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시진핑 시대 열 주역 리위안차오 공산당 중앙조직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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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 :12-02-01 03:28|본문
정치개혁·경제성장 주도… 중화굴기 그의 손에

"리위안차오(李源潮·62·사진)가 원자바오(溫家寶) 총리의 유력한 후계자로 거론되지 않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중국이 계속해 굴기(우뚝 섬)하고자 한다면 경제·사회적 불평등과 만연한 부패, 민족분쟁, 환경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 문제를 다룬 그의 경험은 중국의 자산이자 5세대 지도력의 동력이라 할 만하다."
터키의 국제관계 싱크탱크인 전략연구 분석센터(CESRAN)의 중국 전문가 니콜라스 밀러가 최근 일본의 시사전문지 '더 디플로매트'에 게재한 칼럼에서 리위안차오를 평가한 글이다.
리위안차오는 공산당 서열 18위의 정치국위원으로 당내 핵심요직인 중앙조직부장을 맡아 8000여만명의 공산당원 가운데 간부 640만명의 인사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특히 각 성의 당 서기와 성장 등 4100여개 요직은 모두 그의 손을 거쳐 결정된다. 베이징 외교가에서는 리위안차오의 현재 업무와 지위, 과거 전례 등을 이유로 올 가을 제18차 당 대회에서 서열 6위의 국가부주석이나 선전을 관장하는 서열 5위의 상무위원에 선임될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중국의 미래를 읽다
리위안차오는 2002년 장쑤(江蘇)성 당서기를 맡으면서 진가를 보여줬다. 그는 이 시기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이 제시한 '조화사회 건설'과 '과학적 발전관'을 장쑤성의 현실 경제에 구현하는 데 주력했다. 리위안차오는 취임하자마자 곧바로 4개 분야, 25개 항목으로 된 '조화사회 표준지표'를 처음 고안했다. 이는 1인당 국내총생산(GDP)뿐 아니라 도시의 가처분소득, 실업률, 엥겔계수, 녹지비율, 분배구조, 촌민 자치율까지 총괄하는 개념이다.
2004년 장쑤성 민영 철강회사인 톄번(鐵本)사건 처리에서 원칙 있는 대응으로 호평을 받았다. 당시 톄번은 자기자본 3억위안으로 무려 106억위안의 초대형 철강공장 건설에 나섰다. 중국 국무원은 사업 중단을 명령했고, 리위안차오는 불법 확장이라며 관련 인사 문책과 함께 문까지 닫는 강경조치를 했다. 당시 톄번의 투자는 경기 과열과 공급 과잉을 야기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됐다. 리위안차오는 나아가 1000여개의 과잉투자 부문을 취소하거나 연기했다. 원 총리는 장쑤성의 과잉투자가 바로잡혔다면서 거시조정의 대표적 성공사례로 꼽았다.
2007년 5월 중국의 3대 호수 중 하나인 우시(無錫)의 타이후(太湖)가 오염됐을 때 그는 단호히 대응했다. 그는 "장쑤성의 GDP가 15% 줄어도 좋다"며 폐수 배출업체 2150개를 퇴출하는 극약처방을 내렸다. 와중에도 장쑤성은 그의 재임기간이었던 2004∼2006년 전국 3위의 성장률을 기록했고 실업률도 낮아졌다. 경제성장과 발전에서 질과 양,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셈이다.
◆톈안먼 사태에 발목 잡혀
그는 정치개혁과 부패문제에 관해서 뚜렷한 원칙을 견지하며 괄목할 만한 성과를 냈다. 리위안차오는 2007년 말 중앙조직부장을 맡은 이후 당내 민주화와 선거제도개혁을 주도해 왔다. 그는 특히 농촌개혁을 위해 대졸 출신의 촌관 3만명가량을 육성하며 당의 저변 확충에 기여하고 있다.
그는 '청백리'라는 별명이 따라다닐 정도로 비리와 부패문제에 엄격하다. 그는 1980년대 후반 공산주의 청년단(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시절 지방출장 때 '네 가지 요리에 국 한 그릇(四菜一湯·사채일탕)'의 간소한 식단을 고집하고 그 이상의 요리가 나오면 초과비용을 지불했다. 사채일탕은 당시 공산당이 무리한 접대비리를 막기 위해 세운 내부원칙이지만 지키는 이는 드물었다고 한다.
리위안차오는 중국 권력의 3대 파벌인 '공청단파' '태자당' '상하이방'에 모두 속하며 출세에 필요한 정치자산도 풍부하다. 그는 공청단 중앙에서 7년간 일하면서 후 주석과 신뢰를 쌓았고 상하이에서 성장하며 출세했다.
또한 그는 혁명가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 리간청(李幹成)은 쑤저우(蘇州)지구 당서기와 상하이 부시장을 지냈다. 이 때문에 리위안차오의 행정성과와 지도력이 과대포장되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그는 1989년 톈안먼(天安門)사태 때 학생시위를 지지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가 출세가도에 발목이 잡혔다. 리위안차오는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를 마친 후 좌천당해 약 10년간 한직을 떠돌았다. 이 때문에 그는 리커창(李克强)에 뒤처졌고 공청단 5세대 1인자에서 2인자로 전락했다. 현재로서는 차기 총리후보감이라는 평가가 현실로 실현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다만 향후 5세대 지도부에서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지분과 권한을 행사할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리위안차오(李源潮·62·사진)가 원자바오(溫家寶) 총리의 유력한 후계자로 거론되지 않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중국이 계속해 굴기(우뚝 섬)하고자 한다면 경제·사회적 불평등과 만연한 부패, 민족분쟁, 환경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 문제를 다룬 그의 경험은 중국의 자산이자 5세대 지도력의 동력이라 할 만하다."
