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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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철호| 작성일 :13-03-10 06:33|본문
남창시를 순라하고있는 446퇀 조선인전사들(1947년 11월)
산해관 넘어 전국해방 전장으로.1
연변의 건아들 호성하 피로 물들이며 배다리 놓고
단풍전투 지혜롭게 벌려 장강 도하작전 서막 열어
동북해방전쟁이 끝난후 조선인장병들은 제4야전군으로 재편성된 동북의 각 부대를 따라 산해관을 넘어 화북으로 진군, 평진전역에 참가하여 당고전투와 천진시가전에서 용맹을 펼쳤다. 조선인장병들은 부대를 따라 계속 남하하여 장강도하작전에 참가했으며 국민당군을 추격하여 대서남과 해남도까지 진격하였다. 동북에 살던 조선인전사들에게 있어서 무더운 기후, 체질에 맞지 않는 물과 풍토, 학질, 리질 등 질병을 이겨나가야 하는것 역시 하나의 간고한 싸움이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조선인장병들은 중화인민공화국창건을 위해 남정북전하면서 불멸의 공훈을 세웠다.
평진전역은 해방전쟁시기에 진행된 3대전역 가운데 제일 마지막에 진행된 전역이였다. 원 동북야전군 제10종대가 재편성된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 제47군의 제139사(원 28사)와 141사(원 30사)는 제40, 43, 38군 부대와 함께 북경과 천진의 국민당군의 련계를 차단하고 북평주위의 국민당군을 소멸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들은 락방을 공략하여 적들이 남쪽으로 도망치는 것을 가로막아 놓았다. 제47군 140사(원 29사)는 제46군과 함께 당고, 로태에서 국민당군 3000여명을 소멸한후 국량성, 신하진으로 진격하여 국민당군의 4대 군수창고의 하나인 신하화약창고를 점령하였다. 이러한 전투에서 공병퇀 6련과 같은 조선인장병들로 구성된 영웅집단이 나타났다.
"다리부설영웅 6련"
당시 천진에는 국민당군대 13만명이 견고한 방어시설을 가지고 웅거해있었다. 천진을 해방하는 것은 곧 국민당의 숨통을 끊고 북평을 고립무원한 처지에 빠뜨리는것이였으며 전 화북을 해방하는 관건적인 고리였다.
1949년 1월 1일, 산해관의 한 회족마을에서 주민들과 함께 즐겁게 설을 쇠고있던 제4야전군 특종부대 공병퇀 2영 6련 전사들은 갑작스레 울리는 집합나팔소리에 자리에서 벌떡벌떡 일어났다. 7일 안으로 천진시교 안동 리가분이라는 곳에 이르러 평진전역에 참가하라는 긴급명령이 하달된것이였다. 회족인민들의 휘둥그래진 눈바램을 받으면서 전사들은 즉시 행군길에 올랐다.
공병 6련은 치치할공병학교를 졸업한 제3기 졸업생들로 무어진 련인데 련장 왕충발과 1패 패장, 사무장 등 3명을 제외한 138명이 모두 조선인열혈청년들로 무어진 부대였다. 이들은 1947년 7월, 연변지구의 중학교학생들 가운데서 모집되여 1년간의 학습과 실습을 거쳐 다리부설, 폭파, 지뢰해제, 갱도수축 등 기술을 장악하였고 이미 료심전역에 참가하여 실전경험을 쌓기도 했었다.
7일동안의 행군로정은 425킬로메터, 하루 평균 60킬로메터씩 강행군해야 했다. 오동지달 맵짠 날씨에 눈길을 헤치면서 날마다 60킬로메터씩 걷는다는 것은 실로 간단하지 않았다. 전사들은 온몸이 땀투성이가 되었고 털모자언저리는 입김에 성에가 끼고 턱과 눈썹에는 고드름이 매달렸으며 발이 부르터 물집이 생겼지만 밤낮을 이어 행군하였다. 졸음에 몰려 길을 걸을수 없을 때에는 서로 부축해주고 고무해주면서 줄달음쳤다. 드디여 8일 아침, 제때에 목적지에 도달했다.
6련의 임무는 천진시 동북쪽 소서영문앞 넓고 깊은 해자 호성하에 다리를 놓아 38군의 포와 전차가 안전하게 건너도록 담보하는것이였다. 6련은 밤에 다리를 놓을 철선을 리가분까지 운반해놓고 명령을 기다렸다.
