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IT업계 선구자 장춘국가광전자산업기지발전그룹 류천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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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13-03-26 23:57|본문
중국 IT업계 선구자 장춘국가광전자산업기지발전그룹 류천문회장
목전 우리 나라에 두개밖에 없는 국가광전자산업기지중 하나인 장춘국가광전자산업기지발전그룹 ,산하에 수많은 대형국유기업을 거느리고있는 국유대형주식회사인 장춘국가광전자산업기지발전그룹은 조선족 류천문(57세)회장이 그 사령탑을 잡고있다. 그의 이름앞에는 “중국 IT업계 선구자, 세계가 주목하는 글로벌 리더”라는 어마어마한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허스키한 목소리, 목적의식이 분명한 눈빛, 다소 무뚝뚝해보이는 그의 말투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주제를 꿰뚫는 랭철한 리성,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가 분명해 때론 듣는 이로 하여금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그는 또 이제까지 우리를 여러번 놀라게 했다. 그는 우리 나라 첫노트북자주브랜드 “빵쟈(邦甲)를 만들어냈고 청도 하이얼그룹 노트북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그의 행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미중경제합작기구 중국수석기업가 60명중의 한사람이고 우리 나라 개혁개방30년 우수창신기업가이며 길림성10대과학기술전문가이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확고한 신념, 자신의 삶에 대한 무한한 긍정으로 군인, 정치인, 기업인 등 화려한 인생경력을 겪으며 오늘의 자리에 오른 류천문회장, “래일 죽더라도 오늘만큼은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는 그의 력사는 열정과 도전의 련속이였다. 그에게 있어서 열정은 “랑만”이 아니라 “미래을 위한 선택”이였기에 그의 도전과 열정은 뭇사람들의 감탄과 존경을 불러오는 것이다.
바람개비는 바람 불지 않으면 돌지 않는다.
1954년 길림성 반석에서 태여난 류천문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다재다능한 아이였다. 특히 무슨 일에나 한번 빠지면 꼭 끝을 보고야 마는 그는 고집만큼이나 의력 또한 대단한 아이였다. 바람개비놀이에 빠졌던 어린시절 바람없는 날이면 죽도록 달려야 돌아가는 바람개비놀이에 또래애들은 금방 지치고 힘들어서 포기하기도 했지만 그만은 바람개비를 힘차게 돌리기 위해 열심히 달렸고 바람이 센 산우에도 자주 오르군하면서 바람개비 돌아가는 모습이 재미있어 산과 들을 휘젓고 다녔던 유별난 아이였다
중학교 시절부터 모든면에서 뛰여난 모범생이였던 그는 특히 예술면에서 타고난 끼를 보이며 작사, 작곡에까지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여 학교를 졸업할무렵 당시 군인으로 되는것이 모든 젊은이들의 희망이였던 그 시절에 류천문은 당당하게 해방군 땅크부대 문예병으로 입대하며 학교의 자랑으로 되기도 했다.
작곡으로 재간을 인정받아 문예병으로 입대한 그였지만 입대한지 얼마 안되여 여러가지 악기들도 능란하게 다루게 되자 그는 재능을 인정받아 군관학교에 추전받는 행운을 얻게 되였다.
군관학교를 졸업한후 부대에서 승승장구하며 영장급까지 오른 그는 근 7년이란 군인생활을 접고 제대하여 장춘영화촬영소 공청단서기로 임직했다.
부대에 있을때에는 군인이야말로 자신의 적성에 가장 알맞는 직종이라고 자부해왔던 류천문은 공청단간부로 정계에 말을 들여놓으면서 백성들을 위해 뭔가 실질적인 일을 할수 있는 훌륭한 간부로 되는것도 자신의 꿈꿔왔던 또다른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모든 정열과 열정을 쏟으며 공청단사업에 자신의 심혈을 몰부었다. 그는 어린시절, 바람이 불지 않으면 돌지 않는 바람개비를 돌게 하려고 산과 들을 열심히 뛰여다녔듯이 공청단사업을 위해 일이 없으면 끊임없이 일을 만들며 일을 해나갔고 밤을 패가며 자기개발을 위한 공부에도 열중했다.
