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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고대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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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dmin| 작성일 :11-07-28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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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漢)

진(秦)에 이어지는 중국의 통일왕조(BC 202∼AD 220). 왕망(王莽)이 세운 신(新:8~22)나라에 의하여 잠시의 중단이 있어, 그 이전에 장안(長安)을 수도로 하였던 한을 전한(前漢:西漢), 뤄양[洛陽]에 재건된 한을 후한(後漢:東漢)이라고 한다.

 <역사의 개설>
한왕조의 창시자는 진말(秦末)의 반란 지도자의 한 사람인 유방(劉邦:高祖)이다. BC 206년 진이 타도되자 반란의 통일적 지도자 항우(項羽)는 그를 한왕(漢王)으로 봉하였으나, BC 202년에 항우를 타도하여 황제의 자리에 올라 장안을 수도로 하고 중국을 통일하였다. 한왕조는 기본적으로는 진(秦)나라의 국가체제를 계승하여 전국통치의 조직은 군현제를 기본으로 하였다. 그러나 한왕조의 수립은 진말의 난 이래의 여러 집단의 지도자와 유방 직속 부하들의 협력에 의한 것이어서, 유방은 이들 공신(功臣)과 그의 일족을 제후왕·열후(列侯)로서 각지에 봉건하였다. 한(漢)의 군현과 봉건 병치제도를 군국제(郡國制)라고 부르는데, 유방의 치세 중에 공신인 왕들은 모두 멸망하고, 왕은 결국 유씨 일족(劉氏一族) 출신자에 한하는 것이 한왕조의 정제(定制)가 되었다. 한나라의 봉국(封國)은 춘추시대 이전의 제후의 씨족적 결합을 기초로 한 읍(邑)과는 성질이 다르지만, 제후왕은 중앙관제와 유사한 관제를 가지며, 한대(漢代) 초기에는 자립적 경향이 있었다. 유방이 죽은 뒤 황후 여씨(呂氏)와 그 일족에 의한 궁정정치의 일시적 혼란이 있었으나, 문제(文帝)·경제(景帝)의 시기에 한왕조의 지배체제가 안정을 되찾게 되자 제후왕의 봉토삭감 정책이 취하여져, BC 154년에 일어난 오초 7국(吳楚七國)의 난 후에 경제는 제후왕의 세력을 삭감하였으며, 무제(武帝) 때 제후왕은 봉국에 대한 통치의 실권을 완전히 잃어 군국제는 내용면에서는 군현제와 똑같은 것이 되어, 한왕조의 중앙집권적 전제통치의 체제가 완성되었다. 한편, 무제 시대에 한제국은 대외적으로 크게 영토를 확대하였다. 북방의 흉노에 대하여 초기에는 유화정책을 취했으나, 여러 차례 원정을 실시하여 그 세력을 고비사막 이북으로 물리쳤다. 동방으로는 한반도에까지 진출하여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고, 또 남방으로도 출병하여 한나라의 영토는 안남에까지 미치어, 일남군(日南郡) 등의 9개군을 설치하였다. 서방에서는 장건(張騫)의 원정을 계기로 서역(西域) 제국을 복속시키고, 중국과 서방과의 교통로인 이른바 ‘실크로드’가 개척되었다. 이와 같이 무제의 치세는 사상 최대의 대제국이 건설된 전성기였으나, 반면에 제국(帝國)의 모순이 표면화하기도 하였다. 특히 대규모의 원정, 토목사업, 궁정의 사치 등으로 국가재정의 파탄을 초래하자 이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증세(增稅), 화폐제도의 개선, 소금·철·술의 전매제, 균수법(均輸法)·평준법(平準法)에 의한 상업관영(商業官營) 등의 재정정책이 취하여졌다. 이 정책은 재정의 불균형을 구하는 효과는 있었지만, 주로 농민에게 과중한 부담이 되어 사회적 모순이 심화되었다. 