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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고대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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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15-09-17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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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漢)

진(秦)에 이어지는 중국의 통일왕조(BC 202∼AD 220). 왕망(王莽)이 세운 신(新:8~22)나라에 의하여 잠시의 중단이 있어, 그 이전에 장안(長安)을 수도로 하였던 한을 전한(前漢:西漢), 뤄양[洛陽]에 재건된 한을 후한(後漢:東漢)이라고 한다.

 <역사의 개설>
한왕조의 창시자는 진말(秦末)의 반란 지도자의 한 사람인 유방(劉邦:高祖)이다. BC 206년 진이 타도되자 반란의 통일적 지도자 항우(項羽)는 그를 한왕(漢王)으로 봉하였으나, BC 202년에 항우를 타도하여 황제의 자리에 올라 장안을 수도로 하고 중국을 통일하였다. 한왕조는 기본적으로는 진(秦)나라의 국가체제를 계승하여 전국통치의 조직은 군현제를 기본으로 하였다. 그러나 한왕조의 수립은 진말의 난 이래의 여러 집단의 지도자와 유방 직속 부하들의 협력에 의한 것이어서, 유방은 이들 공신(功臣)과 그의 일족을 제후왕·열후(列侯)로서 각지에 봉건하였다. 한(漢)의 군현과 봉건 병치제도를 군국제(郡國制)라고 부르는데, 유방의 치세 중에 공신인 왕들은 모두 멸망하고, 왕은 결국 유씨 일족(劉氏一族) 출신자에 한하는 것이 한왕조의 정제(定制)가 되었다. 한나라의 봉국(封國)은 춘추시대 이전의 제후의 씨족적 결합을 기초로 한 읍(邑)과는 성질이 다르지만, 제후왕은 중앙관제와 유사한 관제를 가지며, 한대(漢代) 초기에는 자립적 경향이 있었다. 유방이 죽은 뒤 황후 여씨(呂氏)와 그 일족에 의한 궁정정치의 일시적 혼란이 있었으나, 문제(文帝)·경제(景帝)의 시기에 한왕조의 지배체제가 안정을 되찾게 되자 제후왕의 봉토삭감 정책이 취하여져, BC 154년에 일어난 오초 7국(吳楚七國)의 난 후에 경제는 제후왕의 세력을 삭감하였으며, 무제(武帝) 때 제후왕은 봉국에 대한 통치의 실권을 완전히 잃어 군국제는 내용면에서는 군현제와 똑같은 것이 되어, 한왕조의 중앙집권적 전제통치의 체제가 완성되었다. 한편, 무제 시대에 한제국은 대외적으로 크게 영토를 확대하였다. 북방의 흉노에 대하여 초기에는 유화정책을 취했으나, 여러 차례 원정을 실시하여 그 세력을 고비사막 이북으로 물리쳤다. 동방으로는 한반도에까지 진출하여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고, 또 남방으로도 출병하여 한나라의 영토는 안남에까지 미치어, 일남군(日南郡) 등의 9개군을 설치하였다. 서방에서는 장건(張騫)의 원정을 계기로 서역(西域) 제국을 복속시키고, 중국과 서방과의 교통로인 이른바 ‘실크로드’가 개척되었다. 이와 같이 무제의 치세는 사상 최대의 대제국이 건설된 전성기였으나, 반면에 제국(帝國)의 모순이 표면화하기도 하였다. 특히 대규모의 원정, 토목사업, 궁정의 사치 등으로 국가재정의 파탄을 초래하자 이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증세(增稅), 화폐제도의 개선, 소금·철·술의 전매제, 균수법(均輸法)·평준법(平準法)에 의한 상업관영(商業官營) 등의 재정정책이 취하여졌다. 이 정책은 재정의 불균형을 구하는 효과는 있었지만, 주로 농민에게 과중한 부담이 되어 사회적 모순이 심화되었다. 