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전통문화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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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15-11-02 09:59|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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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춘지에(春節)
춘지에(春節)는 음력 1월1일로 고대에는 ‘위엔단(元旦)’, ‘위엔르(元日)’, ‘위엔차오(元朝)’, ‘정단(正旦)’, ‘신정(新正)’ 등으로 불려졌고 민간에서는 ‘구워니엔(過年)’, ‘구워신니엔(過新年)’ 이라 칭했으며 정월(正月) 초하루를 ‘1년의 으뜸이요, 1월의 첫날이요, 時의 시작이다’라고 하여 “싼위엔(三元)”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춘절의 이칭(異稱)으로 사용된 ‘元日’에서의 ‘元’은 개시한다는 의미로 ‘元日’은 첫날을 의미한다. 또한 ‘朝’와 ‘旦’은 새벽을 뜻하는 글자로 하루의 시작을 함축하고 있고 ‘正’은 표준, 즉 준칙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고대에는 초저녁에 북두칠성이 떠 있는 위치가 계절의 정확한 표준방위가 된다고 하여 斗建 혹은 同建 이라 칭한 것처럼 ‘正旦’의 의미는 1년의 기준이 되는 새벽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元日’은 주로 先秦時期에 주로 사용되었던 춘절명칭이고 西漢時期에 이르러서는 ‘三朝’, ‘正月’, ‘正旦’이라 불려졌으며 현재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新正’, ‘元旦’ 이라는 명칭은 위진남북조시대에 처음 사용되었던 것이 明代까지 지속적으로 불리워지다가 청대에 이르러 ‘元旦’으로 통일되었다.
그렇다면 春節이란 용어는 언제부터 사용되었을까? 동한의 문헌에 따르면 춘절이란 용어가 사용되고 있었으나 봄을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춘절과 관련이 없으며, 남송 文天祥이 기록한 ≪文山集≫ 권 20에 기록된 <二十四日>이란 詩에 ‘춘절 전 3일을 강남에서는 小年이라 한다’라고 하여 춘절이란 표현이 있으나 이 또한 입춘을 나타내고 있어 음력 1월 1일과는 관련성이 없다. ‘춘절’이란 용어가 중국인 사이에 보편적으로 사용되게 된 계기는 1912년 1월 2일 손중산(孫中山)이 각 성에 보낸 통지문에서 ‘중화민국은 양력을 사용하되 황제기원 4691년 11월 13일을 중화민국 元年 元旦으로 한다’라고 선언하였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 1949년 12월 23일 개최된 12차 정무회의에서 ‘신년(公曆元旦)’, ‘春節’, ‘勞動節’, ‘國境紀念日’을 제정함에 따라 ‘元旦’은 양력 1월 1일을, 그리고 춘절은 정월 초하루를 지칭하게 되었다.1)
춘절 전날 밤을 ‘츄시(除夕)’라 불렀는데 상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단오(5.5), 중추(8.15), 제석(12.30)을 1년 중 3대 중요한 장부결산 날로 삼아 손익의 실태를 조사한 후 다음 해를 계획하는 중요한 절목으로 생각했다.2)
제석날 밤에 가족들이 둘러앉아 밤을 지새며 즐기는 것을 ‘쇼우쑤이(守歲)’라 하였고, 자정 무렵이 되면 폭죽을 터뜨리면서 액막이 놀이를 하였다. 초하룻날 폭죽을 터트리는 풍속은 중국 민간신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중국인들은 초자연적 존재, 즉 신(神), 귀(鬼), 조상들이 인간을 초월하는 능력을 가지고서 이승의 인생에 간섭할 수 있다고 여겼다.3)
이에 돌아가신 조상을 섬겨 복을 받고자 하였고, 신령의 호감을 사서 악의를 품지 못하도록 하고자 하였다. 중국인들은 귀를 악의에 찬 영혼으로 보았기 문에 경멸의 대상으로 여겼다.