부지런하고 창의력과 추진력이 뛰여난데다 리더로서의 호소력과 파워가 남달랐던 류천문의 사업스타일은 공청단간부로서 적격이였다. 하여 그는 얼마후 공청단료원시위에서 사업하다가 인차 공청단성위에서 사업하게 됐다.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 한 시골 소년이 돌렸던 작은 바람개비는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거대한 풍차로 변했고 그를 이끄는 원동력이 되여 오늘의 류천문을 만드는 무궁한 에너지가 됐던것이였다.
100%노력에 20%의 열정을
류천문회장은 100%의 노력은 모두 똑 같지만 100%노력우에 20%의 열정이 더해졌을때만이 남을 앞지를수 있고 남들보다 앞선 성과를 만들어 낼수 있다고 말한다.
1985년 류천문은 조직의 수요로 공청단연변주위 사무실 주임으로 임직하면서 연변과의 인연을 시작했다. 우수한 조선족간부들이 운집해 있는 연변에서 그는 다른사람들이 8시간을 자면 6시간을 자고 다른 사람들이 6시간을 자면 5시간을 자면서 100%의 노력에 20%의 열정을 쏟아부으며 자신이 세운 목표를 이루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어찌보면 연변에서 사업하는 기간은 그의 뛰여난 재능과 열정이 가장 빛을 발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공청단연변주위에서 근 1년간 사업하면서 류천문은 상급에서 맡겨준 임무을 멋지게 완성하는 한편 작곡가의 재능을 발휘하여 “아름다운 연변을 건설하자”는 노래를 작곡했는데 청춘의 생기와 희망으로 흘러넘치는 아름다운 이 노래는 선률이 아름다운데다 호소력까지 짙어 얼마 지나지 않아 공청단조직의 대표곡으로 되여 연변대지에 우렁차게 울러퍼지게 됐다.
그는 또 서예가 남달리 뛰여난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여 짬짬이 시간을 짜내여 주당위와 주인대 등 여러 사업단위 간판을 멋진 글씨체로 새롭게 바꾸어주어 사람들의 절찬을 받기도 했다.
1987년, 주로간부국 비서처 처장으로 사업터를 바꾸게 된 그는 동북로해방지구인 연변에서 수많은 로간부들이 퇴직후 마땅히 향수 받아야 할 생활상의 여러가지 대우(三个待遇)들을 향수받지 못하고있는 사실을 알고 가슴이 아팠다. 그는 로간부들의 대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밤을 새워가며 직접 자세한 제안서를 작정하여 성, 중앙 해당 부문에 제기했다. 그가 제기한 연변의 로간부대우문제에 관한 제안은 인차 중앙 해당 부문의 중시를 불러일으켰으며 연변은 전국적으로 시점으로 류천문이 제기한 세가지 면에서 로간부를 대우할데 관한 상세한 제안이 확정되고 시달되게 됐다.
1990년, 연변의약국 부국장으로 부임한 류천문은 또 한번 새로운 도전을 맞게 됐다. 당시 연변에는 한국출국붐이 갓 일면서 약품시장에는 가짜,저질 약품들이 판을 치고있었다. 철저히 소비자들의 리익을 보호하고 가짜, 저질 약품들을 추방하기 위해 그는 직접 선두에 서서 국내 주요한 약품생산기지를 방문하고 직접 약을 구입하는데 나서기도 했다. 어떤 지역은 기차를 타고 가는데만 근 4, 5일이 걸리는 긴 려정이였지만 그는 힘들줄을 전혀 몰랐다…
연변에서 사업하는 근 10년간 그는 실력으로 승부하기 위해 매사에 더 철저하고 두배 세배 노력했으며 자기개발과 실력을 쌓기 위한 공부도 끊임없이 했다. 그는 1988년부터는 동북사범대학 청년간부반에서 정치법률을 전공했으며 1990년에는 국가급기업법률고문자격을 획득했다. 후에 국가사법부에서 변호사자격시험을 회복하자 그는 제일 첫패로 변호사시험에 합격되여 당당히 국가1급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하가에 젊은날의류천문회장은 매일 5시간이상을 자본적이 별로 없다고 한다…
세상은 노력하고 준비하는 사람에게 더많은 기회를 가져다준다. 1994년 류천문운 조직의 부름을 받고 연변에 조사연구를 내려온 국가위생부 부장일행을 접대하게 되였는데 그의 뛰여난 사업능력은 인차 국가위생부 부장의 눈에 띄였다. 당시 국가위생부에서는 류천문과 같은 나젊은 간부들을 물색하고있던터라 그는 인차 국가위생부 예방사 수출입처 처장으로 파격승진했으며 1년후에는 국가대외경제무역부 정보사 국제합작처 처장으로 부임하게 됐다.
