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전국(고대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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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dmin| 작성일 :11-07-28 09:23|본문
◑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BC 8세기에서 BC 3세기에 이르는 중국 고대의 변혁시대.
주(周)나라 제13대 평왕(平王)이 낙양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부터를 동주시대라 하고 동주시대를 다시 춘추 시대와 전국 시대로 나눈다.
춘추시대의 시초는 BC 770년, 주(周)왕조가 뤄양[洛陽]으로 천도한 후로, 노(魯)나라의 연대기 《춘추》의 최초의 해(BC 722)라고 한다. 전국시대의 시초는 진(晉)의 유력 귀족인 한(韓)·위(魏)·조(趙) 3씨가 실권을 잡은 해(BC 453), 또는 이 3씨가 정식 제후(諸侯)로 승격한 해(BC 403)이며, BC 221년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의 통일로 끝이 난다.
춘추 시대에 들어서면서 주나라 왕실의 세력이 점점 약해져 천자로서의 위력이 없어지고 대신 강력한 제후들이 서로 패권을 다투게 된다. 주나라 초기에 1천여 국이나 되던 제후의 수가 마침내는 10여 개국으로 압축되었다. 이 가운데 패권을 잡은 제후를 춘추오패(春秋五覇)라 하는데 이 오패는 제의 환공, 진(晋)의 문공, 초의 장왕, 오왕 합려, 월왕 구천이라는 설과 오왕 합려, 월왕 구천 대신 송의 양공과 진(秦)의 목공이라는 설이 있다.
첫번째 패자 제의 환공은 관중과 포숙아의 도움으로 패자가 되어 B.C.651년 규구(葵丘)에서 제후들을 모아 회맹하였다.
진(晋)의 문공은 오랜 망명 생활 끝에 성복의 대전에서 강력한 라이벌인 초나라 성왕을 물리치고 패자가 되어 천토(踐土)에서 회맹하였다. 초의 장왕은 필의 전투에서 진(晋)을 물리치고 패자로서 인정받았다.
그후 천하의 형세는 진(晋)과 초가 남북으로 대치하고 동쪽의 제와 서쪽의 진(秦)이 서로 견제하는 4강의 시대로 접어든다. B.C.546년 송나라 수도에서 '미병회담'이 열려 일종의 정전협상이 체결되면서 중원은 소강 상태에 접어든다. 부국강병의 추구와 권모 술수가 소용돌이치며 명군과 명신들, 명장과 맹장들의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근 2백년 동안 계속되는 동안 진나라를 제외한 나머지 여섯 나라의 힘은 점점 쇠약해져 차례차례 진나라에 멸망해 버리고 B.C.221년 제나라가 마지막으로 진나라에 항복함으로써 진의 시황제가 중국 최초의 대통일 국가를 이루게 된다 .
<정치>
춘추에서 전국에 걸친 전국시대는 서주시대(西周時代)의 봉건제도(封建制度)가 해체되고, 진(秦)·한(漢) 황제 아래에서의 중앙집권 체제가 형성되어가는 과도적 시대이다. 춘추시대는 서주 이래의 제후국이 100여 개나 존속하고 있어서 전통적 기풍이 강하였으나, 전국시대에 들어와서는 강국이 약국을 병합하여 진(秦)·초(楚)·연(燕)·제(齊)·한(韓)·위(魏)·조(趙)의 이른바 전국칠웅(戰國七雄)이 성립하였다. 각국의 군주는 스스로 왕을 자칭하고 광대한 영역을 통치할 관료기구를 정비하였으나, 그 중에서도 서방의 진은 적극적인 정치개혁에 의하여 부국강병에 힘써 마침내 천하통일에 성공하였다.