고대 중국인들은 산귀신이 사람을 잡아먹고 전염병을 일으키는 것으로 여겨 많은 사람들의 고민거리가 되었다. 일명 ‘니엔(年)’이라 불린 이 산귀신이 폭죽소리를 무서워했기 때문에 대나무를 태워 산귀신을 좇는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대나무가 터지며 나는 소리라고 하여 ‘빠오쥬(爆竹)’ 라 불렸던 액막이 방법은 이후 대나무통에 화약을 넣어 터뜨리는 방법이 활용되면서 보편화되었고, 이후 결혼식과 같은 즐거운 일이 있을 때 액을 막는 한 방법으로 정착되었다.
한편 정초에 행하는 액막이 행위 중에 ‘츈리엔(春聯)’이란 습속이 있다.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의하면 ‘입춘 날에는 봄에 합당한 글자를 써서 문에 붙인다’라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보아 츈리엔을 붙이는 행위가 민간인들 사이에 폭 넓게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문에 붙이는 글자로는 귀신을 쫓는 신(神)인 션다(神茶), 위레이(鬱壘)와 복숭아나무로 만든 타오푸(桃符)등을 활용하였고, 그림으로는 닭과 호랑이를 그려 액이 물러나기를 빌었다.
2) 위엔시아오지에(元宵節)
위엔시아오지에는 음력 정월 15일로 ‘上元節’, ‘元夜’, ‘元宵節’ 등으로 불렸으며 위엔시아오지에(元宵節)날 ‘등(燈)’을 밝히는 풍습이 있어 ‘燈節’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원나라 위엔시아오카이(袁世凱)가 민정을 시찰하던 중 백성들이 ‘元宵, 元宵’하는 소리를 내었는데 위엔시아오카이는 이것을 ‘袁宵, 袁宵(원세개는 멸망할 것이다)’라고 표현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元宵’라는 칭호를 금지하고 ‘湯圓’으로 바꾸었다.
위엔시아오지에(元宵節)에 등을 거리에 밝히는 풍속은 언제부터 유래된 것일까? 여기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에 션으어(神鵝)라는 새가 인간세계에 왔다가 사냥꾼이 쏜 화살에 맞아 부상을 당했다. 옥황상제는 격노하여 정월 15일에 인간세계에 천병(天兵)을 파견하여 불로 벌을 내리라고 하였다. 이 때 천상세계에 있던 착한 선녀가 이 소식을 인간들에게 전해 주었고 인간들은 옥황상제에 대항할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다. 정월 14,5일 전후 3일 동안 집집마다 문 앞에 홍등을 밝히고 불꽃놀이를 하였다. 천병들이 인간세계에 불을 놓기 위해 천상세계를 열고 인간계를 보니 곳곳에 불이 지펴져 있는 것을 보고 옥황상제에게 임무를 마쳤다고 보고하였다. 정월보름 날 등불을 밝히고 폭죽놀이를 하는 것은 그 날의 승리를 기념하고 인간세계를 도와준 선녀에게 감사하다는 마음의 표시를 하기 위해서였다.4)
위엔시아오지에(元宵節)에 등을 밝히고 달맞이하는 풍속을 백성들이 좋게 여겼기 때문에 당나라에서는 정월 보름날 전후 하루씩 통금을 완화하는 放夜를 시행하였다. 옹낙(雍洛)의 『영이록(靈異錄)』에 의하면 ‘당나라에서 정월 보름날 밤을 중심으로 한 전후 3일 저녁을 야행하도록 했더니 남녀들의 놀러 다니는 거마(車馬)가 길을 메웠다’라고 전하고 있고, 육계굉의 북경세화기(北京歲華記)에 ‘정월 보름날 밤에 부녀자들이 모두 집에서 나와 거리를 거닐었다’라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보아 위엔시아오지에(元宵節)에 행해진 답교(踏橋)놀이는 시대를 막론하고 오랫동안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다리 밟기가 민중들의 습속으로 가리 잡게 된 데는 정월 보름날 다리를 밟으면 모든 병을 물리칠 수 있다는 조우바이삥(走百病), 즉 액막이(度厄)에 대한 믿음과 소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된다.
