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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중국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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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dmin| 작성일 :11-07-21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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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宋)

중국 역사상 당(唐)·오대십국(五代十國)에 이어지는 왕조(960∼1277).
당나라가 쇠약해진 틈을 타 절도사였던 주전충에 의해 당이 멸망하자 황하유역에는 5개의 왕국이 그 남쪽에는 10개의 크고 작은 나라가 일어나 어지럽게 다투어 흥하고 망하기를 거듭하였는데, 이때의 중국을 5대 16국이라고 한다. 이 중 후주의 조광윤은 중국의 지배자가 되어 카이펑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송'이라고 하였다. 황제가 된 조광윤은 제일 먼저 군인의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였다. 문치주의를 근본 방침으로 삼아 과거제도를 개혁하고 문신을 우대하였으며 절도사의 권한을 빼앗았다. 그러나 이러한 문치주의는 국방력의 약화를 하져와 수많은 북방민족의 침입에 시달리게 하였다. 그것을 스스로 지킬 힘이 없던 송나라는 재물을 바쳐 비위를 맞추는 식으로 외적의 침입을 피해야 했다.
게다가 방대한 관리조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했으므로 백성들은 무거운 세금에 허덕이는 생활을 해야했다.

왕안석의 변법은 이와 같은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주장되었다. 변법은 대상인과 지주를 누르고 상공인과 소농민을 보호하여 생산력을 증가시킴으로써 국가 재정과 국방력을 강화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마광을 비롯한 대지주, 고리 대금업자, 대상인을 대표한 세력들의 반대로 인해 중지 되고 말았다.

한 편 송나라는 건국과 함께 이미 북방쪽에 강력한 적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 중 가장 세력을 가진 족속은 몽골 계통의 거란족으로 '야율아보기'가 주변의 부족을 통일시키고 나라를 세워 요나라라고 불렀다. 요나라는 여진족인 금에 멸망되기 전까지 200여년 동안 끊임없이 송나라를 괴롭혔다.

그래서 요, 서하와도 '전연의 맹'이라는 조약을 맺어 조공을  수 없이 바치게 되었다.
이후 금이 요를 멸망시키고 송나라마저 침략하니 송의 일족들은 강남의 임암(지금의 항저우)으로 천도하여 남송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남송은 금과 조약을 맺고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를 보낼 수 있었으며 경제적.문화적으로도 번영하였다. 그 뒤 남송은 원이 금을 멸망 뒤 바로 원에게 멸망하였다.

<개관>
오대(五代) 유일의 명군인 후주(後周)의 세종(世宗)이 죽은 뒤 그의 부장(部將)인 조광윤(趙匡胤:太祖)이 근위병(近衛兵)의 추대를 받고 천자의 자리에 올라 960년 송나라를 건국하였다. 그는 오대 부장들의 횡포에 혐오를 느껴 제위(帝位)에 오르자 군인을 억압하고 문관을 우대하여 문치주의를 채택하였다. 한편, 모든 권한을 중앙정부로 집중시켜 독재권 확립을 도모하고 다음의 태종도 이 정책을 답습하여 송나라의 기초는 이 2대 왕 사이에 이루어져 일단은 독재정치기구가 확립되었다. 이 독재제도는 그 후 청나라 때까지 이어졌다. 독재정치의 기반은 강력한 군대와 치밀한 관료제에 의하여 유지되는 것이나, 당초 군인을 억압한 결과 군대가 약화되었으므로 그 수를 늘려 독재권을 지속시키려 하였다. 군사비가 재정의 80 %를 차지하게 되어 종래의 양세(兩稅) 수입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 차(茶)·소금·술·백반 등 일용필수품의 전매수입으로 방대한 군사비를 염출하려 하였다. 이 신경제정책이 안으로는 밀매자(密賣者)를 자극하여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반란의 온상을 형성케 하였다. 밖으로는 외부민족을 자극하여 민족의식에 눈뜨게 하고 강력한 국가를 형성하여 송나라에 대항케 하는 결과가 되었다. 송나라 300년의 역사는 이 두 가지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태조시대에 강남(江南)·쓰촨[四川]에 할거하던 여러 나라는 멸망하여 천하가 거의 평정되었으나 산시[山西]의 북한(北漢)은 거란(契丹)의 원조가 있어 그의 평정은 태종시대로 승계되었다. 때마침 거란의 북한에 대한 태도가 냉각된 것을 안 태종은 일거에 북한을 멸망시키고 그 여세를 몰아 후진(後晉) 때 거란에 넘겨준 연운(燕雲) 16주를 회복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 다음 진종(眞宗) 때, 거란이 대거 침입해 왔으나, 전연(淵)에서 맹약을 맺고 은(銀)·비단 등의 세폐(歲幣)를 주어 화목하였으므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평화가 계속되어 경제계는 호경기를 맞이했고, 국가 재정은 호전하였다. 진종은 전연에서의 굴욕적인 외교를 거짓 꾸미고, 한편으로는 천자의 위엄을 과시하고자 풍부한 재정을 이용하여 일찍이 시황제나 한나라 무제가 행한 산둥[山東]의 명산인 타이산[泰山]에 제례를 지내 막대한 경비를 소모하였으나 그래도 재력은 아직 여유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인종(仁宗) 때는 서하(西夏)와 수년간에 걸쳐 전쟁을 치렀다. 서하는 송나라의 소금 전매제의 확립으로 자국산 청백염(靑白鹽)의 수출이 금지되어 이미 태종 때부터 송나라에 반항하다가 인종 때 독립을 선언하고 대대적으로 침입하였다. 이 전쟁으로 서하도 큰 타격을 입었으나 송도 전쟁 뒤 경제공황에 빠져 재정은 적자에 허덕이고 실업자가 속출하여, 경제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동남지방에도 반란이 일어 바야흐로 위기에 직면하였다.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인종의 뒤를 이은 신종(神宗) 때는 왕안석(王安石)을 등용하여 신법(新法)을 실시하였다.

