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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고대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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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dmin| 작성일 :11-07-25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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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淸)

  명(明)나라 이후 만주족(滿洲族) 누르하치[奴兒哈赤]가 세운 정복왕조(征服王朝)로서, 중국 최후의 통일왕조(1636∼1912). 중국의 근대사는 이 왕조 말기부터 시작된다.

<정치과정의 개관>
만주인은 수렵·어로를 주된 생업으로 하는 퉁구스족의 일파로서 본래 여진(女眞) 또는 여직(女直)이라 불리었다. 그 일부는 12세기에 화베이[華北]로 진출하여 금(金)왕조를 세웠으나, 만주에 잔류한 대부분은 점차 정착농업을 영위하였으며, 명조 말기에는 해서(海西)·건주(建州)·야인(野人)의 3부로 나누어져 명나라의 간접통치를 받고 있었다.
 
명나라는 여진족의 여러 부족에 대하여 시종 분열정책을 취하였으나, 조선의 임진왜란(1592∼98)을 전후하여 만주에 대한 명나라의 통제력이 이완된 틈을 타서 건주좌위(建州佐衛)의 수장(首長) 누르하치가 여진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1616년 스스로 한(汗)의 위(位)에 올라 국호를 후금(後金)이라 하고, 선양[瀋陽]에 도읍하였다. 이 사람이 청나라의 태조이다. 명나라는 이를 제압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사르후의 싸움에 대패하여(1619) 랴오허강[遼河] 동쪽을 잃었다. 이어 일어난 황타이지[皇太極:太宗]는 먼저 명과 조선의 연합을 막기 위해 두 번에 걸쳐 조선에 침입하였다(1627·36). 또 내몽골로 진출하여 차하르부(部)를 정복하여 대원전국(大元傳國)의 새(璽)를 얻음으로써 36년 새삼스레 황제의 위에 올라 국호도 대청(大淸)으로 고쳤다. 이 시기에 명왕조의 사회적 모순은 궁정의 당쟁과 농민반란으로 집중되어 나타났는데, 44년 이자성(李自成)을 지도자로 하는 농민군은 드디어 베이징[北京]에 진입, 명나라를 멸망시켰다. 이때 농민군을 두려워한 지배계급은 청군과 강화(講和), 산하이관[山海關]을 지키고 있던 오삼계(吳三桂)는 자진하여 청군을 관내로 안내하여 베이징을 회복시켰다. 태종의 아들 순치제(順治帝)는 재빨리 이자성 토벌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그를 후베이[湖北]로 몰아내 궁사(窮死)시킴과 동시에 중국 본토 지배의 대의명분을 획득하였다. 이민족 지배에 대한 저항은 그 후 복왕(福王)·노왕(魯王)·당왕(唐王)·계왕(桂王) 등 구왕족 소위 남명(南明)의 움직임으로 나타났는데, 농민군을 적대시하여 제휴하지 않았으므로 그 명운이 짧아 대세를 회복시키지는 못하였다. 오히려 청조의 중국 통일에 있어서의 적은, 중국 정복에 협력한 평서왕(平西王) 오삼계, 평남왕(平南王) 상가희(尙可喜), 정남왕(靖南王) 경중명(耿仲明)의 3번(三藩)이었으며, 수년에 걸친 3번의 난의 진압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명나라 최후의 유신(遺臣) 정성공(鄭成功)의 자손이 귀순함으로써 청나라는 제4대 황제 강희제(康熙帝)에 이르러 비로소 전중국을 통일하였다.

