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 청년가수 량춘화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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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09-04-22 09:31|본문
현대음악의 불길을 지피며
량춘화, 무대에만 나서면 언제나 발랄한 그녀, 목청도 표정도 행동도 활기로 차넘쳐 사람들은 모두 그녀가 근심도 걱정도 모르고 곱게 자라온 “공주”인줄로 착각하고있다. 하지만 실생활에서 그녀는 료리솜씨(특히 한식)가 일품일뿐만아니라 솔직하고 남을 배려할줄도 아는 녀성다운 이미지를 가지고있는것은 물론 특히 사랑에서 슬픈 주인공임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것이다.
순탄한 배움의 길
한마디로 그녀가 가수로 성장해온 길은 별다른 굴곡이 없이 순탄했다. 1978년 1월 12일 연길시의 한 보통로동자가정에서 태여난 량춘화는 여느집 맏손군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뿐인 남동생에게 엄마를 “빼앗기고” 어려서부터 전설같은 외할머니의 손끝에서 자라며 노래속에서 예술세포를 키워왔다. 바로 그제날 방초선 등 유명한 조선족예술인들과 함께 공연무대에서 노래를 불러 인기를 모았던 민요가수 김순자, 그 김순자가수의 외손녀로 태여난게 량춘화에게는 행운이라 할수 있는 부분이였다.
사실 당시 남편의 강력한 반대로 예술의 길을 포기해야 했던 김순자가수는 귀여운 손녀에게 자신이 못이룬 꿈을 기탁했던것 같다. 어렸을적 외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민요를 자장가처럼 들으며 단잠에 들던 일이며 그 노래에 맞추어 나풀나풀 춤을 추던 일들을 량춘화는 지금도 잊을수 없다. 그런 외할머니의 기대에 부응해서일가, 춤과 노래에 타고난 재질을 가지고있었던 량춘화는 일찍 6.1유치원시절 4살때부터 무대에 나서서 춤도 추고 노래를 불렀을뿐만아니라 중앙소학교시절에는 1학년때부터 문예반에서 활약하며 각종 소년아동노래콩클에 참가한것은 물론 연변라디오방송 소년아동프로에도 자주 선을 보여 꾀꼴새목청을 남김없이 과시했다.
량춘화가 오늘날 인기가수로 성장한데는 외할머니뿐만아니라 부모님들의 로고도 깃들어있다. 딸애의 예술적재질을 제때에 발견한 부모님들은 량춘화가 중앙소학교에 입학하던 날부터 과외로 소년궁에 다니며 음악을 배우게 했다. 결국 공든 탑이 무너지지 않듯이 외할머니와 부모님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량춘화는 중앙소학교를 졸업한 뒤 1988년도에 동북3성에서 4년에 1차씩 그것도 한번에 단 4명씩만 모집하는 예술학교시험에 무난히 합격되여 당시 예술지망생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꿈의 배움터ㅡ민악학부에 당당하게 들어섰다.
예술학교시절 유명한 성악교원 전화자선생님의 문하에서 성악을 전공한 량춘화는 예술학교생활 8년만인 1996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 예술단에 배치받았으나 천성적으로 활달한 성격이라 얽매이는게 싫어 결국 6개월만에 사표를 내고말았다. 예술의 꿈을 실현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직장이 있어야만 된다는 법이 없음을 그때 나어린 량춘화는 일찍 깨달았던것이다.
꿈의 무대에서 성공하기까지
남들이 선호하는 직장을 대담히 그만둔 뒤 량춘화는 곧바로 나이트클럽 등 밤무대를 전전하며 가수 겸 기획사로 장장 15년을 지내왔다. 그 15년간의 희로애락이 량춘화에게는 평생 잊을수 없는 기억이 되지 않겠나싶다.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를 부를 때면 그녀의 건드러진 노래에 도취된 손님들이 경쟁이라도 하듯 겨끔내기로 꽃을 안겨주는데 이 술상에서 10차 올리면 저 술상에서 20차씩 올려 팬들의 열광적인 사랑에 목이 멜 때도 있었다. 그런 손님들에게 보답하고저 술상을 찾아 술을 부어드리면 손님들 또한 그녀에게 무작정 술을 권하는 바람에 그렇게 마시는 술이 그녀에게는 곤혹이 아닐수 없었다.