한편 서하와의 전쟁은 농민의 중산계급을 몰락시켜 부호와 빈민이 대립하는 근세적 사회발전에 박차를 가하였다. 왕안석의 신법의 목적은 국가재정의 재건과 함께 빈농이나 영세상공업자를 구제하여 중산계급을 육성하는 데 있었다. 신법은 왕안석의 재임중 상당한 성과를 올려 최소한 국가재정은 적자에서 흑자로 전환되고 송나라의 위기는 해소되었다. 그런데 이 신법은 지주·관료·호상(豪商)·종친 등 기득권을 가진 계급의 이익을 침해하였으므로 그들 계급의 강력한 반대를 받았다. 여기에서 신·구 양당의 분쟁이 발생하였고, 신종이 죽자 구법당(舊法黨)의 사마 광(司馬光) 등이 등용되어 신법은 폐기되고 인종시대의 구법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구법당에게는 뚜렷한 정책방향이 없어 정치는 혼란에 빠지고, 신종의 아들 철종(哲宗)이 성장하여 친정(親政)을 행하게 되자 구법당을 물리치고 신법당 관료를 등용하였다. 다음 휘종(徽宗) 때, 중도정치를 행하고자 한때 구법당의 관리를 함께 등용한 일도 있으나 결국 북송 말기까지 신법당이 정국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북송 말의 신법당 관리는 구법당 관리와 별로 다를 것이 없어 당쟁이 끊이지 않다가 마침내 만주에서 일어난 금나라(여진족)에 의하여 1127년 멸망하였다(靖康의 變). 남송시대에는 신법당에 의하여 폐출되었던 철종의 후비(后妃) 맹씨(孟氏)가 고종(高宗)의 즉위를 인정하였던 관계로 구법당계의 관리가 많이 등용되었다. 남송이 강남 땅으로 쫓기자 정치가·군인·학자 사이에는 주전론(主戰論)이 강하였으나 문약한 송인(宋人)은 도저히 여진족에게 당할 수가 없었다.

싸울 때마다 패하고 군사비는 늘어나 백성은 중세(重稅)에 허덕이고 반란이 그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고종 때, 재상(宰相) 진회(秦檜)는 악비(岳飛) 등 군벌을 누르고 금나라와 화의하였으나 금나라에 정변이 일어나 화평은 영속되지 못하였다. 두 나라의 화평은 자주 깨져, 몇 번이나 평화조약이 체결되었고, 남송 사회는 항상 전시상태에 놓여 있어 군비를 마련하기 위한 지폐가 남발되었다. 이 때문에 물가는 앙등하고 무거운 세금과 함께 백성은 도탄에 빠지고 더구나 북송시대에는 서방에서 유입되던 은(銀)이 남송시대에는 거꾸로 서방으로 유출되어 자금의 결핍으로 산업은 위축·침체되고 실업자가 증대하여 여러 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한편 원풍(元豊)의 관제개혁(官制改革:1078∼85)으로 재상의 권한이 강화되어 남송시대에는 진회·한탁주(韓5胄)·사미원(史彌遠)·가사도(賈似道) 등이 전권(專權)을 휘둘렀고, 이에 반하여 천자의 독재권은 형식화되어 통제력을 상실함으로써 관기(官紀)는 문란해졌다. 정치·경제·사회 등 모든 것이 붕괴하려고 할 때 몽골군이 침입하였으므로 송나라는 마침내 그 무력 앞에 멸망하였다.

<君主權(군주권) 강화>
宋은 건국후 군주권을 강화하고 節度使(절도사)의 세력을 약화해 나갔다. 우선 그들이 장악하고 있었던 兵權(병권)을 회수해갔다. 그래서 절도사들이 禁軍(금군)의 지휘를 겸하도록 했다. 그리고 절도사의 근거지를 옮김으로써 특정지역에 절도사의 세력이 형성되는 것을 막았다. 절도사의 兵士중에서 강건한 자를 선발해서 금군에 편입시켰다. 이로 인해서 절도사의 병사-당시 牙軍(아군)이라 불렀다-의 군사적 기능이 상실되었다. 그래서 이들 牙軍은 廂兵(상병) 또는 廂軍(상군)으로 칭해지면서 국가의 각종 봉사라던가 雜役(잡역)에 충당되었다. 그대신 금군의 수를 대폭 증가해서 궁성의 호위나 수도의 치안을 담당할뿐 아니라 각 지역에 주둔케해서 지방, 국방, 치안을 담당케했다. 그리고 절도사가 지배하고 있었던 鎭(진)을 재정비했다. 종래의 진은 요충지에 설치되어 치안 및 조세징수의 의무를 가졌다. 鎭將(진장)은 절도사가 임명했다. 상업요충지에는 鎭을 설치하고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해서 조세 특히 商稅(상세)를 징수했다. 기타 조세징수권을 縣(현)에 귀속시켰다. 나아가서 民政에 대한 권한도 중장조정에서 회수해갔다.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해서 民政을 감독케했으며, 종래의 절도사에 소속되어 民政을 담당했던 幕職官(막직관)의 수를 축소했으며 아울러서 중아에서 막직관을 임명해서 파견하였다. 그리하여 州와 縣의 종래 기능을 회복하고 절도사들은 관여하지 못했다. 財政(재정)권한 역시 회수해갔다. 당후기오대시대의 兩稅法(양세법)에 의해 징수되었던 租稅(조세)는주의 경비를 위해 주에 남긴 조세 留州(류주), 절도사의 경비를 위해 절도사에게 남긴 조세 留使(류사), 중앙조정에 보내어진 조세 上拱(상공) 크게 셋으로 나뉘었다. 당후기오대시대 상공의 규모를 둘러싸고 중앙조정과 절도사의 대립이 빈번했었다. 宋태조는 관리를 파견해서 조세징수를 엄격히 감독케했을뿐 아니라  留使(류사)의 규모를 극히 축소시켰다. 절도사가 지배하고 있었던 州를 本州와 屬州(속주)로 나뉘었다본주에 節度使府(절도사부)가 설치되었고 속주는 기타의 州를 말한다. 그리고 속주의 경우 중앙에서 관리를 임명했다. 따라서 절도사의 권한은 본주에 국한되어졌고 그마저도 축소되었다. 그래서 太宗의 즉ㅇ위 977년경에 오면 절도사는 일종의 명예직과 경제적 혜택만이 주어지는 지위로 약화된다. 그리고 세습도 폐지되었다. 오랫동안 지방분권적 절도사 체제가 붕괴되어졌고 중앙집권체제가 강화되었다.