중국 첫 노트북 탄생 신화를 만들다
국가위생부 예방사수출입처 ,국가대외경제무역부 정보사 등 부문에서 사업하면서 류천문회장은 고신기술과 IT업종 관련 업무를 접하게 되였고 가끔 그 무한한 발전가능성에 매료되여 그면의 지식과 정보를 수집하기도 했다.
보다 창의적인 일을 갈망하며 새로운 도전에 목말라있던 그에게 드디여 기회가 찾아왔다. 한번의 우연한 기회에 류천문은 장춘화우광전자정보산업주식유한회사 류철고회장을 만나게 되였는데 그의 열정과 담략 그리고 경영전략과 개발마인드는 단번에 류철고회장의 심금을 울렸다. 하여 2001년 류천문은 화우광전자정보산업주식유한회사 부회장에 부임하며 IT창업의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2000년말에 창립된 화우광전자정보산업주식회사는 총투자액이 7.35억원에 달하는 신형 광전자정보산업의 고신기술주식제기업으로 막강한 실력과 방대한 규모를 갖추고있었다. 류천문은 부임하자 창업단계있는 회사에 새로운 개발대상을 인입하기 위해 눈코뜰새없이 바삐 보냈다. 드디여 그는 webpad라고 불리는 평면식휴대계산기설비를 찾아냈다. 이는 한국 SEWOO회사가 새롭게 출시한 기능이 뛰여난 첨단기술 산품으로 국제적으로도 앞선 생산기술을 자랑하고있었다. 사업가로서의 전략적판단으로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그는 주동적으로 한국회사를 찾아 방문했고 여러차례 상담을 거쳐 마침내 순조롭게 한국의 webpad생산기술을 인입했고 두차례의 연구개발을 거쳐 정식으로 평면식컴퓨터생산에 돌입했다.
2001년 말 드디여”왕판(网盘)”이라 이름지은 평면식컴퓨터는 대량 생산에 들어갔다.( 미국은 왕판이 출범된 3년후에야 비슷한 산품이 출두되기도 했다.) 왕판의 탄생으로 류천문운 IT업종에서 세계가 주목하는 짜릿한 성공을 거두며 경쟁자들을 긴장시켰다.
2003년 류천문은 화우광전자정보이동계산기연구소 소장으로 부임하며 또 한번 엄청난 도전을 시작했다.
“우리가 설계하고 우리가 생산하고 우리가 판매하는 자주적인 노트북브랜드를 만들자” 류천문은 미래시장을 내다보는 독창적인 직관으로 보다 빨리 미래시장을 주도하기 위해서는 노트북분야에서 자체적 민족브랜드산품개발이 너무나 필요하다는것을 감지했다.
그러나 국내 이름있는 노트북브랜드회사들마저 자체 설계와 생산은 무모하고 어려운 일이라고 포기하고 있는 실정에서 IT업계의 “애숭이”에 불과한 류천문의 선택은 “하루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른다”는 따가운 눈총을 받기도 했다.
한번 마음먹으면 끝까지 해내고마는 류천문회장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대만 노트북업계의 전문가들을 초빙하여 그 가능성을 확인했다. 전문가들은 류천문에게 현재의 평면컴퓨터생산선을 리용하여 자체 노트북브랜드를 생산할수 있다는 확신을 주었다.
류천문은 주저없이 연구소의 경영전략을 평면컴퓨터로부터 노트북으로 바꾸고 일본, 한국, 대만 등 곳에서 우수한 IT인재를 초빙하여 개발팀을 결성하고 중국자체노트북브랜드 개발에 승부수를 던졌다.
드디여 2003년 10월 15일 류천문회장의 야심작 “빵쟈(邦甲)”노트북이 세상에 고고성을 울렸다. 우리 나라 자체로 설계하고 자체의 생산선으로 제작한 “빵쟈”노트북은 출시되자 국내외 IT업계의 초점을 한몸에 받으며 류천문이란 이름 석자는 IT업계의 최고의 브랜드로 떠올랐다.
늘 새롭고 힘든 길을 택하는 류천문회장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당시 자체 노트북생산에서 실패와 부진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있었던 하이얼집단은 모든 희망을 류천문한테 걸고 하이얼에 와서 하이얼노트북을 만들어줄것을 제의했다.