당시 밤무대를 전전하는 한편 량춘화는 연변라디오방송과 연변TV에 노래실력을 선보이며 서서히 자신의 진가를 사회에 알리기 시작했고 2000년도에 연변라디오 매주일가로 《우정만만세》를 불러 인기를 누리면서부터 자신의 노래생애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당시 작곡가 한병낙선생님이 직접 그녀를 찾아 불러보라며 건네준 《우정만만세》는 전파를 타고 널리 전해지면서 많은 사람들의 애창곡으로 보급되였다. 그후에도 《사랑은》, 《우리 고향》, 《결혼가》 등 자신만의 노래 50여수를 부른 량춘화에게 차츰 주렁진 성과가 안겨졌다. 1997년 동북3성조선족노래콩클대회에서 《난 널 사랑해》를 불러 1등의 월계관을 받아안은 그는 그후에도 2002년 전국조선족노래콩클대회에서 《사랑은》을 불러 2등의 영예를 따냈고 2004년 전국조선족노래콩클대회에서는 《너의 곁에 있고싶어》를 불러 단연 1등보좌에 올랐다. 뿐만아니라 2004년에는 《우리 고향》으로 연변TV 매주일가 10대 노래상을 받았고 같은 해에 《우정만만세》로 연변라디오 매주일가 10대 노래상을 받았으며 연변TV 10대 가수상을 받는 등 많은 영예를 안아왔다.
풍요속의 빈곤
이처럼 방송전파를 통해 자신의 진가를 널리 알리며 밤무대에서도 열심히 노래를 부르는 와중에 량춘화는 오래전부터 품고있던 꿈을 이루기 위해 한보한보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즉 자신만의 예술공간을 일궈세우는것, 드디여 그 꿈은 2007년 12월에 이루어졌다. 그녀가 스스로 원장직을 맡고 설립한 Y.B현대음악스쿨(학교)은 현재 제로크루, 유니크, 헤로, 엠플러스, 인츄스패밀리 등 13개의 그룹에 14살부터 27살까지의 학원 70여명을 가지고있으며 비보이, 댄스, 랩 등 주요하게 힙합음악을 가르치고있다. Y.B현대음악스쿨의 설립에 대해 량춘화는 “현재 연변에 현대음악의 자리가 부족하고 무대가 작아 현대음악에 대한 청소년들의 열정에 찬물을 끼얹고있다. 이런 국면을 타개하고 현대음악을 즐기는 청소년들에게 발판이 되고자 학교을 설립했다”며 “보다 학원들을 잘 가르치기 위해 한국에서 가장 먼저 복고댄스를 보급했던 한국 수원JJ나이트댄스학원의 전문강사들 그리고 대형공연, 댄스파티, TV방송출연, 각종 댄스대회에서 인정받은 명실상부한 강사들, 연변대학 예술학원에서 성악을 전공한 강사들을 초청해 기초부터 가르치고있다”고 밝혔다.
Y.B현대음악스쿨은 설립되여서부터 지금까지 불과 2년도 안되는 사이에 연변 최고의 현대음악기지로 발돋움했다. 그동안 연변TV 아리랑극장, 청춘스타트, 사랑으로 가는 길, 음력설문예야회, 연변TV성립 30돐기념행사 등에 빠짐없이 출연했고 연변에서 10여차 펼쳐진 각종 댄스콩클에 참가해 우승을 싹쓸이했는가 하면 2007년에는 전국비보이댄스콩클에서 각각 몇백개팀이 참가한 가운데 개인배틀 8강에 오르고 집체퍼포먼스 1등의 영예를 따내기도 했다.
영예뿐만아니라 Y.B현대음악스쿨은 또 사회를 위해 유익한 일들을 함으로써 사회상으로도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지금까지 량춘화 자신이 직접 책임을 맡고 펼친 미아콘서트(음악회)만 해도 도합 3차례, 미아란 길을 잃어 방황하는 아이들이라는 뜻인만큼 콘서트에서 벌어들인 금액 전부를 불쌍한 아이들을 위한 《사랑의 집》에 기부했고 한국에서 구해온 복장을 거리에서 팔아 모은 금액 전부를 연변TV 《사랑으로 가는 길》에 성금으로 내놓기도 했다.
사실 무슨 일이든 벌려놓으면 힘든 부분이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량춘화도 그랬다. Y.B현대음악스쿨을 설립하여서부터 지금까지 매표공연 한번도 안했고 협찬금 한푼도 받지 않으면서 사회봉사를 하려니 경제상으로 어려울 때가 많았다. 결국 그는 밤무대에서 벌어들인 돈을 전부 학교운영에 쏟아부으며 지금까지 지탱해왔지만 포기라고는 생각도 해본적이 없었다. “불우한 아이들에게 다소나마 사랑의 손길을 보낼수 있다는데서 모든 고달픔도 달갑게 여겨진다”며 밝게 떠올리는 미소는 진심에서 우러러난것이여서 별처럼 찬란했다.