따라서 소제(昭帝)·선제(宣帝) 시대에는 지방통치를 중심으로 한 내정의 안정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한편, 무제의 장기에 걸친 독재적 통치기간 중에 3공(公)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정부 기관이 명목화하게 되고, 황제 측근자들이 정치의 실권을 잡는 경향이 생겼다. 특히 원제(元帝) 이후는 외척(外戚)·환관(宦官) 등 근신(近臣)이 항상 국정의 실권을 잡게 되어 궁정정치는 급속히 부패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외척(外戚) 왕망(王莽)이 8년에 평제(平帝)를 독살하고 제위(帝位)에 올라, 국호를 신(新)이라 하고 한왕조는 일단 멸망하였다. 왕망은 《주례(周禮)》에 기록된 이상화된 주나라의 여러 제도를 현실화하려는 공상적이며 졸속한 개혁을 단행하였으므로, 정치적·사회적 모순이 폭발하고, ‘적미(赤眉)’ 등의 농민집단과 호족(豪族) 세력의 반란에 의하여 재위 15년 만인 22년에 멸망하였다. 왕망 말기 반란의 지도자층 가운데서, 경제(景帝)의 6대 자손인 유수(劉秀)가 남양(南陽:河南) 호족연합의 지도자로서 두각을 나타내어, 농민 집단이나 호족의 자립세력을 평정하고, 25년 뤄양[洛陽]을 수도로 하여 후한(後漢)을 재건하였다. 그가 곧 광무제(光武帝)이며, 유교를 국교로서 확립시키고 군병(郡兵)을 폐지하는 등의 개혁으로 통일제국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한나라는 명제(明帝)의 치세부터 재차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취하여 북방으로는 북흉노를 압박하고, 화제(和帝) 때에는 한제국(漢帝國)의 지배권이 파미르고원을 넘어, 카스피해(海) 이동에 있는 동서 투르키스탄의 50여 개의 서역국가군(西域國家群)까지 확대되었다. 그러나 화제 이후의 황제는 어려서 즉위하였을 뿐만 아니라 단명하였으므로, 또다시 외척과 환관이 권력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경향에 대하여 기골 있는 관료나 학자의 일파가 환관의 권력 독점에 대한 비판을 전개하였지만, 두 번에 걸쳐 탄압을 당하였다. 그 사건을 ‘당고(黨錮)의 옥(獄)’이라 하며, 그 후 궁정정치는 혼란을 거듭하고 후한왕조는 소농층(小農層)의 몰락, 호족세력의 발전 등의 사회적·정치적 과제에 대처하는 통치 능력을 상실하였다. 호족은 전한시대부터 사회적 세력을 확대하고, 후한의 재건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므로 후한은 호족의 정권참가로써 지탱되고 있었다. 유교 국교화의 강화도 호족층이 자체결합의 근거를 유교에 구하였던 것과 관계가 있다. 그들은 효렴(孝廉) 등의 관리임용제도를 통하여 중앙관료에의 길을 확보하였으며, 지방에서는 소유지를 확대하여 소농층을 지배하에 편입하였다. 그 결과 황제통치의 기반인 농민층은 축소되고 호족층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이 감퇴되었다. 이와 같은 정치적·사회적 모순의 누적 끝에 일어난 것이 황건(黃巾)의 난으로서, 도교(道敎)의 시초인 태평도(太平道)의 주창자 장각(張角)이 수령이 되어, 184년 빈농을 중심으로 하는 대규모의 농민반란을 일으켰다. 황건의 난 진압과정에서, 각지에 정치적·군사적 자립세력이 호족세력과 결탁하여 급격히 성장하였다. 그 중의 한 사람인 원소(袁紹)가 궁정의 환관을 절멸시켰으나, 그 후로는 원소·동탁(董卓)·손책(孫策)·조조(曹操)·유비(劉備) 등의 군웅이 할거함으로써, 후한 제국은 완전히 분열되었다. 후한 최후의 황제인 헌제(獻帝)를 옹립하여 하북(河北)을 지배하던 조조의 아들 비(丕)는 220년, 헌제를 강박하여 제위를 물려받고, 위(魏)왕조를 창시함으로써 후한은 멸망하고, 3국시대가 시작되었다.

