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혁명 100년> 혁명이 부른 중국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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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dmin| 작성일 :11-10-03 10:19|본문
재조명 작업 한창..中공산당 탄생의 모태
정부 주도 기념행사 개최..민간행사 불허 눈길
오는 10일 신해혁명(辛亥革命) 100주년을 앞두고 중국 대륙에서 열기가 고조되고 있다. 무엇보다 중국 정부 차원의 기념 활동이 눈에 띈다.
중국 인민은행은 100주년 기념주화를 만들 예정이다. 기념 금화에 혁명의 주역인 쑨원(孫文)의 초상이, 은화에는 혁명의 시작인 우창(武昌) 봉기 장면이 담긴다.
중국 사회과학원은 이미 신해혁명 100주년을 기념해 근현대사를 재조명한 36권짜리 '중화민국사'를 출간했다. 여기에 쑨원을 추종한 장제스(蔣介石)가 신해혁명에 투신해 북벌을 이끌고 북양군벌을 타도하는데 선도적 역할을 했다고 적은 게 이채롭다.
쑨원의 동상을 베이징 인민대회당 동문에 세우자는 주장도 나온다. 청조 타도로 봉건제를 무너뜨린 쑨원이야말로 중국의 '오늘'을 있게 한 인물이라는 게 이들의 판단이다.
지난 4월에는 톈안먼(天安門) 광장에 쑨원의 대형 초상화가 등장하기도 했다. 초상화는 세로 길이가 6m에 무게가 2t에 달했다. 오는 10일 신해혁명 100주년 기념일에 톈안먼에 다시 등장할 것으로 보인다. 올해는 특히 우한(武漢)에서 중국과 대만간 신해혁명 100주년 양안(兩岸) 공동행사가 열린다.
신해혁명은 인민의 봉기로 청나라의 전제정치를 무너뜨리고 공화정치의 기초인 '중화민국(中華民國)'을 건설한 새로운 시작이라는 큰 의미가 있다는 게 중국내 일반적인 평가다. 나아가 중국 공산당의 탄생을 가능하게 한 출발점이었다는 시각도 있다.
유럽 열강에 대한 굴종이 깊어져 민초의 삶에 갈수록 고통이 더해지던 때에 우창봉기(1911년 10월 10일)를 시작으로 한 신해혁명은 중화민국 군정부 수립의 계기가 됐다. 물론 그 이후 군벌 난립으로 인한 국가적인 혼란이 수년간 지속되기는 했지만 신해혁명은 결과적으로 중국 공산당이 움트는 '토양'이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우창봉기 후 1912년 1월 1일 쑨원을 임시 대총통으로 한 난징(南京) 혁명정부가 수립되면서 신해혁명은 잘 진행되는 듯했다. 그러나 쑨원이 청나라 황제를 퇴위시키는 조건으로 반(反) 혁명세력인 위안스카이(元世凱)에게 대총통 자리를 내주면서 중국은 혁명정부와 청나라 잔재, 군벌들이 다투는 혼란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그러다가 5·4운동(1919년 5월 4일)으로 반전을 맞게 된다.
위안스카이가 일본 등 열강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중국내 열강의 군사행동을 보장하는 '매국'을 하자 베이징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애국운동이 터진 것이다. 5·4운동은 애국운동에서 반봉건과 민주주의 운동으로 확대됐고, 그 주역인 리다자오(李大釗)와 천두슈(陳獨秀)를 중심으로 공산당이 결성되는 계기가 됐다. 중국에 본격적인 공산당 활동이 시작된 것이다.
그 이후 마오쩌둥(毛澤東)이 이끄는 공산당이 일본 제국주의, 장제스의 국민당과의 '힘든' 싸움을 거쳐 마침내 1949년 10월 10일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한다. 이런 흐름을 보면 결국 중국 공산당의 뿌리는 결국 신해혁명이라는 게 중국내 식자층의 대체적인 인식이다.