<사회경제>
이 시대의 정치적 변동은 농업생산력의 향상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춘추시대 말에는 철제농구가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전국시대에는 우경(牛耕)이 시작되었으며, 치수관개(治水灌漑) 공사도 각국에서 시행되어 경지면적이 증대하였다. 이렇게 새로 개척된 농지에서의 수확이나 산의 나무, 해변의 소금·물고기 등 산물에 대한 과세로써 전국시대의 각국 군주는 권력을 강화하여 나갔다. 한편, 소금이나 철(鐵)의 생산 판매업자도 거리(巨利)를 취했으며, 교환경제의 발달과 더불어 쟁기 모양을 본뜬 포전(布錢), 소도(小刀)의 형을 이룬 도전(刀錢) 등 청동제 화폐가 유통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발전은 사회조직에도 변화를 가져와, 이제까지의 씨족 결합이 무너지고 5인 평균가족이 독립할 수 있는 경제생활을 영위하게되었다. 그들 중에는 몰락하여 노예가 되는 자도 나왔으나 한편으로는 광대한 토지를 취득하고 유력한 호족(豪族)을 중심으로 동족이 결집하는 호족도 나타났다. 가문의 배경이 없더라도 본인 자신의 재능·자각으로 활약할 수 있는 시대이기도 하였다. 몰락한 귀족의 자손을 비롯하여 상공업자나 농민들도 입신출세하기 위하여 군주나 유력 인사에게 접근하여 법률·군사·외교 등 각자 재질에 따라 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자가 속출하였다. 군주나 유력관료측에서도 부국강병을 위하여 널리 인재를 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타국에서 온 망명자도 등용하였다.
<사상>
‘제자백가(諸子百家)’ 또는 ‘백가쟁명(百家爭鳴)’이라는 말처럼, 이 시대는 중국 사상사상(思想史上) 드물게도 그 활동이 활발했던 시대였다. 정치적·사회적 변동을 배경으로 하여, 어떻게 하면 질서를 회복할 수 있는가를 각자가 자기의 소신에 따라 적극적으로 발언하였기 때문이다. 공자·맹자·순자 등의 유가(儒家)는 효제(孝悌)·인의(仁義)·예(禮)를 바탕으로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묵자를 비조로 하는 묵가(墨家)는 가족이나 국가의 경제를 초월한 겸애(兼愛)의 정신을 역설하였으며, 상앙(商)·한비(韓非)와 같은 법가(法家)는 법의 일원적 지배, 군주권력의 절대화에 의하여 부국강병의 실현을 정치의 목표로 삼았다. 그러한 정치에 기대를 거는 제학파에 대하여, 문화생활을 부정하고 개농주의(皆農主義)를 주장하는 농가나, 인위적 정치도덕의 폐기를 주창하는 노자·장자 등의 도가(道家)도 있었다. 그러나 이같이 활발하던 사상활동도 진·한 제국의 성립을 전후하여 정통사상의 기준이 나타남과 함께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BC 8세기에서 BC 3세기에 이르는 중국 고대의 변혁시대.
주(周)나라 제13대 평왕(平王)이 낙양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부터를 동주시대라 하고 동주시대를 다시 춘추 시대와 전국 시대로 나눈다.
춘추시대의 시초는 BC 770년, 주(周)왕조가 뤄양[洛陽]으로 천도한 후로, 노(魯)나라의 연대기 《춘추》의 최초의 해(BC 722)라고 한다. 전국시대의 시초는 진(晉)의 유력 귀족인 한(韓)·위(魏)·조(趙) 3씨가 실권을 잡은 해(BC 453), 또는 이 3씨가 정식 제후(諸侯)로 승격한 해(BC 403)이며, BC 221년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의 통일로 끝이 난다.
춘추 시대에 들어서면서 주나라 왕실의 세력이 점점 약해져 천자로서의 위력이 없어지고 대신 강력한 제후들이 서로 패권을 다투게 된다. 주나라 초기에 1천여 국이나 되던 제후의 수가 마침내는 10여 개국으로 압축되었다. 이 가운데 패권을 잡은 제후를 춘추오패(春秋五覇)라 하는데 이 오패는 제의 환공, 진(晋)의 문공, 초의 장왕, 오왕 합려, 월왕 구천이라는 설과 오왕 합려, 월왕 구천 대신 송의 양공과 진(秦)의 목공이라는 설이 있다.
첫번째 패자 제의 환공은 관중과 포숙아의 도움으로 패자가 되어 B.C.651년 규구(葵丘)에서 제후들을 모아 회맹하였다.
진(晋)의 문공은 오랜 망명 생활 끝에 성복의 대전에서 강력한 라이벌인 초나라 성왕을 물리치고 패자가 되어 천토(踐土)에서 회맹하였다. 초의 장왕은 필의 전투에서 진(晋)을 물리치고 패자로서 인정받았다.