  <정치>
  한왕조는 진나라가 세운 황제의 직접통치에 의한 전제적 관료국가의 체제를 계승하였다. 따라서 중앙과 지방의 관제는 진제(秦制)를 답습하였다. 중앙관제로는 황제 밑에 3공(公)이 있어, 승상(丞相)은 황제를 보필하여 백관을 통솔하고, 태위(太尉)는 당시 상설의 관(官)은 아니었으나 군사를 담당하고, 어사대부(御史大夫)는 감찰관인 어사를 통솔하는 한편 부승상(副丞相)으로서 행정에도 참여하였다. 3공 밑에 중앙행정을 분담하는 관서로 태상(太常:禮儀祭祀)·광록훈(光祿勳:宮廷護衛)·위위(衛尉:宮門守備)·태복(太僕:帝室의 車馬管理)·정위(廷尉:司法)·대홍려(大鴻'A:諸侯 및 外國의 來朝)·대사농(大司農:국가재정)·종정(宗正:皇族關係)·소부(少府:帝室財政) 등 9시(寺)가 있었다. 9시의 장관을 구경(九卿)이라 하고, 집금오(執金吾:수도의 치안)·장작대장(將作大匠:토목공사)·대장추(大長秋:皇后職∇宮職)를 더하여 12경(卿)이라고도 불렀다. 군(郡)은 지방통치의 중심기관이었으며, 그 장관으로 태수(太守), 군사지휘관으로 위(尉)를 두었다. 태수 밑에 부관으로서 승(丞)이 있고, 수(守)·승(丞) 밑에 지방행정의 실무를 담당하는 공조(功曹)·연사(椽史) 등의 속관이 있었다. 공조는 그 지방의 호족 출신자가 임명되었으며, 지방행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군(郡)은 현을 통할하였으나, 현에도 영(令)·장(長)·위(尉)가 임명되고, 군과 똑같은 하부기구가 있었다. 현(縣)의 통할하에는 향(鄕)과 정(亭)이 있었으며, 향에는 유질(有秩)·색부(嗇夫)·유요(游)가 임명·파견되어, 호적·징세·요역(役) 등을 담당하고, 정에는 정장(亭長)이 있어 경찰업무를 담당하였다. 현·향·정은 성곽으로 둘러싸인 도읍으로서 공통의 성격을 가진 취락으로, 춘추시대 이전의 읍이 그 기원이 된 것이 많았으나, 진(秦)·한(漢)의 형성과 함께 치수 관개기구의 정비로 개척이 진행된 화북평원(華北平原) 등에 새로 건설된 현이 상당수가 있어 현은 전제제국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현·향·정 등의 도읍(都邑)은 약간의 이(里)로 구분되고, 이것이 일반 양민의 거주지구였다. 따라서 이는 종래와 같은 자연부락이 아니고, 이에는 이민(里民) 출신의 이부로(里父老)가 있어 그 유력자를 현·향 등의 삼로(三老)로서 교육을 담당케 하였다. BC 106년 국토를 13개주로 나누고, 자사(刺史)를 파견하여 군태수(郡太守) 이하에 대한 감찰을 행하였다. 후한(後漢)에서는 자사가 지방장관의 실질적 역할을 하게 되었고, 주(州)는 군·현의 위에 위치하는 지방통치의 단위가 되었다. 한제국에서는 군·현 이외에 제후의 나라가 있었고, 경제·무제의 억압정책으로 군국제(郡國制)가 실질적으로는 군현제(郡縣制)가 되었다. 이상과 같이 한제국은 전제적 통치기구에 의하여 농민에 대한 직접적이며 개별적인 인신지배(人身支配)를 실현하였고, 각종 조세와 요역을 부과하였다. 조세 중에서 전조(田租)는 그 토지의 수확량에 일정률을 부과하는 것이 원칙으로, 고조(高祖) 때에는 15분의 1, 이후 수차의 변경을 거쳐 경제(景帝) 때인 BC 156년에는 30분의 1로 정해졌다. 후한에서는 30년부터 30분의 1이 정제(定制)로 되었다. 그러나 이 정률제(定率制)는 현실의 운용면에서는 토지면적에 대한 수납액이 정하여져 정액제(定額制)가 실시되었다. 조(租)라고 부르는 조세에는 시조(市租:商業稅)·해조(海租:漁業稅) 등이 있었다. 인두세(人頭稅)로는, 산부(算賦)는 15∼56세의 남녀에게 1산(算:120錢, 상인과 노비는 배액)을 부과하고, 구전(口錢)은 3∼14세의 남녀에게 23전을 부과하였다. 그밖에 재산세로서 자산(算:算緡錢)이 있는데, 1만 전(錢)에 대하여 1산(算:120錢)을 부과하였으며, 무제 때 상공업자의 자산이 특히 중과(重課)되었다. 농민이 부담한 요역으로는 노역(勞役)과 병역(兵役)이 있는데, 노역은 15∼56세의 남자가 매년 1개월, 거주 군·현의 노역에 동원되었으며, 이것을 경졸(更卒)이라 하였다. 실역(實役)에 종사하지 않을 경우는 경부(更賦)라 하여 300전(錢)을 대납케 하고, 경부는 후에 상제(常制)의 부담으로 전환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상의 조세 가운데 전조·산부·경부 등은 대사농(大司農)이 수납하여 국가재정에 편입시키고, 시조·구전 등은 소부(少府)에 수납하여 제실(帝室)재정의 수입으로 하였다. 한나라의 병제는 징병제로서 병역은 요역의 일종으로 23∼56세의 강건한 남자에게 일률적으로 부과하였다. 재역기간 중, 1년은 출신지 군(郡)에서 군병(郡兵)으로 복무하고, 1년은 황제의 근위군, 수도의 수비대 병사로서 복무하든가, 변경의 정졸(正卒:實役에 복무하지 않을 경우에는 免役錢 징수)로서 복무하였으며, 잔여기간은 출신지에서 연 1회의 도시(都試:군사훈련)가 부과되었다. 후한은 군병제(郡兵制)를 폐지하여, 일반농민은 병역의 실무가 사실상 해소되고, 특정한 가족에게 영구적인 병역이 부과되기 시작하였다.