3) 한스으(寒食)
한스으(寒食)란 한자어에서 알 수 있듯이 차가운 밥을 먹는 날이다. 그렇다면 한식날 왜 불을 피우지 않고 차가운 식사를 하게 됐을까? 이러한 한스으(寒食)의 기원은 중국 진(晋)나라의 충신 찌에투이(介子推)의 혼령을 위로하고자 하는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晋나라 문공(文公)이 공자로 있던 시절 아버지 헌공(獻公)에게 추방당하여 국외에서 생활하던 중 궁핍한 생활로 인해 문공이 병이 들자 찌에투이(介子推)는 자신의 다리 살을 베어 문공을 살려냈다. 이후 문공이 그의 의형인 진(秦)나라 목공(穆公)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른 후 현신(賢臣)을 등용하고 상을 내리는 과정에서 찌에투이(介子推)를 잊고 상을 내리지 않았다. 실망한 찌에투이(介子推)는 어머니와 함께 면산(綿山)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였다. 이후 이 사실을 알게 된 晋文公은 찌에투이(介子推)를 할고봉군(割股奉君)의 현신(賢臣)이라 칭하고 사람을 보내 찾아오도록 했다. 끝내 찌에투이(介子推)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진문공은 찌에투이(介子推) 가 효자인 만큼 산에 불을 지르면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산에서 내려올 것으로 생각하고 불을 질렀다. 그러나 찌에투이(介子推)는 끝내 나오지 않고 어머니와 함께 버드나무 아래에서 불에 타 죽었다.5)
이후 중국인들은 찌에투이(介子推)를 기리기 위해서 매년 칭밍지에 전날 불을 피우지 않고 차가운 음식을 먹었으며 문에 버드나무를 꽂는 풍속이 생겨나게 되었다.
또 다른 설로는 한스으(寒食)의 풍속을 고대의 종교적 의미로 파악하여 매년 봄에 신화(神火)를 만들어 쓸 때에 구화(舊火)를 일 체 금하던 예속(禮俗)에서 나온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6)
그렇다면 한스으(寒食)날 찬밥을 먹는 것은 신구화의 교체기에서 비롯될 수밖에 없었던 의식적 행사를 찌에투이(介子推)의 고사와 연계시켜 중국인들 사이에 구전되어 온 것으로 보는 것이 보다 더 설득력 있는 설명이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한스으(寒食)날 조상의 묘를 다듬고 제사지내는 풍속은 당나라 현종 개원(開元)년간에 칙령으로 한스으(寒食)날 산소에 오르는 것을 하락하면서부터 비롯되었다. 당나라 정정칙(鄭正則)의 「사향의(祠享依)」에 ‘옛날에는 산소에서 제사 지내는 기록이 없었는데 쿵쯔(孔子)가 묘를 바라보며 때에 따라 제사 지내는 것을 허락했으므로 묘제(墓祭)가 여기에서부터 비롯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한스으(寒食)절 날 조상의 묘에 제사 지내는 풍속은 후대에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4) 칭밍지에(淸明節)
24절기의 하나로 동지 이후 106일째 되는 날로서 양력 4월 5일 전후가 된다.
칭밍지에(淸明節)에 중국인들은 교외에 나가 즐거운 한 때를 보내는데 이를 ‘답청(踏靑)’이라 한다. 칭밍지에(淸明節)은 한스으(寒食)절과 거의 붙어있는 관계로 조상의 묘에 성묘하는 풍속이 비슷하게 전해져 오고 있다.