1월 4일 오전 9시, 아군의 수백문의 포가 천진시에 구축한 적의 방어시설을 포격, 방어선을 산산이 부셔놓았다. 11시, 아군 보병의 총공격이 개시되였다. 명령을 받은 6련 전사들은 호성하에 배다리를 놓는 전투에 돌입했다. 철선을 끝고 앞장에 서서 나가던 2패 패장 송천화가 적탄을 맞고 희생되였다. 이밖에 김영도 등 여섯명 전사도 부상을 입었다. 이에 전사들은 철선을 엄페물로 삼아 얼음우로 철선을 밀며 앞으로 전진하였다. 그런데 적의 포격에 얼음이 꺼지는 바람에 얼음을 리용할수 없게 되었다. 지도원 김창룡이 앞장서 가슴치는 물속에 뛰여들자 전사들도 주저없이 물속에 뛰여들었다. 뼈를 에이는듯한 차디찬 물속에서 전사들의 손발이 인차 꽛꽛이 얼어 마비되였다. 라영필패장은 적탄에 손가락 세 개가 뭉텅 끊어져나갔다. 그러나 그는 손을 대충 싸매고는 계속하여 전사들과 함께 철선을 한데 무어 배다리를 놓았다. 그들의 손에 의해 끝내 호성하에 배다리가 놓여졌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겼다. 한줄기라고 하던 호성하가 한줄기인 것이 아니라 두줄기였던것이다. 그러니 다리 하나를 더 놓아야 했다. 그런데 다리 하나를 놓기 위해 마련한 기재를 이미 다 써버렸다. 어떻게 할것인가? 지도원 김창룡은 과단성있게 부련장 윤성기에게 38군 공병영과 련계하여 다리 놓을 기자재들을 가져오도록 하는 한편 호성하를 건너 적의 손에서 기자재를 빼앗아올 것을 3패 패장 라영필에게 명령하였다. 라패장은 즉시 한 개 패를 거느리고 호성하를 건너 적진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그러나 적또치까에서 퍼붓는 미친듯한 기관총사격에 돌격하던 전사들은 음페물에 의거해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전사 김운송이 희생되였다. 이에 지도원 김창룡은 엄호사격으로 적의 화력을 압도하여 전사들의 전진로를 열어주었다. 부패장 황충경이 인솔하는 돌격조가 번개같이 적 또치까에 접근하여 적 화구에 수류탄묶음을 던져넣었다. “꽝!”하는 요란한 폭음과 함께 또치까가 산산이 부셔졌다. 이 기회에 돌격해들어간 전사들은 철근과 목재를 구해가지고 돌아왔다. 이리하여 두 번째 호성하에도 7메터 길이의 다리가 놓이게 되었다.
김창룡지도원이 신호탄 세발을 쏘아 다리부설이 성공되였다고 군부에 알리였다. 그러자 중무기들을 실은 아군의 자동차와 전차들이 기세드높이 다리를 건너 천진시내로 진입하였다. 6련 전사들은 목숨바쳐 놓은 다리우로 지나가는 기계화부대를 보면서 “만세!”, “만세!”하고 격동되여 웨치고 또 웨쳤다.
15일 오후 4시, 천진시는 해방군에 의해 끝내 해방되였다. 하지만 6련의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다른 공병부대와 함께 국민당군이 사방에 매설해놓은 지뢰를 해제하는 전투에 뛰여들어야 했던 것이다. 6련은 반을 단위로 지뢰를 제거하는 경쟁을 벌리였다. 제1반에서는 시간당 170개의 지뢰를 제거하여 최고기록을 따냈다. 6련은 형제부대 전사들과 함께 한달동안의 간고한 싸움 끝에 천진시교에 매설해놓은 40여만개나 되는 지뢰를 죄다 해제해버렸다. 지뢰해제전투에서 6련은 조선인전사 김사련 등 3명이 희생되였다.
2월, 사령부에서는 표창대회를 열고 6련에 “다리부설영웅련”이라는 축기를, 2패 5반에는 “기률을 잘 지키는 반”이라는 축기를 수여하였다. 이외에 전 련이 집체대공을 세웠고 지도원 김창룡을 비롯하여 송천화, 라영필, 김영도 등 18명에게 대공을, 23명에게 소공을 기입해주었다.