  <사회·경제>
  한나라 때에 사회의 기초적인 구성원은 농민이었다. 그들은 오구가(五口家:다섯 식구)와 같이 소형의 가부장적인 가족을 구성하여 자영농업을 영위하는 소농민이었으며, 군현제를 통하여 국가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았다. 그 거주구(區)는 군현제하의 이(里)이지만, 농민은 원칙적으로 모두 국가로부터 작위(爵位)를 받아서 이내(里內)의 신분질서를 형성하고, 그것을 매개로 하여 황제 지배하의 국가질서 내에 조직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나라는 각종 조세·요역 등의 부담의 중압으로 농민층의 빈곤화가 진척되고, 이와는 반대로 호족층은 더욱 세력이 신장되어 대토지 소유자가 되고, 농민은 소작인이나 노비로 전락하여 그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게다가 상인·고리대금업자의 활약으로 이 농민층은 더욱 몰락하게 되었다. 상품생산과 판매에 종사하는 상공업자는 도시의 시(市:市場)라고 부르는 상업구역에서 영업하며 시적(市籍)에 등기되어 시조를 부담하고, 법률적으로는 농민보다 한 단계 낮은 신분적인 지위에 있었다. 최하층의 신분으로서는 관유(官有)·사유(私有)의 노비가 있어 이들은 매매의 대상이 되었다. 노비의 일부는 수공업 등에 사역되는 경우도 있었으나, 한대(漢代)의 많은 생산부문에서 노비가 직접적인 생산자의 주요부분을 차지한 경우는 적었던 것 같으며, 대부분은 가내의 잡용이나 기타 비생산부문에 사용되었다. 한대의 중국은 철제농구의 전면적인 보급, 우경(牛耕)의 일반화와, 통일 전제제국에 의한 치수·관개시설과 기구(機構)의 정비에 따라 농업생산력이 현저하게 증가하였으며, 전한의 대전법(代田法), 후한의 구종법(區種法) 등의 농경기술의 개발도 진척되었다. 한대 농업의 중심은 치수관개가 잘 된 화북(華北)에서의 보리·조 등이 주요작물이고, 강남 저습지대의 벼농사는 기술적으로 아직 발달하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한대는 전국시대에 성장한 수공업이 더욱 발전한 시대이다. 한대의 수공업에는 농민 및 호족층의 자급자족적인 가내수공업도 있었으나, 중요한 경향은 민간수공업자의 상품생산의 발전이다. 철기 수공업과 염엄(鹽業)은 특히 발전하여 대상인에 의한 대규모의 경영이 출현하였고, 기타 청동기 수공업·칠기 수공업·섬유 염색 수공업·양조업·식품가공업·피혁업 등이 번영하였다. 또한, 한대는 대규모의 관영 수공업이 출현하였는데, 대부분은 소부가 관할하였지만 무제 때에는 소금·철·술의 전매제가 시행되어 대사농(大司農)이 관할하였다. 상업의 중심은 도시에 설치된 시(市)이며, 점포는 시내에서 업종별로 나뉘어 배열되고, 이것을 사(肆)라고 불렀다. 도시에서는 시사(市肆)에 점포를 가진 좌상(坐商)이 일상적인 상품매매에 종사하였으나, 각 지역간 또는 도시간의 원격지 교역도 번영하여, 이에 종사하는 대상인·상려(商旅)가 출현하였다. 외국무역도 사상 최초의 번영을 보였으며, 그 중에서도 서역무역이 가장 유명하였으나, 북변에 설치된 관시(關市)에 의한 북방유목민과의 무역,
쓰촨성[四川省] 방면을 경유하는 서남의 오랑캐·인도 등과의 무역,
광저우[廣州]를 거점으로 하는 남해무역도 번영하였다. 상업의 번영에 대응하여 화폐의 유통도 활발하였으며, 화폐경제가 농민의 일상생활에까지 침투하여 통화제도가 확립되었다. 한대의 주화는 무제 때인 BC 119년에 오수전(五銖錢)이 제정되었으며, BC 113년 이후는 상림(上林)의 3관(官)에서 관주전(官鑄錢)이 나와 당(唐)나라의 개원통보(開元通寶)가 제정되기까지 중국 화폐의 기본형식이 되었다.