더구나 강희제는 1689년 러시아제국과 네르친스크조약을 맺음으로써 19세기 중엽까지, 러시아제국이 동진(東進), 남하하는 것을 억제하였다. 또 간간이 분쟁이 일던 조선과의 경계도 정하여 백두산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웠다(1712). 또 계속되는 옹정(雍正)·건륭(乾隆)의 3대에 걸쳐 중앙아시아의 중가르부(準部)를 토벌하고 이에 따라 칭하이[靑海]의 속령화(屬領化)와 티베트 보호와 평화를 촉진시키면서 1759년에는 중가르부·위구르(回紇:후의 新疆省)의 지배를 확립하였다. 이리하여 이 3대에 걸쳐 청왕조는 오늘날의 중국 영토의 조형(祖型)이 되는 중국 사상 최대의 판도를 확립함과 아울러, 동아시아 거의 전역을 그 위령(威領)하에 두었고, 내정의 충실에도 힘입어 그 극성기(極盛期)를 가져왔다. 그러나 건륭 말년, 이미 변경에서 조짐을 보이고 있던 이슬람교도·먀오족[苗族] 등의 여러 반란은, 얼마 안되어 가경(嘉慶) 연간에 이르자 백련교(白蓮敎)의 후베이[湖北] 등 5개 성에서 대반란으로 폭발하였다. 백련교의 난은 10년(1796~1804)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이를 통하여 국가권력의 지주인 8기(八旗:軍隊)의 무력함이 폭로되었으며, 거기다 권신(權臣) 화신(和?의 미증유의 수회사건이 상징하듯, 관료정치의 부패로 인하여 청왕조의 지배는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유럽 자본주의의 세계 지배의 파두(波頭)가 중국에 들이닥침으로써 결정적인 청왕조의 쇠퇴를 가져왔다. 이미 건륭 연간의 매카트니, 가경 연간에 애머스트 등 두 차례의 특사(特使)를 통해 산업자본의 판로 개척을 기도하다가 거절당한 영국은, 1840년 아편문제로 발단된 분쟁을 계기로 무력에 의해 중국을 개국시켰으며(아편전쟁), 프랑스·러시아·미국도 그 뒤를 따랐다.

이후 열강의 청조 지배는 중국에 대한 반식민지적 지배의 매체로서의 성격을 짙게 하였고, 따라서 열강의 자본주의(제국주의)에 대한 직접·간접의 저항이 중국사 전개의 원동력이 되기에 이르렀다. 아편전쟁을 발화제로 발발한 중국 사상 최대의 농민전쟁인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에서, 홍수전(洪秀全) 등이 봉건적 제관계의 폐기를 지향하여 싸우면서, 궁극적으로는 청왕조를 예속시킨 외국 세력과 대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이미 그러한 상황을 뜻하는 것이다.
 
‘태평천국의 난’은 청왕조의 정규군이 아닌, 사실상 증국번(曾國藩)·이홍장(李鴻章) 등 지방의 한인(漢人) 관료가 조직한 개인집단, 즉 향용(鄕勇:湘軍·淮軍)의 힘에 의존하여 진압되었는데, 이 때문에 지방분권적 경향이 강화되고 후의 군벌(軍閥) 할거의 소지를 만듦과 동시에 관계(官界)에서의 한인의 지위를 높이는 결과를 낳아, 그들이 주체가 되어 위로부터의 중국 근대화의 최초의 시도인 ‘양무운동(洋務運動)’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전통적 체제를 옹호하고 보수(保守)하기 위한 군사공업의 이식을 주안으로 하였을 뿐만 아니라 양무파 관료가 기업을 사물화(私物化)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 오히려 민족자본주의의 발전을 저해하였다. 청·일전쟁에서의 패배는 이같은 양무파 노선의 파산을 결정적으로 만들었다.

한편, 제국주의시대로 이행(移行)해 가는 심각한 위기감은, 단순히 유럽 선진국의 기술 이식뿐 아니라, 전통체제 그 자체를 변혁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캉유웨이[康有爲] 등의 변법자강운동(變法自强運動)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광서제(光緖帝)까지 동조한 변법자강운동도 서태후(西太后) 등 수구파의 반대로 겨우 100일 유신(維新)으로 막을 내렸고, 의화단(義和團)운동을 계기로 한 외국 군대의 베이징 진주로 수구파가 최종적으로 몰락하였을 때는 입헌안(立憲案)을 비롯한 여러 개혁안이 처음으로 채용되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서 중국 민중의 동향은 혁명의 기운으로 향해 달려가고 있었으며 멸만흥한(滅滿興漢)의 민족주의는 화교·유학생·민족자본가의 반(反)봉건주의와 합류, 쑨원[孫文]이 주도하는 중국혁명동맹회(中國革沒盟會)에 결집되어 신해혁명(辛亥革命:1911)을 성공으로 이끌었으므로 1912년 선통제(宣統帝) 푸이[溥儀]의 퇴위와 함께 청왕조는 종말을 고하였다. 그것은 또한 중국 민중의 전제군주제와의 결별이기도 하였다.