터키의 국제관계 싱크탱크인 전략연구 분석센터(CESRAN)의 중국 전문가 니콜라스 밀러가 최근 일본의 시사전문지 '더 디플로매트'에 게재한 칼럼에서 리위안차오를 평가한 글이다.
리위안차오는 공산당 서열 18위의 정치국위원으로 당내 핵심요직인 중앙조직부장을 맡아 8000여만명의 공산당원 가운데 간부 640만명의 인사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특히 각 성의 당 서기와 성장 등 4100여개 요직은 모두 그의 손을 거쳐 결정된다. 베이징 외교가에서는 리위안차오의 현재 업무와 지위, 과거 전례 등을 이유로 올 가을 제18차 당 대회에서 서열 6위의 국가부주석이나 선전을 관장하는 서열 5위의 상무위원에 선임될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중국의 미래를 읽다
리위안차오는 2002년 장쑤(江蘇)성 당서기를 맡으면서 진가를 보여줬다. 그는 이 시기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이 제시한 '조화사회 건설'과 '과학적 발전관'을 장쑤성의 현실 경제에 구현하는 데 주력했다. 리위안차오는 취임하자마자 곧바로 4개 분야, 25개 항목으로 된 '조화사회 표준지표'를 처음 고안했다. 이는 1인당 국내총생산(GDP)뿐 아니라 도시의 가처분소득, 실업률, 엥겔계수, 녹지비율, 분배구조, 촌민 자치율까지 총괄하는 개념이다.
2004년 장쑤성 민영 철강회사인 톄번(鐵本)사건 처리에서 원칙 있는 대응으로 호평을 받았다. 당시 톄번은 자기자본 3억위안으로 무려 106억위안의 초대형 철강공장 건설에 나섰다. 중국 국무원은 사업 중단을 명령했고, 리위안차오는 불법 확장이라며 관련 인사 문책과 함께 문까지 닫는 강경조치를 했다. 당시 톄번의 투자는 경기 과열과 공급 과잉을 야기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됐다. 리위안차오는 나아가 1000여개의 과잉투자 부문을 취소하거나 연기했다. 원 총리는 장쑤성의 과잉투자가 바로잡혔다면서 거시조정의 대표적 성공사례로 꼽았다.
2007년 5월 중국의 3대 호수 중 하나인 우시(無錫)의 타이후(太湖)가 오염됐을 때 그는 단호히 대응했다. 그는 "장쑤성의 GDP가 15% 줄어도 좋다"며 폐수 배출업체 2150개를 퇴출하는 극약처방을 내렸다. 와중에도 장쑤성은 그의 재임기간이었던 2004∼2006년 전국 3위의 성장률을 기록했고 실업률도 낮아졌다. 경제성장과 발전에서 질과 양,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셈이다.
◆톈안먼 사태에 발목 잡혀
그는 정치개혁과 부패문제에 관해서 뚜렷한 원칙을 견지하며 괄목할 만한 성과를 냈다. 리위안차오는 2007년 말 중앙조직부장을 맡은 이후 당내 민주화와 선거제도개혁을 주도해 왔다. 그는 특히 농촌개혁을 위해 대졸 출신의 촌관 3만명가량을 육성하며 당의 저변 확충에 기여하고 있다.
그는 '청백리'라는 별명이 따라다닐 정도로 비리와 부패문제에 엄격하다. 그는 1980년대 후반 공산주의 청년단(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시절 지방출장 때 '네 가지 요리에 국 한 그릇(四菜一湯·사채일탕)'의 간소한 식단을 고집하고 그 이상의 요리가 나오면 초과비용을 지불했다. 사채일탕은 당시 공산당이 무리한 접대비리를 막기 위해 세운 내부원칙이지만 지키는 이는 드물었다고 한다.
리위안차오는 중국 권력의 3대 파벌인 '공청단파' '태자당' '상하이방'에 모두 속하며 출세에 필요한 정치자산도 풍부하다. 그는 공청단 중앙에서 7년간 일하면서 후 주석과 신뢰를 쌓았고 상하이에서 성장하며 출세했다.
또한 그는 혁명가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 리간청(李幹成)은 쑤저우(蘇州)지구 당서기와 상하이 부시장을 지냈다. 이 때문에 리위안차오의 행정성과와 지도력이 과대포장되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그는 1989년 톈안먼(天安門)사태 때 학생시위를 지지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가 출세가도에 발목이 잡혔다. 리위안차오는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를 마친 후 좌천당해 약 10년간 한직을 떠돌았다. 이 때문에 그는 리커창(李克强)에 뒤처졌고 공청단 5세대 1인자에서 2인자로 전락했다. 현재로서는 차기 총리후보감이라는 평가가 현실로 실현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다만 향후 5세대 지도부에서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지분과 권한을 행사할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