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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한민족의 명절 광복절 잘 알고계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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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17-08-15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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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조선반도 (한반도)가 일본으로부터 광복된 것을 기념하는 날

광복절은  조선반도가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에서 벗어나 독립한 날과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날을 축하하고 기념하는 날이다.한국의 4대 국경일의 하나로, 1949년에 제정되었다. 

조선반도는  1910년 8월 28일에 일본에 주권을 빼앗겼다. 
그러나 선조들은 주권을 다시 찾기 위해 무장 투쟁을 벌이는 등 끊임없이 힘썼다. 

우리 선조들은 1919년 3월 1일에는 서울에 있는 탑골 공원에서 기미 독립 선언문을 낭독하고, 대한 독립 만세를 불렀다. 만세 운동은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일본은 평화적인 만세 운동을 총칼로 진압하였다.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해외로 옮긴 선조들은 중국의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세우고, 광복군을 조직하는 등 더욱 조직적으로 독립운동을 벌였다. 1939년에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일본은 식민 통치를 더욱 강화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군에게 항복하여 조선반도는 광복을 맞았다. 곧바로 조선반도에는 미군과 소련군이 들어오고, 38도선을 경계로 국토가 분단되는 등 시련을 겪었으나,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여 번영의 기틀을 다졌다.
                               

1910년 8월부터 1945년 8월까지 일본제국주의의 한국강점기는 1910년대의 무단통치기와 1920년대의 문화정치기로 불리는 민족분열통치기, 그리고 1930년대 이후부터 1945년 일제 패망까지의 파쇼 통치기 등 3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무단통치기의 민족해방운동전선은 만주지방을 중심으로 민족해방운동기지를 건설하는 한편, 전체 민족적 저항운동으로서의 3·1운동을 준비했다.
민족분열통치기에는 민족협동전선운동을 전개하던 시기이며, 파쇼 통치기에는 민족통일전선의 구축에 주력했다. 

1910년 8월부터 1945년 8월까지 일본제국주의의 한국강점기는 1910년대의 무단통치기와 1920년대의 문화정치기로 불리는 민족분열통치기, 그리고 1930년대 이후부터 1945년 일제 패망까지의 파쇼 통치기 등 3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식민통치정책의 시기적 변화에 따라 이에 대응하는 전체 민족해방운동의 추진방법도 달라져갔다. 무단통치기의 민족해방운동전선은 전국토가 완전 식민지로 된 상태에서 만주지방을 중심으로 민족해방운동기지를 건설하는 한편, 전체 민족적 저항운동으로서의 3·1운동을 준비했다.

3·1운동 

민족분열통치기의 민족해방운동전선은 일제의 민족분열통치에 대응하기 위해 민족협동전선운동을 전개하던 시기이며, 파쇼 통치기의 민족해방운동전선은 이 시기의 세계사가 파쇼 체제의 등장에 대항하고자 형성된 인민전선에 영향을 받아 민족통일전선의 구축에 주력하던 시기였다. 

물론 1905년부터 실시된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보호통치'도 사실상 식민지배와 다름없다고 보고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식민지배기간을 40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1905~10년에는 비록 보호국체제 아래에서나마 대한제국의 주권이 아직 남아 있었다는 점에서 일제 식민지배기는 1910년부터 일제가 패망한 1945년까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제의 무단통치기 

일제강점기의 제1기로서 1910년의 '합병'에서부터 1919년 3·1운동 이전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1905년 이후 보호국체제 5년간을 거친 일본은 한반도를 완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의병세력과 애국계몽운동에 대해 본격적으로 탄압을 했다. 의병전쟁의 경우 1909년 하반기부터 '남한대토벌작전'이라는 것을 감행하여 의병전쟁세력을 '토벌'하는 한편, 언론·민족교육·출판 활동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던 애국계몽운동을 가혹하게 탄압하는 것은 물론 '105인사건'을 날조하여 신민회원을 비롯한 모든 반일세력의 뿌리를 뽑으려 했다.

'합병'을 감행한 후 일본은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여 조선을 통치하며, 현역 헌병이 직접 경찰업무를 담당했으며 소학교 교원과 군수 등의 문관들도 칼을 차고 근무하게 하는 헌병경찰제도를 실시하여 공포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식민통치 초기의 안정을 유지하려 했고, 민간 출판의 일체 금지, 민족계 교육기관의 폐지, 애국계몽운동 간행물의 전면적 압수, 결사·집회의 전면적 금지 등을 통해 식민지배의 기초를 확보해가는 한편, 총독의 자문기관으로 중추원을 두고 '합병'에 공이 있는 친일파 귀족과 관료들을 그 참의로 임명하여 총독통치에 조선인도 참여하고 있는 것처럼 가장했다.