옛날에는 한스으(寒食)절과 같은 날 이거나 아니면 전날인 칭밍지에(淸明節)에 느릅나무와 버드나무로 불을 일으켜 각 관청에 나누어주었고 이러한 의식은 주대에서 비롯되어 당송(唐宋)까지 계속 계승되어 왔다. 주례(周禮) 권 30 사관조에 봄에는 느릅나무와 버드나무에서 불을 얻고, 여름에는 대추나무와 은행나무, 늦은 여름에는 뽕나무와 석류나무, 가을에는 갈참나무와 도토리나무, 겨울에는 느티나무와 박달나무에서 불을 취한다7)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보아 칭밍지에(淸明節)의 불(火)의 제공은 누대부터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5) 뚜안우지에(端午節)
음력 5월 5일로서 ‘중우(重午)’, ‘뚜안양(端陽)’, ‘티엔중지에(天中節)’ 등으로 불려졌다. 뚜안(端)은 초(初)의 뜻이고, 우(午)는 옛날 우(五)와 상통하던 글자이니 뚜안우(端午)는 ‘초닷새’라는 뜻이 된다. 重午도 五가 겹치는 5월 5일을 뜻하므로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8)
완서잡기(宛暑雜記)에 의하면 ‘연도(燕都-북경)에서는 5월 1일부터 5일까지 작은 아씨들이 모양을 내어 아주 예쁘고, 이미 출가한 여자도 친정에 근친을 가므로 이 날을 여아절(女兒節)이라 한다’라고 하였고, 대대례(大戴禮)에 ‘五월五일에 축란(蓄蘭-창포)으로 목욕한다.’고 했으며, 세시잡기(歲時雜記)에 ‘뚜안우지에(端午節)에 창포와 쑥을 다듬어 작은 인형이나 혹 호로(葫蘆)의 모양을 만들어 차는 것은 액을 물리치기 위함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는 점을 보아 중국인들이 뚜안우지에(端午節)에 창포에 목욕하고 꾸미는 풍속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음력 5월이 되면 더위가 시작되어 음식이 부패하고 전염병이 창궐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재액을 막기 위해 대문에 창포를 꼽고 호로를 사용하는 풍속이 생겨나게 되었다. 뚜안우지에(端午節)날 쫑쯔를 먹는 풍습은 긿긿 투신하여 죽어서 세상의 모범이 되고 자살로써 간(諫) 하겠다는 결의를 밝힌 취위엔(屈原)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초(楚)나라 회왕(懷王)의 충신이었던 취위엔(屈原)은 제(齊)나라와 동맹하여 강국인 진(秦)나라에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진나라의 장의(張儀)와 내통하였던 정적과 왕의 애첩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축출되었다. 이후 왕이 진나라에서 객사하였고 뒤를 이어 경양왕(頃襄王)이 즉위하였을 때 아버지 죽음에 책임이 있는 재상 자란(子蘭)을 비난하다 추방되어 비분함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였다. 단오절 날 강에 용선(龍船)을 띄우고 북을 치며 쫑쯔를 던지는 것은 물고기들이 취위엔(屈原)의 시신을 먹지 못하도록 하려는 데서 비롯된 풍속이라 할 수 있다.
6) 중추지에(仲秋節)
음력 8월 15일로 중국에서도 중추절은 그리 큰 명절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당대(唐代) 중추지에날 달을 보는 풍속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흥미가 적어서 한스으(寒食)이나 뚜안우(端午)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송대(宋代)에는 당보다 성대히 치러졌으나 사부(祠部)의 축일(祝日) 휴가에 입추, 칠석, 중양(9.9)은 있으나 중추지에은 빠져 있는 것으로 보아 축일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뚜안우에 1일 휴가가 있었으니 중추는 뚜안우보다도 쓸쓸한 명절이였다고 할 수 있다.
전통시대 중국에서는 달을 표시할 때 1,2,3월로 표시하지 않고 春, 夏, 秋, 冬 사시 앞에 孟, 仲, 季를 붙여 1월을 孟春, 2월을 仲春, 3월을 季春이라고 불렀다. 7, 8, 9월의 경우 孟秋, 仲秋, 季秋라 불렀기 때문에 8월을 중추라 불렀고, 음력 8월 15일을 仲秋節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중추지에 날 중국인들은 달맞이를 하고 月餠(위에삥)을 먹으면서 한 해의 소원을 빌고 가족들의 우의를 다지기도 하였다.