<행정>
뒤떨어진 소수민족이었던 만주인이 광대한 중국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민족을 개병(皆兵)으로 만들어 압도적인 군사력을 바탕으로 하는 한편, 재래 중국사회의 계급지배 위에 타고 앉아 그것과 기본적으로 유착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8기의 병제와 중요한 관직에 있어서의 만한병용(滿漢倂用) 정책을 제외하고는 청나라는 명왕조의 관제를 거의 그대로 답습하였다. 우선 중앙에 최고 정무기관인 내각 대학사(內閣大學士), 그 집행기관인 6부·5시(寺) 및 감찰기관인 도찰원(都察院)을 두어 각각 황제 직속으로 하였으나, 얼마 안되어 중가르부 토벌 때에 용병의 신속과 군사기밀 보장을 위해 내각의 실권자를 선발, 군기처(軍機處)가 신설되자 실권은 그 곳으로 넘겨졌으며, 건륭 초기에는 독립된 기관으로서 군사·국무의 최고 권한을 겸유하기에 이르렀다. 또 이번원(理藩院)이 신설되어, 몽골·신장[新疆]·시짱[西藏] 등 소위 번부(藩部)의 일을 관장하였다. 서양 제국과의 교섭도 당초에는 그 밑에서 조공국(朝貢國)과 같은 대우로 전락했으나, 말엽에 이르자 업무의 확대와 제국의 압력에 따라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이 설치되었고, 곧 이어 1901년에는 외무부로 승격하였다. 말기 몇 년 동안에는 이 밖의 관제개혁도 시행되었으나, 만인(滿人) 중심의 집권주의는 한인(漢人) 관료의 이반을 초래하여, 오히려 붕괴를 재촉하기만 하였다. 지방 관제에서는, 최고 행정구획인 성(省) 밑에 부(府)가 있고, 부는 다시 주(州)·현(縣)·청(廳)으로 나누어졌으며, 별도로 성 직속의 주·청이 있었다. 성에는 포정사(布政使)·안찰사(按察使)가 있어 민정(民政)·감찰을 분담하였으며, 전대(前代)에 임시 관직으로 나타났던 총독·순무(巡撫)를 최고의 지방관으로서 두었는데, 총독을 1, 2개 성에 1명, 순무를 거의 1개 성에 1명씩 둔 것은 청왕조의 특색이었다.

성에는 또한 제독(提督)·총원(總員)·학정사(學政使)·도원(道員) 등이 있어서 각각 군사·교육·성 내의 업무를 분담 처리하였다. 부·주·현에는 지부(知府)·지주(知州)·지현(知縣)이 있었으며, 이들 밑에 백성은 주로 보갑제(保甲制)로 조직되어 있었다. 백성으로부터 수탈을 일삼던 정부는 커다란 역사적 변화로서 재래의 인두세(人頭稅)와 같은 계보의 정은(丁銀)을 폐지하고, 토지의 단일체계, 즉 지·정은제(地丁銀制)가 옹정(雍正) 초년을 계기로 거의 전국적으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왕조가 전통적인 일군만민(一君萬民) 체제를 사실상 폐기하고, 기초과정에 있어서의 지주제(地主制)의 진전을 용인한, 그 위에 기초를 둔 것을 의미한다. 지·정은이 국가 세입 전체에 차지하는 비중은 건륭 연간에는 거의 70 %에 달하였으나, 이에 버금가는 주요 세목인 염과(鹽課:제염업자와 그 상인에 대한 과세)·관세(關稅:통과세)의 2가지가 점차로 증가하였는데, 특히 청 말에는 관세가 현저히 늘어났다. ‘태평천국의 난’ 진압의 군비로 신설되어, 양무운동(洋務運動)의 재원으로도 쓰던 이금(釐金)도 이 일종이다.