나아가 냉전시기에 '죽의 장막'이 쳐졌었던 중국이 개혁개방 30년 동안 눈부신 성장을 거듭해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G2(주요 2개국)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봉건을 깨트린 신해혁명이 있어서 가능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러나 신해혁명을 보는 중국 시각은 여전히 복잡해 보인다. 신해혁명은 역사적 대격변이라며 큰 의미를 부여하면서도, 그 혁명열기가 다시 끓어오르는 데는 주저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애초 지난달 30일부터 3일까지 베이징(北京) 국가대극원에서 예정됐던 오페라 '중산·이셴' 공연이 갑작스럽게 취소된 게 이런 분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쑨원의 일대기를 다룬 이 작품의 공연을 허가에서 불허로 급선회한 것.
이에 대해 여러가지 해석이 있지만, 중국 당국은 신해혁명 100주년을 띄우고 재조명해 국론을 모아가고 싶은 마음도 있는 반면 그로 인한 부정적 효과를 우려했던 탓에 공연을 취소했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특히 중국 공산당은 쑨원에 대한 집중 조명을 통해 그의 이념인 삼민주의, 민족·민권·민생이 부각될 것을 우려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로인해 그렇지 않아도 작지 않은 '민(民)'의 목소리가 더욱 커지는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는 판단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올 상반기 중국 당국이 베이징과 상하이 소재 주요대학들의 신해혁명 100주년 토론회 계획을 불허했던 점도 눈여겨 볼만하다. 주간지인 '난펑촹(南風窓)'과 '샤오샹천바오(瀟湘晨報)'가 신해혁명을 독자적으로 재평가하려는 기사를 게재했다가 중국 정부 압력으로 편집장이 해임된 것도 예사롭지 않다.
중국 정부는 일단 신해혁명에 대해 정부 주도로 기념행사를 우한 등에서 대대적으로 개최할 예정이지만 민간이 나서는 행사는 '막고' 나선 형국이다.
신해혁명 100주년을 맞는 중국의 복잡한 심경을 보여주는 풍경이라는 지적이다.
정부 주도 기념행사 개최..민간행사 불허 눈길
오는 10일 신해혁명(辛亥革命) 100주년을 앞두고 중국 대륙에서 열기가 고조되고 있다. 무엇보다 중국 정부 차원의 기념 활동이 눈에 띈다.
중국 인민은행은 100주년 기념주화를 만들 예정이다. 기념 금화에 혁명의 주역인 쑨원(孫文)의 초상이, 은화에는 혁명의 시작인 우창(武昌) 봉기 장면이 담긴다.
중국 사회과학원은 이미 신해혁명 100주년을 기념해 근현대사를 재조명한 36권짜리 '중화민국사'를 출간했다. 여기에 쑨원을 추종한 장제스(蔣介石)가 신해혁명에 투신해 북벌을 이끌고 북양군벌을 타도하는데 선도적 역할을 했다고 적은 게 이채롭다.
쑨원의 동상을 베이징 인민대회당 동문에 세우자는 주장도 나온다. 청조 타도로 봉건제를 무너뜨린 쑨원이야말로 중국의 '오늘'을 있게 한 인물이라는 게 이들의 판단이다.
지난 4월에는 톈안먼(天安門) 광장에 쑨원의 대형 초상화가 등장하기도 했다. 초상화는 세로 길이가 6m에 무게가 2t에 달했다. 오는 10일 신해혁명 100주년 기념일에 톈안먼에 다시 등장할 것으로 보인다. 올해는 특히 우한(武漢)에서 중국과 대만간 신해혁명 100주년 양안(兩岸) 공동행사가 열린다.
신해혁명은 인민의 봉기로 청나라의 전제정치를 무너뜨리고 공화정치의 기초인 '중화민국(中華民國)'을 건설한 새로운 시작이라는 큰 의미가 있다는 게 중국내 일반적인 평가다. 나아가 중국 공산당의 탄생을 가능하게 한 출발점이었다는 시각도 있다.