장강도하작전에서
1949년 4월, 제4야전군의 조선인장병들은 다시 부대를 따라 중남의 6개 성을 해방할 임무를 맡고 남진의 길에 올랐다. 조선인장병들은 간고한 행군에서 애민모범, 규률준수의 모범으로 되었고 수많은 련과 영이 모범련, 모범영으로 되었다.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 15병퇀은 70일간의 행군을 거쳐 5월 7일, 장강이북에 도착했다. 장강첨험을 뛰여넘어 전국을 해방하는 전투에서 많은 조선인장병들이 영웅적정신으로 싸웠다. 그중에서도 장강도하작전의 서막인 단풍진전투에서 연변의 원 길동부대에 속했있던 제156사 466퇀은 주력부대의 순조로운 도하작전을 위해 불후의 공훈을 세웠다. 156사는 원 조선의용군 제5지대를 핵심으로 연변에서 조직된 민족련합부대이다. 그중 466퇀은 1영이 중국인련이고 2영, 3영과 퇀 직속 각 련대들은 모두 조선인들로 구성되였다.
단풍진은 무한에서 약 50킬로메터 떨어진 곳에 위치해있는데 제4야전군이 장강을 강행도하할 지점의 하나였다. 단풍진에는 국민당군 백승희의 126군 304사 912퇀 제3영과 황안보안퇀 일부분이 주둔하고 있었다.
남하선봉 15병퇀은 백숭희부대에 장강방어선을 강화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 야전군주력이 장강이북에 집결되기를 기다릴 사이도 없이 즉시 단풍-무혈간의 약 100킬로메터 전선에서 강행도하작전을 벌리였다.
이에 앞서 4월 28일, 백숭희는 장강방어선을 강화할 대책을 토의하기 위해 긴급회의를 열고 장강북안에 배치했던 26군을 장강남안으로 철거시키고 강북에 8개 영만 남겨두는 긴급조치를 취했다. 장강이북에 남아있는 적들은 아군의 도하작전의도와 동정을 정찰하는 한편 북안의 배들을 랍치하여 남안에 끌어감으로써 아군의 도하작전을 파탄시키려 시도하였다.
43군 사령부에서는 15병퇀 사령부의 통일적인 도하작전방안에 따라 단풍진에서의 강행도하임무를 156사에 맡기였다. 이제 156사는 단풍진의 적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불의의 공격을 들이대 적들의 통제하에 있는 배를 몽땅 빼앗은후 그 배를 타고 장강을 도하하여 돌파구를 개척해야 했으며 제2제대의 퇀들로 돌파력량을 확대하여 적들의 반격을 물리침으로써 무한을 포위공격할 후속부대들의 도하를 보장해야 했다.
주공임무가 466퇀 3영에 떨어졌다. 적의 방선은 일직선으로 된 장강을 등지고 북을 향해 반원형으로 포진되고있었다. 아군은 동쪽거점을 1호목표, 북쪽거점을 2호목표, 서쪽거점을 3호목표, 선박이 집중되여있는 부두를 4호목표라 략칭했다. 3영은 퇀의 경위련까지 배속받아 5개 련의 병력으로 1, 2, 4호 목표를 공격하며 1영은 3영과 협동하여 3호목표를 공격하기로 했다. 2영은 퇀의 예비대로 배치되였다.
5월 13일 저녁 19시 정각, 휴식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울렸다. 여느때 같으면 잠자리를 찾을 전사들이 쥐도새도 모르게 예정된 지점에 재빨리 집합하였다. 156사 각 퇀은 지정된 로선으로 각기 전진했다. 466퇀은 신주-단풍간도로를 따라 단숨에 15~20킬로메터 달려 공격출발점인 반석교에 도착, 때는 정각 22시 30분이였다. 반석교앞 언덕에 설치된 466퇀 지휘부에서 동숭빈퇀장이 전투명령을 내렸다.
“단풍전투는 원 계획에 변동이 없다. 극히 은밀히 행동하여 24시 전에 적진부근에 접근한다. 2, 3로선 부대들은 1로선에서 나는 총소리를 공격개시신호로 삼는다. 1, 4호목표를 공격하는 제1로선 련대들은 적에게 발각되기전까지는 은페하여 적진으로 돌진한다. 그 행동개시시간은 24시 정각이다. 지금 22시 55분이다. 각 영은 곧 전투행동을 개시하라!”
자기들이 나갈 로선에 들어선 1, 3영은 즉시 전진하기 시작했다. 음력 16일이여서 달빛에 단풍진륜곽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북에서 남으로 곧게 뻗은 큰길이 서쪽방향으로 휘우듬히 뻗어간 굽인돌이에서 3영은 두 개 로선으로 나뉘여 1호와 2호 목표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두 개 중기패를 배속받은 9련은 1, 4호 목표를 공격하는 돌격련이였고 10련은 그 예비대였다. 한 개 중기패를 배속받은 경위련은 2호목표를 공격하는 돌격련이였고 8련은 그 예비대였다.
