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고대(고대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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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dmin| 작성일 :11-07-25 08:52|본문
◑ 중국고대
아득히 먼 옛날 중국 대지에 살고 있었던 원시인 가운데 북경 원인이 가장 오래된 인류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지금까지의 생각은 1963년 고고학자들에 의해 섬서성( 西省)에서 남전(藍田) 원인이 발견됨으로써 새로운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섬서성에서 발견된 남전 원인의 추측 연대는 무려 1백만 년 전의 것으로 4,50만 년 전의 북경 원인보다 훨씬 옛날의 것이고, 그 다음 해 운남성(雲南省)의 원모(元謀) 분지에서 발견된 이빨 두 개는 감정 결과 지금으로부터 무려 170만 년 전의 선사 시대 인간의 이빨임이 판명되었다. 이 원시인을 '원모 원인'이라 부르는데 이를 계기로 하여 한족의 최초의 역사가 이 원모 원인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이렇게 시작된 역사는 쉬지 않고 흘러 지금으로부터 거의 5,6천 년 전의 중국 대지에는 동쪽에 이족(夷族), 서쪽에 강족(羌族), 남쪽의 묘족(苗族), 북쪽에 적족(狄族)들이 각기 살고 있었다.
동쪽의 이족에는 치우(蚩尤)라는 유명한 두령이 있었는데 그는 네 개의 눈, 여섯 개의 손, 구리로 된 머리, 쇠로 된 이마를 가진 요괴스런 모습을 하고 있었으며, 사람처럼 말하고 모래나 돌 따위를 먹으며 금으로 만든 무기를 사용했다 한다. 그 위에 안개를 뿜어낼 수 있는 조화를 가지고 있어 전쟁을 할 경우 누구에게나 위협적인 인물이었다.
황하 중류 일대에 사고 있던 강족 가운데도 공공(共工)이라는 뛰어난 두령이 있었다. 강족들은 이따금 홍수를 일으켜 하류에 살고 있는 이족을 괴롭혔다. 화가 난 이족의 두령 치우는 그의 독특한 신체적 조건과 안개를 뿜는 조화를 부려 공공 일족을 마구 두들겨 부수니 공공은 화가 나 그의 머리로 부주산(不周山)을 들이받았다. 그러자 하늘을 떠받치고 있던 기둥이 부러지고 땅을 얽어매고 있던 밧줄이 끊어지면서 땅 덩어리가 기울어져 이 때부터 중국의 지형이 서북쪽은 높아져 산이나 고원 지대가 되고 동남쪽은 우묵해져 평야 지대가 되었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로 삼황(三皇)시대 복희씨(伏羲氏)의 뒤를 이은 여와씨(女 氏) 시대에.
"하늘을 받치고 있던 네 기둥이 무너지면서 천지가 무너지고 불기둥이 치솟고 홍수가 범람하였으며 맹수들은 양민을 잡아먹고 맹금은 노약자를 채가는 등 아주 혼돈한 세상이 되어 버렸다. 이에 여와씨는 오색의 돌을 갈아 하늘을 짓고 큰 거북의 다리를 잘라 네 기둥을 세우고 흑룡을 죽여 기주(冀州)를 건너고 갈대의 재를 쌓아 홍수를 막았다." 한다.
질서를 잃은 혼돈의 세계를 그의 노력으로 원상 복귀시켰다는 일종의 천지 창조와 비슷한 이야기이다.
여와씨는 다음에 염제(炎帝) 신농(神農)씨의 천하가 8대 530년 동안 계속되다가 오제(五帝)의 첫째 황제(黃帝) 헌원(軒轅)의 천하가 되었다.
옛날부터 중국의 역사는 삼황(三皇)·오제(五帝)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다. 삼왕은 복희씨(伏羲氏)·지황(地皇)씨·여와씨(女 氏)·신농(神農)씨, 혹은 천황씨(天皇氏)·지황(地皇)씨·인황씨(人皇氏)로 기록되어 있으며 여와씨 대신 축융(祝融) 또는 수인으로 기록한 문헌도 있다.
