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족(纏足)과 천족(天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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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dmin| 작성일 :11-09-06 09:02|본문
천족(天足)이란 전족(纏足)을 한 여성들의 발을 해방시킨다는 뜻이다.
고대중국 여성들이 발을 동여매는 관습인 전족은 당(唐, 서기 618-907년) 왕조시대의 궁중에서부터 유래됐다.
당나라의 궁중에서부터 시작된 전족은 오대십국(五代十國.907-979년)과 송(宋,960-1279년)왕조시대에 이르러 귀족가정에까지 전해졌으며 원(元,1279-1368년).명(明.358-1644년)시대에는 전국적으로 보편화되기에 이르렀다.
결과 중국 고대사회에서는 발을 동여매지 않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풍조가 생겨났는데 귀족과 지식인, 상류가정의 여성들은 모두 발을 동여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면서 평민과 차별화 하는 웃지 못할 풍속이 생겼다. 고대와 같은 부권(夫權과 父權)사회에서는 심미(審美)적 관념이 일단 사회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면 하나의 풍속이 되어 법보다도 더 큰 위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전족은 바로 이와 같은 환경에서 형성된 봉건예교(封建禮敎, 예법과 도덕에 대한 요구)의 일부로서 중국 여성들을 옭아 맨 올가미가 됐다.
전족 과정은 사실상 여성들에 대한 형벌로서 “전족을 한 한쌍의 작은 발에는 한 동이의 눈물이 들어있다”고 까지 할 정도였다. 청 왕조 말기 정부와 민간에서 전족을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나 농민 봉기군인 “태평천국(太平天國)”까지도 여성들의 전족을 금지시켰다.
처음부터 전족을 금지한 청왕조는 말기쯤 되어서는 전족을 아편과 같은 해로운 풍기로 지목하고 이를 타파하기 위해 강력한 정책을 폈지만 생활 속에 깊이 뿌리 박힌 관습을 깨뜨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청 왕조 말기의 고위 관리 이홍장(李鴻章)은 당시로서는 “서양물”을 많이 먹은 사람이었지만 막료들이 그의 집을 방문할 때면 발이 큰 그의 어머니는 발을 옷자락으로 가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 유신인사들도 전족 반대 국민운동을 주도했는데 당시 저명인사 양계초는 「新民日報」에 발표한 글을 통해 “전족은 중국여성들의 발목을 자르는 것과 같다”고 규탄했으며 강유위는 광서(光緖)황제에게 “여성들의 전족을 해방하여 그녀들의 신체를 완전하게 하고 민속을 바로 잡으소서”라고 촉구했다.
20세기에 진입하여 서양풍조가 중국에 전파되면서 전족이 해방되기 시작했는데 일부 보수인사들은 “중국이 크기는 하지만 삼촌금련(三寸金蓮,전족을 비유함)이 발붙일 자리가 없게 됐고나!”고한탄했다.
고대중국 여성들이 발을 동여매는 관습인 전족은 당(唐, 서기 618-907년) 왕조시대의 궁중에서부터 유래됐다.
당나라의 궁중에서부터 시작된 전족은 오대십국(五代十國.907-979년)과 송(宋,960-1279년)왕조시대에 이르러 귀족가정에까지 전해졌으며 원(元,1279-1368년).명(明.358-1644년)시대에는 전국적으로 보편화되기에 이르렀다.
결과 중국 고대사회에서는 발을 동여매지 않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풍조가 생겨났는데 귀족과 지식인, 상류가정의 여성들은 모두 발을 동여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면서 평민과 차별화 하는 웃지 못할 풍속이 생겼다. 고대와 같은 부권(夫權과 父權)사회에서는 심미(審美)적 관념이 일단 사회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면 하나의 풍속이 되어 법보다도 더 큰 위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전족은 바로 이와 같은 환경에서 형성된 봉건예교(封建禮敎, 예법과 도덕에 대한 요구)의 일부로서 중국 여성들을 옭아 맨 올가미가 됐다.
전족 과정은 사실상 여성들에 대한 형벌로서 “전족을 한 한쌍의 작은 발에는 한 동이의 눈물이 들어있다”고 까지 할 정도였다. 청 왕조 말기 정부와 민간에서 전족을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나 농민 봉기군인 “태평천국(太平天國)”까지도 여성들의 전족을 금지시켰다.
처음부터 전족을 금지한 청왕조는 말기쯤 되어서는 전족을 아편과 같은 해로운 풍기로 지목하고 이를 타파하기 위해 강력한 정책을 폈지만 생활 속에 깊이 뿌리 박힌 관습을 깨뜨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청 왕조 말기의 고위 관리 이홍장(李鴻章)은 당시로서는 “서양물”을 많이 먹은 사람이었지만 막료들이 그의 집을 방문할 때면 발이 큰 그의 어머니는 발을 옷자락으로 가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 유신인사들도 전족 반대 국민운동을 주도했는데 당시 저명인사 양계초는 「新民日報」에 발표한 글을 통해 “전족은 중국여성들의 발목을 자르는 것과 같다”고 규탄했으며 강유위는 광서(光緖)황제에게 “여성들의 전족을 해방하여 그녀들의 신체를 완전하게 하고 민속을 바로 잡으소서”라고 촉구했다.
20세기에 진입하여 서양풍조가 중국에 전파되면서 전족이 해방되기 시작했는데 일부 보수인사들은 “중국이 크기는 하지만 삼촌금련(三寸金蓮,전족을 비유함)이 발붙일 자리가 없게 됐고나!”고한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