1) 춘지에(春節)
춘지에(春節)는 음력 1월1일로 고대에는 ‘위엔단(元旦)’, ‘위엔르(元日)’, ‘위엔차오(元朝)’, ‘정단(正旦)’, ‘신정(新正)’ 등으로 불려졌고 민간에서는 ‘구워니엔(過年)’, ‘구워신니엔(過新年)’ 이라 칭했으며 정월(正月) 초하루를 ‘1년의 으뜸이요, 1월의 첫날이요, 時의 시작이다’라고 하여 “싼위엔(三元)”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춘절의 이칭(異稱)으로 사용된 ‘元日’에서의 ‘元’은 개시한다는 의미로 ‘元日’은 첫날을 의미한다. 또한 ‘朝’와 ‘旦’은 새벽을 뜻하는 글자로 하루의 시작을 함축하고 있고 ‘正’은 표준, 즉 준칙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고대에는 초저녁에 북두칠성이 떠 있는 위치가 계절의 정확한 표준방위가 된다고 하여 斗建 혹은 同建 이라 칭한 것처럼 ‘正旦’의 의미는 1년의 기준이 되는 새벽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元日’은 주로 先秦時期에 주로 사용되었던 춘절명칭이고 西漢時期에 이르러서는 ‘三朝’, ‘正月’, ‘正旦’이라 불려졌으며 현재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新正’, ‘元旦’ 이라는 명칭은 위진남북조시대에 처음 사용되었던 것이 明代까지 지속적으로 불리워지다가 청대에 이르러 ‘元旦’으로 통일되었다.
그렇다면 春節이란 용어는 언제부터 사용되었을까? 동한의 문헌에 따르면 춘절이란 용어가 사용되고 있었으나 봄을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춘절과 관련이 없으며, 남송 文天祥이 기록한 ≪文山集≫ 권 20에 기록된 <二十四日>이란 詩에 ‘춘절 전 3일을 강남에서는 小年이라 한다’라고 하여 춘절이란 표현이 있으나 이 또한 입춘을 나타내고 있어 음력 1월 1일과는 관련성이 없다. ‘춘절’이란 용어가 중국인 사이에 보편적으로 사용되게 된 계기는 1912년 1월 2일 손중산(孫中山)이 각 성에 보낸 통지문에서 ‘중화민국은 양력을 사용하되 황제기원 4691년 11월 13일을 중화민국 元年 元旦으로 한다’라고 선언하였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 1949년 12월 23일 개최된 12차 정무회의에서 ‘신년(公曆元旦)’, ‘春節’, ‘勞動節’, ‘國境紀念日’을 제정함에 따라 ‘元旦’은 양력 1월 1일을, 그리고 춘절은 정월 초하루를 지칭하게 되었다.1)
춘절 전날 밤을 ‘츄시(除夕)’라 불렀는데 상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단오(5.5), 중추(8.15), 제석(12.30)을 1년 중 3대 중요한 장부결산 날로 삼아 손익의 실태를 조사한 후 다음 해를 계획하는 중요한 절목으로 생각했다.2)
제석날 밤에 가족들이 둘러앉아 밤을 지새며 즐기는 것을 ‘쇼우쑤이(守歲)’라 하였고, 자정 무렵이 되면 폭죽을 터뜨리면서 액막이 놀이를 하였다. 초하룻날 폭죽을 터트리는 풍속은 중국 민간신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중국인들은 초자연적 존재, 즉 신(神), 귀(鬼), 조상들이 인간을 초월하는 능력을 가지고서 이승의 인생에 간섭할 수 있다고 여겼다.3)
이에 돌아가신 조상을 섬겨 복을 받고자 하였고, 신령의 호감을 사서 악의를 품지 못하도록 하고자 하였다. 중국인들은 귀를 악의에 찬 영혼으로 보았기 문에 경멸의 대상으로 여겼다.