2004년 류천문은 하이얼집단이동계산기본부 본부장으로 취임하며 하이얼노트북의 구원투수로 나섰다. 과연 그는 하이얼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근 1년간의 신고끝에 류천문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하이얼”노트북은 점차 시장에서 소비자들의 신임을 얻게 되였고 중국시장에서 자신의 입지를 굳혀갔다.
IT업종에서 엔지니어로서 예리한 관찰과 담략으로 시장을 보는 안목을 갖추고 시장의 변화에 발빠르게 적응하는 류천문회장의 창신과 도전은 련이어 기적을 만들었고 “류천문”브랜드의 매력과 가치를 만천하에 알렸다.
장춘국가광전자산업기지 사령탑을 잡다
2004년 6월 장춘은 국무원으로부터 국가광전자산업기지로 허가를 받았다. 이는 국가에서 첨단기술산업발전전략과 동북로공업기지전략을 실시하는 중요한 조치로 장춘을 중국광전자산업을 중점발전시키는 전략적지역으로 선정했음을 의미한다. 장춘시정부는 이기회를 다잡고 장춘국가광전자산업기지건설에 박차를 가하면서 회사고위층결책관리간부를 초빙할때 류천문을 떠올리고 두차례나 해당인사를 청도에 파견하여 류천문에게 기지건설사업에 참여할것을 간곡히 요청했다.
항상 더높은 단계에 도전하고 더 큰 꿈을 향해 자신의 모든것을 헌신하는 류천문회장은 2005년12월 장춘국가광전자산업기지발전주식회사 사령탑을 잡으며 장춘광전자산업에 닻을 올렸다.
회사는 설립된후 장춘의 광전자기술, 정보기술, 연구개발과 산업화우세를 발휘하여 국제에서도 유명한 정보자문, 제품연구개발, 제품검측, 인재양성 등 기능을 갖춘 국가광전자정보산업 종합기술서비스플랫폼을 구축하여 우리 나라에서 유일한 광전자산업종합기술서비스기구로 됐다. 류천문회장은 또 장춘에 제1자동차그룹을 중심으로 형성된 자동차기지를 겨냥하여 자동차전자관련 제품개발에 모를 박고 리튬전지, 축전지 등 대상을 투자 개발하고있다.
새로운 프로젝트에 도전할 때마다 일에 대한 무서운 집중력과 추진력으로 회장이기 앞서 전문가 되여 자신이 직접 진두지휘를 하는 류천문회장의 사업스타일은 프로젝트를 성공으로 이끄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노트북을 만들 때에도 그 어렵다는 프로그램을 통채로 외워 IT전문가들도 놀라게 한 그는 또 광전자산업에 종사하면서 자동차전자관련 제품에 대해 전문가보다 더 전문가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높은 기술력을 보여 당당히 길림성 10대 과학기술전문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류천문회장이 키를 잡은 장춘국가광전자산업기지발전유한회사는 2009년 4월 전액지사(全资子公司)2개와 주식통제회사 3개를 가진 총 917개 국유회사와 국유주식통제회사를 소유한 그룹주식회사로 발돋음하여 명실공히 중국을 대표하는 국가광전자산업기지임을 자랑하고있다.
화려한 인생경력에 드라마와 같은 짜릿한 인생도전을 거듭하며 세계가 주목하는 글로벌리더로 우뚝선 류천문회장, 드바쁜 사업와중에도 그는 길림대학, 동북사범대학 겸직교수, 길림성정협위원, 세계화상협회 리사 등 수많은 사회적인 직책도 감당하고있다. 그 중에서도 류회장이 가장 소중히 여기고 심혈을 기울리는 직책은 바로 길림성조선족경제과학기술진흥총회 회장직이다. 그는 8년간 회장직을 련임하며 조선족사회에 물심량면으로 되는 기여를 아끼지 않고있으며 특히 지식정보화시대 조선족기업인들이 더욱 큰 꿈을 가지고 과감히 주류경제의 대조류에 뛰여들어 고신기술과 자체의 브랜드로 새로운 창신과 비약적인 발전를 이룰것을 호소하면서 그들의 멘토로 나서기도 한다..
