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산문(고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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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dmin| 작성일 :11-08-18 09:26|본문
1) 서한(西漢) 산문
중국의 의론문(議論文)은 전국말에서 진나라에 이르는 시기에, 특히 상소문을 중심으로 완성된다. 이사가 진왕(秦王)에게 올린 <간축객서(諫逐客書)> 등이 그 대표적인 글이다.
한대로 들어와서는 산문이 상소문을 중심으로 한 정론문(政論文)과 전국시대의 역사적 산문을 계승한 사전문(史傳文)의 두 갈래로 크게 발달한다. 한대에 들어오면서 많은 사람들의 주(奏)·소(疏)·표(表)·책(策) 같은 글이 쏟아져 나온다. 그 중에서도 가의(賈誼)의 <과진론(過秦論)>, 조착(조錯)의 <논귀속소(論貴粟疏> 등이 한초의 빼어난 정론문이라 할 것이다.
<과진론>은 진나라 멸망의 원인을 따져 지금의 거울로 삼으료는 뜻을 적은 글인데, 날카로운 필치와 절실한 논리에다 거침없는 기세까지 느끼게 하는 명문이다.
<논귀속소>는 중농(重農)정책을 역설하면서 농민생활을 안정시키고 생산의욕을 북돋아야 함을 주장한 글인데, 표현이 소탈하면서도 간결한 잘 다져진 글로 이루고 있다.
이 밖에 한대 산문의 발달을 이해하기 위해서 주목할 만한 저술로는, 한부(漢賦)의 대화체를 개량하여 소제(昭帝) 때 조정에서 소집한 염철회의에 있어서의 대변론을 생동하게 묘사한 환관(桓寬)의 ≪염철론(鹽鐵論)≫, 사상적인 내용이 담긴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의 ≪회남자(淮南子)≫ 등이 있다.
이들보다도 서한의 산문은 사전문(史傳文)인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가 대표한다. 사마천은 태사령(太史令) 사마담(司馬談)의 아들로 그의 아버지가 죽자 아버지의 유업을 계승하여 태사령이 된 뒤 곧 ≪사기≫의 저술에 착수하였다. 그런데 그 당시에 흉노의 땅으로 쳐들어가 적은 병력으로 싸우다 힘이 다하여 흉노에게 항복한 장수 이릉(李陵)을 변호하다가 무제(武帝)의 비위를 건드려 성기를 잘리우는 궁형(宮刑)을 받게 된다. 그는 치욕적인 궁형을 받은 뒤에 옥에서도 자신의 삶의 뜻을 오직 ≪사기≫ 저술에 두어, 출옥한 뒤로도 이 일에만 전념한 끝에 마침내는 130편에 달하는 불후의 대작을 이룩한다.
≪사기≫는 황제(黃帝) 때로부터 무제의 천한(天漢) 말에 이르는 대략 2600년에 걸친 중국의 옛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그 내용은 <본기(本紀)>, <세가(世家)>, <서(書)>, <표(表)>, <열전(列傳)> 으로 크게 나뉘어지는데, 그 중에도 제왕의 일을 편년식으로 기사(紀事)한 <본기>와 중요한 인물들의 전기가 중심이 된 <열전>이 핵심을 이루어 흔히 "기전체(紀傳體)>"라 부른다. 그리고 이 기전체는 후세 정사(正史)의 표준이 된다.
≪사기≫가 중국문학사상 큰 의의를 지니게 된 것은 본기나 열전이 모두 인물을 중심으로 한 기록이어서 후세 전기문학의 시조가 된 때문이다. 그리고 사마천은 이릉의 문제로 궁형을 당한 뒤 자신의 온 삶의 뜻을 이 ≪사기≫ 저작에 두었으므로, 그의 강한 신념과 뜨거운 정열은 객관적이어야 할 역사의 기록에 강한 개성을 불어넣어, 도처에 감동과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생동하는 문장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기≫의 문학적인 성취는 인물에 관한 묘사와 인물과 관련된 사건의 묘사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사마천의 개성적인 문장이나 희극적인 생동하는 표현 방법은 후세 산문은 말할 것도 없고 소설·극곡의 발달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2) 동한(東漢) 산문
동한인의 산문은 상소문이나 의론문을 막론하고 말엽으로 갈수록 모든 글이 더욱 변려체에 가까워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는 부(賦)에서 닦여진 수사기능이 산문에 원용된 때문인 듯하다. 이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저술은 왕충(王充)의 ≪논형(論衡)≫ 84편이다.