헌병경찰제도를 통해 한반도 전체의 통치권을 장악한 일본은 경제적으로 먼저 조선인자본의 산업자본화를 막고 일본 공업제품의 조선시장 확보를 위해 회사령을 발포했다. 

또한 조선을 일본의 항구적인 식량공급지로 만들기 위해 조선총독부를 포함한 일본기관 및 개인의 조선에서의 토지 확보, 토지세수입 증가를 통한 식민지배 재원의 확보 등을 위해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는 한편, 조선에서의 식민지배망 확보를 위해 철도부설·도로건설·항만시설 등 사회간접자본 부문에 일정한 투자를 했다.

사회적으로는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여 식민지 지주제를 강화하고 개항 이전인 조선 후기와 개항기를 통해 일부 성장하고 있던 농촌 중간계급을 전면적으로 몰락시켜 그들을 소작농민으로 재편성함으로써 식민지적 봉건유제가 강력히 잔존하게 했고,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농민층 분해를 촉진하면서도 농촌에서 분출된 인구를 수용할 만한 식민지 공업시설을 갖추지 않음으로써 장차 농촌 및 도시빈민층이 양산될 소지가 마련되고 있었다.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통치 제1기로서의 무단통치기는 일본제국주의가 철저한 탄압을 통해 식민지배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제거하고 정치적·경제적·사회적으로 식민통치의 기초를 확보해가던 시기였다. 

따라서 이에 대한 민족해방운동 쪽의 대응도 자연히 그 대오를 재정비하는 기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우선 국내운동에서는 의병전쟁의 잔존세력들이 일부 무장저항을 계속하는 한편, 애국계몽운동계 세력들에 의해 3·1운동이 준비되던 시기였고, 국외운동에서는 시민회계세력 등에 의해 만주지방을 중심으로 독립운동기지가 건설되던 시기였다.

일제강점기 이전에도 의병전쟁세력과 같은 무장항쟁론, 애국계몽운동세력과 같은 실력양성론 등 민족운동 방법론에 일정한 차이가 있었으나 무단통치기에도 독립전쟁론적·실력양성론적 방법론과 외교독립론이 등장했고, 이 방법론은 3·1운동을 거쳐 1920년대 민족해방운동에서도 그 맥락이 이어졌다.

일제의 민족분열통치기 
일제강점기의 제2기로서 3·1운동에서부터 1931년 일본제국주의가 '만주사변'을 일으켜 대륙침략에 나서면서 식민지배체제를 파쇼 체제화하기 이전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1910년대 무단통치에 대한 반발이 축적되고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일정하게 받는 한편, 제1차 세계대전 종결에 따른 세계질서의 재편성과정을 하나의 기회로 포착하여 폭발한 3.1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식민통치방법을 일정하게 바꾸어나갔다. 그것은 표면적으로 무단통치를 지양하고 유화통치를 표방하는 일과 민족분열정책을 적극적으로 펴는 일이었다.

3·1운동 후 일본은 조선에 대한 '문화정치'를 표방하면서 헌병경찰제도를 폐지하고 보통경찰제도를 채택했다.
그러나 경찰의 병력·기구·비용은 무단통치시기의 약 3배로 증가했고, 문관이 칼을 풀기는 했으나 1군 1경찰서 1면 1주재소 제도가 확립되고 특고형사(特高刑事)·사복형사(私服刑事)·밀정(密偵) 등을 두어 무단통치를 능가하는 지배망을 강화하는 등 민족분열정책을 펴나갔다.
민족분열정책은 우선 자산계급·지식인·종교인 등의 일부를 친일세력으로 포섭하는 일에서 시작되었다.

3·1운동의 실패에 좌절되고 노동자·농민 계급의 의식 성장에 불안해진 일부 자산계급과 지식인·종교인 등이 자치운동·문화운동을 주장하면서 절대독립론에서 후퇴했고, 조선총독부가 지방자치제를 실시한다는 명목으로 면부협의회(面府協議會)·도평의회(道評議會) 등을 두자 각 지방의 자산계급과 지식인 등이 이에 응함으로써 친일세력으로 바뀌어갔다.

