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몽고 찰란둔시와 조선족자치향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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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15-08-24 09:26|본문
내몽고 찰란둔시와 조선족자치향 기행
귀국을 하루 앞두고 내몽고 '찰란둔시와 아영기현 조선족 자치향'을 관광키로 했다. 우리 일행은 아침식사를 마치고 역으로 나갔다. 기차타면 40분 거리다. 매표창구에 30대 중반쯤으로 보인 여성한테 세 사람의 신분증과 내 여권을 제시했더니, 여권만 팽개친 뒤, 신분증을 요구했다.
'한국주민증'을 건네자 이것마저 던져 버린다. 너무 민망하고 황당했다. 입안서 튀어나오려는'육두문자'를 간신히 삼켰다. 일행들도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항의했다가는 되레 혹하나 더 붙을까 봐, 그녀의 횡포에 가까운 거친 태도에, 한마디 말도 꺼내지 못한 채 침묵했다. 말단 철도공무원 한 사람이 대국의 이미지를 '확' 구긴 꼴이다. " 과거 한때 우리나라 공무원도 마찬가지였다. 선진문화국으로 가는 과도기 현상으로 이해하니 화가 쉽게 풀렸다.
우리는 승용차를 빌려 타고 가기로 했다. 정씨는 누군가에게 전화하더니 곧바로 승용차가 달려왔다. 우선 '찰란둔시'를 관광한 뒤에 '아영기현 조선족자치향'을 가기로 했다.
50분 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찰란둔시 인구는 23만명이다. 위치는 호륜패얼시 대흥안령 산맥 동남쪽 기슭의 삼림지역을 중심으로 한, 내몽고자치구에서 유일한 '풍경명승구'로 정부 당국서 지정돼 볼거리가 많았으나, 시간 관계상 '적교공원'과 시가를 건성으로 봤다. 적교공원은 내몽고 동쪽, 최대 공원으로써 물줄기가 사방으로 둘러싸여 흐르고 초목이 무성했다.
또 1905년 건립된 독특한 형태의 적교(다리)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키 위해 공원이름마저 '적교공원'으로 명명했다. 규모는 꽤 커 보였다. 그곳엔 한가롭게 거니는 시민이 있었고, 나이 든 분들은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잡담을 나누고, 다른 한편에선 트럼프 장기를 두는 모습은 영락없이 우리와 다를 게 없다.
적교에 대한 기대를 걸고 요모조모 살펴봤지만 특출하거나 신기한 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다리 중심에 두 개 기둥을 박고, 좌우 양쪽을 잡아당기는 공법으로, 마치 모양새가 사장교를 닮았다. 하지만 100년 전 러시아인들의 선진화된 건축기술로 건설된 점에는 고개가 끄덕여진다. 또한 시내 상가의 간판에는 중국 한자와 몽고 글자를 병기한 게 눈에 띄었다.
일제에 비하면 중국은 소수민족의 말살정책보다는 그들의 전통문화를 장려해주고, 보호해주는 포용정책이 인상적이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일행 중에 역사교사였던 정삼준(63)씨에게 "중국이 소수민족을 포용한 이유를 물었다" 그의 대답은 이렇다. "만일 중국이 소수민족을 탄압하고, 차별정책을 시행했다면, 내부적 혼란과 저항으로, 내란으로 번졌을 것이다"라고 당시의 국내 정세를 설명해 줬다.
그래서 55개 소수민족과 힘을 합쳐서, 지구촌의 G2가 됐다는 그의 설득력이 있는 논리에 공감이 간다. 우리가 배울만한 정신이다. 한국 다문화사회는 거스르지 못한 시대 흐름이다. 그런데도 일부에선 '다문화정책'을 비판하고, 제노포비아(외국인혐오증)를 확산시키는 현실이 안타깝다.
오후에 1시간쯤 걸려 내몽고서 유일한 아영기현(郡) 조선족향(面)으로 들어왔다. 때마침 조선족인 김영수 씨를 만나서 조선족 실태에 대해 설명하던 그의 표정은 어두웠다. 동광촌에 조선족이 330명쯤 거주했는데, 70명은 한국으로 떠났고, 100명 정도는 중국 내 큰 도시로 이주하여, 남은 인구는 160명이라고 한다.
또 신발촌에는 800명이 살았는데, 동광촌과 이주현상이 비슷하다면서 현재 인구는 500명 정도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한·중 수교와 도시화 세계화로 인해, 조선족 사회는 격변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건 더 나은 삶을 위한 도전일 것이다. 특히 이곳 '조선족향'은 자고로 '가무, 입쌀, 미식의 고장'으로 불러왔다.
그뿐만 아니다. 조선민족의 우수한 전통문화가 다른 민족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최근 중국 정부에서 조선족 민속관과 기와집을 지어주어, 깔끔한 현대 도시로 변화시켜주었다는 자랑도 빼놓지 않았다. 또 김 씨는 가슴 찡한 사연도 덧붙인다. 1945년 8월15일 일제가 두 손을 번쩍 들었을 때, 조선족들은 기뻐하고, 환호하면서 목청껏 만세를 불렸단다.
그들은 농사가 잘 되면 돈을 모아, 언젠가는 고국으로 돌아갈 굳은 다짐을 했지만, 6·25가 터져 가지 못한 채, 타국 땅에서 눈을 감았다고 한다. 누구나 고향은 어릴 적 추억이 담겨있고, 조상의 뼈가 묻혀 있는 곳이다. 그래서 더욱 가고 싶고, 두고두고 그리워하는 것이다.
