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 원유문씨의 살아가는 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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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09-04-08 09:55|본문
"뽑혔다는 말을 듣자마자 '대한민국 만세!'라고 외칠 뻔했어요. 왼쪽 가슴에 맺혀 있던 응어리가 뻥 터져 없어지는 느낌이었죠. 애들한테 엄마도 일이 생겼다고, 너희를 위해 뭐든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돼 자랑스러웠어요."
30일 오전 고양시 덕양구청에서 원유문(여·37)씨를 만났다. 원씨는 지난 16일 고양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 중국어 통·번역 전문인력으로 취직한 조선족 여성. 그는 보건복지가족부의 다문화가족 취업지원정책의 하나로 작년 12월 한국외국어대학교 다문화연구센터에서 1주일 동안 교육을 받은 뒤 고양시의 첫 통·번역사가 됐다.
원씨는 1972년 중국 하얼빈시 도리구에서 8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공산당 간부로 철강회사에서 비서로 일했고, 어머니는 조선족대학병원 원무과에서 근무했다. 탄탄한 직장을 가진 덕분에 방 5개짜리 아파트에서 풍족하게 살았다.
그러나 그가 다섯 살 되던 해,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딸만 일곱인 집안에 태어난 남동생이 1주일 만에 앓아 누웠던 것. 그의 엄마가 임신 초기 또 딸일까봐 먹은 낙태 약의 후유증으로 남동생의 몸에 딱딱한 혹과 고름이 빈틈없이 들어찼다고 했다. 부모는 직장을 그만두고 1년 넘게 병원을 전전했다.
속이 상할 때마다 그는 수학문제를 풀며 마음을 달랬다. 부모 대신 살림을 맡아 하던 둘째 언니가 구석에 앉아 울 때, 자매들과 다퉈 아버지한테 혼날 때면 영하 30도의 강추위에도 마당에 나가 수학문제를 풀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와 중학교 2학년 때에는 수학경시대회에 나가 상도 탔다. 결국 1992년 산동성 연태사범대학 수학과에 입학했다.
1996년 대학을 졸업한 뒤 하북성 천진시로 갔다. 그곳에서 중국 업체와 한국 무역상들을 연계하는 가이드로 일했다. 4년 동안 매달 3만~4만원(한국 돈 500만~600만원)씩 벌었다.
1999년 성실히 일하는 그를 눈여겨본 한국 무역상들이 그를 한국으로 초청했다. 마르크스·엥겔스·레닌의 책을 보며 자란 그였지만 마음속에는 자본주의를 택해 쑥쑥 발전하는 한국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한국에 눌러 살기로 마음 먹고 2001년 5월 서울 신림동에 3000만원을 들여 양고기 꼬치구이 식당을 냈다. 테이블 6개인 작은 가게였지만 하루 평균 매출이 50만~60만원, 주말엔 80만~90만원에 달했다. 한국에 와서야 한국말을 배웠고 한글은 읽을 줄도 몰랐지만 한국인들은 그에게 도움의 손을 내밀었다. 미용실 주인은 테이블을 더 놓을 수 있게 자신의 가게 앞을 비워줬고, 단골손님은 전기료를 아낄 수 있는 방법을 일러줬다.
모로코 출신 남편 라시드 잔보리(35)씨를 만난 것도 이때였다. 그를 보고 한눈에 반한 남편은 그를 보기 위해 일부러 가게 앞을 돌아 출퇴근했다. 2005년 이들은 결혼했고, 서울 독산동에 첫 보금자리를 꾸몄다.
네 살, 두 살 아들 둘을 낳고 알콩달콩 살았지만 늘 깨소금 냄새가 났던 건 아니다. 2005년 8월 강원도 강릉으로 여름휴가를 가다가 자동차 사고가 나서 합의금으로 5000만원을 물어줘야 했고, 그 때문에 운영하던 가게도 헐값에 넘겨줘야 했다. 남편이 일산에 있는 자동차 부품 수출회사에서 근무했지만 월급은 200만원이 채 되지 않았다.
작년 9월 바람 쐬러 들른 호수공원에서 센터의 김희진 팀장을 만났다. 마침 여성회관에서 영어를 배우고 있던 그에게 김 팀장이 이주여성을 위한 통·번역 일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스스로를 위해, 도와준 한국인들을 위해 늘 무엇이든 해보고 싶었던 그는 "돈 한푼 안 줘도 좋으니 시켜만 달라"고 했다.
앞으로 그는 매주 월~금요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고양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이 지역 다문화가족의 절반을 차지하는 중국 이주민 지원사업에 참여할 예정이다. 특히 결혼이민자의 가족상담 통역이나 다문화가족 자녀 가정통신문 및 센터 홍보물 번역, 결혼이민자 병원 방문시 동행 통역 등의 업무도 맡는다. 4월부터는 통역 업무를 지원하기 위해 수요일마다 이동출입국관리사무소에 나간다.