한편 경제적인 면에서 토지조사사업을 완성한 일본은 조선에서의 쌀 생산량을 높여 본국의 식량부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을 실시했다.

이는 수리시설과 토지개량사업의 확장을 통해 연간 약 900만 석의 쌀을 증산하여 그중 700만 석을 일본으로 가져갈 목적으로 세워졌다. 

그러나 사업자금 조달이 어려웠던 점, 일본자본이 토지개량보다 더 이익이 많은 토지매입에 주로 투입된 점 등으로 예정대로 실시되지 못했다. 

계획이 예정대로 실시되지 못했는데도 쌀의 일본 이출량은 많아져서, 1920년에 0.63석이던 조선인 1인당 연간 쌀소비량은 1930년에는 0.45석으로 떨어지는 한편 조선의 농업을 미단작(米單作)농업이 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920년대 말기에는 세계공황의 여파가 조선에 미쳐 심각한 농업공황을 가져왔고 이 과정에서 조선농민의 파산은 속출했다. 파산한 농민의 일부는 산 속으로 가서 화전민이 되거나 일본의 노동시장으로 흘러가거나 만주로 가서 소작농이 되었으며, 남은 농업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수가 이른바 세궁민(細窮民)이나 걸인이 되어 유랑했다.

1920년대의 민족분열통치기로 들어서면서 회사령은 해제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 전승국인 일본의 자본주의가 급속히 발달하면서 식민지 조선에 대한 공업투자도 어느정도 증가하여 미쓰이[三井]·미쓰비시[三菱]·노구찌[野口] 등 독점재벌이 침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20년대 식민지 경제정책의 주된 방향이 일본 본국에 대한 원활한 식량공급을 위한 산미증식정책에 있었으므로 아직도 본격적인 공업투자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런 조건 속에서 조선인 자본에 의한 중소기업이 메리야스 공업과 고무공업 등에서 일부 일어나고 조선인 자본 민간은행이 일부 설립되었다.
한편 3·1운동으로 활기를 띠었던 민족해방운동전선은 1920년대 전반기에 독립운동의 총본부로서, 좌우익세력의 통합정부로서 성립되었던 상해임시정부의 활동이 좌익세력과 무장투쟁론세력의 이탈, 국민대표자대회의 결렬을 계기로 침체국면으로 들어가고, 자치론자를 중심으로 하는 우익세력의 일부가 타협주의노선으로 선회함으로써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이 위기를 타개하고 새로운 활로를 열기 위해 1926년부터 중국전선에서 좌우익세력의 협동전선을 지향하는 민족유일당운동이 일어났고, 이 운동은 국내에서는 1927년에 신간회운동으로 나타났다.
중국 관내의 좌우합작 운동으로, 특히 만주지방에서는 3부통합운동으로 발전했던 해외의 민족유일당운동은 끝내 성공하지 못했으나, 신간회운동은 비타협적 우익세력과 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하는 좌익세력의 협동전선에 의해 일본제국주의의 끈질긴 탄압 아래서도 노동운동·농민운동·학생운동 등을 지도하면서 1931년까지 지속되었다.

이보다 앞서 1918년에 조직된 한인사회당에서 비롯된 사회주의 전선은 상해임시정부의 성립과 함께 고려공산당운동으로 발전하여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사이에 심한 파쟁을 보이다가 1925년에 고려공산당시대를 청산하고 국내에 조선공산당이 조직되었다. 

이후 조선공산당은 1928년까지 4년간에 4차례나 일제의 검거로 당이 괴멸되면서 곧 후속당이 성립되는 과정을 겪었다. 이런 과정에서도 조선공산당은 민족협동전선에 참가하여 비타협적 우익세력과 함께 표면단체로서의 신간회를 유지하면서 활동했다.

일제강점기의 제2기로서의 1920년대 민족분열통치기는, 일본제국주의가 정치적으로는 3·1운동에의 대응책으로서 지주·자산계급·지식인 등을 중심으로 하는 우익세력의 일부를 친일세력화하여 민족분열정책에 성공해가던 시기였고, 경제적으로는 1910년대에 완성한 토지조사사업을 기초로 조선의 일본에 대한 식량공급지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한 시기였다.

