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당 성립(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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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dmin| 작성일 :11-08-08 09:37|본문
소련이 표방하는 "피압박계급의 해방", "피압박민족의 해방"은 이론적으로는 중국 국민혁명의 이상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많았다. 손문(孫文)은 레닌에게 러시아 형겸의 성공을 축하하는 전문을 보낸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소련이 표방하는 사상이 중국 국민혁명의 이상과 통하는 점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아진다.
코민테른을 배경으로 1920년에는 인도네시아 공산당 및 이란 공산당이 창설되고, 1922년에는 일본공산당이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중국에는 1920년 봄 코민테른으로부터 파견된 보이딘스키가 북경에 그 모습을 나타내면서부터 중국공산당 조직의 활동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보이딘스키는 먼저 북경대학의 이대교와 접촉한 끝에 그의 소개로 상해에서 진독수와 만나게 되었다. 진독수는 5.4운동 당시 군벌정부에 의해 체포, 투옥된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북경대학 교수직에서 물러나 상해에서 문필생활을 하고 있었다. 보이딘스키와 진독수와의 만남은 중국에 공산당의 씨를 뿌리는 계기가 되었다. 진독수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크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보이딘스키의 권유를 받은 진독수는 그해 8월에 공산당 창립 발기인대회를 열게 되었다. 이 발기인대외에 참석한 사람은 7명의 지식인에 불과했지만 이것을 계기로 공산주의 조직이 중국 각지에 확대되었다.
1921년 3월 보이딘스키의 뒤를 이어 마링이 코민테른 극동담당 책임자로 중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는 네델란드 태생으로 앞서 언급했듯이 인도네시아의 혁명운동에 참가한 바도 있어 식민지 공산주의 조직면에서 코민테른에서는 권위 있는 존재였다. 1921년 7월 마링이 참석한 가운데 제1회 전국대표대회가 열려 중국공산당 성립이 선언되었는데, 여기에 참석한 사람은 동필무(董必武), 모택동(毛澤東), 장국도(張國燾), 주불해(周佛海), 진공박(陳公博)을 포함한 13명이었다.
회의 4일째를 맞아 최종적으로 당의 규약을 채택하기로 하였는데 당의 규약을 놓고 여러 의견이 나왔으나 기본적인 당의 입장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당의 기본임무로 하지만, 과도기적 단계에서의 전술로서는 프롤레타리아가 적극적으로부르조아 민주주의 운동에 참가한다."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렇게 해서 거대한 중국대륙에 처름으로 중국공산당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1회 전국대표대회의 13명 대표가 앞으로 걸어야 할 길은 그렇게 순탄한 길은 아니었다.
이 대회에서 서기로 지명된 모택동은 나중에 중국공산당의 주석이 되었고, 동필무는 중화인민공화국 부주석이 되었을 뿐 그 나머지는 제명, 처형되는 등 파란많은 길을 걸은 사람이 많았다.
창립 당시의 중국공산당은 너무나 미미한 존재였으나 민족해방운동이라는 커다란 조류 속에서 급속히 성장하여 불과 수년 후에는 군벌 타도를 위한 북벌에 참가하는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