유럽 열강에 대한 굴종이 깊어져 민초의 삶에 갈수록 고통이 더해지던 때에 우창봉기(1911년 10월 10일)를 시작으로 한 신해혁명은 중화민국 군정부 수립의 계기가 됐다. 물론 그 이후 군벌 난립으로 인한 국가적인 혼란이 수년간 지속되기는 했지만 신해혁명은 결과적으로 중국 공산당이 움트는 '토양'이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우창봉기 후 1912년 1월 1일 쑨원을 임시 대총통으로 한 난징(南京) 혁명정부가 수립되면서 신해혁명은 잘 진행되는 듯했다. 그러나 쑨원이 청나라 황제를 퇴위시키는 조건으로 반(反) 혁명세력인 위안스카이(元世凱)에게 대총통 자리를 내주면서 중국은 혁명정부와 청나라 잔재, 군벌들이 다투는 혼란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그러다가 5·4운동(1919년 5월 4일)으로 반전을 맞게 된다.
위안스카이가 일본 등 열강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중국내 열강의 군사행동을 보장하는 '매국'을 하자 베이징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애국운동이 터진 것이다. 5·4운동은 애국운동에서 반봉건과 민주주의 운동으로 확대됐고, 그 주역인 리다자오(李大釗)와 천두슈(陳獨秀)를 중심으로 공산당이 결성되는 계기가 됐다. 중국에 본격적인 공산당 활동이 시작된 것이다.
그 이후 마오쩌둥(毛澤東)이 이끄는 공산당이 일본 제국주의, 장제스의 국민당과의 '힘든' 싸움을 거쳐 마침내 1949년 10월 10일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한다. 이런 흐름을 보면 결국 중국 공산당의 뿌리는 결국 신해혁명이라는 게 중국내 식자층의 대체적인 인식이다.
나아가 냉전시기에 '죽의 장막'이 쳐졌었던 중국이 개혁개방 30년 동안 눈부신 성장을 거듭해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G2(주요 2개국)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봉건을 깨트린 신해혁명이 있어서 가능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러나 신해혁명을 보는 중국 시각은 여전히 복잡해 보인다. 신해혁명은 역사적 대격변이라며 큰 의미를 부여하면서도, 그 혁명열기가 다시 끓어오르는 데는 주저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애초 지난달 30일부터 3일까지 베이징(北京) 국가대극원에서 예정됐던 오페라 '중산·이셴' 공연이 갑작스럽게 취소된 게 이런 분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쑨원의 일대기를 다룬 이 작품의 공연을 허가에서 불허로 급선회한 것.
이에 대해 여러가지 해석이 있지만, 중국 당국은 신해혁명 100주년을 띄우고 재조명해 국론을 모아가고 싶은 마음도 있는 반면 그로 인한 부정적 효과를 우려했던 탓에 공연을 취소했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특히 중국 공산당은 쑨원에 대한 집중 조명을 통해 그의 이념인 삼민주의, 민족·민권·민생이 부각될 것을 우려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로인해 그렇지 않아도 작지 않은 '민(民)'의 목소리가 더욱 커지는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는 판단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올 상반기 중국 당국이 베이징과 상하이 소재 주요대학들의 신해혁명 100주년 토론회 계획을 불허했던 점도 눈여겨 볼만하다. 주간지인 '난펑촹(南風窓)'과 '샤오샹천바오(瀟湘晨報)'가 신해혁명을 독자적으로 재평가하려는 기사를 게재했다가 중국 정부 압력으로 편집장이 해임된 것도 예사롭지 않다.
중국 정부는 일단 신해혁명에 대해 정부 주도로 기념행사를 우한 등에서 대대적으로 개최할 예정이지만 민간이 나서는 행사는 '막고' 나선 형국이다.
신해혁명 100주년을 맞는 중국의 복잡한 심경을 보여주는 풍경이라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