이 과정을 통해 농업경영면에서는 소작경영에 의한 자본주의적 이윤추구가 정착해감으로써 농민의 전면적 하강분해에 의한 빈궁화·유민화가 이루어져 가던 시기였다.

 이와 같은 식민지배정책의 변화에 대응하여 민족해방운동 전선은 1920년대 전반기까지의 임시정부 중심의 운동과 고려공산당 중심의 운동을 끝내고 국내에서 성립된 조선 공산당에 참가한 좌익세력과 비타협적 우익세력이 협조해서 민족협동전선운동을 펼쳤던 시기였다.
그것은 이 시기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배정책인 민족분열정책에 대응한 정책이기도 했다.

일제의 파쇼 통치기 

일제강점기의 제3기로서 대체로 1931년 일본제국주의의 만주침략에서부터 태평양전쟁에서 일제가 패망한 1945년 8월 까지를 가리킨다.
1920년대 말기부터의 경제공황에 타격을 입은 일본제국주의는 그 대응책으로 파쇼 체제로 전환하는 한편, 공황탈출구를 만주침략에서 찾게 되었다. 이 침략전쟁이 이후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짐으로써 한반도에 대한 식민지적 성격도 달라졌으며, 이에 따라 그 식민통치정책도 파쇼 체제, 전시체제로 전환되어갔다. 

한국에 대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파쇼 정책은 1920년대의 민족분열통치기를 통해 상대적으로 다소 느슨했던 사상통제를 강화하면서 국내의 민족운동을 철저히 탄압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조선사상보호관찰령·조선사상범예방구검령 등의 악법을 제정하여 사상통제를 강화하고, 조선방공협회·시국대응전조선보국연맹 등을 두어 사상범의 전향을 강요함으로써 민족해방운동전선에 큰 타격을 주었다.

한편 1937년 중일전쟁을 도발한 후에는 조선에도 국가총동원법을 적용시키고 국민총동원연맹을 결성하여 전시체제를 강화하는 한편,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강조하고 한글사용을 금지했으며, 조선인에게도 일본어 상용과 신사참배(神社參拜)·궁성요배(宮城搖拜) 등을 강요하고 나아가서 그 성명을 일본식으로 바꾸게 하는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 '일본정신발양주간'을 두어 조선인의 민족성을 말살하려 했다.

한편 저축보국주간을 두고 '애국공채'를 강매함으로써 전쟁비용 충당에 광분했다. 더욱이 일본제국주의는 침략전쟁을 확대하면서 전쟁물자와 인력의 조달이 어려워지자 조선인에게도 국민징용령(國民徵用令)을 적용시켜 보국대·징용·여자정신대(女子挺身隊) 등을 통해 전쟁노동력으로 동원했고, 나아가서 육군특별지원병제도·징집제도·학도지원병제도 등을 실시하여 조선인을 직접 전투인력으로 동원했다.

파쇼 통치기를 통해 약 500만 명의 조선인이 전쟁노동력으로 동원되었고, 약 50만 명의 조선인 청년들이 전투인력으로 동원되었다.
한편 경제적으로는 1920년대 말기부터의 경제공황으로 조선의 농촌경제가 파멸상태에 빠지자, 조선총독부는 그 대책으로 1932년부터 농촌진흥운동을 펴는 한편, 조선소작조정령(朝鮮小作調停令 : 1932)·자작농지설정사업(自作農地設定事業 : 1932)·조선농지령(朝鮮農地令 : 1934) 등을 발표했다.

그러나 어느 경우도 효과를 보지 못한 채 중일전쟁의 도발로 본격적 전시체제로 들어서게 되었다. 전시체제하에서 식량부족 상태에 빠진 일본제국주의는 조선미곡배급조정령(1939)·임시미곡배급규정(1940) 등을 발표하여 미곡의 강제공출제도를 실시했다. 

 

파쇼 통치기의 경제는 공업부문에서 어느 정도의 변화가 있었다. 1920년대까지의 조선은 일본에 대한 식량공급지로서의 역할이 중요했으나 경제공황을 겪는 과정에서 조선쌀의 일본으로의 과잉유출이 일본 농촌경제에 심한 타격을 주게 되었다.

더욱이 1930년대 들어 일본의 대륙침략이 본격화함으로써 식민지 조선은 식량공급지로서의 역할 위에 다시 병참기지로서의 역할을 더 요구받게 되었다(대륙병참기지화정책). 즉 수력자원을 비롯한 조선의 풍부한 자원을 이용하는 공업화 요구가 높아지게 된 것이다. 