따라서 소제(昭帝)·선제(宣帝) 시대에는 지방통치를 중심으로 한 내정의 안정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한편, 무제의 장기에 걸친 독재적 통치기간 중에 3공(公)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정부 기관이 명목화하게 되고, 황제 측근자들이 정치의 실권을 잡는 경향이 생겼다. 특히 원제(元帝) 이후는 외척(外戚)·환관(宦官) 등 근신(近臣)이 항상 국정의 실권을 잡게 되어 궁정정치는 급속히 부패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외척(外戚) 왕망(王莽)이 8년에 평제(平帝)를 독살하고 제위(帝位)에 올라, 국호를 신(新)이라 하고 한왕조는 일단 멸망하였다. 왕망은 《주례(周禮)》에 기록된 이상화된 주나라의 여러 제도를 현실화하려는 공상적이며 졸속한 개혁을 단행하였으므로, 정치적·사회적 모순이 폭발하고, ‘적미(赤眉)’ 등의 농민집단과 호족(豪族) 세력의 반란에 의하여 재위 15년 만인 22년에 멸망하였다. 왕망 말기 반란의 지도자층 가운데서, 경제(景帝)의 6대 자손인 유수(劉秀)가 남양(南陽:河南) 호족연합의 지도자로서 두각을 나타내어, 농민 집단이나 호족의 자립세력을 평정하고, 25년 뤄양[洛陽]을 수도로 하여 후한(後漢)을 재건하였다. 그가 곧 광무제(光武帝)이며, 유교를 국교로서 확립시키고 군병(郡兵)을 폐지하는 등의 개혁으로 통일제국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한나라는 명제(明帝)의 치세부터 재차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취하여 북방으로는 북흉노를 압박하고, 화제(和帝) 때에는 한제국(漢帝國)의 지배권이 파미르고원을 넘어, 카스피해(海) 이동에 있는 동서 투르키스탄의 50여 개의 서역국가군(西域國家群)까지 확대되었다. 그러나 화제 이후의 황제는 어려서 즉위하였을 뿐만 아니라 단명하였으므로, 또다시 외척과 환관이 권력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경향에 대하여 기골 있는 관료나 학자의 일파가 환관의 권력 독점에 대한 비판을 전개하였지만, 두 번에 걸쳐 탄압을 당하였다. 그 사건을 ‘당고(黨錮)의 옥(獄)’이라 하며, 그 후 궁정정치는 혼란을 거듭하고 후한왕조는 소농층(小農層)의 몰락, 호족세력의 발전 등의 사회적·정치적 과제에 대처하는 통치 능력을 상실하였다. 호족은 전한시대부터 사회적 세력을 확대하고, 후한의 재건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므로 후한은 호족의 정권참가로써 지탱되고 있었다. 유교 국교화의 강화도 호족층이 자체결합의 근거를 유교에 구하였던 것과 관계가 있다. 그들은 효렴(孝廉) 등의 관리임용제도를 통하여 중앙관료에의 길을 확보하였으며, 지방에서는 소유지를 확대하여 소농층을 지배하에 편입하였다. 그 결과 황제통치의 기반인 농민층은 축소되고 호족층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이 감퇴되었다. 이와 같은 정치적·사회적 모순의 누적 끝에 일어난 것이 황건(黃巾)의 난으로서, 도교(道敎)의 시초인 태평도(太平道)의 주창자 장각(張角)이 수령이 되어, 184년 빈농을 중심으로 하는 대규모의 농민반란을 일으켰다. 황건의 난 진압과정에서, 각지에 정치적·군사적 자립세력이 호족세력과 결탁하여 급격히 성장하였다. 그 중의 한 사람인 원소(袁紹)가 궁정의 환관을 절멸시켰으나, 그 후로는 원소·동탁(董卓)·손책(孫策)·조조(曹操)·유비(劉備) 등의 군웅이 할거함으로써, 후한 제국은 완전히 분열되었다. 후한 최후의 황제인 헌제(獻帝)를 옹립하여 하북(河北)을 지배하던 조조의 아들 비(丕)는 220년, 헌제를 강박하여 제위를 물려받고, 위(魏)왕조를 창시함으로써 후한은 멸망하고, 3국시대가 시작되었다.