이와 같은 국가재정의 수탈을 가능케 하는 경제외강제(經濟外强制)의 기초를 이루고 이민족 지배를 지탱케 한 것은 청왕조 특유의 병제인 8기(八旗)였다. 즉 만주인을 모두 병사로서 홍(紅)·백(白)·황(黃)·남(藍) 및 그것에 테두리가 달린 8가지 기색(旗色)으로 나눈 세습적인 단체로 편성하였다. 뒤에는 만주인뿐만 아니라 몽골·한군(漢軍)의 8기까지 더하여 합계 24기(旗)로, 기적(旗籍) 20만에 이르렀으나, 그래도 광대한 영토를 경략(經略)·수비하기에 부족하였으므로, 한인만으로 편성된 녹영(綠營:綠旗)을 설치하고 총독과 순무에 의해 통솔되었다. 팔기의 구성원, 즉 기인(旗人)에게는 기지(旗地)가 지급되어 경제적 자급이 배려되었다. 그러나 경작자로는 한인이 진출, 빈궁해진 기인(旗人)은 기지를 전당잡히거나 팔아넘기는 일이 많아짐으로써 8기제도는 붕괴되기 시작하였고, 그 무력함은 백련교의 난에서 백일하에 드러났다. 이 때 민간의용군인 향용(鄕勇)이 나타났는데, 이들은 태평천국의 난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그 후 청왕조도 뒤늦게나마 연군(練軍:8기와 녹영에서 선발)과 서양식으로 편성한 신군(新軍)을 양성하였으나, 연군과 신군 사이에서 혁명파의 반란이 일어나 신해혁명의 발단이 되었다.

<사회·경제>
청대의 사회는 소수의 기인(旗人) 및 지배계급인 관료층(鄕紳 포함)과 피지배계급인 양민(良民:農工商 기타)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경제적으로 볼 때 관료층은 거의 모두 지주였으며, 양민 가운데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은 자작농(自作農)과 전호(佃戶:小作農)로 나뉘어 있었다. 이 가운데 지주와 전호가 기본적 계층이었으며, 양자 사이의 봉건적 관계가 사회구성의 기축(基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제국가 체제하에서는 지주층도 또한 지배당하는 존재이며, 관료체계 속에 파고들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특권의 유무가 생겼고, 명왕조 말엽 이래의 상품화폐경제의 전개와 때맞추어 재지(在地) 중소 지주층의 몰락과 관료지주·상인지주의 부재지주로서의 발전이 두드러졌다.

이같은 지주의 존재 형태의 변화는 전호에 대한 통제력을 약화시킴과 함께, 원래 그것이 전호측에서 지주에게 의존하지 않고 그들이 서로 협력·제휴함으로써 재생산 가능한 체제를 만들어냈다는 변화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기 때문에, 전호층의 계급투쟁, 즉 항조(抗租)의 발생을 용이하게 하였다. 이미 강남(江南) 일대의 농촌에는 명나라 말 이래로 목면·비단[絹]을 중심으로 하는 섬유공업과 기타 수공업이 발달하여, 중국의 기본 경제지대가 되고 있었는데 이에 따르는 쌀의 부족을 보충하기 위하여 청왕조 초에는 후난[湖南]·쓰촨[四川] 지방이 새로운 곡창지대로 등장하였다. 또 푸젠[福建]의 사탕수수 재배에 대하여 ‘만주’의 콩깻묵이 비료로서 강남·푸젠으로 이입되는 등, 각지의 특산적 상품생산을 통하여 일종의 지역적 분업이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강남의 면직물은 국내 시장뿐만 아니라 ‘난징[南京]목면’의 이름으로 널리 해외로도 수출되었다. 이같은 수공업은 대부분 전호층의 영세한 부업경영이었기 때문에 유통과정은 상인 자본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그 중에서도 산시[山西]상인과 신안[新安]상인의 2대 동향(同鄕)상인단은 전국 시장을 양분하여, 서로 동업조합으로서의 회관(길드)을 만들어 중간적 이익을 옹호하였다. 화폐경제의 침투와 상품생산의 전개는 전호층의 자립화를 지탱하는 한편, 농촌에 있어 새로운 무산자(無産者)를 탄생시키기도 하였다.