 

1920년대에도 조선에 대한 일본독점재벌의 침투가 있었으나 일본제국주의의 대륙침략 본격화에 따르는 병참기지화 시기로서의 1930년대는 조선의 공업구조가 종래의 소비재·식료품 공업 중심에서 다소 벗어나 흥남질소비료공장의 설립으로 대표되는 중화학공업생산이 어느 정도 높아지기 시작하는 구조로 바뀌게 되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조선 공업에 대한 일본독점자본의 지배를 더욱 강화시키고 공업 발달의 파행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병참기지화정책에 의한 약간의 공업화도 조선인의 생활경제와는 전혀 격리되어 있었던 것이다.

 

 1920년대를 통해 일부 발달했던 공장제수공업 단계가 대부분이던 조선인 공업은 1930년대 들어 격심해진 노동운동을 극복하고 자본축적도를 높여 공장제수공업의 성격을 탈피해야 하는 2가지 과제를 안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인 기업의 일부는 만주사변 이후 일본제국주의의 군수 인플레이션 정책에 편승하여 자본축적도를 높이고 예속자본으로 변모했으며, 대부분의 조선인 기업은 조선총독부의 군수산업 우선정책하에서 심한 통제를 받고 더 성장하지 못하다가 조선공업조합령(1938)·기업정비령(1942) 등을 거쳐 일본 대기업에 흡수당했다.

1930년대 이후 일본제국주의의 파쇼 통치에 대한 민족해방운동전선의 대응책은 1920년대 민족협동전선운동의 실패를 반성하면서 전체 전선에 걸쳐 민족통일전선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1930년대 이후의 세계사가 독일·이탈리아·일본 중심의 파쇼 체제 등장에 대응하기 위해 위로부터의 통일전선으로서 인민전선을 구축해간 것과 같이, 일본제국주의 파쇼 체제와 투쟁하는 조선의 민족해방운동전선도 민족통일전선을 구축하는 길로 나아갔다.

1920년대에 성립된 민족협동전선으로서의 신간회가 해소된 다음해인 1932년에 중국관내지역 전선에서 우익전선의 대표적 단체라 할 수 있는 한국독립당과 좌익단체화한 조선의열단 등이 중심이 되어 통일전선체로서의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성립시켰다.

1935년에는 이 동맹을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한층 강화된 통일전선 정당으로서의 조선민족혁명당이 성립되었다.
이후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일본이 중일전쟁을 도발한 1937년에는 조선민족혁명당 중심의 좌익통일전선이라 할 수 있는 조선민족전선연맹이 성립되고, 한국국민당 중심의 우익통일전선이라 할 수 있는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가 성립되었다가 두 전선을 통일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어 1939년에는 전국연합진선협회를 성립시킴으로써 한때 통일되었다.

한편 1936년에는 만주지방에서의 항일무장항쟁이 동북인민혁명군 동북항일연군으로 발전하면서 그 속에서 활약하던 조선인들에 의해 통일전선체로서의 조국광복회가 성립되었다.
이것은 물론 코민테른 인민전선론의 영향이지만, 일제 파쇼 통치기의 조선민족해방운동전선 자체도 좌우익전선을 막론하고 민족통일전선의 구축을 추구했던 결과이다.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전쟁이 확대될수록 민족해방을 가깝게 전망한 이 시기의 전체 민족해방운동전선은 모든 정치세력을 통일하여 해방 후 통일민족국가 수립에 대비해야 했으며, 군사적으로도 모든 군사력을 통일하여 참전함으로써 일본제국주의의 항복조약에 참가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일이 절실했다.
국토 전체가 완전식민지로 되고, 한때 해방구적 역할을 했던 만주지방이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감으로써 전선이 분산되기는 했으나, 중국관내지역 전선은 민족전선연맹과 광복운동단체연합회가 1942년부터 임시정부를 통일전선정부로 만들고 민족전선연맹의 군사력인 조선의용대를 임시정부 군사력인 한국광복군으로 통합했다.