<제도의 정비>
宋은 太祖 趙匡胤(조광윤)과 그의 동생 趙匡義(조광의)때에 국가체제가 整備(정비)되었다.
송의 제도는 외형적으로는 唐초기의 律令制度(율령제도)를 계승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唐後期(당후기)와 五代에 설치되었던 관제를 답습하고 있다.
당초기의 三省, 六部, 九時, 五監이 설치되어 있으나 실권은 없었단. 그대신 中書省(중서성), 樞密院(추밀원), 三司(삼사)가 국정을 나누어 맡았다. 그래서 중서성은 民政을 담당했고, 장관으로 同中書門下平章事(동중서문하평장사), 參知政事(참지정사)를 임명했다. 중서성 아래에 翰林學士院(한림학사원)이 설치되었는데 학문이 뛰어난 자를 翰林學士에 등용해서 황제의 詔勅(조칙)의 초안을 작성했고 황제의 자문에 응하기도 했다. 추밀원은 唐후기에 설치되어 추밀使가 軍政을 담당했다. 삼사는 오대시대때 설치되어 장관으로 三司使가 임명되어 財政을 총괄케했다. 唐代에는 모든 국정이 三省에 귀속되었고 삼성의 장관인 宰相(재상)의 권한은 막중했다. 그러나 宋代는 국정을 나누어 담당하고 있고 따라서 재상의 권한 역시 분산되고 있다. 곧 황제의 권한을 강화해주는 기능을 하고 있다.
宋은 전국을 초기에 15路(로) 4府(부)로 나누어 통치하였다. 4府는 가장 중요한 도시와 그 주변지역에 설치된 기구이다. 路의 행정 역시 나누어진다. 民政은 轉運使(전운사)가 담당했고 軍政은 按撫使(안무사)가 임명되었꼬 刑獄(형옥)은 提點(제점)이, 財政은 提擧常平使(제거상평사) 등이 임명되었다. 역시 권한의 집중을 막는 조처라 할수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 州가 설치되었고 장관 知州事(지주사)가 임명되었다. 또 아래에 縣이 설치되어 知縣事(지현사) 또는 縣令이 임명되었다. 송대지방관제는 삼단계로 되어 있는게 특징이다.
한편 관료를 등용하기 위해서 科擧制度(과거제도)를 잘 정비하고 있다. 이때 과거제도엔 進士科(진사과)와 諸科(제과)로 나누어져 있다. 진사과는 時와 賦(부), 당시에 중요한 정책에 관한 의견을 진술한 論, 경서,사서에 대한 지식을 시험한 帖 (첩경), 경서,사서의 내용을 시험한 墨義(묵의)를 시험쳤고, 諸科(제과)는 첩경과 묵의만 시험쳤다. 따라서 대부분의 응시자들이 진사과를 선호하게 되었고 처음 진사합격자가 20명에 미치지 못했으나 태조후기 973년엔 26人에 이르게 된다. 903년에 殿試(전시)가 채택되어져서 황제가 직접 선발된 합격자의 순위를 결정했다. 그래서 황제와 합격자간의 門生관계가 수립되었다. 당대에는 특별히 재상중에서 知貢擧(지공거)를 임용해서 과거시험을 주관케했다. 이로인해 당대에는 지공거와 합격자사이에 門生관계가 이루어졌고 관료생활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송대에는 과거제도이 3단계가 이룩되었다. 첫 번째는 府와 州에서 실시되고 鄕試(향시)의 합격자는 貢院(공원)에서 省試(성시)에 응했고 그 합격자는 殿試(전시)에 응했다. 太宗시대에 오면 급제자의 수가 크게 증가한다. 태종ㅈㄱ위 977년에 진사 109명 제과 207명이 급제하면서 그 수는 점차 증가해간다. 그러나 鄕試급제가 곧 貢擧人의 수만해도 5~6천명에 이르고 미급제자의 수는 누적되었다. 이들을 위해 15차례 공거인이 된자 그러면서 미급제자게 특별히 '出身'이라는 칭호를 주면서 胥吏(서리) 등에 등용하기도 했다. 과거급제자는 관료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점차 진사과가 중요시됨에 따라 진사과 급제자들이 고위관직을 점유하게 되었다.