  <정치>
  한왕조는 진나라가 세운 황제의 직접통치에 의한 전제적 관료국가의 체제를 계승하였다. 따라서 중앙과 지방의 관제는 진제(秦制)를 답습하였다. 중앙관제로는 황제 밑에 3공(公)이 있어, 승상(丞相)은 황제를 보필하여 백관을 통솔하고, 태위(太尉)는 당시 상설의 관(官)은 아니었으나 군사를 담당하고, 어사대부(御史大夫)는 감찰관인 어사를 통솔하는 한편 부승상(副丞相)으로서 행정에도 참여하였다. 3공 밑에 중앙행정을 분담하는 관서로 태상(太常:禮儀祭祀)·광록훈(光祿勳:宮廷護衛)·위위(衛尉:宮門守備)·태복(太僕:帝室의 車馬管理)·정위(廷尉:司法)·대홍려(大鴻'A:諸侯 및 外國의 來朝)·대사농(大司農:국가재정)·종정(宗正:皇族關係)·소부(少府:帝室財政) 등 9시(寺)가 있었다. 9시의 장관을 구경(九卿)이라 하고, 집금오(執金吾:수도의 치안)·장작대장(將作大匠:토목공사)·대장추(大長秋:皇后職∇宮職)를 더하여 12경(卿)이라고도 불렀다. 군(郡)은 지방통치의 중심기관이었으며, 그 장관으로 태수(太守), 군사지휘관으로 위(尉)를 두었다. 태수 밑에 부관으로서 승(丞)이 있고, 수(守)·승(丞) 밑에 지방행정의 실무를 담당하는 공조(功曹)·연사(椽史) 등의 속관이 있었다. 공조는 그 지방의 호족 출신자가 임명되었으며, 지방행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군(郡)은 현을 통할하였으나, 현에도 영(令)·장(長)·위(尉)가 임명되고, 군과 똑같은 하부기구가 있었다. 현(縣)의 통할하에는 향(鄕)과 정(亭)이 있었으며, 향에는 유질(有秩)·색부(嗇夫)·유요(游)가 임명·파견되어, 호적·징세·요역(役) 등을 담당하고, 정에는 정장(亭長)이 있어 경찰업무를 담당하였다. 현·향·정은 성곽으로 둘러싸인 도읍으로서 공통의 성격을 가진 취락으로, 춘추시대 이전의 읍이 그 기원이 된 것이 많았으나, 진(秦)·한(漢)의 형성과 함께 치수 관개기구의 정비로 개척이 진행된 화북평원(華北平原) 등에 새로 건설된 현이 상당수가 있어 현은 전제제국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현·향·정 등의 도읍(都邑)은 약간의 이(里)로 구분되고, 이것이 일반 양민의 거주지구였다. 따라서 이는 종래와 같은 자연부락이 아니고, 이에는 이민(里民) 출신의 이부로(里父老)가 있어 그 유력자를 현·향 등의 삼로(三老)로서 교육을 담당케 하였다. BC 106년 국토를 13개주로 나누고, 자사(刺史)를 파견하여 군태수(郡太守) 이하에 대한 감찰을 행하였다. 후한(後漢)에서는 자사가 지방장관의 실질적 역할을 하게 되었고, 주(州)는 군·현의 위에 위치하는 지방통치의 단위가 되었다. 한제국에서는 군·현 이외에 제후의 나라가 있었고, 경제·무제의 억압정책으로 군국제(郡國制)가 실질적으로는 군현제(郡縣制)가 되었다. 이상과 같이 한제국은 전제적 통치기구에 의하여 농민에 대한 직접적이며 개별적인 인신지배(人身支配)를 실현하였고, 각종 조세와 요역을 부과하였다. 조세 중에서 전조(田租)는 그 토지의 수확량에 일정률을 부과하는 것이 원칙으로, 고조(高祖) 때에는 15분의 1, 이후 수차의 변경을 거쳐 경제(景帝) 때인 BC 156년에는 30분의 1로 정해졌다. 후한에서는 30년부터 30분의 1이 정제(定制)로 되었다. 그러나 이 정률제(定率制)는 현실의 운용면에서는 토지면적에 대한 수납액이 정하여져 정액제(定額制)가 실시되었다. 