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나라(고대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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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dmin| 작성일 :11-07-25 08:51|본문
◑ 주(殷)
중국의 고대 왕조(BC 1122?∼BC 256).
주(周)왕조는 기원전 12세기에서 기원전 249년까지 은(殷)나라에 이어 성립된 중국의 고대 왕조이다. 이전의 하(夏)·은과 더불어 삼대(三代)라 한다. 요(堯)·순(舜)의 시대를 이어 받은 이상(理想)의 치세(治世)라 일컬어진다. 처음에는 은나라에 귀속된 속국이었으나 문왕(文王)의 뒤를 이은 무왕(武王)이 은의 폭군 주(紂)를 몰아내고 건국했다.
주(周)는 은(殷)의 말기에 처음 시작된 봉건제도를 본격적으로 발전시킨 국가로서 봉건제에 의해 혈연관계가 없는 부족까지도 주의 친척으로 보는 유사혈연제를 만들어 제후로 봉하고 유사시 무력을 동원하도록 하여 강력한 무력국가를 만들었다. 이러한 주도 서융(西戎)이라는 유목민의 침입을 피해 기원전 770년에는 동쪽 낙양(洛陽)으로 천도했다. 동쪽으로 옮겨갈 때까지를 서주(西周)라 하고, 그 이후를 동주(東周)라고 한다. 동주시대에는 국력이 쇠약하여 각 제후들에게 실권을 빼앗긴 채 명목만 남은 국가가 되었다. 기원전 256년 진(秦)에 의해 멸망하기까지 25명의 제왕이 514년간 동주왕조를 이끌었다. 동주시대는 곧 춘추전국시대에 해당한다.
주 왕실은 동천과 함께 권세를 잃고 이에 대신하여 춘추의 5패 - 제(齊), 송(宋), 진(晋), 진(秦), 초(楚) - 라고 불리우는 패자가 천하를 호령하기도 하고 전국의 7웅이라고 불리운 제후 즉 한(韓), 위(魏), 조(趙), 제(齊), 연(燕), 초(楚), 진(秦)이 정치를 전단하는 시대가 시작된다. 이러한 춘추전국시대의 나라들은 모두 주왕실의 제후들이었으나, 당시 정치가 문란 해서 주왕실의 위력이 제후들에게 미치지 못했다. 이러한 혼란의 와중에 공자, 노자, 맹자 등 많은 사상가들이 출현했으며 제지백가(諸子百家)라는 학술 사상이 발달했다. 대표적인 유파로는 유가(儒家), 도가(道家), 묵가(墨家), 법가(法家), 음양가(陰陽家), 명가(名家), 종횡가(縱橫家), 농가(農家), 병가(兵家), 소설가(小說家), 잡가(雜家) 등 10대가 있었다. 각 유파는 상호 논박하면서 사상적 발전을 이루었으므로 당시 학술 문화가 크게 발전하는 계기를 이루었다.
<건국>
주왕조(周王朝)의 시조는 후직(后稷:棄)이며, 13대째의 고공단부(古公亶父:太王) 때에, 기산(岐山:陝西省 中部)에 옮겨 정주(定住)하고, 국호를 주(周)라 하였다. 당시 황허강[黃河]의 하류지역에는 은왕조(殷王朝)가 번영하고 있었는데, 주족(周族)은 그 서쪽 변두리의 제후(諸侯)의 하나였다. 태왕의 손자 문왕(文王:昌)에 이르러 태공망(太公望:呂尙) 등의 보좌로 서방의 패자(覇者:西伯)가 되었다. 그 아들 무왕(武王:發)은 제후의 지지를 받아, 당시 민심을 잃고 있던 은의 주왕(紂王)을 멸할 싸움을 일으켰다. 이 출병(出兵)을 하지 말도록 간(諫)한 백이(伯夷)·숙제(叔齊)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러나 무왕은 마침내 목야(牧野)전투에서 은의 대군을 무찔러 주왕을 죽이고, 은왕조에 갈음하여 주왕조를 창시하였다.