  <문화>
  한나라 문화는 춘추전국시대에 형성된 각 분야의 문화를 보다 발전시키는 동시에, 그 후 중국의 전통적 문화의 기본적 양식으로 형성된 것이 많아, 한나라가
중국문화사에서 차지하는 지위는 매우 중요하다. 학술·사상의 분야에서는 전한 전반기(前半期)는 도가사상과 법가사상, 특히 후자가 전제적 통치의 현실면에서 지도이념으로서의 지위를 차지하였다. 무제의 치세에 동중서(董仲舒)의 헌책(獻策)으로 오경박사(五經博士)가 설치되어 유교의 국교화가 비롯되었다. 이런 경향은 원제(元帝)의 시기부터 결정적으로 되어, 유교는 국가통치·사회질서의 기본적 이념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고, 후한시대로 계승되었다. 전한시대의 학자는 옛 경문(經文)의 복원(復原), 정본(定本)의 작성에 노력하여, 경전을 금문(今文:漢代의 書體)·고문(古文:先秦時代의 옛 書體)의 2계통의 경서(經書)로 성립시켰다. 후한시대에는 마융(馬融)·정현(鄭玄) 등의 학자에 의하여, 고전의 주석에 전념하는 훈고학(訓學)이 발전하였다. 사학(史學)에서 한대는 명확한 역사적 의식으로 편집된 사서(史書)가 출현했던 시대이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반고(班固)의 《한서(漢書)》는 그 대표작으로서, 이후의 중국 정사(正史)의 기본형식이 확립되었다. 과학적 지식의 분야에서도 진보와 그 체계화가 이루어졌는데, 유흠(劉歆)의 《삼통력(三統曆)》은 중국의 천문학·역법(曆法)의 틀[型]을 만들었으며, 수학의 저작으로서 《구장산술(九章算術)》, 의학을 체계화한 《상한론(傷寒論)》 《황제내경(黃帝內經)》 등은 특히 유명하다. 문학분야에서는 《사기(史記)》와 《한서(漢書)》가 한대 산문학(散文學)의 대표적인 거작이다. 운문학(韻文學)에서는 전국시대에 비롯된 초사(楚辭) 등의 흐름을 채택한 사부(辭賦)와, 궁정문학으로서 악부(樂府)의 양식이 나타났다. 미술·공예 대부분은 예속적 직인층(職人層)에 의하여 제작(制作)되었다고 생각되나, 이 분야에서도 현저한 전진이 있어, 중국의 전통적인 기본 양식으로 형성된 것이 많다. 회화(繪畵)에는 칠화(漆畵), 고분벽화 등이 있으며, 조소(彫塑)에는 화상석(畵像石)이나 이상(泥像) 등이 있다. 서(書)는 한대에서는 예서(隸書)가 정식 서체로서 중시되었으나, 해서·행서·초서 등의 서체도 생겨났으며, 후한 말에는 장지(張芝)에 의하여 고유의 서예(書藝)가 형성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또, 공예도 동기·칠기·도기·직물 등의 기술과 양식에 현저한 진보가 있었다.

  <공예>
  한대의 미술은 국가적인 통제가 강하였다. 그러나 미술의 발전을 위축시키기는커녕 오히려 큰 조직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양산(量産)하고, 단순한 형식 속에서도 층이 두텁고 깊이 있는 표현을 창조하였다. 중앙과 지방에 공예품을 제작하는 공방이라 할 만한 공관(工官)이 만들어졌다. 제도(帝都)에서는 고공실(考工室)·동원장(東園匠)·상방(尙方)이라고 하는 관제 공방이 있었다. 고공실과 상방은 오로지 제실용(帝室用)의 여러 기물(器物)을 만들고, 동원장에서는 능묘에 부장되는 명기류(明器類)를 만들었다. 은(殷)·주(周) 시대의 공예품은 제례용구가 대부분을 차지하였으나, 한대에서는 일상용구의 제작이 많아졌다. 그러나 이것도 일반 서민이 쓰던 기구라고는 보기 어려우며, 제왕 주변의 특수계급의 사람들이 사용하던 것이 대부분이었다. 공예 가운데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동기이다. 은·주의 초자연적·주술적인 형태가 여기에서는 지극히 인간적인 생활의 용구로서, 신선한 생명력이 주입되었다. 신(神)의 용품이던 것이 인간의 용품으로서 새로운 사명을 지니게 된 것이다. 박산로(博山爐:山東省 靑州의 산을 본딴 향로)·촛대·초두(뺅?음식물을 데우는 容器)·대구(帶鉤:혁대 고리) 등에 정교한 기법을 구사한 일품(逸品)이 많다. 동경(銅鏡)도 이 시대에 수작(秀作)이 많아 신선문(神仙文)·기하문(幾何文)·신수문(神獸文) 등을 곁들인 것이 있고, 또 금은 상감(象嵌)의 기술을 응용한 것도 있다. 칠공예품도 한대 공예의 일품에 속한다. 제법에도 몇 종류가 있어, 목심칠(木心漆), 건칠(乾漆), 대[竹]를 엮어서 틀을 만들고 옻칠을 두껍게 입힌 남태칠기(藍胎漆器)와 토기에 칠을 입힌 것 등이 있다. 