사기의 저자 사마천(司馬遷)은 삼황의 시대는 잘라 버리고 오제본기(五帝本紀)로부터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삼황 시대를 역사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제란 황제(黃帝)·전욱( 頊)·제곡·제요(提要)·제순(帝舜)을 말한다.
황제의 물결이 유유히 흐르는 황하와 그 주변을 메운 비옥한 황토의 평야, 이것은 고대 중국의 풍요로움을 상징한 것이다. 황제가 노란빛의 나라인 중국의 첫째 제왕으로서 중국 민족의 숭앙의 대상이 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황제는 유웅국의 임금 소전(少典)의 아들로서 나면서부터 신령스럽고 총명하여 태어난 지 칠십 일이 채 못되어 능히 말을 하였고 모르는 것이 없었다. 나이가 들어 장성하매 더욱 총명하고 민첩하여 주위 사람들의 촉망을 받았다.
당시 여러 제후들은 서로 침략을 일삼아 백성들을 괴롭혔으나 여러 제후의 맹주격인 염제 신농씨의 힘이 미약하여 이를 능히 평정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은 괴로운 생활을 보내야 했다.
이에 황제 헌원은 처음으로 창과 방패를 만들어 침략을 일삼는 제후들을 징벌하니 제후들이 모두 그의 곁에 모여 그를 따랐으나 치우만은 정벌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되자 맹주의 자리를 도로 찾기 위하여 염제 신농은 제후들을 괴롭히거나 침략하였다. 마침내 황제와 염제는 무력에 호소하여 판천에서 자웅을 겨루게 되었다.
처음에는 쌍방이 모두 고전하였으나 3번의 싸움 끝에 황제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가장 포악하기로 이름난 치우가 반란을 일으켰다. 치우는 싸움에 유리한 요괴스럽고 독특한 신체적 조건을 이용하며 황제를 괴롭히니 처음에는 황제가 불리하여 탁록까지 후퇴하였다. 황제는 제후들의 군사와 연합하여 탁록에서 치우와 결전을 벌였다. 치우는 짙은 안개에 대비하여 지남차(자석이 달린수레)를 발명하였기 때문에 안개 속에서도 치우가 있는 곳을 탐지할 수 있었다. 격전 끝에 황제의 연합군이 대승을 거두었고 치우는 사로잡혀 죽음을 당하였다. 이에 황제의 명성이 크게 떨쳐 중원의 제후들은 모두 황제를 '천자'로 추대하기에 이르렀다.
황제는 천자가 된 후 배와 수레를 발명하고 집을 짓는 법과 옷짜는 일을 발명했으며 약초를 조사, 분석하여 의료기술을 폈다. 또 창힐에게 명하여 문자를 제작하게 하고 영륜에게는 악기, 대요에게는 십간 십이지를 만들게 하였고, 부인인 유조는 누에 치는 법을 가르쳤다 한다.
이 때에 이르러 천하는 잘 다스려지고 백성들은 안락한 생활을 누리게 되었다. 황제는 장기적이고 대규모적인 전쟁의 승리자가 됨으로써 지금까지 폐색되었던 씨족 사회의 한계를 타파하고 각 씨족간의 융합이 이루어져 한족의 옛 전신인 화하족이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런 사실 때문에 후세 사람들은 황제를 화하족의 시조로서 숭앙하고 모든 문물과 제도의 확립을 모두 황제의 공적이라 하여 황제를 '문명의 개조'라 칭송하고 있다.
황제는 죽은 후 섬서성에 묻혔다고 전해지고 있다. 황제의 능이 있는 고을
이름은 황제의 이름을 따 황릉현이라 불리고 있다.
예로부터 전해 오는 전설에는 신화적인 색채가 짙은 것이 사실이지만, 황제의 역사를 자세히 검토해 볼 때 그 때까지 없었던 일련의 놀랄만한 전쟁은 전혀 터무니없는 허구(虛構)가 아님을 충분히 이해하고 짐작할 수 있다.
황제의 시대가 지나자 중국의 역사는 원시적 씨족 공동체가 무너지고 노예제가 싹트기 시작하여 계급이 없는 사회에서 계급이 있는 사회로 이행(移行)하는 대 변혁의 시대로 들어서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