<문화>
주는 종주(宗周:陝西省 渭水 유역의 鎬京)를 도읍으로 하였으나, 동방을 통치하는 중심으로서 낙수(洛水)를 따라서 동도(東都) 성주(成周)를 건설하였다. 그리고 희성(姬姓)의 동족을 노(魯)·위(衛)·진(晉) 등의 요지에 후(侯)로 봉하고, 건국의 공신 태공망 여상도 제(齊)에 봉하였다. 이것을 봉건(封建)이라 부르고, 흔히 무왕의 동생 주공(周公:旦)이 처음으로 실시한 제도라 하나,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이 ‘봉건’과 유사한 제도는 이미 은대 말기에 행하여진 것 같다. ‘봉건’뿐만 아니라 주공이 창시했다고 하는 주의 예제(禮制)는 후세에 원망을 산 것이 많으나, 주의 청동기문화(靑銅器文化)나 상형문자(象形文字)는 은에서 발달한 것을 이어받은 것이 명백하다. 대체로 주의 문화는 은의 문화에 힘입은 바가 많다. 은을 멸한 후, 주의 지배자는 그 정치적 변동 등을 하늘의 뜻에 의하는 것으로 보았다. 즉, 일찍이 은에 내린 천명(天命)은 주왕(紂王)이 민심을 잃었기 때문에 은에서 떠나고, 새로이 주(周)에 내려진 것이라 했다. 이렇게 천명을 고친, 즉 혁명(革命)한 주왕조가 영속되기 위해서는 덕(德)을 닦고 쌓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동주시대>
무왕부터 소왕(昭王)·목왕(穆王)에 이르는 동안이 주왕조의 전성기였으나, 마침내 BC 9세기부터 안에서는 제후의 이반(離反), 밖에서는 융적(戎狄)의 침입이 잦아져서 주는 내리막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11대 선왕(宣王:靜)은 융적을 격퇴하여 한때 세력을 회복하였으나, 그의 아들 유왕(幽王)은 포사(褒)를 총애하여 내정이 문란해져서 견융(犬戎)의 침입을 초래하여 유왕은 살해되었다. 그의 아들 평왕(平王:宜臼)은 마침내 도읍을 성주(成周:河南省 洛陽 부근)에 옮기고 주왕조를 부흥시켰다. 이 평왕의 동천(東遷:BC 770) 이전을 서주(西周)라 하며, 그 이후를 동주(東周)라 불러 구별한다.
동주시대에 들어서서 약 반세기가 지나 춘추시대(春秋時代)가 시작된다(BC 722). 춘추시대에는 제후 등의 이반으로 국내의 정정(政情)이 불안정하였고, 열국 간에 전쟁과 회맹(會盟)이 끊이지 않았으며, 제(齊)의 환공(桓公), 진(晉)의 문공(文公)과 같은 패자(覇者:覇는 伯과 같은 뜻이며, 大諸侯를 의미한다)가 회맹을 주재(主宰)하여, 중원(中原)의 질서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패자는 명목상으로는 주왕실의 권위를 존중하고, 주의 봉건질서를 적극적으로 허물어뜨리고자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BC 5세기에 들어서자, 여러 나라의 내부에서 하극상(下克上)의 풍조가 일어나, 그 기세에 눌려 주의 위열왕(威烈王)은 진의 유력한 귀족 한(韓)·위(魏)·조(趙)의 3씨를 정식으로 제후로 격상하는 것을 인정했다(BC 403). 이 해를 전국시대(戰國時代)가 시작되는 해로 보는 설이 있는 것은 주왕 자신이 ‘봉건’의 정신을 망각한 점을 중대시하기 때문이다. 전국시대의 주왕은 낙양 부근을 영유하는 한낱 작은 제후에 지나지 않았고, 그것도 마침내 동서(東西)로 분열된 나머지 BC 256년, 난왕(王)이 진(秦)에 항복하여 주는 멸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