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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지른 물 뒤늦은 후회
금년 3월초 43살나는 김씨는 한국에서 불법체류단속에 걸려 11년만에 귀국하게 되였다. 단동시 동강부두에 도착한 그는 봄철 싸늘한 추위에 홀홀 떨며 변방검사소의 벌금을 기다려야 했다. 함께 온 5~6년 불법체류자들은 모두다 자체로 벌금을 내고 순리롭게 통관했지만 불법체류자가운데서도 《고참》인 그는 지갑에 돈이 없어 오직 마중나온 녀동생의 도움을 기다려야만 했다. 오빠를 데리고 나온 녀동생은 떨고있는 오빠가 애처로워 상점에 데리고 가 내의부터 한벌 사입히고 심양으로 가는 고속뻐스에 올랐다.몰라보게 …(2009-03-31 10: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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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조선족기업가가 본 중국동포 장·단점
얼마 전 필자는 연변TV 대외사업부에서 해외출장을 온 기자들과 함께 현재 서울 명동과 대림동에서 대형음식(예식)사업을 하고 있는 연변출신의 조선족기업가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서울에서 13년간 꾸준히 음식업을 경영해 성공한 그는 수많은 중국동포들을 겪어왔고 향수(鄕愁)와 애환(哀歡)을 함께 나누면서 느낀 경험들을 통해 중국동포들의 ‘장점’과 ‘단점’을 지적했다. 10여 년간 그들과 함께 부대끼면서 감수한 것들이어서 신빙성이 높았고 수긍이 갔다.
아래에 그가 본 중국동포의 장·단점(長·…(2009-03-31 10: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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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명 렬사(전우)들의 유골 이름 찾아 14년
60년전 길림해방전투서 희생된 12명 렬사(전우)들의 유골 이름 찾아 14년
림남석 리규택 로인 오늘도 11명 무명렬사들의 이름 찾는다
60년전인 1947년 11월 7일 길림시를 해방하는 제1차 외곽전투에서 12명 조선족전사들이 영광스럽게 희생되였다. 60년후인 2007년 11월 7일에 그 전역에서 요행 살아남은 렬사들의 전우 림남석(83세)과 리규택(80세)은 렬사들의 유골이 묻혀있는 길림시 풍만구 가룡원렬사릉원에 또다시 찾아와 12명 영령들을 추모하였다.
…(2009-03-31 10: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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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인재의 적극 활용법
민족인재의 귀중함:
조선족학생이 중국의 대학을 나오고 외국류학까지하고 돌아오자면 적어도 20년이란 긴세월이 걸리지만 그중 우리민족교육과 부모형제가 적어도 소학교부터 고등중학교까지12년이란 기초교육의 전반과정을 책임지고 그모든 경제 및 기타 부담을 감당한것이다.
우리 민족영재들은 중국의 교육제도에서 비교적 합리한 지식과 전업구조를 가지고 있어 200만 인구밖에 안되지만 언어 수학 물리 화학은 물론 철학 미술 영화 교육 항천 기계 로봇 IT BT NT 기업 기술원 교원 경찰 군인 공…(2009-03-31 10: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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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은 다가올 동북아시대 소금입니다"
"조선족은 소금과 같습니다. 양은 적어도 꼭 필요한 게 소금이죠."
이승률 연변과기대 부총장의 말에는 힘이 있었다. 그 밑바닥엔 조선족에 대한 유별난 사랑이 자리잡고 있다. 그는 16년간 중국 연변 땅을 넘나들며 조선족을 계몽하고 교육해왔다. 조선족에 무관심한 이들로선 그의 깊은 애정이 낯설기만 할 것이다.