그후 천하의 형세는 진(晋)과 초가 남북으로 대치하고 동쪽의 제와 서쪽의 진(秦)이 서로 견제하는 4강의 시대로 접어든다. B.C.546년 송나라 수도에서 '미병회담'이 열려 일종의 정전협상이 체결되면서 중원은 소강 상태에 접어든다. 부국강병의 추구와 권모 술수가 소용돌이치며 명군과 명신들, 명장과 맹장들의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근 2백년 동안 계속되는 동안 진나라를 제외한 나머지 여섯 나라의 힘은 점점 쇠약해져 차례차례 진나라에 멸망해 버리고 B.C.221년 제나라가 마지막으로 진나라에 항복함으로써 진의 시황제가 중국 최초의 대통일 국가를 이루게 된다 .
<정치>
춘추에서 전국에 걸친 전국시대는 서주시대(西周時代)의 봉건제도(封建制度)가 해체되고, 진(秦)·한(漢) 황제 아래에서의 중앙집권 체제가 형성되어가는 과도적 시대이다. 춘추시대는 서주 이래의 제후국이 100여 개나 존속하고 있어서 전통적 기풍이 강하였으나, 전국시대에 들어와서는 강국이 약국을 병합하여 진(秦)·초(楚)·연(燕)·제(齊)·한(韓)·위(魏)·조(趙)의 이른바 전국칠웅(戰國七雄)이 성립하였다. 각국의 군주는 스스로 왕을 자칭하고 광대한 영역을 통치할 관료기구를 정비하였으나, 그 중에서도 서방의 진은 적극적인 정치개혁에 의하여 부국강병에 힘써 마침내 천하통일에 성공하였다.
<사회경제>
이 시대의 정치적 변동은 농업생산력의 향상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춘추시대 말에는 철제농구가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전국시대에는 우경(牛耕)이 시작되었으며, 치수관개(治水灌漑) 공사도 각국에서 시행되어 경지면적이 증대하였다. 이렇게 새로 개척된 농지에서의 수확이나 산의 나무, 해변의 소금·물고기 등 산물에 대한 과세로써 전국시대의 각국 군주는 권력을 강화하여 나갔다. 한편, 소금이나 철(鐵)의 생산 판매업자도 거리(巨利)를 취했으며, 교환경제의 발달과 더불어 쟁기 모양을 본뜬 포전(布錢), 소도(小刀)의 형을 이룬 도전(刀錢) 등 청동제 화폐가 유통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발전은 사회조직에도 변화를 가져와, 이제까지의 씨족 결합이 무너지고 5인 평균가족이 독립할 수 있는 경제생활을 영위하게되었다. 그들 중에는 몰락하여 노예가 되는 자도 나왔으나 한편으로는 광대한 토지를 취득하고 유력한 호족(豪族)을 중심으로 동족이 결집하는 호족도 나타났다. 가문의 배경이 없더라도 본인 자신의 재능·자각으로 활약할 수 있는 시대이기도 하였다. 몰락한 귀족의 자손을 비롯하여 상공업자나 농민들도 입신출세하기 위하여 군주나 유력 인사에게 접근하여 법률·군사·외교 등 각자 재질에 따라 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자가 속출하였다. 군주나 유력관료측에서도 부국강병을 위하여 널리 인재를 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타국에서 온 망명자도 등용하였다.
<사상>
‘제자백가(諸子百家)’ 또는 ‘백가쟁명(百家爭鳴)’이라는 말처럼, 이 시대는 중국 사상사상(思想史上) 드물게도 그 활동이 활발했던 시대였다. 정치적·사회적 변동을 배경으로 하여, 어떻게 하면 질서를 회복할 수 있는가를 각자가 자기의 소신에 따라 적극적으로 발언하였기 때문이다. 공자·맹자·순자 등의 유가(儒家)는 효제(孝悌)·인의(仁義)·예(禮)를 바탕으로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묵자를 비조로 하는 묵가(墨家)는 가족이나 국가의 경제를 초월한 겸애(兼愛)의 정신을 역설하였으며, 상앙(商)·한비(韓非)와 같은 법가(法家)는 법의 일원적 지배, 군주권력의 절대화에 의하여 부국강병의 실현을 정치의 목표로 삼았다. 그러한 정치에 기대를 거는 제학파에 대하여, 문화생활을 부정하고 개농주의(皆農主義)를 주장하는 농가나, 인위적 정치도덕의 폐기를 주창하는 노자·장자 등의 도가(道家)도 있었다. 그러나 이같이 활발하던 사상활동도 진·한 제국의 성립을 전후하여 정통사상의 기준이 나타남과 함께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