한국의 낙랑군(樂浪郡) 유적에서 발견된 것이 그 좋은 예이다. 옥기도 중국 특유의 산물인데, 주대(周代)에 이미 관영의 제조소가 있었으며, 한대에는 귀족의 의례적 필수품으로서뿐만 아니라, 일반의 장식품으로서 패옥(佩玉)·옥즐(玉櫛)·옥부(玉斧)·옥배(玉杯) 등이 만들어졌다. 명기는 무덤 속에 사자(死者)와 함께 넣기 위하여 특별히 만든 채색도자기인데, 사람의 형태를 취한 것을 용(俑)이라고 한다. 용 이외에도 조수(鳥獸)를 비롯하여 말이나 소를 나타낸 것에 걸작이 있으며, 사자가 생전에 살았던 것으로 보이는 주택건축이나, 양·멧돼지 등의 명기도 있다. 이들 명기는 조각으로서 보더라도 조형성이 뛰어난 것이며, 소박한 가운데서도 한대 장인(匠人)의 생명과 역량을 잘 나타내고, 또 당시의 생활습속을 구체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도자기도 한나라는 다음 시대인 육조(六朝)와 함께 그 초창기에 해당하며, 당(唐)·송(宋)시대가 동양 도자기사(陶瓷器史)의 백미(白眉)를 이룬다면 한대는 그 선구(先驅)라 할 수 있어, 이 시대에 이미 높은 화도(火度)로써 용해시키는 유약, 즉 고열유(高熱釉)가 사용되었다. 이때의 도기는 동기 같이 묵직하게 생긴 중후한 형태의 것이 많았다. 염직은 문헌에 보이는 것과 한대의 유적에서 출토된 유품을 비교하여 대체로 짐작할 수 있다. 수(繡)·금(錦)·기(綺)·능(綾)·나(羅)·문직(紋織) 등 기법적으로 상당히 뛰어나, 그 중에는 당대(唐代)의 그것과 다를 바 없는 것도 있다.

  <회화>
회화라고 하여도 오늘날 볼 수 있는 한대의 유품은 전(塼)이나 능묘의 벽면에 새겨진 화상석(畵像石)이 주된 것인데, 그들에게서 볼 수 있는 자유분방한 필치는 중국 회화를 발전시키는 풍요한 기반을 이루고 있다. 특히, 선묘(線描)를 중히 여긴 이 시대의 필법은 선(線)의 예술이라고 불린 중국화의 선구를 이루고 있다. 인물·풍경·동물·화훼(花卉)·신선 등 모든 분야에 미치고 있어, 중국미술의 한없는 깊이와 풍요함을 절실히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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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산: 가장 수려한 산 인기글 아미산: 가장 수려한 산 아름다운 아미산중국의 사진명소 100개중 가장 아름다운 산천 아미산(峨尾山)은 수려함으로 승부한다. 아아하고 수려하며 유구하고 신비한 아미산은 아름다운 경치와 유구한 불교문화, 특이한 지질적 특징으로 명산으로 인정된다."선인의 산, 불교의 나라", "동물의 락원", "지질 박물관" 등 다양한 영예를 안은 아미산은 "이 세상에서 수려함으로 승부"한다는 미명을 가지고있으며 당연히 사진작가들이 빼놓지 않는 사진명소로도 꼽힌다.아미산은 천여년전의 당(唐)왕조때 벌써 많은 문인들이…(2015-09-21 10:07:03)
현대의 치파오(전통의상) 인기글 [현대의 치파오(旗袍)]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패션 유행의 선도 그룹은 평민이었으며 그들은 소박하고 실용적인 것을 추구하였다. 의상에 있어서 사람들의 미적 추구는 거의 대부분 혁명사업에 대한 열기로 변화되었다. 치파오가 대표하는 유유자적한 숙녀형상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존재할 공간을 상실함으로써 치파오는 쇠퇴기를 맞이하였다. 이 시기의 의상은 단순함과 소박함을 중시하였는데, 남성복은 중산복(中山裝), 학생복(學生裝), 춘추삼(春秋衫), 작업복(工作服) 스타일의 자켓,…(2015-09-17 09:03:17)
당나라(고대역사) 인기글 수(隋)나라에 이은 중국의 왕조. 618년 이연(李淵)이 건국하여 907년 애제(哀帝) 때 후량(後梁) 주전충(朱全忠)에게 멸망하기까지 290년간 20대의 황제에 의하여 통치되었다. 중국의 통일제국(統一帝國)으로는 한(漢)나라에 이어 제2의 최성기(最盛期)를 이루어, 당에서 발달한 문물(文物) 및 정비된 제도는 한국을 비롯하여 동(東)아시아 여러 나라에 많은 영향을 끼쳐 그 주변 민족이 정치·문화적으로 성장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한국의 경우 삼국체제(三國體制)가 붕괴되고…(2015-09-17 09:02:55)