그들은 인구가 희박한 변경으로 이주하거나, 만몽(滿蒙)의 봉금지(封禁地)를 잠식하고, 또는 해외로 이민하여 화교(華僑)가 되거나 혹은 비밀결사에 들어가 반사회적 행동을 하였는데, 그 일부는 백련교의 난을 비롯한 청나라 말의 여러 반란에서 일정한 혁명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청왕조는 처음에 엄하게 해금(海禁)하여 외국무역은 광저우[廣州]항 한 곳에 한하였고, 공행(公行)이라 불리는 특허상인의 조합에 독점을 허가했다.

무역은 차·생사 수출을 주로 하는 편무역(片貿易)으로서 19세기 초에는 연간 4,500만 달러의 은이 유입되었다. 이 형세를 역전시킨 영국의 인도산 아편 밀수입은 중국 경제를 혼란에 빠뜨렸는데, 아편 그 자체의 해악은 물론, 아편전쟁의 직접 원인이 되었다. 아편전쟁의 패전에 따라 강제로 개국을 하게 된 중국에는 면제품을 비롯한 영국 산업자본의 제품들이 밀려들어왔으나, 계속 아편수입과 은의 유출은 중국 경제를 피폐시켰을 뿐만 아니라, 농업과 결합하여 놀랄 만한 경제성을 지닌 견고한 가내공업제품이 저항하였기 때문에, 산업자본의 근본 의도는 어긋났다. 그렇지만 흥륭기의 자본주의는 장기적 경쟁을 통하여 점차 중국 가내공업을 압도, 농민경영을 파괴하고 대량의 무산 대중을 낳게 하였다. 1880년대에 이르자 면제품의 수입은 결국 아편을 능가하였고 거꾸로 면화가 수출 초과로 바뀌어 쌀의 수입이 급증하는 등 무역구조는 명료하게 원료 식민지적인 형태를 나타내었다.

그 무렵, 양무파(洋務派)는 군사공업뿐만 아니라 상하이[上海]에 기기직포국(機器織布局) 등을 설치, 민수기업에도 진출하였으나 민간기업을 압박할 뿐이었다. 한편 청·일전쟁 후 제국주의 단계로 들어간 구미(歐美) 열강의 대중(對中) 침입은 차관(借款), 철도 이권의 획득, 기업의 직접 진출의 형태로 강화되면서, 중국은 완전히 반(半)식민지화하였다. 의화단의 저항을 계기로 하여 청왕조도 겨우 식산흥업(殖産興業) 정책을 취하여, 제국주의 침략과 혁명세력의 대두에 대비하였으나, 그 지배체제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 사이에 지방 향신층(鄕紳層)이 앞장선 기업의 설립(방적·성냥제조 등)과 이권회수 운동은 신해혁명을 지향하여, 부르주아적 성격을 떠받치고 있었다.