조(租)라고 부르는 조세에는 시조(市租:商業稅)·해조(海租:漁業稅) 등이 있었다. 인두세(人頭稅)로는, 산부(算賦)는 15∼56세의 남녀에게 1산(算:120錢, 상인과 노비는 배액)을 부과하고, 구전(口錢)은 3∼14세의 남녀에게 23전을 부과하였다. 그밖에 재산세로서 자산(算:算緡錢)이 있는데, 1만 전(錢)에 대하여 1산(算:120錢)을 부과하였으며, 무제 때 상공업자의 자산이 특히 중과(重課)되었다. 농민이 부담한 요역으로는 노역(勞役)과 병역(兵役)이 있는데, 노역은 15∼56세의 남자가 매년 1개월, 거주 군·현의 노역에 동원되었으며, 이것을 경졸(更卒)이라 하였다. 실역(實役)에 종사하지 않을 경우는 경부(更賦)라 하여 300전(錢)을 대납케 하고, 경부는 후에 상제(常制)의 부담으로 전환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상의 조세 가운데 전조·산부·경부 등은 대사농(大司農)이 수납하여 국가재정에 편입시키고, 시조·구전 등은 소부(少府)에 수납하여 제실(帝室)재정의 수입으로 하였다. 한나라의 병제는 징병제로서 병역은 요역의 일종으로 23∼56세의 강건한 남자에게 일률적으로 부과하였다. 재역기간 중, 1년은 출신지 군(郡)에서 군병(郡兵)으로 복무하고, 1년은 황제의 근위군, 수도의 수비대 병사로서 복무하든가, 변경의 정졸(正卒:實役에 복무하지 않을 경우에는 免役錢 징수)로서 복무하였으며, 잔여기간은 출신지에서 연 1회의 도시(都試:군사훈련)가 부과되었다. 후한은 군병제(郡兵制)를 폐지하여, 일반농민은 병역의 실무가 사실상 해소되고, 특정한 가족에게 영구적인 병역이 부과되기 시작하였다.

  <사회·경제>
  한나라 때에 사회의 기초적인 구성원은 농민이었다. 그들은 오구가(五口家:다섯 식구)와 같이 소형의 가부장적인 가족을 구성하여 자영농업을 영위하는 소농민이었으며, 군현제를 통하여 국가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았다. 그 거주구(區)는 군현제하의 이(里)이지만, 농민은 원칙적으로 모두 국가로부터 작위(爵位)를 받아서 이내(里內)의 신분질서를 형성하고, 그것을 매개로 하여 황제 지배하의 국가질서 내에 조직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나라는 각종 조세·요역 등의 부담의 중압으로 농민층의 빈곤화가 진척되고, 이와는 반대로 호족층은 더욱 세력이 신장되어 대토지 소유자가 되고, 농민은 소작인이나 노비로 전락하여 그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게다가 상인·고리대금업자의 활약으로 이 농민층은 더욱 몰락하게 되었다. 상품생산과 판매에 종사하는 상공업자는 도시의 시(市:市場)라고 부르는 상업구역에서 영업하며 시적(市籍)에 등기되어 시조를 부담하고, 법률적으로는 농민보다 한 단계 낮은 신분적인 지위에 있었다. 최하층의 신분으로서는 관유(官有)·사유(私有)의 노비가 있어 이들은 매매의 대상이 되었다. 노비의 일부는 수공업 등에 사역되는 경우도 있었으나, 한대(漢代)의 많은 생산부문에서 노비가 직접적인 생산자의 주요부분을 차지한 경우는 적었던 것 같으며, 대부분은 가내의 잡용이나 기타 비생산부문에 사용되었다. 한대의 중국은 철제농구의 전면적인 보급, 우경(牛耕)의 일반화와, 통일 전제제국에 의한 치수·관개시설과 기구(機構)의 정비에 따라 농업생산력이 현저하게 증가하였으며, 전한의 대전법(代田法), 후한의 구종법(區種法) 등의 농경기술의 개발도 진척되었다. 