당시 송사회에서는 華北지역의 학자들은 質(질), 곧 내용을 좋아했고, 자연히 경전이나 사서를 중요시 여겼으며 이로 인해 이들은 대체로 제과에 응시하는 경향이 많았다. 거기에 비해 江南의 학자들은 文, 곧 글을 좋아하여 진사과에 응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고위관직에 江南출신이 점유하기에 이르렀고 화북학자들의 불만이 커졌다. 송대과거제도는 집권파당의 성격에 따라 제도가 자주 바뀌었다. 그렇다하더라도 과거제도는 송이후에도 더욱 정교하게 정비되어져서 시행되었고 동아시아 사회전체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관제>
지금의 내각에 해당하는 중서(中書)에는 재상인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와 부재상인 참지정사(參知政事) 수명이 있어 이들의 권한은 거의 같았으나 다만 직함만이 약간 아래일 뿐이다. 또한 군사에는 추밀원(樞密院)이 있어 통수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병권(兵權)에는 통수권과 지휘권이 있어 천자만이 이것을 통할하고 군사령관은 마음대로 군대를 움직일 수 없었다. 다만 추밀원을 통하여 천자의 명령이 군사령관에게 전달되면 비로소 군대를 움직일 수 있었다. 추밀원에는 추밀사(樞密使)·추밀부사 등이 있었고, 중서와 추밀원은 양부(兩府) 또는 2부(二府)라 불러 국정을 논하는 최고기관이었다. 정무는 이들 수명의 합의에 의하여 행하여지고 천자는 최후의 결재를 하였다. 송대에는 재정을 가장 중요시하였으므로 삼사(三司:재무부)의 권한은 컸고, 그 장관인 삼사사(三司使)는 천자에 직속되어 있었다. 또한 송대 관제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특수 감찰기관의 발달이었다. 태조 때는 무덕사(武德司)가 있어 관리나 백성을 감시하였으나 태종은 이것을 황성사(皇城司)로 고쳐 확장·정비하고 그 간부에는 외척(外戚)이나 환관(宦官) 등 심복 몇 명을 임명하고 그 밑에 수천 명의 밀정을 두어 수도(首都)뿐만 아니라 전국으로 파견하여 관료의 행동을 감시시켰으므로 독재권이 신장(伸張)되었다. 지방행정구역인 각 노(路)에는 감사(監司)를 두고 후에는 따로 제거상평사(提擧常平司)를 설치하여 상호 감시하게 함으로써 권력의 집중을 방지하고, 주(州)에는 지주(知州:도지사)를 두는 한편 그 밑에 통판(通判)을 두어 지주의 권한을 제한시켰다. 이렇게 하여 어떤 특정인에게 권한이 집중되는 것을 막고 모든 권한은 오로지 천자 한 사람에게로 집중시키는 조직이었다. 다만 이 같은 제도하에서는 천자가 모든 정무에 관여하여 중요한 정무와 일반 정무와의 구별이 어려웠으므로 신종의 원풍(元豊) 연간에 당(唐)의 육전(六典)을 본떠 관제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사회와 경제>
오대(五代) 각국은 군비를 확장할 필요에서 재정의 기초를 굳히고자 산업을 장려하였다. 이 때문에 각지에 특산물이 대량으로 생산되고 그 질도 향상됨으로써 자급자족하던 장원시대(莊園時代)는 지나고 상품경제시대가 도래하였다. 이에 따라 상인의 수도 급속히 증가하였으나 오대 각국은 서로 분열되어 관세(關稅)의 장벽을 설치하고 있어 상품 유통에는 커다란 장애 요인이 되었다. 상인들이 판로를 확대하려면 불가불 각국의 국경을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천하를 통일하려는 독재군주와 상인과는 그 이해(利害)가 완전히 일치하였다. 상인은 독재군주의 보호 아래 더욱 더 발전하고 독재군주는 상인에 의하여 그 재정적 기초를 굳혔다. 송대에 상세(商稅)가 지세(地稅)와 백중하였던 사실은 이것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위를 거쳐 송의 통일이 이루어지고 평화가 도래하자 모든 산업은 안정된 판로를 개척하여 급속히 발전하였다. 산업발달에 더욱 박차를 가한 것은 외국무역의 번영이었다. 서쪽으로는 육지를 통하여 위구르인(人)이, 남해에서는 아랍인이, 또한 동쪽에서는 한국과 일본인이 비단·도자기, 기타 물자를 구하러 왔다. 그들은 금·은, 특히 다량의 은을 중국에 가져왔다. 그것이 산업자금으로 투자되어 산업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 때문에 노동력의 수요가 갑자기 늘어 이제까지 도둑의 무리에 가담하여 비밀결사에 투신, 사회불안을 조장하던 실업자들에게 직장이 주어졌으며 호경기의 계속에 따라 국가의 세입도 크게 늘어 흑자의 건전재정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북송시대의 근세적 문화는 이러한 사회를 배경으로 탄생한 것이었다. 송의 산업이 발달하여 생산력이 증대한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 하나는 분업(分業)의 발달이다. 지역적인 분업뿐만 아니라 생산과정에서도 분업이 이루어져, 기업이 대규모로 되는 동시에 전문화하여 능률이 오르게 되었다. 둘째 요인으로는 과학적 기술의 발달이었다. 그 구체적인 실례로서 화력혁명(火力革命)이 있다. 즉 석탄사용의 보급에 따라 동(銅)·철 등의 제련 기술이 발달하여 다량의 동·철이 생산되었다. 동의 생산 증가는 동전의 대량 주조를 가능케 하여 상업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철의 생산 증대는 병기의 발달을 가져와 국방에 크게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 종류의 농기구 제조는 농산물의 생산력 증대에도 박차를 가하였다. 이와 같은 화력혁명은 생산력 증대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도자기의 발달에도 크게 영향을 끼쳤다.