이 부총장은 원래 건설 쪽 일을 해온 사업가였다. 어느날 아주 특별한 만남을 계기로 삶의 행로가 180도 바뀌었다. 1990년 10월. 이 부총장은 사업차 중국에 갔…(2009-03-31 09:5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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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회사서 일하는 조선족들의 희와 비
한국에서의 조선족들의 회사취직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한국에 입국하여 우선 일당으로 노가다판을 전전하면서 사처에 일자리를 부탁하고있었다.
회사취직은 일반적으로 친척, 친구, 아는 사람 등 조선족끼리 서로 부탁하고 소개하며 이뤄지고있었다. 조선족들은 자기가 있는 회사에서 누가 나가거나 새로운 일자리가 생기면 자기가 아는 조선족을 소개해 주군 했다.
하루 11―13시간 로동회사거나 음식점 종업원 대부분이 11시간―13시간씩 일을 하고있었고 회사에서 받는 스트레스때문에 변비가 생기는 사람도 있었…(2009-03-31 09: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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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노가다판의 조선족남자들
기자는 협찬과 신문사의 파견을 받고 일전 한국에 가 《재한 조선족 삶의 현장》 취재를 하게 됐다. 한국 체류기간 기자는 재한 조선족 32명에 대한 전화통화와 직접 만나본 사람들을 통해 재한 조선족들의 밑바닥인생을 보았고 그들의 간고한 돈벌이와 아끼는 생활을 보며 중국에 있는 우리들의 삶은 말 그대로 사치임을 절감하게 됐다. 한국에 입국한 조선족마다 첫 정거장처럼 꼭 거쳐가는 곳이 있다. 노가다판이다. 이 노가다판을 통해 조선족들은 중국 국내에서 종래로 겪어보지 못했던 고된 로동관을 넘게 되고 …(2009-03-31 09:5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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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출신 마지막 증인 조선족 ......
위안부출신 마지막 증인 조선족 리수단할머니의 인생을 적는다
리수단할머니.
마지막 증인
10월 19일 오후, 할빈시조선족예술관에는 특별한 손님 한분이 찾아왔다. 백발이 성성한 80대의 운신이 어려운 할머니 한분이 한복을 차려입은채 휄체어에 앉아 안중근 의사 기념관과 민속박물관을 관람했다.
해설원은 류창한 한어로 해설을 진행했다.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한어로 대답을 하기도 하였다. 분명 그의 한어말씨에 조선어 억양이 짙게 묻어나지만 할머니는 조선말을 전혀 모른단다.…(2009-03-31 09:5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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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밉상이던 조선족... 이제 위신 올라가기 시작》
ㅡ한국국제로동재단 취업강사 김일남씨
기자가 한국에서 재한 조선족현황을 잘 아는 조선족을 찾으니 많은 사람들이 《김일남선생》이라고 소개한다.
《재한 조선족? 밉상이죠.》 재한 조선족들의 권익을 위해 십여년 뛰여온 김일남씨 입에서 답답하고 안타까운 치부들이 줄줄이 나온다.
서울 대림동 지하철역을 나와서 바로 보이는 국제로동재단 취업교육 사무실을 찾아 김일남씨(55세)를 만나려고 들어서니 조선족 여럿이 찾아와 애로상담을 하고있었다. 어느 중학교 조선어문 교원같은 인상의 김일남씨, 취재중…(2009-03-31 09:4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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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사회속에 함께 뿌리 내리고파"
"대부분 재미조선족들은 한인들을 가깝게 생각하고있고 또 한인사회와 함께 가고싶어합니다."
미국 뉴욕조선족동포회 주광일회장은 "한인 이민사회가 성장한것처럼 조선족사회도 최근 급성장하고있다."며 "그동안 한인사회와의 긴밀한 협력관계가 없었다면 힘들었을것"이라고 말했다.
뉴욕의 조선족사회는 10년이라는 짧은 이민사를 갖고있지만 매우 빨리 발전해왔다. 이민 초기 한인업소에서 인력을 제공하면서 자본력을 모았고 지금은 많은 업소들을 직접, 또는 동업형식으로 운영하고있다.