늘 새롭고 힘든길을 선택하며 더욱 큰 꿈을 향해 달려온 류천문회장, 잠자는 사람은 꿈을 꾸지만 잠을 이기는 사람은 꿈을 이룬다고 이야기하는 류천문회장, 그의 성공이 아름다운것은 바로 1분1초도 놓치지 않는 “일벌레프로정신”으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며 끊임없이 도전했기 때문이다.
연변일보 장연하 전윤길 신연희기자
허스키한 목소리, 목적의식이 분명한 눈빛, 다소 무뚝뚝해보이는 그의 말투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주제를 꿰뚫는 랭철한 리성,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가 분명해 때론 듣는 이로 하여금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그는 또 이제까지 우리를 여러번 놀라게 했다. 그는 우리 나라 첫노트북자주브랜드 “빵쟈(邦甲)를 만들어냈고 청도 하이얼그룹 노트북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그의 행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미중경제합작기구 중국수석기업가 60명중의 한사람이고 우리 나라 개혁개방30년 우수창신기업가이며 길림성10대과학기술전문가이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확고한 신념, 자신의 삶에 대한 무한한 긍정으로 군인, 정치인, 기업인 등 화려한 인생경력을 겪으며 오늘의 자리에 오른 류천문회장, “래일 죽더라도 오늘만큼은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는 그의 력사는 열정과 도전의 련속이였다. 그에게 있어서 열정은 “랑만”이 아니라 “미래을 위한 선택”이였기에 그의 도전과 열정은 뭇사람들의 감탄과 존경을 불러오는 것이다.
바람개비는 바람 불지 않으면 돌지 않는다.
1954년 길림성 반석에서 태여난 류천문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다재다능한 아이였다. 특히 무슨 일에나 한번 빠지면 꼭 끝을 보고야 마는 그는 고집만큼이나 의력 또한 대단한 아이였다. 바람개비놀이에 빠졌던 어린시절 바람없는 날이면 죽도록 달려야 돌아가는 바람개비놀이에 또래애들은 금방 지치고 힘들어서 포기하기도 했지만 그만은 바람개비를 힘차게 돌리기 위해 열심히 달렸고 바람이 센 산우에도 자주 오르군하면서 바람개비 돌아가는 모습이 재미있어 산과 들을 휘젓고 다녔던 유별난 아이였다
중학교 시절부터 모든면에서 뛰여난 모범생이였던 그는 특히 예술면에서 타고난 끼를 보이며 작사, 작곡에까지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여 학교를 졸업할무렵 당시 군인으로 되는것이 모든 젊은이들의 희망이였던 그 시절에 류천문은 당당하게 해방군 땅크부대 문예병으로 입대하며 학교의 자랑으로 되기도 했다.
작곡으로 재간을 인정받아 문예병으로 입대한 그였지만 입대한지 얼마 안되여 여러가지 악기들도 능란하게 다루게 되자 그는 재능을 인정받아 군관학교에 추전받는 행운을 얻게 되였다.
군관학교를 졸업한후 부대에서 승승장구하며 영장급까지 오른 그는 근 7년이란 군인생활을 접고 제대하여 장춘영화촬영소 공청단서기로 임직했다.
부대에 있을때에는 군인이야말로 자신의 적성에 가장 알맞는 직종이라고 자부해왔던 류천문은 공청단간부로 정계에 말을 들여놓으면서 백성들을 위해 뭔가 실질적인 일을 할수 있는 훌륭한 간부로 되는것도 자신의 꿈꿔왔던 또다른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모든 정열과 열정을 쏟으며 공청단사업에 자신의 심혈을 몰부었다. 그는 어린시절, 바람이 불지 않으면 돌지 않는 바람개비를 돌게 하려고 산과 들을 열심히 뛰여다녔듯이 공청단사업을 위해 일이 없으면 끊임없이 일을 만들며 일을 해나갔고 밤을 패가며 자기개발을 위한 공부에도 열중했다.
부지런하고 창의력과 추진력이 뛰여난데다 리더로서의 호소력과 파워가 남달랐던 류천문의 사업스타일은 공청단간부로서 적격이였다. 하여 그는 얼마후 공청단료원시위에서 사업하다가 인차 공청단성위에서 사업하게 됐다.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 한 시골 소년이 돌렸던 작은 바람개비는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거대한 풍차로 변했고 그를 이끄는 원동력이 되여 오늘의 류천문을 만드는 무궁한 에너지가 됐던것이였다.