<문화>
송나라의 문화는 흔히 서양의 르네상스 문화와 비교되기도 하는데, 복고적(復古的)인 성격이 송대문화의 한 특징을 이루는 까닭이다. 예를 들어 문학, 특히 산문(散文)에 있어서 송나라는 하나의 뚜렷한 시대적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당나라 말기부터 한나라의 고문(古文)으로 돌아가자는 이른바 고문부흥운동이 고개를 들었으나 그 세력은 아직 미미하였다. 그러나 북송 중기부터 구양 수(歐陽修) 등이 고문부흥운동을 다시 제창하면서 이 운동은 사대부들의 동조를 얻게 되고 마침내 문단의 큰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또한 송나라의 유학(儒學)은 주자학(朱子學)으로 대표되는데, 이것 역시 하나의 사상부흥운동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때까지의 유학은 훈고학(訓學)이 주류를 이루어 경전(經典)의 자구(字句) 해석에만 천착하는 학문이었다. 그로 말미암아 유교는 정작 민중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오히려 불교보다 열세에 놓인 느낌마저 있었다. 그와 같이 민중과 유리되었던 유교가 송대에 이르러서는 불교의 자극을 받고 고대의 원시유교(原始儒敎)로 되돌아가 성현(聖賢)의 정신을 올바로 파악하려는 새로운 기운이 싹텄다. 그리고 이것이 곧, 주자학으로 열매를 맺게 되었다. 복고풍조는 각 분야에서 다양하게 개화되었으며 취미분야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가령, 당나라 이전의 중세기에는 정원을 꾸밀 때에도 정원석(庭園石)에 채색을 하는 등 인공미(人工美)를 극도로 살린 화려한 조경(造景)이 환영을 받았으나, 송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원시적인 자연경관을 살린 정원을 매력있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와 같은 풍조와 아울러 사대부의 생활 주변에도 고품(古品)을 아끼고 사랑하는 복고취미가 크게 유행하였다. 고동기(古銅器) 같은 것이 발굴되면 사대부들은 그것을 서재에 장식하고 감상하는 것을 하나의 취미로 삼았다. 송나라 때 편찬된 《고고도(考古圖)》 《박고도(博古圖)》 등은 모두 고동기 발굴품을 수록한 책들로서, 학문적으로 귀중한 자료가 되는 것은 물론이지만, 당초의 편찬 동기는 취미생활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취미생활뿐만 아니라 의학분야에도 복고 또는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풍조가 파급되고 있었다. 당나라 때까지의 양생법(養生法)은 신체에 이상이 생기면 밖으로부터 약을 투입하여 치료하는 대증요법(對症療法)이 채택되고 있었다. 그러나 송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이른바 온보(溫補)의 방법이 등장하여 일정한 기간 동안 환자의 체내에 질병에 대한 저항력을 길러줌으로써 질병을 자연 치유케 하는 방법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옛날로 돌아간다는 것은 말하자면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이며, 꾸밈이 없는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얘기이다. 송나라 이전의 문화를 그 원인이야 어디 있건 인간 본래의 개성이 몰각(沒却)됨으로써 어떤 한계점에 부닥친 문화라 특징짓는다면, 송나라 문화는 인간의 자각과 더불어 그 개성이 발굴되고 존중되는 풍토 위에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송나라 문화의 또 하나의 특색은 서민문화의 발달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문화가 모든 백성에게 골고루 향유될 수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한정된 계층, 곧 큰 도시에 사는 서민들의 생활 향상에 따라 발생한 현상이었다. 송대에는 산업이 발달하고 생산력이 증대되면서 상거래가 활발해지자 상인들의 세력이 커지고 도시도 발달하였다. 도읍지인 카이펑[開封]은 인구가 100만 명에 달하였다고 하며 당시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이와 같은 대도시를 배경으로 하여 사대부들의 귀족문화가 발달하였다. 그리고 이 문화는 서민들의 생활이 향상되면서 자연히 서민층에도 확산되었다. 예컨대, 북송의 철종(哲宗) 연간에는 오늘날의 난징[南京]에 전당포·주점·잡화상 등으로 구성된 시사(詩社)가 있었다. 그들의 시(詩)가 사대부의 시와 견줄 만한 수준에 미치지 못한 것은 물론이지만, 송대의 문화가 서민계층에까지 파급되고 시작(詩作)의 저변이 확대되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며, 당나라 때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현상이다. 