[열람중]한나라(고대력사) 인기글 ◑ 한(漢)진(秦)에 이어지는 중국의 통일왕조(BC 202∼AD 220). 왕망(王莽)이 세운 신(新:8~22)나라에 의하여 잠시의 중단이 있어, 그 이전에 장안(長安)을 수도로 하였던 한을 전한(前漢:西漢), 뤄양[洛陽]에 재건된 한을 후한(後漢:東漢)이라고 한다. &lt;역사의 개설&gt;한왕조의 창시자는 진말(秦末)의 반란 지도자의 한 사람인 유방(劉邦:高祖)이다. BC 206년 진이 타도되자 반란의 통일적 지도자 항우(項羽)는 그를 한왕(漢王)으로 봉하였으나, BC 202년에…(2015-09-17 09:02:13)
오대송원(고대사) 인기글 907년부터 오대십국(五代十國)의 분열 국면이 거의 60연간 지속되었으며, 960년에 중국은 다시 통일을 이룩하면서 송(宋)왕조가 건립되었다. 이후로 중국은 비록 계층간의 갈등과 민족적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계속하여 왕조가 교체되긴 하였지만 이전과 같은 그러한 대분열의 혼란 국면은 발생되지 않았는데, 이것은 많은 왕조들의 흥망이 반복되는 과정을 거치는 동안 중국은 이미 확고한 통일의 기초를 다짐으로써 더 이상 동요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대십국(五代十國)으로부터 송(宋) 요(遼) 금(…(2015-09-17 09:01:46)
춘추전국(고대사) 인기글 기원전 770년에 서주(西周)가 멸망하고 주(周)왕조는 낙읍(洛邑: 지금의 洛陽)으로 천도함으로써 동주(東周)시기가 시작되었다. 동주는 다시 "춘추시대(春秋時代)"와 "전국(戰國時代)"의 두 시기로 나누어진다. 동주시기에는 제철기술이 신속히 발전하여 철제 농기구와 소를 이용하여 밭을 가는 방법이 사용되고 경지면적이 확대되었다. 또한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서 낡은 노예제도하의 생산관계가 새로운 생산력을 속박하게 되자, 이에 지배계급을 반대하는 노예와 평민들의 투쟁이 격렬해졌으며, 그 결…(2015-09-17 09:01:30)
진한시대(고대사) 인기글 중국은 전국시대부터 이미 봉건사회에 진입하였지만, 중국에서 진정한 중앙집권을 수립한 통일된 봉건국가는 진(秦)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진(秦)의 건립으로부터 동한(東漢) 말기에 이르기까지 약 450년간은 중국의 봉건사회가 정립된 시기이다.전국 후기 "칠국쟁웅(七國爭雄)" 중에서 진(秦)나라가 가장 강대하였다. 기원전 221년에 진시황(秦始皇)은 나머지 여섯 나라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중국 역사상 최초의 중앙집권 국가이자 통일 봉건국가인 진(秦)왕조를 건립하였다. 진시황은 통일을 강화하고 자신의 통치를…(2015-09-17 09:01:13)
원시사회(고대사) 인기글 고고자료에 의하면, 대략 100만년 이전에 중국에는 이미 원시인류가 있었다. 운남성(雲南省) 원모(元謀)에서 발견된 원인 화석 "원모인(元謀人)"과 섬서성(陝西省) 남전(藍田)에서 발견된 원인 화석 "남전인(藍田人)"은 중국 최초의 원시인류로 알려져 있다. 대략 4 5십만년 이전에 북경 주구점(周口店) 일대에서 생활한 원인인 "북경원인(北京猿人)"은 이미 직립 보행할 수 있었으며, 간단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고 불을 이용함으로써 사람의 기본적인 특징을 구비하고 있었다.그 후 중국의 원시인류는 모계…(2015-09-17 09:00:54)
야부리: 중국의 다보스 인기글 야부리: 중국의 다보스 가장 아름다운 중국의 사계절 명소 100개중 겨울 명소 야부리(亞布力)는 원래 과실수의 고장이라는 의미로 로시야어로 야부러니라 했다. 청(淸)왕조때 야부리는 벌써 황실의 사냥터였는데 오늘날 뭇 산속에 스키장들이 산재해 무성한 숲, 눈부신 눈과 어울려 장관을 이룬다.스키장은 고산 경기용 스키장과 관광용 스키장으로 분류되는데 그중 해발 1000m의 정상 산기슭에 조성된 스키장은 총길이 30km에 달하는 11갈래의 다양한 난이도의 코스를 보유한 대 규모의 스키장이다.또한 독일에서…(2015-09-17 08:45:19)
