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 학파 창시동의어 중국의 전통 문화를 집대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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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15-11-02 10:03|본문
유가 학파 창시동의어 중국의 전통 문화를 집대성하다
춘추 시대 공자에게서 비롯된 유가 사상은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중국의 사회, 사상, 정치, 문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사상이다. 춘추 시대 제자백가 중 가장 먼저 성립되었으며, 전국 시대의 맹자가 대표적인 사상가이다.
공자는 노(魯)나라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조상은 송(宋)나라의 몰락한 귀족이었다. 그는 조실부모했지만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었으며, 17세에 노나라의 말단 관리 신분으로 《시경(詩經)》과 《서경(書經)》, 《예(禮)》를 익혀 서주 시대 문화에 접근했다.
공자는 청년 시절부터 주 무왕의 조카로 성왕을 도와 주나라의 기틀을 세운 주공을 이상적인 인물로 삼았고, 동주의 수도 낙읍에서 유학하며 서주 시대의 문화를 경험했다. 그는 30대에 이르러 학문에 큰 진전을 보였으며, 노나라의 수도 곡부에서 사학(私學)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귀족 자제들만이 교육을 받을 수 있었는데, 공자는 귀천을 가리지 않고 누구든 공평하게 교육시켰다. 이때 문하생으로는 자로, 증점, 염백우, 염구, 중궁 등이 있다.
공자는 당시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삼환(三桓), 즉 계손, 숙손, 맹손 등의 공격을 받아 노 소공이 제나라로 쫓겨나자 소공과 함께 제나라로 향했다. 그는 제나라 경공과 함께 음악을 논하는 한편, 정치를 묻는 경공에게 정명주의(正名主義)를 강조했다. 정명주의는 각자가 자신의 신분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공자의 주장은 제나라 대부 안영의 반대에 부딪혀 실행되지 못했으며, 이에 공자는 다시 노나라로 돌아왔다.
노나라로 귀국한 공자는 중도(中都)의 지방관으로 임명되어 1년 만에 그곳의 질서와 예의, 윤리의 기틀을 마련했고, 점차 인망이 높아지자 기원전 500년에는 대사구(大司寇, 지금의 최고법관)가 되었다. 그리고 노나라와 제나라의 협곡(夾谷) 회담에 참석해 과거 제나라에게 뺏겼던 문수(汶水) 북부 일대의 땅을 돌려받았다. 그러나 공자의 관직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공자는 노나라의 왕권 회복을 위해 삼환 타도를 주장하면서 삼환과 대립했다. 당시 노나라에서는 제례 의식을 치르고 제사에 사용된 고기를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어 신하를 예우했다. 그런데 공자는 삼환의 농락으로 고기를 하사받지 못했고, 이에 그는 관직을 버리고 노나라를 떠날 결심을 했다.
원본사이즈보기 공자 공자는 서주 시대를 이상적인 시대로 생각하고 여러 나라를 유랑했으나 그의 정치 이념을 받아들여 주는 곳이 없었다.
노나라를 떠난 공자는 몇몇 제자들과 함께 위, 송, 조, 정, 진, 채 등 여러 나라를 유랑했다. 그는 자신의 정치 이념을 실현시켜 줄 군주를 찾았으나, 부국강병을 제일의 목표로 삼던 춘추 시대와 그의 사상은 맞지 않았다. 결국 10년이 넘는 세월을 떠돌던 그는 다시 노나라로 돌아와 제자 육성과 저술에 전념했다. 그는 고전을 바탕으로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자신의 관점에 따라 《역경(易經)》, 《서경》, 《시경》, 《예기》, 《춘추(春秋)》, 《악기》 등을 정리했다.
공자는 주공이 살았던 서주 시대를 이상적인 시대로 생각했다. 따라서 서주 시대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실현 방법으로 정명을 내세웠다. 정명은 계층 간의 직분과 한계를 명확히 한 것으로, 사회 구성원들이 직책과 직분에 충실하면 사회 제도와 조직은 순조롭게 운영된다고 보았다. 이렇게 형성된 질서는 반드시 도덕적 관념 인(仁), 즉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기초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그는 신분의 귀천을 따지지 말고, 교육을 통해 도덕적 인의 완성자인 군자(君子)를 길러 낼 것을 주장했다. 결국 공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도덕 철학은 인이었으며, 공자가 주장한 예(禮), 효(孝), 제(悌), 충(忠) 등 나머지 덕목들은 인의 실천 방법이었다.