송대에는 귀족문화의 서민층에 대한 침투와 아울러, 서민문화가 귀족층에 끼친 영향도 찾아볼 수 있다. 도읍에는 구란(勾欄)·와자(瓦子)라는 오락시설이 있어서 잡극(雜劇)·재담(才談)·요술 따위 연희(演戱)가 서민들을 관객으로 하여 번창하였다. 잡극은 뒤에 더욱 발전하여 원곡(元曲)이 되고 사대부들도 그것을 창작하게 된다. 또한 속어(俗語)가 시문(詩文)에 사용되는 경향이 뚜렷해지는데, 이것 역시 서민문화의 영향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처럼 귀족층이나 서민층의 문화가 발전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송대에 이르러 서적 인쇄술이 비약적으로 발달함에 따라 누구나 책을 손쉽게 구할 수 있었다는 점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회화>
육조시대(六朝時代)의 서(書), 당대의 시(詩), 송대의 화(畵)라 일컬어지듯이, 송대의 그림은 중국의 역대 예술을 통해서도 눈부신 발전을 이루어 동양화 내지 중국화의 확고한 전통을 수립하고 그 진가(眞價)를 발휘하게 되었다. 송대의 회화는 북송과 남송화로 나누어지는데 이 두 가지 유파 사이에는 각각 두드러진 특징이 있다. 즉, 북송화는 궁정에 설치된 화원(畵院)을 중심으로 황실의 비호 아래 발달하였다. 당·오대(五代)에 볼 수 있었던 약동하는 묘선(描線)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감정을 억제한 냉철하고도 정확한 선을 구사하여 이지적인 화풍을 이루어 놓았다. 격조 높은 이 시대의 이상을 잘 표출한 작품으로는 휘종(徽宗)이 그린 화조도(花鳥圖) 등을 들 수 있다. 처음에 휘종이 중심이 되어 그 진용을 정비한 화원이 큰 성과를 올리게 된 것은 남송 때에 이르러서였다. 화원의 화풍에만 얽매이지 않고 화가의 독창성이 자유로이 표현되는 회화작품이 활발히 제작되었다. 마원(馬遠)·하규(夏珪)로 대표되는 수묵화를 비롯하여 이적(李迪)·이안충(李安忠) 등의 화조도에는 형식에 사로잡히지 않은 예술적인 향취가 넘쳐 흐른다. 화원에 소속된 정통파 화가 외에도 비정통파로 불릴 수 있는 화가들의 활동이 활발하였다는 사실은 송대 회화의 큰 특색이다. 특히 수묵화가 가운데는 목계(牧谿)·옥간(玉澗)과 같이 대담한 화법을 구사하면서 힘차고 청아한 화면을 구성한 화가들의 존재가 빛나고 있다. 또한 송대에는 화론(畵論)에도 빼어난 것이 많이 나왔는데, 특히 삼원(三遠:高遠·深遠·平遠)을 이론적으로 확립시킨 곽희(郭熙)와 그의 아들 곽은(郭恩)의 공저인 《임천고치(林泉高致)》는 그 대표적인 저술로서, 후대의 작화(作畵)나 화론 전개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조각>
수(隋)·당(唐) 시대 조각의 특징은 국가의 불교정책에 힘입어 웅대한 불교의 세계관을 나타내고 지배자의 권위를 과시한 대작들이 많은 데 비하여, 송대에는 불교가 일반 민중 속에 뿌리를 내리게 됨으로써 조각의 규모는 축소될 수밖에 없었지만 오히려 인간미와 서민성을 풍기는 작품들이 나타났다. 즉 수·당·오대에는 보살상(菩薩像)의 조영(造營)이 대부분이었지만, 송대에는 나한(羅漢)·관음상(觀音像)을 활발하게 제작하였으며, 당나라 불상에서 볼 수 있는 심오한 예술성이나 유연함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을지라도 어딘가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조촐한 작품들이 수없이 많다. 송대 이전에는 거대한 석굴사원(石窟寺院)의 조상(造像) 등에서 자연과 맞서는 신앙의 격렬함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있으나, 이 시대에는 흙을 빚거나 나무를 다듬어서 만든 불상이 크게 유행한 것도 하나의 특징이라 하겠다.
<공예>
오늘날 세계의 도자기 연구가들에게 송(宋)나라 도자기는 지금까지 인류가 만들어 놓은 공예품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물건의 하나라고 상찬되고 있다. 이와 같은 송나라의 도자기가 완성단계에 다다른 것은 대략 북송 중기 무렵이 되며, 그 이후부터는 차차 잡다한 요소가 섞이기 시작하면서 순수한 송나라 도자기의 아름다움은 사라져 갔다. 송나라 도자기는 청자와 백자의 두 가지로 대표되는데, 간결한 가운데에도 강인한 인상을 풍기는 조형미와 구슬을 연상시키는 자기 표면의 촉감은 달리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걸작이다.
<서예>
태종(太宗) 치세에 《순화각첩(淳化閣帖)》이 편찬되고 왕희지(王羲之)·왕헌지(王獻之)의 글씨를 비롯한 전통적인 명필들의 서법을 부흥시키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이와는 달리 채양(蔡襄)·소식(蘇軾)·황정견(黃庭堅)·미불(米? 등 4대가에 의해 지난날의 전통에서 벗어난 새로운 서법이 나타나 틀에 박히지 않고 개성이 넘치는 신선한 서풍(書風)이 널리 일반의 환영을 받았다.