귀국을 하루 앞두고 내몽고 '찰란둔시와 아영기현 조선족 자치향'을 관광키로 했다. 우리 일행은 아침식사를 마치고 역으로 나갔다. 기차타면 40분 거리다. 매표창구에 30대 중반쯤으로 보인 여성한테 세 사람의 신분증과 내 여권을 제시했더니, 여권만 팽개친 뒤, 신분증을 요구했다.
'한국주민증'을 건네자 이것마저 던져 버린다. 너무 민망하고 황당했다. 입안서 튀어나오려는'육두문자'를 간신히 삼켰다. 일행들도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항의했다가는 되레 혹하나 더 붙을까 봐, 그녀의 횡포에 가까운 거친 태도에, 한마디 말도 꺼내지 못한 채 침묵했다. 말단 철도공무원 한 사람이 대국의 이미지를 '확' 구긴 꼴이다. " 과거 한때 우리나라 공무원도 마찬가지였다. 선진문화국으로 가는 과도기 현상으로 이해하니 화가 쉽게 풀렸다.
우리는 승용차를 빌려 타고 가기로 했다. 정씨는 누군가에게 전화하더니 곧바로 승용차가 달려왔다. 우선 '찰란둔시'를 관광한 뒤에 '아영기현 조선족자치향'을 가기로 했다.
50분 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찰란둔시 인구는 23만명이다. 위치는 호륜패얼시 대흥안령 산맥 동남쪽 기슭의 삼림지역을 중심으로 한, 내몽고자치구에서 유일한 '풍경명승구'로 정부 당국서 지정돼 볼거리가 많았으나, 시간 관계상 '적교공원'과 시가를 건성으로 봤다. 적교공원은 내몽고 동쪽, 최대 공원으로써 물줄기가 사방으로 둘러싸여 흐르고 초목이 무성했다.
또 1905년 건립된 독특한 형태의 적교(다리)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키 위해 공원이름마저 '적교공원'으로 명명했다. 규모는 꽤 커 보였다. 그곳엔 한가롭게 거니는 시민이 있었고, 나이 든 분들은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잡담을 나누고, 다른 한편에선 트럼프 장기를 두는 모습은 영락없이 우리와 다를 게 없다.
적교에 대한 기대를 걸고 요모조모 살펴봤지만 특출하거나 신기한 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다리 중심에 두 개 기둥을 박고, 좌우 양쪽을 잡아당기는 공법으로, 마치 모양새가 사장교를 닮았다. 하지만 100년 전 러시아인들의 선진화된 건축기술로 건설된 점에는 고개가 끄덕여진다. 또한 시내 상가의 간판에는 중국 한자와 몽고 글자를 병기한 게 눈에 띄었다.
일제에 비하면 중국은 소수민족의 말살정책보다는 그들의 전통문화를 장려해주고, 보호해주는 포용정책이 인상적이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일행 중에 역사교사였던 정삼준(63)씨에게 "중국이 소수민족을 포용한 이유를 물었다" 그의 대답은 이렇다. "만일 중국이 소수민족을 탄압하고, 차별정책을 시행했다면, 내부적 혼란과 저항으로, 내란으로 번졌을 것이다"라고 당시의 국내 정세를 설명해 줬다.
그래서 55개 소수민족과 힘을 합쳐서, 지구촌의 G2가 됐다는 그의 설득력이 있는 논리에 공감이 간다. 우리가 배울만한 정신이다. 한국 다문화사회는 거스르지 못한 시대 흐름이다. 그런데도 일부에선 '다문화정책'을 비판하고, 제노포비아(외국인혐오증)를 확산시키는 현실이 안타깝다.
오후에 1시간쯤 걸려 내몽고서 유일한 아영기현(郡) 조선족향(面)으로 들어왔다. 때마침 조선족인 김영수 씨를 만나서 조선족 실태에 대해 설명하던 그의 표정은 어두웠다. 동광촌에 조선족이 330명쯤 거주했는데, 70명은 한국으로 떠났고, 100명 정도는 중국 내 큰 도시로 이주하여, 남은 인구는 160명이라고 한다.
또 신발촌에는 800명이 살았는데, 동광촌과 이주현상이 비슷하다면서 현재 인구는 500명 정도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한·중 수교와 도시화 세계화로 인해, 조선족 사회는 격변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건 더 나은 삶을 위한 도전일 것이다. 특히 이곳 '조선족향'은 자고로 '가무, 입쌀, 미식의 고장'으로 불러왔다.
그뿐만 아니다. 조선민족의 우수한 전통문화가 다른 민족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최근 중국 정부에서 조선족 민속관과 기와집을 지어주어, 깔끔한 현대 도시로 변화시켜주었다는 자랑도 빼놓지 않았다. 또 김 씨는 가슴 찡한 사연도 덧붙인다. 1945년 8월15일 일제가 두 손을 번쩍 들었을 때, 조선족들은 기뻐하고, 환호하면서 목청껏 만세를 불렸단다.
그들은 농사가 잘 되면 돈을 모아, 언젠가는 고국으로 돌아갈 굳은 다짐을 했지만, 6·25가 터져 가지 못한 채, 타국 땅에서 눈을 감았다고 한다. 누구나 고향은 어릴 적 추억이 담겨있고, 조상의 뼈가 묻혀 있는 곳이다. 그래서 더욱 가고 싶고, 두고두고 그리워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