100%노력에 20%의 열정을
류천문회장은 100%의 노력은 모두 똑 같지만 100%노력우에 20%의 열정이 더해졌을때만이 남을 앞지를수 있고 남들보다 앞선 성과를 만들어 낼수 있다고 말한다.
1985년 류천문은 조직의 수요로 공청단연변주위 사무실 주임으로 임직하면서 연변과의 인연을 시작했다. 우수한 조선족간부들이 운집해 있는 연변에서 그는 다른사람들이 8시간을 자면 6시간을 자고 다른 사람들이 6시간을 자면 5시간을 자면서 100%의 노력에 20%의 열정을 쏟아부으며 자신이 세운 목표를 이루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어찌보면 연변에서 사업하는 기간은 그의 뛰여난 재능과 열정이 가장 빛을 발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공청단연변주위에서 근 1년간 사업하면서 류천문은 상급에서 맡겨준 임무을 멋지게 완성하는 한편 작곡가의 재능을 발휘하여 “아름다운 연변을 건설하자”는 노래를 작곡했는데 청춘의 생기와 희망으로 흘러넘치는 아름다운 이 노래는 선률이 아름다운데다 호소력까지 짙어 얼마 지나지 않아 공청단조직의 대표곡으로 되여 연변대지에 우렁차게 울러퍼지게 됐다.
그는 또 서예가 남달리 뛰여난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여 짬짬이 시간을 짜내여 주당위와 주인대 등 여러 사업단위 간판을 멋진 글씨체로 새롭게 바꾸어주어 사람들의 절찬을 받기도 했다.
1987년, 주로간부국 비서처 처장으로 사업터를 바꾸게 된 그는 동북로해방지구인 연변에서 수많은 로간부들이 퇴직후 마땅히 향수 받아야 할 생활상의 여러가지 대우(三个待遇)들을 향수받지 못하고있는 사실을 알고 가슴이 아팠다. 그는 로간부들의 대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밤을 새워가며 직접 자세한 제안서를 작정하여 성, 중앙 해당 부문에 제기했다. 그가 제기한 연변의 로간부대우문제에 관한 제안은 인차 중앙 해당 부문의 중시를 불러일으켰으며 연변은 전국적으로 시점으로 류천문이 제기한 세가지 면에서 로간부를 대우할데 관한 상세한 제안이 확정되고 시달되게 됐다.
1990년, 연변의약국 부국장으로 부임한 류천문은 또 한번 새로운 도전을 맞게 됐다. 당시 연변에는 한국출국붐이 갓 일면서 약품시장에는 가짜,저질 약품들이 판을 치고있었다. 철저히 소비자들의 리익을 보호하고 가짜, 저질 약품들을 추방하기 위해 그는 직접 선두에 서서 국내 주요한 약품생산기지를 방문하고 직접 약을 구입하는데 나서기도 했다. 어떤 지역은 기차를 타고 가는데만 근 4, 5일이 걸리는 긴 려정이였지만 그는 힘들줄을 전혀 몰랐다…
연변에서 사업하는 근 10년간 그는 실력으로 승부하기 위해 매사에 더 철저하고 두배 세배 노력했으며 자기개발과 실력을 쌓기 위한 공부도 끊임없이 했다. 그는 1988년부터는 동북사범대학 청년간부반에서 정치법률을 전공했으며 1990년에는 국가급기업법률고문자격을 획득했다. 후에 국가사법부에서 변호사자격시험을 회복하자 그는 제일 첫패로 변호사시험에 합격되여 당당히 국가1급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하가에 젊은날의류천문회장은 매일 5시간이상을 자본적이 별로 없다고 한다…
세상은 노력하고 준비하는 사람에게 더많은 기회를 가져다준다. 1994년 류천문운 조직의 부름을 받고 연변에 조사연구를 내려온 국가위생부 부장일행을 접대하게 되였는데 그의 뛰여난 사업능력은 인차 국가위생부 부장의 눈에 띄였다. 당시 국가위생부에서는 류천문과 같은 나젊은 간부들을 물색하고있던터라 그는 인차 국가위생부 예방사 수출입처 처장으로 파격승진했으며 1년후에는 국가대외경제무역부 정보사 국제합작처 처장으로 부임하게 됐다.