현재 뉴욕일…(2009-03-31 09:3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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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람중]이방인도, 이방인이 아닌것도 아닌 그들 ‘조선족 이모’
좌판 약장수로 시작해 산업현장과 가사노동을 책임지는 노동자, 중국어 교사에 이르기까지. 조선족 동포가 우리 사회에서 담당하는 역할이 점점 다양해지면서 비중도 커지고 있다.법무부의 최근 자료에 따르면, 고용허가제가 실시된 2004년 8월부터 2007년 9월말까지 국내에서 직업을 갖고 활동중인 조선족 동포는 9만5691명이다. 베트남, 필리핀, 태국, 중국 등 외국인 노동자를 모두 합친 8만3821명보다 1만명 이상 많다. 특히 2004년과 2005년 사이에는 무려 2만4858명이 늘었다.조선족 동포…(2009-03-31 09:2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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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의 불량소비현상에 대한 검토
개혁개방이후 조선족사회의 경제발전이 빨랐고 그들의 생활수준은 전에 없이 제고되었다. 그러나 조선족의 비계획적인 소비경향은 조선족사회의 경제생활에 불리한 영향을 초래하였다.
조선족의 경제생활에서 계획성이 결핍하고 생산보다 소비가 앞선 경향이 심하였다. 개혁개방이전 논농사 위주인 조선족농민들의 생활은 밭농사 위주인 주위 한족(汉族)들보다 더 윤택하였으나 돈은 있는 대로 다 써버리는 경향이 있어 저축은 거의 못하였다. 이에 비해 한족들은 수입은 조선족보다 적었지만 저축만은 언제나…(2009-03-25 15: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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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이라는 디딤돌
우리 가게에서는 중국의 다수 민족인 한족(汉族)이 소수 민족이다. 17명의 직원 가운데 한족은 단 2명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15명 가운데 1명은 몽고족, 14명은 조선족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의사소통은 한국어(조선어)로 이루어진다.
내가 딱히 의도했던 조직 구조는 아니지만 그렇게 되어버렸다. 주위에서는 "참 복 받았다"고 축하해주지만 복을 받은 건지는 계속 두고 볼 일이다. 여하튼 외국에서 사업하면서 내가 줄곧 사용해오던 언어로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은 '편한' 일이긴 하다…(2009-03-25 15: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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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화의 끈질긴 생명력을 보았다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 수부 연길시를 방문한적이 있다. 공항에서 내려 호텔까지 가는 도로변의 풍경이 이국같지가 않았다.모든 간판들이 한글과 한자 복수로 되여있었기때문이다. 그것도 한글 먼저, 한자가 뒤로 씌여있었는데 자치주조례에 따른것이라고 한다. 또한 조선족과 한족이 함께 사는 도시지만 대부분의 경우 우리말이 통해 불편함이 전혀 없었다.그리고 오래전부터 형님, 동생 하며 지내온 K씨가 연길에 오면 3대 명물 보신탕, 국수, 찰떡은 맛보아야 한다면서 보신탕집부터 안내하여 가보니 서울 어느 뒤…(2009-03-25 15: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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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포끼리 서로 헐뜯지 맙시다.
재한조선족문제연구
제2부 재한조선족의 삶의 실태
“우리 동포끼리 서로 헐뜯지 맙시다.”
김정룡
예로부터 우리민족은 단합심이 부족한 것이 단점으로 지적되어 왔다. 이를테면, 옛날 조정에서는 외적을 눈앞에 두고도 당파싸움에 빠져 있었고, 한반도는 남북으로 쪼개졌고, 남쪽에서는 “경상도 사람, 전라도 사람” 하면서 차별을 두고, 일본열도에서는 조총련과 민단이 대립해온 역사가 있다.
조선족사회는, 조선족이 집결된 연변사람들이 흑룡강성, 요녕성, 길…(2009-03-25 15: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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