라울 정도로 많을 뿐만 아니라 예술적인 조예도 매우 깊다. 池升元은 동양화에도 조예가 깊다.

그는 <저녁 무렵>, <밭머리에서>, <손가락 권총>, <풍속도> 등 많은 동양화작품을 창작하였는데 특히 1972년에 창작한 ‘밭머리에서’는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 작품은 文化大革命 시기에 창작한 것으로 ‘화약 냄새’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主題가 선명하고 구도가 엄밀하며 기세가 당당하다. 필치가 유창하고 표현기법이 익숙한 이 그림은 70년대 중국의 시대적 정신을 비교적 선명하게 반영하였다.

池升元은 당시 延邊日報의 標題를 직접 썼는데, 해방 이후 최초의 한글서예 자료이기도 하다. 初期의 서체는 宮體와 흡사하며, 1960년대에 쓴 서체는 다소 朝鮮의 서체에 가까웠다. 이것은 서예를 접한 초기였을 광복 직후 한국에서 출판한 습자교재로 초등학교에서 궁체를 배웠고, 日報社 美術編輯으로 재직 當時에는 朝鮮의 인쇄물을 접하면서 朝鮮 서체의 영향을 받아 書風의 변화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池升元은 중국에서 한글 컴퓨터 폰트인 楷書와 明朝體를 개발하기도 하였으며 1982년에 延邊美術家協會 副主席으로 선출기도 하였다. 池升元은 후기에 延邊博物館 副硏究館員의 직함을 받고 재직하다가 1990년대 초에 퇴임하였다. 새 중국 창건과 함께 중국 이주 朝鮮民族은 중화민족의 일원이 되었으며 延邊朝鮮族自治州의 성립으로 민족 자치를 이루게 되었다.

민족 자치는 5천년 역사를 자랑하는 중국 문화 속에서 조선민족의 전통문화와 예술을 保存할 수 있는 중요한 요건을 제공한 것이며, 中國人들 속의 소수민족이라는 새로운 민족성을 형성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민족 자치를 실현하지 못하였다면 朝鮮族은 아마 옛 고구려 유민이나 발해유민들처럼 중국인에게 동화되어 민족의 문화예술을 잃어 버렸을 것이다.

건국 초기에는 鐵筆 글씨쓰기를 중시하여 교학요강에서도 습자에 대해 구체적으로 言及하였으며 습자교육은 건국 초기에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렇게 빛을 보이는 듯 하던 한글 서예가 1957년의 整風, 1958년에 시작되어 2년간 지속된 大躍進과 文化大革命이란 10년 大動亂을 거치는 동안 철저히 짓밟혀 다시 암흑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다행히 池升元에 의하여 한글 서예가 표지 글씨 등 실용적인 면에 쓰이기 시작하였다. 당시 池升元의 書風은 미성숙 단계이지만 宮體의 영향을 다분히 받아 화려한 筆劃으로 구성되어 우아한 개성을 연출하였으며 항일시기에 형성된 강인한 민족성에 의하여 궁체의 부드러움은 약간 벗어난 강직한 필획을 구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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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족'이라는 말을 쓰지 말자 인기글 작자 정인갑 우리 민족의 명칭은 ‘조선족’이다. 한어로는‘朝鲜族’이며 가끔 ‘朝’ 또는 ‘朝族’로 략칭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어떤 도서를 출판할때 '본 도서의 소수민족어 번역본 (蒙藏哈维朝语)도 곧 출판된다’'라는 기사를 종종 볼수 있다. 또 리력서의 민족을 적는 칸이 한글자밖에 쓸수 없을 정도로 작을때 필자는 ‘朝’자를 적어넣군 한다. 그러나 우리 민족을 '선족'으로 략칭하면 안된다. 왜냐하면 이는 일본식민주의자가 우리 민족을 폄하(贬下)하기 …(2010-05-21 09:57:44)
한국에서 생활 인기글 한국에 온지도 벌써 6년째다......어느덧 이렇게 세월이 흘렀는가 싶게, 6년이라는 세월이 한사람의 인생에서 결코 짧은 기간은 아닌데, 어언 한국에서 오래 보냈다는 의미네...요즘은 대학원 입학신청 해놓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두 학교 다 가능성은 크지만 그래도 모르는게 사람일이니 방심할수가 없는데, 이 기다려야 하는 두달동안이 정말 길어보인다.남편이 지금 다니는 직장도 부도의 위기속에 삐꺽거리고 있어서 다시 찾아야 할 판이라 요즘 머리가 사실 가볍지 않다. 그래도 다행히 남편이 하는 일은 구…(2010-05-21 09:54:06)
[열람중]중국 건국초기의 조선민족 서예 인기글 1) 社會變動과 政治 環境 광복이후의 國共內戰이 1949년에 共産黨의 승리로 전쟁이 끝나고 10월 1일에 社會主義 새 중국을 建立하게 되었으나, 建國 후인 1950년에 韓國戰爭의 勃發로 朝鮮族 志願兵을 파병하게 되었고 그 결과 南北分斷과 수많은 민족 희생자를 낳게 된다. 1953년에 시작된 整風運動이 1957년에는 反右派鬪爭으로 발전하여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진 1958년에 시작된 大躍進 운동과 3년간 지속된 大凶年으로 朝鮮民族들은 굶주림에 허덕이다가 1963년에 겨…(2010-05-05 10:24:45)
“이제는 명실공히 동포사회 구심점 역할 할 때가 왔습니다” 인기글 귀한동포연합총회는 최길도 신임회장 부임 이후 “새로 조직을 개편하여 각 부서의 업무를 분명히 하고 부서 책임감을 높이기 위하여” 지난 3월21일 오후, 서울 구로지회 사무실에서 제3기 1차 대의원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날 회의에서 최길도 회장은 총회 "제3기 김휴기 자문위원장 추천 및 위촉장 수여 및 전홍범 대의원회의장 …(2010-04-30 10: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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