" src="http://t1.daumcdn.net/thumb/R500x0/?fname=http%3A%2F%2Ft1.daumcdn.net%2Fencyclop%2Fm63%2FociyVxDjex6tNmncqgb5zIFTAyGoCmLinFuGuGbZ%3Ft%3D1440130202000%3Ft%3D1446429600000" width="500" height="386"> 원본사이즈보기 <효경도> 《효경》은 효도에 관하여 공자가 한 말을 기록한 책이다.
공자의 사상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그의 사상은 수많은 제자들에게 전해졌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공자는 3천여 명의 제자를 가르쳤으며, 그중 우수한 제자가 72명이었다고 한다. 특히 덕행에서는 안회, 민자건, 염백우, 중궁, 언어에서는 재아, 자공, 정사에는 염유, 자로, 고대 문헌에서는 자유, 자하 등이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한편 이들은 공자가 죽고 난 후 모두 여덟 개의 파로 나누어졌다. 그중 증자를 우두머리로 하는 효 중시파와 자하를 우두머리로 하는 예 중시파가 중요했다. 이후 공자의 사상은 전국 시대에 맹자와 순자로 이어진다.
전국 시대는 오직 강한 국력을 가진 나라만이 계속되는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시대로, 당시 유가는 크게 빛을 보지 못했다. 유가가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은 맹자가 뛰어난 언변으로 공자 사상을 전파한 후부터였다. 그리하여 맹자는 공자 다음 가는 성인을 의미하는 '아성(亞聖)'의 자리에 올랐다.
맹자는 전국 시대 추나라 출신으로, 노나라 공족 맹손씨의 후예이다. 그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단기지계(斷機之戒)로 유명해진 어머니 예(倪)씨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후 공자의 제자이며 《중용(中庸)》의 저자인 자사의 제자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공자의 인 사상을 계승했으며, 공자가 제시하지 못한 인을 실천하는 근거를 '성선(性善)'에서 찾았다. 즉 인간의 성품은 나면서부터 착하며, 인간 본성에는 네 가지 마음씨가 있다고 했다. 이것을 사단(四端)이라 하며, 측은지심(惻隱之心, 불쌍히 여기는 마음), 수오지심(羞惡之心,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 사양지심(辭讓之心, 양보하는 마음), 시비지심(是非之心, 잘잘못을 아는 마음)이 있다. 그는 이러한 사단을 자각하고 충실하게 이행하는 것이 인의예지의 시작이라고 보았다.
특히 맹자는 인 사상이 정치에 실현되면 왕도 정치가 성립된다고 강조했다. 이는 당시 전국 시대에 유행하던 무력 및 권모술수를 통한 패도 정치와 대립되는 개념이었다. 왕도 정치는 군주의 도덕적 실천에 의지하며, 구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백성을 기르는 양민, 백성을 가르치는 교민을 주장했다. 구체적인 정책으로는 정전제, 학교 교육, 농사철 보호 등을 제시했다. 또한 맹자는 민본을 정치의 근본으로 여기고, 백성들을 위하는 정치를 펼치지 못한다면 군주 방벌도 가능하다고 했다. 이는 역성혁명을 인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혁신적 사고였다.
원본사이즈보기 1989년 발행된 공자 우표 공자 탄생 2,540주년을 맞아 중국에서 발행된 우표. 공자와 그의 사상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맹자가 공자의 인 사상을 계승했다면, 전국 시대 순자는 공자의 예를 중시한 자하파를 이었다. 그러나 순자는 자유와 자하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사상은 유가를 따르면서도, 유가와 다른 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맹자의 성선설과 정반대의 개념인 성악설을 주장한다는 점이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지니고 있는 인간의 본성에는 악과 욕망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것을 제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하여 그는 교육을 강조했다. 또한 인간은 무리를 형성하므로 각자의 본분을 지키지 않으면 분쟁이 생긴다고 보았다. 이렇듯 순자의 예는 공자의 예처럼 고정된 규범이 아니라 법적 강제력이 부여된 것이었기 때문에 기존 유가와 차이를 보였다. 이런 점 때문에 그의 문하에서 이사와 한비자 같은 법가들이 탄생했다.
유가는 시대에 따라 변화, 발전하며 중국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통일 국가가 등장하면서 통치자들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 데 사용되었고, 한나라 무제 때에는 유교(儒敎)로 승화되어 중국의 국교로 불렸을 정도였다. 중국 역사에서 도교나 불교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적도 있었으나, 통치 이념으로써 2,500여 년간 개인뿐만 아니라 중국 사회 전반에 막강한 역량을 발휘했다.