중국 첫 노트북 탄생 신화를 만들다
국가위생부 예방사수출입처 ,국가대외경제무역부 정보사 등 부문에서 사업하면서 류천문회장은 고신기술과 IT업종 관련 업무를 접하게 되였고 가끔 그 무한한 발전가능성에 매료되여 그면의 지식과 정보를 수집하기도 했다.
보다 창의적인 일을 갈망하며 새로운 도전에 목말라있던 그에게 드디여 기회가 찾아왔다. 한번의 우연한 기회에 류천문은 장춘화우광전자정보산업주식유한회사 류철고회장을 만나게 되였는데 그의 열정과 담략 그리고 경영전략과 개발마인드는 단번에 류철고회장의 심금을 울렸다. 하여 2001년 류천문은 화우광전자정보산업주식유한회사 부회장에 부임하며 IT창업의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2000년말에 창립된 화우광전자정보산업주식회사는 총투자액이 7.35억원에 달하는 신형 광전자정보산업의 고신기술주식제기업으로 막강한 실력과 방대한 규모를 갖추고있었다. 류천문은 부임하자 창업단계있는 회사에 새로운 개발대상을 인입하기 위해 눈코뜰새없이 바삐 보냈다. 드디여 그는 webpad라고 불리는 평면식휴대계산기설비를 찾아냈다. 이는 한국 SEWOO회사가 새롭게 출시한 기능이 뛰여난 첨단기술 산품으로 국제적으로도 앞선 생산기술을 자랑하고있었다. 사업가로서의 전략적판단으로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그는 주동적으로 한국회사를 찾아 방문했고 여러차례 상담을 거쳐 마침내 순조롭게 한국의 webpad생산기술을 인입했고 두차례의 연구개발을 거쳐 정식으로 평면식컴퓨터생산에 돌입했다.
2001년 말 드디여”왕판(网盘)”이라 이름지은 평면식컴퓨터는 대량 생산에 들어갔다.( 미국은 왕판이 출범된 3년후에야 비슷한 산품이 출두되기도 했다.) 왕판의 탄생으로 류천문운 IT업종에서 세계가 주목하는 짜릿한 성공을 거두며 경쟁자들을 긴장시켰다.
2003년 류천문은 화우광전자정보이동계산기연구소 소장으로 부임하며 또 한번 엄청난 도전을 시작했다.
“우리가 설계하고 우리가 생산하고 우리가 판매하는 자주적인 노트북브랜드를 만들자” 류천문은 미래시장을 내다보는 독창적인 직관으로 보다 빨리 미래시장을 주도하기 위해서는 노트북분야에서 자체적 민족브랜드산품개발이 너무나 필요하다는것을 감지했다.
그러나 국내 이름있는 노트북브랜드회사들마저 자체 설계와 생산은 무모하고 어려운 일이라고 포기하고 있는 실정에서 IT업계의 “애숭이”에 불과한 류천문의 선택은 “하루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른다”는 따가운 눈총을 받기도 했다.
한번 마음먹으면 끝까지 해내고마는 류천문회장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대만 노트북업계의 전문가들을 초빙하여 그 가능성을 확인했다. 전문가들은 류천문에게 현재의 평면컴퓨터생산선을 리용하여 자체 노트북브랜드를 생산할수 있다는 확신을 주었다.
류천문은 주저없이 연구소의 경영전략을 평면컴퓨터로부터 노트북으로 바꾸고 일본, 한국, 대만 등 곳에서 우수한 IT인재를 초빙하여 개발팀을 결성하고 중국자체노트북브랜드 개발에 승부수를 던졌다.
드디여 2003년 10월 15일 류천문회장의 야심작 “빵쟈(邦甲)”노트북이 세상에 고고성을 울렸다. 우리 나라 자체로 설계하고 자체의 생산선으로 제작한 “빵쟈”노트북은 출시되자 국내외 IT업계의 초점을 한몸에 받으며 류천문이란 이름 석자는 IT업계의 최고의 브랜드로 떠올랐다.
늘 새롭고 힘든 길을 택하는 류천문회장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당시 자체 노트북생산에서 실패와 부진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있었던 하이얼집단은 모든 희망을 류천문한테 걸고 하이얼에 와서 하이얼노트북을 만들어줄것을 제의했다.
2004년 류천문은 하이얼집단이동계산기본부 본부장으로 취임하며 하이얼노트북의 구원투수로 나섰다. 과연 그는 하이얼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근 1년간의 신고끝에 류천문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하이얼”노트북은 점차 시장에서 소비자들의 신임을 얻게 되였고 중국시장에서 자신의 입지를 굳혀갔다.