그는 "지난 4년간 하는 일 없이 애들 돌보면서 집에만 있느라 고민과 스트레스만 늘어났는데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며 "오전 6시 반에 일어나 하루종일 바쁘게 설쳐도 몸이 날아갈 듯 가볍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09-04-18 13:51:08 출국/비자에서 이동 됨]
[이 게시물은 운영자님에 의해 2010-11-27 10:43:54 한민족센터에서 이동 됨] 원씨는 1972년 중국 하얼빈시 도리구에서 8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공산당 간부로 철강회사에서 비서로 일했고, 어머니는 조선족대학병원 원무과에서 근무했다. 탄탄한 직장을 가진 덕분에 방 5개짜리 아파트에서 풍족하게 살았다.
그러나 그가 다섯 살 되던 해,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딸만 일곱인 집안에 태어난 남동생이 1주일 만에 앓아 누웠던 것. 그의 엄마가 임신 초기 또 딸일까봐 먹은 낙태 약의 후유증으로 남동생의 몸에 딱딱한 혹과 고름이 빈틈없이 들어찼다고 했다. 부모는 직장을 그만두고 1년 넘게 병원을 전전했다.
속이 상할 때마다 그는 수학문제를 풀며 마음을 달랬다. 부모 대신 살림을 맡아 하던 둘째 언니가 구석에 앉아 울 때, 자매들과 다퉈 아버지한테 혼날 때면 영하 30도의 강추위에도 마당에 나가 수학문제를 풀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와 중학교 2학년 때에는 수학경시대회에 나가 상도 탔다. 결국 1992년 산동성 연태사범대학 수학과에 입학했다.
1996년 대학을 졸업한 뒤 하북성 천진시로 갔다. 그곳에서 중국 업체와 한국 무역상들을 연계하는 가이드로 일했다. 4년 동안 매달 3만~4만원(한국 돈 500만~600만원)씩 벌었다.
1999년 성실히 일하는 그를 눈여겨본 한국 무역상들이 그를 한국으로 초청했다. 마르크스·엥겔스·레닌의 책을 보며 자란 그였지만 마음속에는 자본주의를 택해 쑥쑥 발전하는 한국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한국에 눌러 살기로 마음 먹고 2001년 5월 서울 신림동에 3000만원을 들여 양고기 꼬치구이 식당을 냈다. 테이블 6개인 작은 가게였지만 하루 평균 매출이 50만~60만원, 주말엔 80만~90만원에 달했다. 한국에 와서야 한국말을 배웠고 한글은 읽을 줄도 몰랐지만 한국인들은 그에게 도움의 손을 내밀었다. 미용실 주인은 테이블을 더 놓을 수 있게 자신의 가게 앞을 비워줬고, 단골손님은 전기료를 아낄 수 있는 방법을 일러줬다.
모로코 출신 남편 라시드 잔보리(35)씨를 만난 것도 이때였다. 그를 보고 한눈에 반한 남편은 그를 보기 위해 일부러 가게 앞을 돌아 출퇴근했다. 2005년 이들은 결혼했고, 서울 독산동에 첫 보금자리를 꾸몄다.
네 살, 두 살 아들 둘을 낳고 알콩달콩 살았지만 늘 깨소금 냄새가 났던 건 아니다. 2005년 8월 강원도 강릉으로 여름휴가를 가다가 자동차 사고가 나서 합의금으로 5000만원을 물어줘야 했고, 그 때문에 운영하던 가게도 헐값에 넘겨줘야 했다. 남편이 일산에 있는 자동차 부품 수출회사에서 근무했지만 월급은 200만원이 채 되지 않았다.
작년 9월 바람 쐬러 들른 호수공원에서 센터의 김희진 팀장을 만났다. 마침 여성회관에서 영어를 배우고 있던 그에게 김 팀장이 이주여성을 위한 통·번역 일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스스로를 위해, 도와준 한국인들을 위해 늘 무엇이든 해보고 싶었던 그는 "돈 한푼 안 줘도 좋으니 시켜만 달라"고 했다.
앞으로 그는 매주 월~금요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고양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이 지역 다문화가족의 절반을 차지하는 중국 이주민 지원사업에 참여할 예정이다. 특히 결혼이민자의 가족상담 통역이나 다문화가족 자녀 가정통신문 및 센터 홍보물 번역, 결혼이민자 병원 방문시 동행 통역 등의 업무도 맡는다. 4월부터는 통역 업무를 지원하기 위해 수요일마다 이동출입국관리사무소에 나간다.
그는 "지난 4년간 하는 일 없이 애들 돌보면서 집에만 있느라 고민과 스트레스만 늘어났는데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며 "오전 6시 반에 일어나 하루종일 바쁘게 설쳐도 몸이 날아갈 듯 가볍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