한대 농업의 중심은 치수관개가 잘 된 화북(華北)에서의 보리·조 등이 주요작물이고, 강남 저습지대의 벼농사는 기술적으로 아직 발달하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한대는 전국시대에 성장한 수공업이 더욱 발전한 시대이다. 한대의 수공업에는 농민 및 호족층의 자급자족적인 가내수공업도 있었으나, 중요한 경향은 민간수공업자의 상품생산의 발전이다. 철기 수공업과 염엄(鹽業)은 특히 발전하여 대상인에 의한 대규모의 경영이 출현하였고, 기타 청동기 수공업·칠기 수공업·섬유 염색 수공업·양조업·식품가공업·피혁업 등이 번영하였다. 또한, 한대는 대규모의 관영 수공업이 출현하였는데, 대부분은 소부가 관할하였지만 무제 때에는 소금·철·술의 전매제가 시행되어 대사농(大司農)이 관할하였다. 상업의 중심은 도시에 설치된 시(市)이며, 점포는 시내에서 업종별로 나뉘어 배열되고, 이것을 사(肆)라고 불렀다. 도시에서는 시사(市肆)에 점포를 가진 좌상(坐商)이 일상적인 상품매매에 종사하였으나, 각 지역간 또는 도시간의 원격지 교역도 번영하여, 이에 종사하는 대상인·상려(商旅)가 출현하였다. 외국무역도 사상 최초의 번영을 보였으며, 그 중에서도 서역무역이 가장 유명하였으나, 북변에 설치된 관시(關市)에 의한 북방유목민과의 무역,
쓰촨성[四川省] 방면을 경유하는 서남의 오랑캐·인도 등과의 무역, 광저우[廣州]를 거점으로 하는 남해무역도 번영하였다. 상업의 번영에 대응하여 화폐의 유통도 활발하였으며, 화폐경제가 농민의 일상생활에까지 침투하여 통화제도가 확립되었다. 한대의 주화는 무제 때인 BC 119년에 오수전(五銖錢)이 제정되었으며, BC 113년 이후는 상림(上林)의 3관(官)에서 관주전(官鑄錢)이 나와 당(唐)나라의 개원통보(開元通寶)가 제정되기까지 중국 화폐의 기본형식이 되었다.

  <문화>
  한나라 문화는 춘추전국시대에 형성된 각 분야의 문화를 보다 발전시키는 동시에, 그 후 중국의 전통적 문화의 기본적 양식으로 형성된 것이 많아, 한나라가
중국문화사에서 차지하는 지위는 매우 중요하다. 학술·사상의 분야에서는 전한 전반기(前半期)는 도가사상과 법가사상, 특히 후자가 전제적 통치의 현실면에서 지도이념으로서의 지위를 차지하였다. 무제의 치세에 동중서(董仲舒)의 헌책(獻策)으로 오경박사(五經博士)가 설치되어 유교의 국교화가 비롯되었다. 이런 경향은 원제(元帝)의 시기부터 결정적으로 되어, 유교는 국가통치·사회질서의 기본적 이념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고, 후한시대로 계승되었다. 전한시대의 학자는 옛 경문(經文)의 복원(復原), 정본(定本)의 작성에 노력하여, 경전을 금문(今文:漢代의 書體)·고문(古文:先秦時代의 옛 書體)의 2계통의 경서(經書)로 성립시켰다. 후한시대에는 마융(馬融)·정현(鄭玄) 등의 학자에 의하여, 고전의 주석에 전념하는 훈고학(訓學)이 발전하였다. 사학(史學)에서 한대는 명확한 역사적 의식으로 편집된 사서(史書)가 출현했던 시대이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반고(班固)의 《한서(漢書)》는 그 대표작으로서, 이후의 중국 정사(正史)의 기본형식이 확립되었다. 