IT업종에서 엔지니어로서 예리한 관찰과 담략으로 시장을 보는 안목을 갖추고 시장의 변화에 발빠르게 적응하는 류천문회장의 창신과 도전은 련이어 기적을 만들었고 “류천문”브랜드의 매력과 가치를 만천하에 알렸다.
장춘국가광전자산업기지 사령탑을 잡다
2004년 6월 장춘은 국무원으로부터 국가광전자산업기지로 허가를 받았다. 이는 국가에서 첨단기술산업발전전략과 동북로공업기지전략을 실시하는 중요한 조치로 장춘을 중국광전자산업을 중점발전시키는 전략적지역으로 선정했음을 의미한다. 장춘시정부는 이기회를 다잡고 장춘국가광전자산업기지건설에 박차를 가하면서 회사고위층결책관리간부를 초빙할때 류천문을 떠올리고 두차례나 해당인사를 청도에 파견하여 류천문에게 기지건설사업에 참여할것을 간곡히 요청했다.
항상 더높은 단계에 도전하고 더 큰 꿈을 향해 자신의 모든것을 헌신하는 류천문회장은 2005년12월 장춘국가광전자산업기지발전주식회사 사령탑을 잡으며 장춘광전자산업에 닻을 올렸다.
회사는 설립된후 장춘의 광전자기술, 정보기술, 연구개발과 산업화우세를 발휘하여 국제에서도 유명한 정보자문, 제품연구개발, 제품검측, 인재양성 등 기능을 갖춘 국가광전자정보산업 종합기술서비스플랫폼을 구축하여 우리 나라에서 유일한 광전자산업종합기술서비스기구로 됐다. 류천문회장은 또 장춘에 제1자동차그룹을 중심으로 형성된 자동차기지를 겨냥하여 자동차전자관련 제품개발에 모를 박고 리튬전지, 축전지 등 대상을 투자 개발하고있다.
새로운 프로젝트에 도전할 때마다 일에 대한 무서운 집중력과 추진력으로 회장이기 앞서 전문가 되여 자신이 직접 진두지휘를 하는 류천문회장의 사업스타일은 프로젝트를 성공으로 이끄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노트북을 만들 때에도 그 어렵다는 프로그램을 통채로 외워 IT전문가들도 놀라게 한 그는 또 광전자산업에 종사하면서 자동차전자관련 제품에 대해 전문가보다 더 전문가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높은 기술력을 보여 당당히 길림성 10대 과학기술전문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류천문회장이 키를 잡은 장춘국가광전자산업기지발전유한회사는 2009년 4월 전액지사(全资子公司)2개와 주식통제회사 3개를 가진 총 917개 국유회사와 국유주식통제회사를 소유한 그룹주식회사로 발돋음하여 명실공히 중국을 대표하는 국가광전자산업기지임을 자랑하고있다.
화려한 인생경력에 드라마와 같은 짜릿한 인생도전을 거듭하며 세계가 주목하는 글로벌리더로 우뚝선 류천문회장, 드바쁜 사업와중에도 그는 길림대학, 동북사범대학 겸직교수, 길림성정협위원, 세계화상협회 리사 등 수많은 사회적인 직책도 감당하고있다. 그 중에서도 류회장이 가장 소중히 여기고 심혈을 기울리는 직책은 바로 길림성조선족경제과학기술진흥총회 회장직이다. 그는 8년간 회장직을 련임하며 조선족사회에 물심량면으로 되는 기여를 아끼지 않고있으며 특히 지식정보화시대 조선족기업인들이 더욱 큰 꿈을 가지고 과감히 주류경제의 대조류에 뛰여들어 고신기술과 자체의 브랜드로 새로운 창신과 비약적인 발전를 이룰것을 호소하면서 그들의 멘토로 나서기도 한다..
늘 새롭고 힘든길을 선택하며 더욱 큰 꿈을 향해 달려온 류천문회장, 잠자는 사람은 꿈을 꾸지만 잠을 이기는 사람은 꿈을 이룬다고 이야기하는 류천문회장, 그의 성공이 아름다운것은 바로 1분1초도 놓치지 않는 “일벌레프로정신”으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며 끊임없이 도전했기 때문이다.
연변일보 장연하 전윤길 신연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