<문화>
청왕조의 학문을 대표하는 것은 고증학(考證學)인데, 이것의 지나친 발달은 이민족 지배를 유지하기 위하여 청왕조가 취한 사상통제의 산물이었다. 처음에 강희제(康熙帝)는 반만(反滿)사상을 억압하고, 민심 수습을 위하여 명왕조에 이어 주자학(朱子學)을 정통적인 관학(官學)으로 삼았으며, 스스로도 여러 학문을 익히고 한문화(漢文化)에 친숙해졌으나, 명왕조 말 이래의 학자 고염무(顧炎武)·황종희(黃宗羲) 등 야(野)에 있으면서 반만적인 민족의식이나 정치관을 가득 담은 《일지록(日知錄)》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 등을 저술하였다. 청왕조는 얼마 안 있어 그 지배가 확립됨과 동시에 이들에 대하여 엄격한 태도로 임하였으니(‘文字의 獄’, 禁書), 그로 인하여 반만사상은 지하로 숨어들었고, 고염무에게서 시작되는 고전의 실증적·비판적 연구는, 고전이 지녔던 격렬한 경세(經世)의 염을 잃고 학술의 주류가 되었다. 대진(戴震)·단옥재(段玉裁)·전대흔(錢大昕) 등의 학자가 배출되었고, 《사고전서(四庫全書)》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등의 편찬이 잇따라 이루어졌다. 고증학은 중국 학술사상의 한 정점이었다. 또한 근대과학정신에 대한 싹도 보호·육성되었으나, 곧 그 비실천성에 대한 비판은, 도광제(道光帝) 이후 청왕조의 쇠퇴와 중국 전체의 위기 가운데서 공양학(公羊學)의 발흥으로 나타났으며 그것은 공자진(自珍)·위원(魏源)·캉유웨이[康有爲]·량치차오[梁啓超]로 이어지면서, 드디어 변법자강의 실제운동을 불러일으키기에 이르렀다. 한편 고문학파(古文學派)에서도 실천성을 강조하는 증국번(曾國藩)·장즈둥[張之洞] 등이 나타나서 송학(宋學)을 재흥시켰다.

그들을 중심으로 하여 수행된 양무운동 사상은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으로 특징지어지는데, 장즈둥의 《권학편(勸學篇)》은 그 대표적인 저작이다. 이들은 모두 청왕조 체제를 옹호하는 것이었으나 이에 반하여 옌푸[嚴復] 등은 유럽 근대사상을 본격적으로 소개했고, 이에 입각한 새로운 사회기반에 지탱된 쑨원[孫文]은 기성의 틀을 벗어난 독특한 시야에서 독자적인 혁명사상을 고취했는데, 그 사상이 민족·민권(民權)·민생(民生)으로 집약되는 3민주의(三民主義)였다. 그 내용은 다소 유동적인 것이지만 청왕조 말기 제계급의 동향과 위기의식을 가장 심각하고 포괄적으로 반영한 사상이 되었다. 청대의 문학은 원(元)·명(明)에 이어 희곡·소설의 발달이 뚜렷한데, 희곡에서는 《장생전(長生殿)》 《도화선(桃花扇)》이 2대 명작으로 손꼽히고, 소설에서는 《요재지이(聊齋志異)》 《부생육기(浮生六記)》 외에 《유림외사(儒林外史)》 《홍루몽(紅樓夢)》의 2대 장편이 당시의 사대부나 관료귀족의 생태를 폭로하여 쌍벽을 이루었다. 또 청나라 말에는 임서(林) 등을 통하여 유럽의 근대소설이 소개되어, 계몽사조의 일환을 짊어짐과 동시에 《관장현형기(官場現形記)》 《노잔유기(老殘遊記)》 《20년목도지괴현상(二十年目睹之怪現狀)》 등 관계의 부패를 폭로한 정치소설이 나타나 소설의 역할에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였다.