공산당 성립(현대사) 인기글 1917년 "10월혁명"에서 제정 러시아를 무너뜨리고 공산정권을 수립한 레닌은 즉시 공산주의의 새로운 국제조직의 설립에 착수하였다. 이같은 레닌의 꿈은 1919년 현실화되어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 창립대회가 열리게 되었고, 이어 1920년에 제2회 대회가 열려 소련의 세계 적화 공작은 한층 더 조직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리고 이 제2회 대회에는 인도의 로이와 인도네시아의 혁명활동에 종사해온 마링(중국명 馬林) 등이 유럽 공산주의자들 틈에 끼어 그 모습을 나타냈다. 소련이 표방하는 "…(2015-09-14 09:56:26)
당사대(현대사) 인기글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의 성립은 중국 근현대사상 가장 중대한 사건이며, 그것은 중국이 반식민지(半植民地) 반봉건(半封建) 사회의 어두운 역사를 청산하고, 독립 통일 민주 번영 부강의 새로운 사회주의 국가 체제로 나아가도록 하였다. 중국인들은 습관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이전을 구중국(舊中國) 혹은 해방전(解放前)이라 말하고, 그후를 신중국(新中國) 혹은 해방후(解放後)라고 말한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중화인민공화국은 창립된지 50여년이 되었는데, 이 기간에 중국은 비록 내부적 갈등…(2015-09-14 09:56:10)
북벌전쟁(현대사) 인기글 중국공산당이 창립된 후, 1922년 최초의 철저한 반제·반봉건의 민주주의 혁명 강령을 제기하였으며, 1923년 국민당과 혁명 통일전선을 수립하기로 결정하였다. 1924년 손중산(孫中山)은 광주(廣州)에서 국민당을 개편하고 제1차 국공합작을 실현하였다. 이로써 국·공 양당은 공동으로 황포군관학교(黃 軍官學校)를 창설하고 국민혁명군(國民革命軍)을 조직하여 군벌세력을 정벌하였다. 국민혁명군은 먼저 광동(廣東)에서 군벌세력을 격파한 후, 1926년 정식으로 북진하여 북양군벌(北洋軍閥)을 토벌하기 시작하였…(2015-09-14 09:55:53)
항일전쟁(현대사) 인기글 1937년 7월 7일, 중국의 동북을 점령하고 다시 화북으로 진격한 일본 침략군은 북경 부근에서 "노구교사변(蘆溝橋事變)"을 일으켜 전면적으로 중국을 침공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에 대하여 중국의 군대도 강력한 저항을 하게 됨으로써 마침내 전면적인 항일전쟁(抗日戰爭)이 발발하였다.항일전쟁이 일어나기 이전 1936년 12월에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서안사변(西安事變)"이 발생하였는데, 그 결과 장개석은 강제적으로 공산당과 항일 공조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제2차 국공합작을 실현하게 되었다.그…(2015-09-14 09:55:38)
현대산문(고대문학) 인기글 1) 서한(西漢) 산문중국의 의론문(議論文)은 전국말에서 진나라에 이르는 시기에, 특히 상소문을 중심으로 완성된다. 이사가 진왕(秦王)에게 올린 &lt;간축객서(諫逐客書)&gt; 등이 그 대표적인 글이다.한대로 들어와서는 산문이 상소문을 중심으로 한 정론문(政論文)과 전국시대의 역사적 산문을 계승한 사전문(史傳文)의 두 갈래로 크게 발달한다. 한대에 들어오면서 많은 사람들의 주(奏)·소(疏)·표(表)·책(策) 같은 글이 쏟아져 나온다. 그 중에서도 가의(賈誼)의 &lt;과진론(過秦論…(2015-09-14 09:55:21)
中華 제1龍은 복희(伏羲)씨 인기글 龍은 중화민족의 상징이다. 그래서 염황(炎帝와 黃帝:4천년 전 중국 전설 속 黃河유역 부락연맹의 수령)의 자손들을 가리켜 용의 후예라고 한다. 그렇다면 중화민족 최초의 龍은 누구일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깐수(甘肅)성의 天水시에서 찾을 수 있다. 天水시는 중국에서 역사적 문화적으로 유명한 名城으로 경내에는 명승고적과 인문유적이 169곳이나 보존되어 있다. 푸시(伏羲)문화, 大地灣원시부락문화, 친국(秦國)초기문화, 석굴문화와 3국(魏,蜀,吳)문화를 대표로 한 천수 古文化는 중국 고…(2015-09-14 09:5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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