23시 20분에 제1로선 선봉패인 1패를 령솔하여 전진하던 9련 부련장 김범도는 전화로 영지휘부의 허락을 받은후 장강북측 전진로선을 버리고 뚝남측 강변으로 전진하기로 결정하였다. 뚝에 딱 붙어 강변으로 전진하는 것이 더욱 유리했던 것이다.
적진 전면에 접근하여 경중기의 엄호화력을 배치하면서 돌격시간을 기다리고있던 제3로선 방향에서 총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1영이 1호목표의 적에게 발각된것이였다.
3영 영장 원성은 곧 9련과 경위련에 돌격개시명령을 내렸다. 수십정의 경, 중 기관총이 1호와 2호 목표에 몰사격을 퍼부었다. 엄호화력에 적들의 화력이 압도된 순간을 리용하여 9련 1패 패장은 1반을 지휘하여 적진의 장애물을 폭파하고 적의 화점에 달려들었다. 1반 반장 림수현이 제일 앞에서 적의 화점에 수류탄을 던졌다. 이때 좌측으로 접근한 3반 전사 오창근도 1호 화점에 수류탄을 던졌다. 이리하여 1호거점에서 도망치는 일부 적들은 3반에서 추격하고 1반은 1호화점을 점령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2반은 부련장 김범도의 지휘하에 맹호마냥 내달려 부두를 점령했다.
전투가 시작되여 2분만에 1호거점을 돌파하고 8분만에 부두를 점령했다는 김범도부련장의 전화보고를 받은 3영 영장 원성은 예비대인 10련을 전투에 투입시켜 종심으로 공격함으로써 2호, 3호 거점을 측면으로 위협하라고 명령했다.
경위련은 수심이 1메터 넘는 늪을 건너 적의 화점으로부터 10여메터 떨어진 지점까지 접근, 2, 3패와 중기패의 화력으로 적의 화력을 압제하게 한후 선봉패인 1패로 하여금 적의 화점으로 진격해 들어가게 해 15분만에 2호방선을 돌파, 2련과 함께 종심으로 돌입하여 도망치는 적들을 추격하였다.
1호목표를 공격하는 선봉패인 1패를 엄호하기 위하여 2, 3패와 중기패를 지휘하던 9련 련장 차춘모는 복부에 중상을 입고도 계속 지휘를 견지하였다. 련락병 최장근이 달려가 업으려 할 때 그는 자기는 관계하지 말고 빨리 부두로 돌격하라는 말만 남기도 눈을 감았다. 련장이 희생되자 지도원 김성희가 2, 3패와 중기패를 지휘하여 드센 화력으로 1패를 엄호하였다. 1호거점을 돌파하고 10련이 전투에 투입한후 9련은 곧 부두에 집결하여 선박을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한시간 남짓한 전투로 단풍작전의 기본임무를 완수하였다. 다만 1영이 공격하던 3호거점의 화점에 몰려든 적들이 계속 대항하고있을뿐이였다. 이 보고를 받은 동승빈퇀장은 산포 1문을 갖고 3영에 와 전투를 직접 지휘했다. 10여정의 경, 중 기관총이 적의 화점을 봉쇄하고 산포가 직사하자 적들은 흰기를 내두르면서 투항을 알려왔다.
싸움이 5월 14일 4시 30분에 결속되였으니 전투는 약 5시간 걸림셈이였다. 이번 작전에서 아군은 적 487명을 소멸하고 경, 중 기관총 18정, 보총 430자루, 선박 69척을 로획했다. 반면 9련 련장 차춘모, 경위련 지도원 박량호 등 9명의 조선인장병을 비롯한 43명 아군이 장렬히 희생되였다.
단풍전투에서 로획한 배를 타고 아군은 5월 14일부터 장강도하작전을 시작하였다. 466퇀 2영을 주공대로, 3영을 제2제대로 하여 도하에 성공한후 또 장강남안에서 적의 배 300척을 로획하여 제4야전군 후속부대들의 신속하고 순조로운 도하를 보장하였다.
장강을 건너 466퇀은 형제부대들과 함께 강을 거슬러올라가면서 의창, 의당, 삼두평에서 적 6000여명을 섬멸하였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