≪논형≫은 그 시대부터 자각하기 시작한 지식인으로서의 새로운 의식과 문인으로서의 새로운 문장의식의 일면을 보여주는 저술이다. 그는 특히 사상을 논술한 글에서 짜임새있는 논리의 구성과 생동하는 표현으로 동한 산문의 수준을 보여준다. 그러나 특히 문학에 관한 이론만으로도 개성적인 문학의 싹이 그때부터 움트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그의 중요한 문학이론은 다음의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① 그는 저술에 종사하는 "문유(文儒)"를 높이었다. 그는 "저술자를 문유(文儒), 설경자(說經者)를 세유(世儒)"라 하면서, "옛날의 뛰어난 사람들은 글을 저작하여 스스로 하는 일에 활용하고 자기의 뜻을 세상에 밝히었다. 세유(世儒)는 그 당시에는 존중을 받더라도 문유(文儒)의 글을 만나지 못하면 그의 행적이 전하여지지 않는다" 하였다.
② 그는 헛된 말 헛된 수사를 반대하고 글의 내용과 실용을 중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③ 그는 과장된 표현을 쓰지 말고 간략하고도 분명한 글을 쓸 것을 주장하였다.
④ 옛 글만을 소중히 여기며 본받으려는 기풍을 반대하였다.
그의 비판의 눈은 매우 예리하였다. 그러나 막 수사에서 미(美)의 창조 가능성을 발견하고, 멋진 미를 추구하기에 바쁜 그 시대 산문의 풍조를 바로 잡지는 못하였다.
그런데 동한에 있어서도 중국산문사상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사전문(史傳文)인 반고(班固)의 ≪한서(漢書)≫이다. 반고는 그의 아버지 반표(班彪)가 쓰다가 완성치 못한 유업을 이어 ≪한서≫를 이룩하였는데, 뒤에 누이동생 반소(班昭)와 마속(馬續)이 이를 더 보충 정리하였다 한다. 도합 100편인데 12본기, 8표, 10지(志), 70열전으로 이루어졌으며, 한(漢) 고조(高祖) 원년부터 왕망(王莽)의 지황(地皇) 4년에 이르는, 중국 최초의 본격적인 단대사(斷代史)이다.
≪한서≫는 ≪사기≫를 본뜨기는 하였으나 체재를 수정하여 <세가(世家)>를 없애고 <서(書)>를 <지(志)>로 바꾸기도 하였는데, 특히 유흠(劉歆)의 ≪칠략(七略)≫을 근거로 한 <예문지(藝文志)> 같은 것은 고대 학술사의 연구자료로써 매우 중요한 것이 되었다. 그리고 책의 체재뿐만이 아니라 이들이 책을 쓰는 기본 태도에도 차이가 있다. 사마천은 궁형이란 치욕적인 형벌을 당하고 나서 자기의 삶의 뜻을 오직 ≪사기≫의 저술에만 두고 있었기 때문에, 글이 감정적이고 어떤 사건의 서술에 자신의 신세를 담은 주관적인 기록이 되기 일쑤였다. 반고는 그러한 울분이 없었으므로 그 시대상황의 기록이 객관적이고 더욱 착실하다. 그리고 반고의 시대는 부(賦)의 영향으로 산문도 대우(對偶)와 수사를 중시하기 시작한 때라서 문장의 성격도 서로 다르다. ≪사기≫의 문장이 질박하고 산만하면서도 기세가 있는 데 비하여, ≪한서≫는 문아(文雅)하고 대구가 많은 정련된 글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사기≫의 글이 천현(淺顯)하고도 생동한다면 ≪한서≫의 글은 간심(艱深)하고도 중후하다.
≪한서≫ 중에서도 열전에 속하는 <주매신전(朱買臣傳)>·<장우전(張禹傳)>·<소무전(蘇武傳)> 등 뛰어난 문장으로 유명한 글들이 많다. ≪한서≫의 기록이 더 짜임새가 있고 정련되었기 때문에, 동한에서 당대(唐代)에 이르는 고문이 성행하지 않았던 시기에는 ≪사기≫보다도 ≪한서≫가 훨씬 더 중시되었었다.
따라서 지금 보면 개성적이고 다감(多感)한 ≪사기≫의 문장에서 더 많은 문학적인 성향을 발견할 수 있을는지는 모르지만, ≪한서≫가 후세 문학에 끼친 영향은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것이다.