고대 중국인들은 산귀신이 사람을 잡아먹고 전염병을 일으키는 것으로 여겨 많은 사람들의 고민거리가 되었다. 일명 ‘니엔(年)’이라 불린 이 산귀신이 폭죽소리를 무서워했기 때문에 대나무를 태워 산귀신을 좇는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대나무가 터지며 나는 소리라고 하여 ‘빠오쥬(爆竹)’ 라 불렸던 액막이 방법은 이후 대나무통에 화약을 넣어 터뜨리는 방법이 활용되면서 보편화되었고, 이후 결혼식과 같은 즐거운 일이 있을 때 액을 막는 한 방법으로 정착되었다.
한편 정초에 행하는 액막이 행위 중에 ‘츈리엔(春聯)’이란 습속이 있다.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의하면 ‘입춘 날에는 봄에 합당한 글자를 써서 문에 붙인다’라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보아 츈리엔을 붙이는 행위가 민간인들 사이에 폭 넓게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문에 붙이는 글자로는 귀신을 쫓는 신(神)인 션다(神茶), 위레이(鬱壘)와 복숭아나무로 만든 타오푸(桃符)등을 활용하였고, 그림으로는 닭과 호랑이를 그려 액이 물러나기를 빌었다.
2) 위엔시아오지에(元宵節)
위엔시아오지에는 음력 정월 15일로 ‘上元節’, ‘元夜’, ‘元宵節’ 등으로 불렸으며 위엔시아오지에(元宵節)날 ‘등(燈)’을 밝히는 풍습이 있어 ‘燈節’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원나라 위엔시아오카이(袁世凱)가 민정을 시찰하던 중 백성들이 ‘元宵, 元宵’하는 소리를 내었는데 위엔시아오카이는 이것을 ‘袁宵, 袁宵(원세개는 멸망할 것이다)’라고 표현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元宵’라는 칭호를 금지하고 ‘湯圓’으로 바꾸었다.
위엔시아오지에(元宵節)에 등을 거리에 밝히는 풍속은 언제부터 유래된 것일까? 여기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에 션으어(神鵝)라는 새가 인간세계에 왔다가 사냥꾼이 쏜 화살에 맞아 부상을 당했다. 옥황상제는 격노하여 정월 15일에 인간세계에 천병(天兵)을 파견하여 불로 벌을 내리라고 하였다. 이 때 천상세계에 있던 착한 선녀가 이 소식을 인간들에게 전해 주었고 인간들은 옥황상제에 대항할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다. 정월 14,5일 전후 3일 동안 집집마다 문 앞에 홍등을 밝히고 불꽃놀이를 하였다. 천병들이 인간세계에 불을 놓기 위해 천상세계를 열고 인간계를 보니 곳곳에 불이 지펴져 있는 것을 보고 옥황상제에게 임무를 마쳤다고 보고하였다. 정월보름 날 등불을 밝히고 폭죽놀이를 하는 것은 그 날의 승리를 기념하고 인간세계를 도와준 선녀에게 감사하다는 마음의 표시를 하기 위해서였다.4)
위엔시아오지에(元宵節)에 등을 밝히고 달맞이하는 풍속을 백성들이 좋게 여겼기 때문에 당나라에서는 정월 보름날 전후 하루씩 통금을 완화하는 放夜를 시행하였다. 옹낙(雍洛)의 『영이록(靈異錄)』에 의하면 ‘당나라에서 정월 보름날 밤을 중심으로 한 전후 3일 저녁을 야행하도록 했더니 남녀들의 놀러 다니는 거마(車馬)가 길을 메웠다’라고 전하고 있고, 육계굉의 북경세화기(北京歲華記)에 ‘정월 보름날 밤에 부녀자들이 모두 집에서 나와 거리를 거닐었다’라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보아 위엔시아오지에(元宵節)에 행해진 답교(踏橋)놀이는 시대를 막론하고 오랫동안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다리 밟기가 민중들의 습속으로 가리 잡게 된 데는 정월 보름날 다리를 밟으면 모든 병을 물리칠 수 있다는 조우바이삥(走百病), 즉 액막이(度厄)에 대한 믿음과 소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된다.