또한 유가는 중국의 전통 문화를 집대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중국 역대 시문학은 《시경》, 문물과 제도는 《예기》, 최초의 왕조부터 주나라까지의 역사는 《춘추》, 점복과 관련된 것은 《주역》 등의 유교 경전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유가는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주어 특히 조선은 유가를 바탕으로 정치, 사회, 법률, 학문, 문화 등을 이룩해 나갔다.
춘추 시대 공자에게서 비롯된 유가 사상은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중국의 사회, 사상, 정치, 문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사상이다. 춘추 시대 제자백가 중 가장 먼저 성립되었으며, 전국 시대의 맹자가 대표적인 사상가이다.
공자는 노(魯)나라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조상은 송(宋)나라의 몰락한 귀족이었다. 그는 조실부모했지만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었으며, 17세에 노나라의 말단 관리 신분으로 《시경(詩經)》과 《서경(書經)》, 《예(禮)》를 익혀 서주 시대 문화에 접근했다.
공자는 청년 시절부터 주 무왕의 조카로 성왕을 도와 주나라의 기틀을 세운 주공을 이상적인 인물로 삼았고, 동주의 수도 낙읍에서 유학하며 서주 시대의 문화를 경험했다. 그는 30대에 이르러 학문에 큰 진전을 보였으며, 노나라의 수도 곡부에서 사학(私學)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귀족 자제들만이 교육을 받을 수 있었는데, 공자는 귀천을 가리지 않고 누구든 공평하게 교육시켰다. 이때 문하생으로는 자로, 증점, 염백우, 염구, 중궁 등이 있다.
공자는 당시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삼환(三桓), 즉 계손, 숙손, 맹손 등의 공격을 받아 노 소공이 제나라로 쫓겨나자 소공과 함께 제나라로 향했다. 그는 제나라 경공과 함께 음악을 논하는 한편, 정치를 묻는 경공에게 정명주의(正名主義)를 강조했다. 정명주의는 각자가 자신의 신분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공자의 주장은 제나라 대부 안영의 반대에 부딪혀 실행되지 못했으며, 이에 공자는 다시 노나라로 돌아왔다.
노나라로 귀국한 공자는 중도(中都)의 지방관으로 임명되어 1년 만에 그곳의 질서와 예의, 윤리의 기틀을 마련했고, 점차 인망이 높아지자 기원전 500년에는 대사구(大司寇, 지금의 최고법관)가 되었다. 그리고 노나라와 제나라의 협곡(夾谷) 회담에 참석해 과거 제나라에게 뺏겼던 문수(汶水) 북부 일대의 땅을 돌려받았다. 그러나 공자의 관직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공자는 노나라의 왕권 회복을 위해 삼환 타도를 주장하면서 삼환과 대립했다. 당시 노나라에서는 제례 의식을 치르고 제사에 사용된 고기를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어 신하를 예우했다. 그런데 공자는 삼환의 농락으로 고기를 하사받지 못했고, 이에 그는 관직을 버리고 노나라를 떠날 결심을 했다.
원본사이즈보기 공자 공자는 서주 시대를 이상적인 시대로 생각하고 여러 나라를 유랑했으나 그의 정치 이념을 받아들여 주는 곳이 없었다.
노나라를 떠난 공자는 몇몇 제자들과 함께 위, 송, 조, 정, 진, 채 등 여러 나라를 유랑했다. 그는 자신의 정치 이념을 실현시켜 줄 군주를 찾았으나, 부국강병을 제일의 목표로 삼던 춘추 시대와 그의 사상은 맞지 않았다. 결국 10년이 넘는 세월을 떠돌던 그는 다시 노나라로 돌아와 제자 육성과 저술에 전념했다. 그는 고전을 바탕으로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자신의 관점에 따라 《역경(易經)》, 《서경》, 《시경》, 《예기》, 《춘추(春秋)》, 《악기》 등을 정리했다.
공자는 주공이 살았던 서주 시대를 이상적인 시대로 생각했다. 따라서 서주 시대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실현 방법으로 정명을 내세웠다. 정명은 계층 간의 직분과 한계를 명확히 한 것으로, 사회 구성원들이 직책과 직분에 충실하면 사회 제도와 조직은 순조롭게 운영된다고 보았다. 이렇게 형성된 질서는 반드시 도덕적 관념 인(仁), 즉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기초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그는 신분의 귀천을 따지지 말고, 교육을 통해 도덕적 인의 완성자인 군자(君子)를 길러 낼 것을 주장했다. 결국 공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도덕 철학은 인이었으며, 공자가 주장한 예(禮), 효(孝), 제(悌), 충(忠) 등 나머지 덕목들은 인의 실천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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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사상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그의 사상은 수많은 제자들에게 전해졌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공자는 3천여 명의 제자를 가르쳤으며, 그중 우수한 제자가 72명이었다고 한다. 특히 덕행에서는 안회, 민자건, 염백우, 중궁, 언어에서는 재아, 자공, 정사에는 염유, 자로, 고대 문헌에서는 자유, 자하 등이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한편 이들은 공자가 죽고 난 후 모두 여덟 개의 파로 나누어졌다. 그중 증자를 우두머리로 하는 효 중시파와 자하를 우두머리로 하는 예 중시파가 중요했다. 이후 공자의 사상은 전국 시대에 맹자와 순자로 이어진다.