중국의 의론문(議論文)은 전국말에서 진나라에 이르는 시기에, 특히 상소문을 중심으로 완성된다. 이사가 진왕(秦王)에게 올린 <간축객서(諫逐客書)> 등이 그 대표적인 글이다.
한대로 들어와서는 산문이 상소문을 중심으로 한 정론문(政論文)과 전국시대의 역사적 산문을 계승한 사전문(史傳文)의 두 갈래로 크게 발달한다. 한대에 들어오면서 많은 사람들의 주(奏)·소(疏)·표(表)·책(策) 같은 글이 쏟아져 나온다. 그 중에서도 가의(賈誼)의 <과진론(過秦論)>, 조착(조錯)의 <논귀속소(論貴粟疏> 등이 한초의 빼어난 정론문이라 할 것이다.
<과진론>은 진나라 멸망의 원인을 따져 지금의 거울로 삼으료는 뜻을 적은 글인데, 날카로운 필치와 절실한 논리에다 거침없는 기세까지 느끼게 하는 명문이다.
<논귀속소>는 중농(重農)정책을 역설하면서 농민생활을 안정시키고 생산의욕을 북돋아야 함을 주장한 글인데, 표현이 소탈하면서도 간결한 잘 다져진 글로 이루고 있다.
이 밖에 한대 산문의 발달을 이해하기 위해서 주목할 만한 저술로는, 한부(漢賦)의 대화체를 개량하여 소제(昭帝) 때 조정에서 소집한 염철회의에 있어서의 대변론을 생동하게 묘사한 환관(桓寬)의 ≪염철론(鹽鐵論)≫, 사상적인 내용이 담긴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의 ≪회남자(淮南子)≫ 등이 있다.
이들보다도 서한의 산문은 사전문(史傳文)인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가 대표한다. 사마천은 태사령(太史令) 사마담(司馬談)의 아들로 그의 아버지가 죽자 아버지의 유업을 계승하여 태사령이 된 뒤 곧 ≪사기≫의 저술에 착수하였다. 그런데 그 당시에 흉노의 땅으로 쳐들어가 적은 병력으로 싸우다 힘이 다하여 흉노에게 항복한 장수 이릉(李陵)을 변호하다가 무제(武帝)의 비위를 건드려 성기를 잘리우는 궁형(宮刑)을 받게 된다. 그는 치욕적인 궁형을 받은 뒤에 옥에서도 자신의 삶의 뜻을 오직 ≪사기≫ 저술에 두어, 출옥한 뒤로도 이 일에만 전념한 끝에 마침내는 130편에 달하는 불후의 대작을 이룩한다.
≪사기≫는 황제(黃帝) 때로부터 무제의 천한(天漢) 말에 이르는 대략 2600년에 걸친 중국의 옛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그 내용은 <본기(本紀)>, <세가(世家)>, <서(書)>, <표(表)>, <열전(列傳)> 으로 크게 나뉘어지는데, 그 중에도 제왕의 일을 편년식으로 기사(紀事)한 <본기>와 중요한 인물들의 전기가 중심이 된 <열전>이 핵심을 이루어 흔히 "기전체(紀傳體)>"라 부른다. 그리고 이 기전체는 후세 정사(正史)의 표준이 된다.
≪사기≫가 중국문학사상 큰 의의를 지니게 된 것은 본기나 열전이 모두 인물을 중심으로 한 기록이어서 후세 전기문학의 시조가 된 때문이다. 그리고 사마천은 이릉의 문제로 궁형을 당한 뒤 자신의 온 삶의 뜻을 이 ≪사기≫ 저작에 두었으므로, 그의 강한 신념과 뜨거운 정열은 객관적이어야 할 역사의 기록에 강한 개성을 불어넣어, 도처에 감동과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생동하는 문장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기≫의 문학적인 성취는 인물에 관한 묘사와 인물과 관련된 사건의 묘사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사마천의 개성적인 문장이나 희극적인 생동하는 표현 방법은 후세 산문은 말할 것도 없고 소설·극곡의 발달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2) 동한(東漢) 산문
동한인의 산문은 상소문이나 의론문을 막론하고 말엽으로 갈수록 모든 글이 더욱 변려체에 가까워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는 부(賦)에서 닦여진 수사기능이 산문에 원용된 때문인 듯하다. 이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저술은 왕충(王充)의 ≪논형(論衡)≫ 84편이다.