<미술>
청왕조 미술의 특징이 가장 명료하게 나타난 것은 회화이다. 그것은 명왕조 회화의 연장이지만, 명대뿐만 아니라 중국 4000년 회화사의 종장(終章)을 장식하기에 알맞은 것으로써, 오랜 전통을 보유한 정통파가 이민족의 정복하에서도 그대로 화계(畵系)를 바꾸어나가, 양상을 변화시키며 최후의 빛을 발하면서 지평선 너머로 꺼져가는 듯한 느낌이다. 그 최후의 빛을 발한 화가로 석도(石濤)와 주탑(朱A)이 있다. 이들은 명왕조의 왕실 출신으로, 명왕조 멸망 후 출가하여 선승(禪僧)이 되었으나 마음속에 불타는 치열한 저항정신으로 화필을 구사, 기성 화가와는 전혀 다른 자유롭고 독특한 중국 문인화의 예술을 쌓아올렸다. 이들과 같은 시대인 청초(淸初), 왕시민(王時敏)·왕감(王鑑)·왕휘(王)·왕원기(王原祁)·오력(吳歷)·운수평(5壽平:南田) 등 소위 4왕오운(四王吳5) 등은 한 파를 형성하고 당시 화단을 이끌었는데, 석도·주답에 비하면 형식의 틀에 얽매여 예술적 감동은 적다. 청왕조 화원(畵院)은 궁정화가를 거느리고, 양식에 통일이 없이 송원화(宋元畵)·남화(南畵) 혹은 서양화까지 끌어들였으나 화단(畵壇)의 구석으로 밀려난 듯, 권위도 실력도 없었다. 중기에 이르자 상업도시 양저우[揚州]에 문인화를 전문으로 하는 일단이 나타나 남화의 전통을 이어 개성의 표현에 주력, 이단적인 존재로서 주목을 받았으나 너무 주관에 치우쳐서 신경지를 개척하지는 못하였는데, 화암(華,:新羅山人)·김동심(金冬心)만은 확실히 별격의 존재라 할 수 있다. 청나라 초의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은 명왕조 판화의 흐름을 받은 금릉(金陵:南京)의 출판이지만, 금릉판화가 청대에 와서 쑤저우[蘇州]로 진출, 훌륭한 판화의 성행을 보게 되자 서양화의 원근법과 음영법(陰影法)을 받아들여 서민예술로서 뿌리를 내리기에 이르렀다.

청왕조 공예의 대표는 도자기인데, 강희·옹정·건륭의 3대, 백 수십 년간에 징더전요[景德鎭窯]를 비롯하여 여러 곳의 관요(官窯)에서 제작된 도자기는 일품으로서 서유럽 여러 나라에 수출되었다. 칠공예(漆工藝)로는 건륭·가경(嘉慶) 연간에 궁정 용구로서 대소 갖가지의 제품이 만들어졌으나 명왕조 작풍(作風) 답습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였는데, 기교를 부리고 의장(意匠)도 부질없이 번거로운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인간의 재능이라고는 볼 수 없을 만큼 섬세한 기법으로 정성들여 만든 칠공예품은 유럽 각국으로 수출되어 진중히 간직되었다. 그 밖에 중국 특산의 옥(玉)이나 비취(翡翠)를 가공, 옥기와 세공물을 만들었으며, 이와 관련 있는 것으로는 유리를 재료로 한 화병·공기·향로 등도 만들었는데, 그 중에서도 ‘건륭유리[乾隆硝子]’라 불리는 작품은 특히 유명하다.

<한국과의 관계>
한반도 북변에 할거하면서 17세기 초 중국 본토에 진출하여 통일왕조 청(淸)을 세운 여진은 조선 개국 초부터 북방개척에 힘을 기울였던 조선 정부의 가장 부심(腐心)거리로 등장하여 때로는 무력으로, 때로는 회유책을 써서 이들의 조공(朝貢)·귀화(歸化)를 권장하였다. 조선 정부는 이들이 노략질하는 동기의 하나가 생활 필수품의 결핍에 있음을 감안하여 함경도의 경성(鏡城)과 경원(慶源)에 무역소를 설치하고 그들이 필요한 물건을 바꾸어 가도록 하였으며, 여진 추장들에게는 중추원지사(中樞院知事)를 비롯하여 호군(護軍)·사직(司直)·만호(萬戶)·천호(千戶) 등의 명예 군직(軍職)을 주기도 하였다. 특히 청을 일으킨 건주여진은 1467년(세조 13) 남이(南怡) 등이 이끄는 조선군의 정벌을 당해, 추장 이만주(李滿住) 부자가 살해되어 그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명나라와 조선의 힘이 만주에 미치지 못하는 틈을 타서 세력을 크게 확장하여 조선 선조가 의주(義州)에 피란하였을 때 건주 여진의 추장 누르하치는 조선에 구원병을 보내겠다고 제의하기도 하였으나 조선 정부는 그 속셈을 알 수 없어 거절하였다.