3) 한스으(寒食)
한스으(寒食)란 한자어에서 알 수 있듯이 차가운 밥을 먹는 날이다. 그렇다면 한식날 왜 불을 피우지 않고 차가운 식사를 하게 됐을까? 이러한 한스으(寒食)의 기원은 중국 진(晋)나라의 충신 찌에투이(介子推)의 혼령을 위로하고자 하는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晋나라 문공(文公)이 공자로 있던 시절 아버지 헌공(獻公)에게 추방당하여 국외에서 생활하던 중 궁핍한 생활로 인해 문공이 병이 들자 찌에투이(介子推)는 자신의 다리 살을 베어 문공을 살려냈다. 이후 문공이 그의 의형인 진(秦)나라 목공(穆公)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른 후 현신(賢臣)을 등용하고 상을 내리는 과정에서 찌에투이(介子推)를 잊고 상을 내리지 않았다. 실망한 찌에투이(介子推)는 어머니와 함께 면산(綿山)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였다. 이후 이 사실을 알게 된 晋文公은 찌에투이(介子推)를 할고봉군(割股奉君)의 현신(賢臣)이라 칭하고 사람을 보내 찾아오도록 했다. 끝내 찌에투이(介子推)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진문공은 찌에투이(介子推) 가 효자인 만큼 산에 불을 지르면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산에서 내려올 것으로 생각하고 불을 질렀다. 그러나 찌에투이(介子推)는 끝내 나오지 않고 어머니와 함께 버드나무 아래에서 불에 타 죽었다.5)
이후 중국인들은 찌에투이(介子推)를 기리기 위해서 매년 칭밍지에 전날 불을 피우지 않고 차가운 음식을 먹었으며 문에 버드나무를 꽂는 풍속이 생겨나게 되었다.
또 다른 설로는 한스으(寒食)의 풍속을 고대의 종교적 의미로 파악하여 매년 봄에 신화(神火)를 만들어 쓸 때에 구화(舊火)를 일 체 금하던 예속(禮俗)에서 나온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6)
그렇다면 한스으(寒食)날 찬밥을 먹는 것은 신구화의 교체기에서 비롯될 수밖에 없었던 의식적 행사를 찌에투이(介子推)의 고사와 연계시켜 중국인들 사이에 구전되어 온 것으로 보는 것이 보다 더 설득력 있는 설명이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한스으(寒食)날 조상의 묘를 다듬고 제사지내는 풍속은 당나라 현종 개원(開元)년간에 칙령으로 한스으(寒食)날 산소에 오르는 것을 하락하면서부터 비롯되었다. 당나라 정정칙(鄭正則)의 「사향의(祠享依)」에 ‘옛날에는 산소에서 제사 지내는 기록이 없었는데 쿵쯔(孔子)가 묘를 바라보며 때에 따라 제사 지내는 것을 허락했으므로 묘제(墓祭)가 여기에서부터 비롯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한스으(寒食)절 날 조상의 묘에 제사 지내는 풍속은 후대에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4) 칭밍지에(淸明節)
24절기의 하나로 동지 이후 106일째 되는 날로서 양력 4월 5일 전후가 된다.
칭밍지에(淸明節)에 중국인들은 교외에 나가 즐거운 한 때를 보내는데 이를 ‘답청(踏靑)’이라 한다. 칭밍지에(淸明節)은 한스으(寒食)절과 거의 붙어있는 관계로 조상의 묘에 성묘하는 풍속이 비슷하게 전해져 오고 있다.