시집갈 준비는 다 되였지만
여느 처녀들과 마찬가지로 량춘화에게도 사랑은 있었다. 하지만 처음에 사랑했던 남자가 불행한 사고로 저세상 사람이 되고 두번째 만났던 남자에게서는 거짓이 발견되여 그만두고말았다. 이것이 지금까지 량춘화가 겪어본 련애경험의 전부다. 간단한것 같지만 사실상 그는 슬픈 사랑의 주인공인셈이다.
어느덧 처녀나이로 과년해진 그는 “지금이라도 좋은 신랑감만 만나면 시집갈 준비는 다 되였다”고 하면서 리상적인 배우자에 대해 한마디로 “똑똑하면 된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리상적인 배우자를 만나지 못한데 대해 그는 “하는 일이 많아 바깥교제가 멀고 선을 볼 시간적여유가 없어서였다”고 일축했다.
사실 량춘화에게도 따르는 남자들이 없은것은 아니였다. 아니, 많았다. 련애편지도 많이 받았고 직접 찾아오는 남자들도 적지 않았다. 예술학교시절 그가 하학하고 집에 돌아올 때면 늘 그의 집앞에서 기다리는 남자애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나이가 어린 원인도 있었겠지만 특히 예술지향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련애문제는 한번도 고려해본적이 없었다. 로처녀행렬에 들어서게 되면서 사랑은 점점 멀어지는것 같았다. 그런 딸을 두고 어머니 또한 적잖게 마음을 썩이고있다. 친구들의 집에 놀러갔다가 친구의 손군들을 보고 안아주며 이뻐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량춘화도 모르는게 아니고 늘 미안한 마음이지만 “하늘을 봐야 별을 딸게” 아니겠는가.
“좋은 신랑 만나 결혼한후에 신랑이 안해의 예술활동을 반대하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량춘화는 “예술은 내 생명의 일부분인만큼 어떻게 해서든 신랑을 설득해서 예술을 계속 하겠다”고 말했다. 한번 마음주면 끝까지 주는 타입인 그는 현모량처가 되는게 생활속의 꿈이라고 밝혔다.
많은 사람들은 량춘화의 노래를 듣고 호방한 그의 노래속에서 발랄한 기질을 보며 활달한 처녀로만 생각할것이지만 실생활에서 그는 녀성다운 섬세함도 갖추고있었다. 가수꿈을 접고 연길에서 맨 처음 《삼꽃식당》이라는 간판을 걸고 개인영업을 꾸렸던 외할머니의 영향을 받아 많이 보고 먹으면서 배운 료리기술이 량춘화에게는 무엇보다 자랑거리였다. 닭곰이나 갈비찜 등 한식료리에 뛰여난 그는 “웬간한 잔치상은 혼자서 거뜬히 차릴수 있다”고 장담했다. 지금도 어디에 가든 처음 보는 음식이면 반드시 먹어보고 집에 돌아와 꼭 해보고야 직성이 풀린다는 그는 현재 적어도 한달에 한번씩 Y.B현대음악스쿨의 학원들을 자기집에 초청해 직접 자기가 만든 료리를 상우에 올리기도 한단다. “이제 나를 데려가는 남자는 호박이 넝쿨채로 떨어진셈”이라며 익살스레 웃는 그 모습이 자못 귀엽기도 했다.
지금까지 가장 유감스러웠던 일에 대해 량춘화는 외할머니의 사망을 꼽았다. 그처럼 손녀를 귀여워해주고 손녀의 가수꿈을 위해 심혈을 몰부어주시던 외할머니는 그녀가 텔레비에 나오기전 즉 그녀의 예술학교시절에 사망됐다. “텔레비에 나오는 손녀의 모습을 한번도 못보신 외할머니가 그립다”며 눈시울을 붉히는 그의 표정에는 서운함이 가득 묻어있었다.
앞으로의 타산에 대해 량춘화는 “현재 연변의 현대음악은 무대가 적고 미래보장이 잘 안되는 등으로 곤혹을 겪고있다”면서 “연변에 젊은 음악인들의 활동이 많았으면 좋겠다. 무대가 적고 기회가 적어도 장끼가 있다면 도전해볼것을 권고한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앞으로 더 많은 현대음악인재들을 양성하여 보다 큰 무대에 추천할것”이라며 “나 또한 Y.B현대음악스쿨을 계속 밀고나가는 한편 민요에도 복귀할 타산”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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