그 후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의 아들 태종은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을 일으켜 조선과 형제의 맹약을 맺고, 36년(인조 14)에는 다시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의 항복을 받음으로써 종래의 수직 또는 수평 관계는 전도(顚倒)되어 청나라가 조선의 종주국이 되었다. 이로부터 조선은 약 250년간 해마다 정기·부정기적으로 사절과 조공품을 보내어 사대(事大)의 예를 하였으나, 조선은 내정의 간섭을 받지 않고 대체로 독자성을 유지하여 청나라의 종주국 행세는 극히 형식적인 것이었으며, 양국 관계도 별 어려움이 없이 무난하게 보냈다. 1842년 난징조약[南京條約]으로 조선에 앞서 개국한 청나라는 조선이 일본과의 강화도조약으로 쇄국의 둑이 무너지자, 82년(고종 19) 조선과 미국의 통상을 권유하고 조미·조독 수호통상조약을 돕는다는 구실로 마건충(馬建忠)·정여창(丁汝昌)이 군함을 끌고 들어와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였다. 또한 같은 해에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군함 3척에 4,500명 병력을 끌고 와서 흥선대원군을 납치하였고, 청나라의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은 독일인 묄렌도르프 및 마건충 등을 조선 정부의 정치·외교·세관 등의 고문으로 앉게 함으로써 청나라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84년 갑신정변을 계기로 청·일 양군이 충돌해 톈진조약[天津條約]을 맺자 위안스카이[袁世凱]를 주조선 총리로 임명해 정치·경제 등 모든 분야에 걸쳐 간섭하는 등 종주국 행세를 하였다. 청나라는 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군대를 파견하여 동학군을 진압하는 데 협력하였으나,

이를 계기로 일본과 충돌하여 청·일전쟁을 일으켰는데 이 전쟁에서 패함에 따라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조선은 96년 250년간 사용하여 온 청나라의 연호를 버리고 ‘건양(建陽)’을 연호로 사용함으로써 최초로 자체의 연호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97년에는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쳐 청나라와 대등한 황제국임을 선포하였다. 조선 사회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는 동안에 ‘숭명배청(崇明排淸)’의 모화사상(慕華思想)이 더욱 일어 당시의 학자는 물론 일반 민중에까지 뿌리깊이 스며들었는데, 학자로서는 송시열(宋時烈)에 이르러 그 극에 달하였다.

이는 중국 본토의 ‘중화(中華)’만이 문화·가치이고 일본·베트남·거란·몽골·흉노 및 여진[淸]은 야만의 ‘이(夷)’이니 비문화·비가치(非價値)라는 화이론적(華夷論的) 세계관의 소산이어서, 중국 변두리의 오랑캐 여진족이 형성한 청나라의 문화는 배척되고, 주자학(朱子學)만이 국가사회 유지의 규범으로 정치와 결합되어 숭상되었다. 그러나 주자학이 형식적·관념적·배타적인 면만이 강화되어 학문으로서의 자유로운 비판을 거부하자, 그 반동으로 실학(實學)이 일어났고, 영조·정조 때에는 청나라 고증학(考證學)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박학(樸學)이 일어나서 정약용(丁若鏞) 등 실학파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청나라를 경유하여 서학(西學:유럽의 자연과학과 천주교)이 유입되어 과학기술과 종교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전성기를 맞이한 강희∼건륭 연간(1662~1795)에 부연사(赴燕使) 일행에 끼어 청나라의 물질문명을 보고 돌아온 박지원(朴趾源)·박제가(朴齊家) 등은 청나라의 문화를 들여와 문화를 개발하고 산업을 일으키자는 ‘북학(北學)’운동을 벌였다. 이와 같이 청나라의 근대문화는 조선의 학자들을 자극하여 그 고증학적 방법과 과학사상을 바탕으로, 역사학·지리학·언어학·금석학(金石學) 및 천문학·지도제작 등에 많은 역작이 나왔고, 이와 같은 학문의 방법은 백과사전파에도 영향을 끼쳐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1770)가 편찬될 정도로 근대문학의 발달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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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경제동향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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