옛날에는 한스으(寒食)절과 같은 날 이거나 아니면 전날인 칭밍지에(淸明節)에 느릅나무와 버드나무로 불을 일으켜 각 관청에 나누어주었고 이러한 의식은 주대에서 비롯되어 당송(唐宋)까지 계속 계승되어 왔다. 주례(周禮) 권 30 사관조에 봄에는 느릅나무와 버드나무에서 불을 얻고, 여름에는 대추나무와 은행나무, 늦은 여름에는 뽕나무와 석류나무, 가을에는 갈참나무와 도토리나무, 겨울에는 느티나무와 박달나무에서 불을 취한다7)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보아 칭밍지에(淸明節)의 불(火)의 제공은 누대부터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5) 뚜안우지에(端午節)
음력 5월 5일로서 ‘중우(重午)’, ‘뚜안양(端陽)’, ‘티엔중지에(天中節)’ 등으로 불려졌다. 뚜안(端)은 초(初)의 뜻이고, 우(午)는 옛날 우(五)와 상통하던 글자이니 뚜안우(端午)는 ‘초닷새’라는 뜻이 된다. 重午도 五가 겹치는 5월 5일을 뜻하므로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8)
완서잡기(宛暑雜記)에 의하면 ‘연도(燕都-북경)에서는 5월 1일부터 5일까지 작은 아씨들이 모양을 내어 아주 예쁘고, 이미 출가한 여자도 친정에 근친을 가므로 이 날을 여아절(女兒節)이라 한다’라고 하였고, 대대례(大戴禮)에 ‘五월五일에 축란(蓄蘭-창포)으로 목욕한다.’고 했으며, 세시잡기(歲時雜記)에 ‘뚜안우지에(端午節)에 창포와 쑥을 다듬어 작은 인형이나 혹 호로(葫蘆)의 모양을 만들어 차는 것은 액을 물리치기 위함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는 점을 보아 중국인들이 뚜안우지에(端午節)에 창포에 목욕하고 꾸미는 풍속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음력 5월이 되면 더위가 시작되어 음식이 부패하고 전염병이 창궐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재액을 막기 위해 대문에 창포를 꼽고 호로를 사용하는 풍속이 생겨나게 되었다. 뚜안우지에(端午節)날 쫑쯔를 먹는 풍습은 긿긿 투신하여 죽어서 세상의 모범이 되고 자살로써 간(諫) 하겠다는 결의를 밝힌 취위엔(屈原)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초(楚)나라 회왕(懷王)의 충신이었던 취위엔(屈原)은 제(齊)나라와 동맹하여 강국인 진(秦)나라에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진나라의 장의(張儀)와 내통하였던 정적과 왕의 애첩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축출되었다. 이후 왕이 진나라에서 객사하였고 뒤를 이어 경양왕(頃襄王)이 즉위하였을 때 아버지 죽음에 책임이 있는 재상 자란(子蘭)을 비난하다 추방되어 비분함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였다. 단오절 날 강에 용선(龍船)을 띄우고 북을 치며 쫑쯔를 던지는 것은 물고기들이 취위엔(屈原)의 시신을 먹지 못하도록 하려는 데서 비롯된 풍속이라 할 수 있다.
6) 중추지에(仲秋節)
음력 8월 15일로 중국에서도 중추절은 그리 큰 명절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당대(唐代) 중추지에날 달을 보는 풍속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흥미가 적어서 한스으(寒食)이나 뚜안우(端午)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송대(宋代)에는 당보다 성대히 치러졌으나 사부(祠部)의 축일(祝日) 휴가에 입추, 칠석, 중양(9.9)은 있으나 중추지에은 빠져 있는 것으로 보아 축일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뚜안우에 1일 휴가가 있었으니 중추는 뚜안우보다도 쓸쓸한 명절이였다고 할 수 있다.
전통시대 중국에서는 달을 표시할 때 1,2,3월로 표시하지 않고 春, 夏, 秋, 冬 사시 앞에 孟, 仲, 季를 붙여 1월을 孟春, 2월을 仲春, 3월을 季春이라고 불렀다. 7, 8, 9월의 경우 孟秋, 仲秋, 季秋라 불렀기 때문에 8월을 중추라 불렀고, 음력 8월 15일을 仲秋節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중추지에 날 중국인들은 달맞이를 하고 月餠(위에삥)을 먹으면서 한 해의 소원을 빌고 가족들의 우의를 다지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