≪논형≫은 그 시대부터 자각하기 시작한 지식인으로서의 새로운 의식과 문인으로서의 새로운 문장의식의 일면을 보여주는 저술이다. 그는 특히 사상을 논술한 글에서 짜임새있는 논리의 구성과 생동하는 표현으로 동한 산문의 수준을 보여준다. 그러나 특히 문학에 관한 이론만으로도 개성적인 문학의 싹이 그때부터 움트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그의 중요한 문학이론은 다음의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① 그는 저술에 종사하는 "문유(文儒)"를 높이었다. 그는 "저술자를 문유(文儒), 설경자(說經者)를 세유(世儒)"라 하면서, "옛날의 뛰어난 사람들은 글을 저작하여 스스로 하는 일에 활용하고 자기의 뜻을 세상에 밝히었다. 세유(世儒)는 그 당시에는 존중을 받더라도 문유(文儒)의 글을 만나지 못하면 그의 행적이 전하여지지 않는다" 하였다.
② 그는 헛된 말 헛된 수사를 반대하고 글의 내용과 실용을 중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③ 그는 과장된 표현을 쓰지 말고 간략하고도 분명한 글을 쓸 것을 주장하였다.
④ 옛 글만을 소중히 여기며 본받으려는 기풍을 반대하였다.
그의 비판의 눈은 매우 예리하였다. 그러나 막 수사에서 미(美)의 창조 가능성을 발견하고, 멋진 미를 추구하기에 바쁜 그 시대 산문의 풍조를 바로 잡지는 못하였다.
그런데 동한에 있어서도 중국산문사상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사전문(史傳文)인 반고(班固)의 ≪한서(漢書)≫이다. 반고는 그의 아버지 반표(班彪)가 쓰다가 완성치 못한 유업을 이어 ≪한서≫를 이룩하였는데, 뒤에 누이동생 반소(班昭)와 마속(馬續)이 이를 더 보충 정리하였다 한다. 도합 100편인데 12본기, 8표, 10지(志), 70열전으로 이루어졌으며, 한(漢) 고조(高祖) 원년부터 왕망(王莽)의 지황(地皇) 4년에 이르는, 중국 최초의 본격적인 단대사(斷代史)이다.
≪한서≫는 ≪사기≫를 본뜨기는 하였으나 체재를 수정하여 <세가(世家)>를 없애고 <서(書)>를 <지(志)>로 바꾸기도 하였는데, 특히 유흠(劉歆)의 ≪칠략(七略)≫을 근거로 한 <예문지(藝文志)> 같은 것은 고대 학술사의 연구자료로써 매우 중요한 것이 되었다. 그리고 책의 체재뿐만이 아니라 이들이 책을 쓰는 기본 태도에도 차이가 있다. 사마천은 궁형이란 치욕적인 형벌을 당하고 나서 자기의 삶의 뜻을 오직 ≪사기≫의 저술에만 두고 있었기 때문에, 글이 감정적이고 어떤 사건의 서술에 자신의 신세를 담은 주관적인 기록이 되기 일쑤였다. 반고는 그러한 울분이 없었으므로 그 시대상황의 기록이 객관적이고 더욱 착실하다. 그리고 반고의 시대는 부(賦)의 영향으로 산문도 대우(對偶)와 수사를 중시하기 시작한 때라서 문장의 성격도 서로 다르다. ≪사기≫의 문장이 질박하고 산만하면서도 기세가 있는 데 비하여, ≪한서≫는 문아(文雅)하고 대구가 많은 정련된 글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사기≫의 글이 천현(淺顯)하고도 생동한다면 ≪한서≫의 글은 간심(艱深)하고도 중후하다.
≪한서≫ 중에서도 열전에 속하는 <주매신전(朱買臣傳)>·<장우전(張禹傳)>·<소무전(蘇武傳)> 등 뛰어난 문장으로 유명한 글들이 많다. ≪한서≫의 기록이 더 짜임새가 있고 정련되었기 때문에, 동한에서 당대(唐代)에 이르는 고문이 성행하지 않았던 시기에는 ≪사기≫보다도 ≪한서≫가 훨씬 더 중시되었었다.
따라서 지금 보면 개성적이고 다감(多感)한 ≪사기≫의 문장에서 더 많은 문학적인 성향을 발견할 수 있을는지는 모르지만, ≪한서≫가 후세 문학에 끼친 영향은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