<고려와의 관계>
송나라가 일어난 960년 전후의 고려는 제4대 광종(光宗)의 치세(治世)로서 대외적으로는 국경을 맞댄 중국 동북지방의 요(遼:契丹)와는 긴장관계를 지속하고 중원(中原) 국가로서는 후주(後周)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여 오다가 후주가 송나라에 멸망하자 962년 광평시랑(廣評侍郞) 이흥우(李興祐)를 송나라에 사신(使臣)으로 보내 이로부터 양국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양국은 이후 사절(使節)·예물 교환, 유학생 파견, 송상(宋商)의 출입 등으로 정치적·문화적 관계가 밀접하게 되나, 송과는 남서로 대립되어 적대관계를 가지게 되고 고려와는 남북으로 국경을 맞대어 침략세력으로 도사리고 있던 요(遼)가 고려와 송의 국교에 변수(變數)로 작용하게 되었다. 979년 요를 침공하였다가 대패한 송은 고려에 우호적 손길을 뻗쳐 986년(성종 5) 다시 대규모의 정토군(征討軍)을 일으키면서 고려에도 원병(援兵)을 청하여 군사를 발하였으나 역시 패하여, 요는 이로부터 더욱 고려와 송의 연합적 동태를 주시하면서 고려의 서북면(西北面:평북)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993년(성종 12) 거란의 제1차 침략을 받은 고려는 거란과 강화를 맺고 994년부터 요의 연호(年號)를 사용하고 이 해 6월에 성종은 요에 보복코자 사신을 송에 보내 원병을 청하였으나 출병을 거부하자 30년 만에 국교를 단절하였다. 목종(穆宗)이 즉위한 뒤 999년(목종 2)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이후 양국은 소극적이나마 교류를 하였으나 고려는 송을 거란 배후 견제세력으로 이용하려 한 것에 대해 송은 고려·요와의 문제에 개입을 회피하고 중립을 견지하였다. 거란의 제2차 침략(1010)을 거쳐 제3차 침략(1018)을 받은 고려는 거란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요의 압력에 따라 목종 이래 재개하였던 송과의 국교를 다시 단절하였다. 그러나 국교의 단절에도 여상(麗商)과 송상(宋商)에 의한 무역거래는 활발하여, 특히 송나라 상인들의 빈번한 내왕은 고려에 세계의 이질적인 문화요소를 전달하여 주었는데, 이 당시 아랍[大食國] 상인이 수삼차 고려에 내왕할 수 있었던 것도 송상의 중개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후 송나라에서는 신종(神宗)이 즉위(1067)하면서 연려대요책(聯麗對遼策)이 대두되어 고려에 국교재개를 요구하여 왔고 고려에서는 송나라의 문화를 깊이 흠모하였던 문종(文宗)이 즉위한 뒤 매우 친송적(親宋的)이어서 1071년 양국은 약 반세기 동안 단절하였던 국교를 다시 텄다. 양국의 국교는 서로 요나라의 자극을 꺼려야 하는 입장이어서 정치·군사적인 관계보다는 경제·문화적인 측면으로 기울었으나, 이 또한 요나라의 이목을 피해야 했기 때문에 왕래하는 항로도 동로(東路)에서 서로(西路)로 변경하여야 할 정도였다. 여하튼 양국의 무역거래는 1078년 송나라에서 새로 건조한 거선 2척에 막대한 예물을 싣고 고려에 보낸 이래 절정기를 맞았다. 당시 송은 무역장려책과 더불어 고려에 친선책을 써서 고려사신과 고려상인에 대하여는 극진한 우대를 하여 이들이 통과하는 연로(沿路)에는 고려관을 세워 숙식을 제공하였다. 고려에서는 예성강(禮成江)∼자연도(紫燕島:仁川)∼마도(馬島:海美)∼고군산(古群山)∼죽도(竹島)∼혹산도(黑山島)∼중국 명주(明州:浙江省密波府)에 이르는 항로를 송선이 오고갈 때 관리를 항구에 보내 이를 영송(迎送)케 하였다.


또한 야간에는 송선이 통과하는 항로 연변의 산정(山頂)에 순차로 봉화를 올려 예성강까지 인도하는 등 접대에 정성을 다하였다. 고려와 송나라는 이와 같이 국교의 단속(斷續)에 구애됨이 없이 공사무역(公私貿易)을 통해 막대한 수량의 물물을 교류하였는데, 특히 고려는 송나라의 서적을 수집하는 데 많은 힘을 기울여, 국초 이래 구경(九經)을 비롯하여 제자서(諸子書)·사서(史書)·역서(曆書)·형법서(刑法書)·의서(醫書)·도가서(道家書)·불서(佛書) 등 광범위하게 수입해서 이를 재소화(再消化)하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아 문화적인 부(富)를 축적하였다. 또한 송의 사악(詞樂)이 들어와 고려에서 송악(宋樂)이 떨쳤고, 1116년(예종 11)에는 휘종(徽宗)이 《대성아악(大晟雅樂)》을 보내와 이로부터 우리의 음악은 종래의 향악·당악에 아악이 새로운 음악으로 첨가되어 국악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요의 동태를 주시하며 국교관계를 유지한 고려와 송은 1115년(예종 15), 요군을 격파하고 쑹화강[松花江] 이동의 땅을 장악한 여진 완안부(完顔部)의 아구타[阿骨打]가 황제를 칭하고 금국(金國)을 세움으로써 다시 그 관계는 흔들리게 되었다. 금나라가 일어나자 송은 금과 연합해서 1125년 요를 멸망케 하였으나 2년 후에는 송나라 자신도 금에게 수도를 빼앗기고 휘종·흠종이 납치되어 북송시대는 막을 내리고(靖康의 變) 임안(臨安:杭州)의 남송시대가 열린다. 이를 전후해서 송은 고려에 자국의 위급을 알리고 금을 협공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금에 사대정책(事大政策)을 결정한 고려는 이를 거절하여 양국의 관계는 소원한 사이가 되었다. 송나라는 1142년 금에 세공을 바치고 신(臣)을 칭하게 되었고, 이후 고려도 주로 금나라와의 외교에 주력하게 되었다. 고려와 송나라가 주로 문화적인 교류를 하면서 서로 많은 귀화인을 맞이하여 고려에서는 이들에게 벼슬을 주어 우대하였는데, 이 중에는 문예·음률로써 이름을 떨친 사람도 많고, 남송이 멸망할 무렵에는 많은 송나라 사람이 고려에 귀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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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의 가정생활 인기글 [결혼과 음식] [가정생활] 중국의 가정은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이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A. 독신가정(單身家庭) : 한 사람만 생활한다. B. 핵심가정(核心家庭) : 부부 두 사람 및 미혼 자녀가 함께 생활한다. C. 주간가정(主幹家庭) : 부부와 미성년 자녀 외에도 노인이 있으며 3대나 4대가 함께 생활한다. D. 연합가정(聯合家庭) : 하나의 대가정에 2대 이상이 있고, 동일한 세대 속에도 2개나 3개 이상 의 소가정이 있으며 모두 함께 생활한다. 중국의 가…(2011-07-14 09:25:00)