통일전선정부로 된 임시정부는 1941년 이후 중국공산군지역인 옌안[延安]에 성립된 조선독립동맹 및 그 군사력인 조선의용군과의 통일전선에 합의했고, 1930년대 이후 일제의 파쇼화에 대응하면서 발전한 국내의 혁명적 노·농운동과 그것을 모체로 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도 1930년대 후반기 이후에는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인민전선노선을 수용하면서 통일전선을 지향해갔으며, 1944년에 국내에서 좌우익 통일전선으로 비밀리에 조직된 건국동맹도 민족해방에 대비하면서 해외전선과의 통일을 기하여 조선독립동맹과의 연결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일본제국주의가 패망했다.

요컨대 일제강점기의 제3기로서의 파쇼 통치기는 침략전쟁을 본격화한 일본제국주의가 식민지 조선에 대해 정치적·경제적인 면에서의 전쟁협력을 강요하던 시기였다.
특히 중일전쟁 도발 후에는 종래 식량공급지 중심으로 경영하던 조선을 병참기지로 삼기 위해 일본독점자본에 의한 공업시설을 일정하게 갖추어갔다. 일제의 파쇼 통치와 일정한 공업화에 대응하는 민족해방운동전선의 1920년대까지의 민족협동전선에 의한 합법투쟁이 청산되고 혁명적 노·농운동과 조선공산당재건운동이 추진되는 한편, 민족해방에 대비하면서 통일민족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좌우익 통일전선운동이 추진되었다.

사회성격 

36년간에 걸친 일제식민통치기가 우리 역사 전체를 통해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 일제강점기는 역사적으로 어떤 성격을 가지는가, 그것이 일제강점기 이전의 개항기와 8·15해방 이후의 우리 역사를 어떻게 연결지우는가, 8·15해방 이후의 민족분단과 일제강점기와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하는 문제 등에 대한 이해가 객관적으로 요구된다.(→ 한국사)

일제강점기 이전의 개항기 30여 년간은 우리 역사가 정치적으로는 대체로 입헌군주제를 지향했고, 극히 일부가 공화제를 지향하면서 부르주아적 인민주권주의를 실현시키려 했고, 경제적으로는 일반적으로 자본주의체제를 지향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항기의 정치적·경제적 지향이 일제강점기에 그대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우선 정치적으로는 일본의 덴노 지배체제가 그대로 옮겨졌을 뿐만 아니라 일본 본국이 가진 극히 제한적인 의회제도마저 조선에는 적용되지 않고 군인출신 총독에 의한 독재정치가 일제강점기 전체를 통해 실시되었다.

한편, 경제적인 면에서의 개항기는 농업경제부문에서 지주전호제(地主佃戶制)가 일정하게 붕괴되는 한편, 자소작·상농층 등을 중심으로 하는 농촌중간층이 성장해갔고, 상공업부문에서는 외국자본의 침투 아래서도 내국자본에 의한 공장제수공업이 일정하게 발전하고 상업자본 및 관료자본의 산업자본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면서 단초적 공장공업도 발달해갔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로 들어서면서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토지조사사업이 강행됨으로써 개항기의 추세와는 달리 자소작 상농층의 성장은 저지되었으며, 그들을 소작농민으로 전락시켜 식민지적 지주소작제를 광범위하게 재편성함으로써 그 사회를 식민지반봉건사회가 되게 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에 반해 농업경제부문에서의 이같은 반봉건적 요소가 광범위하게 재편성되었고, 또 그것이 일제강점기 전체를 통해 강인하게 잔존했음을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 이식자본주의로서의 식민지자본주의가 그 나름대로 원시축적과정과 상업자본주의 단계 등을 거치면서 단계적인 발전을 해왔고, 특히 1930년대 이후 파쇼 지배체제하에서의 공업화를 통해 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 단계에까지 나아갔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일제강점기의 사회성격을 식민지반봉건사회로 인식하든 식민지자본주의사회로 인식하든 간에 그것이 일제강점기 이전 사회의 순조로운 연장선상에 있은 것은 아니며 일제강점기로서의 굴절된 부분을 가질 수밖에 없었음은 명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강점기의 한반도 전체가 하나의 사회체제 아래 있었던 것이 분명하며, 그것이 또 8·15해방 후 사회적·경제적 요인보다 오히려 정치적 요인에 의해 자본주의체제와 사회주의체제로 양분되었다.

장차 민족통일이 이루어진 후의 역사학은 통일 이후의 시대를 현대사로 하고 개항기와 일제강점기와 분단시대를 통틀어 통일 이전의 근대사로 인식할 수 있을 것이며, 일제강점기의 사회성격문제나 역사적 위치문제도 그 테두리 안에서 다시 검토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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