과학적 지식의 분야에서도 진보와 그 체계화가 이루어졌는데, 유흠(劉歆)의 《삼통력(三統曆)》은 중국의 천문학·역법(曆法)의 틀[型]을 만들었으며, 수학의 저작으로서 《구장산술(九章算術)》, 의학을 체계화한 《상한론(傷寒論)》 《황제내경(黃帝內經)》 등은 특히 유명하다. 문학분야에서는 《사기(史記)》와 《한서(漢書)》가 한대 산문학(散文學)의 대표적인 거작이다. 운문학(韻文學)에서는 전국시대에 비롯된 초사(楚辭) 등의 흐름을 채택한 사부(辭賦)와, 궁정문학으로서 악부(樂府)의 양식이 나타났다. 미술·공예 대부분은 예속적 직인층(職人層)에 의하여 제작(制作)되었다고 생각되나, 이 분야에서도 현저한 전진이 있어, 중국의 전통적인 기본 양식으로 형성된 것이 많다. 회화(繪畵)에는 칠화(漆畵), 고분벽화 등이 있으며, 조소(彫塑)에는 화상석(畵像石)이나 이상(泥像) 등이 있다. 서(書)는 한대에서는 예서(隸書)가 정식 서체로서 중시되었으나, 해서·행서·초서 등의 서체도 생겨났으며, 후한 말에는 장지(張芝)에 의하여 고유의 서예(書藝)가 형성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또, 공예도 동기·칠기·도기·직물 등의 기술과 양식에 현저한 진보가 있었다.

  <공예>
  한대의 미술은 국가적인 통제가 강하였다. 그러나 미술의 발전을 위축시키기는커녕 오히려 큰 조직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양산(量産)하고, 단순한 형식 속에서도 층이 두텁고 깊이 있는 표현을 창조하였다. 중앙과 지방에 공예품을 제작하는 공방이라 할 만한 공관(工官)이 만들어졌다. 제도(帝都)에서는 고공실(考工室)·동원장(東園匠)·상방(尙方)이라고 하는 관제 공방이 있었다. 고공실과 상방은 오로지 제실용(帝室用)의 여러 기물(器物)을 만들고, 동원장에서는 능묘에 부장되는 명기류(明器類)를 만들었다. 은(殷)·주(周) 시대의 공예품은 제례용구가 대부분을 차지하였으나, 한대에서는 일상용구의 제작이 많아졌다. 그러나 이것도 일반 서민이 쓰던 기구라고는 보기 어려우며, 제왕 주변의 특수계급의 사람들이 사용하던 것이 대부분이었다. 공예 가운데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동기이다. 은·주의 초자연적·주술적인 형태가 여기에서는 지극히 인간적인 생활의 용구로서, 신선한 생명력이 주입되었다. 신(神)의 용품이던 것이 인간의 용품으로서 새로운 사명을 지니게 된 것이다. 박산로(博山爐:山東省 靑州의 산을 본딴 향로)·촛대·초두(뺅?음식물을 데우는 容器)·대구(帶鉤:혁대 고리) 등에 정교한 기법을 구사한 일품(逸品)이 많다. 동경(銅鏡)도 이 시대에 수작(秀作)이 많아 신선문(神仙文)·기하문(幾何文)·신수문(神獸文) 등을 곁들인 것이 있고, 또 금은 상감(象嵌)의 기술을 응용한 것도 있다. 칠공예품도 한대 공예의 일품에 속한다. 제법에도 몇 종류가 있어, 목심칠(木心漆), 건칠(乾漆), 대[竹]를 엮어서 틀을 만들고 옻칠을 두껍게 입힌 남태칠기(藍胎漆器)와 토기에 칠을 입힌 것 등이 있다. 한국의 낙랑군(樂浪郡) 유적에서 발견된 것이 그 좋은 예이다. 옥기도 중국 특유의 산물인데, 주대(周代)에 이미 관영의 제조소가 있었으며, 한대에는 귀족의 의례적 필수품으로서뿐만 아니라, 일반의 장식품으로서 패옥(佩玉)·옥즐(玉櫛)·옥부(玉斧)·옥배(玉杯) 등이 만들어졌다. 명기는 무덤 속에 사자(死者)와 함께 넣기 위하여 특별히 만든 채색도자기인데, 사람의 형태를 취한 것을 용(俑)이라고 한다. 