중국 한족은 왜 붉은색을 좋아 하는가 인기글 중국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오성홍기’, 천안문광장 등 중국의 상징물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만약 중국을 다녀왔던 세심한 사람이라면 ‘중국사람들이 붉은색을 아주 좋아한다’ 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중화민족은 예로부터 황색을 고귀하고 신성한 권위의 상징으로 여겨왔다. 아울러 붉은색을 상서로움과 경사로움의 상징으로 여긴다. 이를 테면 순결하고 선량한 효자를 &lt;적자(赤子)&gt;라고 부르고 여성들의 화려한 화장을 홍장(紅裝)이라고 한다. 또한 홍안(弘顔)이라는 말도 자…(2011-07-14 09:23:40)
"만리장성 쌓은 접착제는 쌀죽" 인기글 중국 만리장성을 쌓는 과정에서 쌀죽이 벽돌 접착제로 사용됐다고 영국 데일리 텔레그래프지가 1일 보도했다. 중국 고고학자들이 시안(西安)의 만리장성 벽돌의 모르타르를 분석한 결과다. 만리장성 개.보수 작업 도중 유난히 단단하게 붙어있는 벽돌의 회반죽을 분석한 결과 중국인들이 아침식사로 즐겨 먹는 찹쌀죽과 같은 성분이란 결과가 나왔다. 시안 유적보존.복원 센터의 한 전문가는 "적외선 분석 결과 벽돌의 모르타르와 쌀이 같은 분자구조인 것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신문은 이 결과가 끈끈한 쌀죽이…(2011-07-14 09:20:11)
베이징 출신은 ‘귀족’, 외지인은 ‘떠돌이’ 인기글 중국 베이징 시민들이 외지 사람에 비해 대학입학, 취업 등에서 눈에 띄게 혜택을 받으면서도 외부인들은 ‘떠돌이’라고 부르며 차별하고 있어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현재 베이징에 살고 있는 리후에이(李輝)(43)씨는 85년 고향 푸젠(福建)에서 올라와 20년간 노력한 끝에 4개 회사와 2개의 빌딩을 가진 성공한 사업가가 됐다. 그러나 그는 요즘도 타지 출신이라는 이유로 적지 않은 차별은 받고 있다. “베이징 사람들은 저처럼 타지에서 온 사람을 피아오런(漂人, 떠돌이)이라고 부릅니다. 베이징에 2…(2011-07-14 09:18:52)
중국 가면 8 써서 팔아라 인기글 '중국시장을 숫자로 돌파하라.' 세계 소비시장 블랙홀로 떠오르고 있는 중국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숫자마케팅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지난 1월 29일 세계 최대 항공기 제작사인 보잉은 차세대 전략기종인 7E7 드림라이너(Dreamliner) 기종을 787로 명명했다. 7X7 시리즈를 선보였던 보잉에서 전략 기종에 8자를 도입한 것은 세계 항공기시장을 집어삼키고 있는 중국을 노린 전략이다. 중국에서 숫자 8(八)은 '파차이(發財)'의 '發'과 발…(2011-07-14 09:16:56)
중 소비력 미국 앞질러 1위 인기글 곡물·육류등 추월…1인당 소비는 휠씬 떨어져중국이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 소비국으로 등극했다. 이로써 중국은 자국 경제가 무서운 기세로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를 하나 더 얻게 됐다. 미국 워싱턴에 있는 지구경제연구소(EPI)는 중국의 주요 원자재와 공산품 소비가 미국을 앞섰다고 16일 밝혔다. 중국은 5대 원자재 중 석유를 제외한 곡물, 육고기, 석탄, 철강 등의 품목 소비에서 미국을 추월했다. 텔레비전, 냉장고, 휴대폰 등 주요 공산품목에서도 중국이 미국보다 더 많이 소비하고 있는 것으…(2011-07-11 09:09:04)
"폭죽 놀이는 중국의 전통" 인기글 당국이 안전상의 이유로 강력한 단속에 나섰지만 베이징(北京)에서는 중국인들의 춘제(春節. 설) 전통이 돼버린 폭죽 놀이를 막지 못했다고 상하이 영자지인 상하이데일리가 신화통신을 인용, 14일 보도했다. 특히 변호사 등 수도 베이징의 지식인들 조차도 춘제의 축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폭죽 터뜨리기에 참여하는 등 전통적인 놀이문화는 당국의 의지와 무관하게 더욱 확산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베이징 당국은 지난 1993년부터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도심지역인 4환로(四環路) 안에서의 폭죽놀이를 금지했으며,…(2011-07-11 09:07:09)
'세계의 지붕'이 녹아내린다 인기글 파미르고원·히말라야산맥 난개발로 빙하 줄어 중국인들이 ‘지구의 지붕’으로 부르는 칭짱(靑藏)고원의 빙하가 매년 급속도로 녹아내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구 온난화의 영향도 있지만 인간들의 과도한 개발이 주범으로 지목됐다.중국의 칭짱고원 생태지질환경 원격탐사팀은 1970년대 4만8859.18㎢에 달하던 칭짱고원 빙하 면적이 최근 4만4438.36㎢로 줄어들었다고 10일 밝혔다. 이는 매년 평균 147.36㎢씩 빙하 면적이 줄어든 것이다. 특히 파미르고원과 히말라야산맥, 카라코람산맥의 빙하 피해가…(2011-07-11 09: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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