전국 시대는 오직 강한 국력을 가진 나라만이 계속되는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시대로, 당시 유가는 크게 빛을 보지 못했다. 유가가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은 맹자가 뛰어난 언변으로 공자 사상을 전파한 후부터였다. 그리하여 맹자는 공자 다음 가는 성인을 의미하는 '아성(亞聖)'의 자리에 올랐다.
맹자는 전국 시대 추나라 출신으로, 노나라 공족 맹손씨의 후예이다. 그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단기지계(斷機之戒)로 유명해진 어머니 예(倪)씨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후 공자의 제자이며 《중용(中庸)》의 저자인 자사의 제자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공자의 인 사상을 계승했으며, 공자가 제시하지 못한 인을 실천하는 근거를 '성선(性善)'에서 찾았다. 즉 인간의 성품은 나면서부터 착하며, 인간 본성에는 네 가지 마음씨가 있다고 했다. 이것을 사단(四端)이라 하며, 측은지심(惻隱之心, 불쌍히 여기는 마음), 수오지심(羞惡之心,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 사양지심(辭讓之心, 양보하는 마음), 시비지심(是非之心, 잘잘못을 아는 마음)이 있다. 그는 이러한 사단을 자각하고 충실하게 이행하는 것이 인의예지의 시작이라고 보았다.
특히 맹자는 인 사상이 정치에 실현되면 왕도 정치가 성립된다고 강조했다. 이는 당시 전국 시대에 유행하던 무력 및 권모술수를 통한 패도 정치와 대립되는 개념이었다. 왕도 정치는 군주의 도덕적 실천에 의지하며, 구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백성을 기르는 양민, 백성을 가르치는 교민을 주장했다. 구체적인 정책으로는 정전제, 학교 교육, 농사철 보호 등을 제시했다. 또한 맹자는 민본을 정치의 근본으로 여기고, 백성들을 위하는 정치를 펼치지 못한다면 군주 방벌도 가능하다고 했다. 이는 역성혁명을 인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혁신적 사고였다.
원본사이즈보기 1989년 발행된 공자 우표 공자 탄생 2,540주년을 맞아 중국에서 발행된 우표. 공자와 그의 사상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맹자가 공자의 인 사상을 계승했다면, 전국 시대 순자는 공자의 예를 중시한 자하파를 이었다. 그러나 순자는 자유와 자하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사상은 유가를 따르면서도, 유가와 다른 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맹자의 성선설과 정반대의 개념인 성악설을 주장한다는 점이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지니고 있는 인간의 본성에는 악과 욕망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것을 제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하여 그는 교육을 강조했다. 또한 인간은 무리를 형성하므로 각자의 본분을 지키지 않으면 분쟁이 생긴다고 보았다. 이렇듯 순자의 예는 공자의 예처럼 고정된 규범이 아니라 법적 강제력이 부여된 것이었기 때문에 기존 유가와 차이를 보였다. 이런 점 때문에 그의 문하에서 이사와 한비자 같은 법가들이 탄생했다.
유가는 시대에 따라 변화, 발전하며 중국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통일 국가가 등장하면서 통치자들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 데 사용되었고, 한나라 무제 때에는 유교(儒敎)로 승화되어 중국의 국교로 불렸을 정도였다. 중국 역사에서 도교나 불교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적도 있었으나, 통치 이념으로써 2,500여 년간 개인뿐만 아니라 중국 사회 전반에 막강한 역량을 발휘했다.
또한 유가는 중국의 전통 문화를 집대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중국 역대 시문학은 《시경》, 문물과 제도는 《예기》, 최초의 왕조부터 주나라까지의 역사는 《춘추》, 점복과 관련된 것은 《주역》 등의 유교 경전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유가는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주어 특히 조선은 유가를 바탕으로 정치, 사회, 법률, 학문, 문화 등을 이룩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