용 이외에도 조수(鳥獸)를 비롯하여 말이나 소를 나타낸 것에 걸작이 있으며, 사자가 생전에 살았던 것으로 보이는 주택건축이나, 양·멧돼지 등의 명기도 있다. 이들 명기는 조각으로서 보더라도 조형성이 뛰어난 것이며, 소박한 가운데서도 한대 장인(匠人)의 생명과 역량을 잘 나타내고, 또 당시의 생활습속을 구체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도자기도 한나라는 다음 시대인 육조(六朝)와 함께 그 초창기에 해당하며, 당(唐)·송(宋)시대가 동양 도자기사(陶瓷器史)의 백미(白眉)를 이룬다면 한대는 그 선구(先驅)라 할 수 있어, 이 시대에 이미 높은 화도(火度)로써 용해시키는 유약, 즉 고열유(高熱釉)가 사용되었다. 이때의 도기는 동기 같이 묵직하게 생긴 중후한 형태의 것이 많았다. 염직은 문헌에 보이는 것과 한대의 유적에서 출토된 유품을 비교하여 대체로 짐작할 수 있다. 수(繡)·금(錦)·기(綺)·능(綾)·나(羅)·문직(紋織) 등 기법적으로 상당히 뛰어나, 그 중에는 당대(唐代)의 그것과 다를 바 없는 것도 있다.

  <회화>
회화라고 하여도 오늘날 볼 수 있는 한대의 유품은 전(塼)이나 능묘의 벽면에 새겨진 화상석(畵像石)이 주된 것인데, 그들에게서 볼 수 있는 자유분방한 필치는 중국 회화를 발전시키는 풍요한 기반을 이루고 있다. 특히, 선묘(線描)를 중히 여긴 이 시대의 필법은 선(線)의 예술이라고 불린 중국화의 선구를 이루고 있다. 인물·풍경·동물·화훼(花卉)·신선 등 모든 분야에 미치고 있어, 중국미술의 한없는 깊이와 풍요함을 절실히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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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경제동향 목록

중국경제동향 목록
원시사회(고대사) 인기글 고고자료에 의하면, 대략 100만년 이전에 중국에는 이미 원시인류가 있었다. 운남성(雲南省) 원모(元謀)에서 발견된 원인 화석 "원모인(元謀人)"과 섬서성(陝西省) 남전(藍田)에서 발견된 원인 화석 "남전인(藍田人)"은 중국 최초의 원시인류로 알려져 있다. 대략 4 5십만년 이전에 북경 주구점(周口店) 일대에서 생활한 원인인 "북경원인(北京猿人)"은 이미 직립 보행할 수 있었으며, 간단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고 불을 이용함으로써 사람의 기본적인 특징을 구비하고 있었다.그 후 중국의 원시인류는 모계…(2011-08-01 09:22:01)
오대송원(고대사) 인기글 907년부터 오대십국(五代十國)의 분열 국면이 거의 60연간 지속되었으며, 960년에 중국은 다시 통일을 이룩하면서 송(宋)왕조가 건립되었다. 이후로 중국은 비록 계층간의 갈등과 민족적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계속하여 왕조가 교체되긴 하였지만 이전과 같은 그러한 대분열의 혼란 국면은 발생되지 않았는데, 이것은 많은 왕조들의 흥망이 반복되는 과정을 거치는 동안 중국은 이미 확고한 통일의 기초를 다짐으로써 더 이상 동요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대십국(五代十國)으로부터 송(宋) 요(遼) 금(…(2011-08-01 09:21:01)
삼국수당(고대사) 인기글 위(魏) 촉(蜀) 오(吳) 삼국의 정립에서 진(晉)의 통일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남북조(南北朝)의 대치로부터 수(隋) 당(唐)의 통일에 이르기까지, 약 700년간(220 907) 중국은 기본적으로 반은 분열되고 반은 통일되어 있었는데, 이러한 분열에서 통일로 향하는 상황은 중국의 봉건사회가 진(秦) 한(漢) 이래의 공고화에서 발전과 흥성으로 향하는 시기이기도 하다.위 촉 오 삼국이 정립한 국면은 220년부터 280년까지 60년간 지속되었다가 최후에 사마(司馬)씨에 의해 통일되었다. 이리하여 진(晉…(2011-07-28 09:34:10)
명청시대(고대사) 인기글 1368년 주원장(朱元璋)이 명(明)왕조를 건립한 후에 중국은 또다시 한인(漢人)의 통치를 회복하여 276년간 지속되다가 명대 말기에 이자성(李自成)이 이끄는 농민봉기가 발발하였다. 1644년에 명왕조가 농민봉기에 의해 심각한 타격을 받고 있을 무렵, 날로 강성해진 동북의 소수민족인 만주족이 기회를 틈타 산해관(山海關)으로부터 북경을 공격하여 명왕조를 붕괴시키고 청(淸)왕조를 건립하였다. 청왕조는 중국 역사상 마지막 봉건왕조가 되었으며, 1911년 손문(孫文)을 중심으로 한 혁명파의 "신해혁명(辛…(2011-07-28 09:33:00)
[열람중]한나라(고대력사) 인기글 ◑ 한(漢)진(秦)에 이어지는 중국의 통일왕조(BC 202∼AD 220). 왕망(王莽)이 세운 신(新:8~22)나라에 의하여 잠시의 중단이 있어, 그 이전에 장안(長安)을 수도로 하였던 한을 전한(前漢:西漢), 뤄양[洛陽]에 재건된 한을 후한(後漢:東漢)이라고 한다. &lt;역사의 개설&gt;한왕조의 창시자는 진말(秦末)의 반란 지도자의 한 사람인 유방(劉邦:高祖)이다. BC 206년 진이 타도되자 반란의 통일적 지도자 항우(項羽)는 그를 한왕(漢王)으로 봉하였으나, BC 202…(2011-07-28 09:25:41)
하나라(고대력사) 인기글 ◑ 하(夏)왕조 중국 전설상의 가장 오래 된 왕조로는 하를 말하고 있다.하와 그에 이어지는 은(殷)·주(周)를 합하여 3대라고 통칭하며, 옛 중국에서는 이상적 성대(聖代)로 불려왔으나, 명확한 유적·유물이 남아 있는 것은 은나라 이후이다. 하왕조(夏王朝)의 시조 우(禹)는 황허강[黃河]의 홍수를 다스리는 데 헌신적으로 노력하여 그 공으로 순(舜)이 죽은 뒤, 제후의 추대를 받아 천자가 되었다고 한다. 순 임금은 외아들 상균을 두었지만,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물려주었듯, 덕망이 높은 우에게 천자자리…(2011-07-28 09:24:19)
춘추전국(고대력사) 인기글 ◑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BC 8세기에서 BC 3세기에 이르는 중국 고대의 변혁시대. 주(周)나라 제13대 평왕(平王)이 낙양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부터를 동주시대라 하고 동주시대를 다시 춘추 시대와 전국 시대로 나눈다. 춘추시대의 시초는 BC 770년, 주(周)왕조가 뤄양[洛陽]으로 천도한 후로, 노(魯)나라의 연대기 《춘추》의 최초의 해(BC 722)라고 한다. 전국시대의 시초는 진(晉)의 유력 귀족인 한(韓)·위(魏)·조(趙) 3씨가 실권을 잡은 해(BC 453), 또는 이 3씨가 정식 제…(2011-07-28 09:23:26)
청나라(고대력사) 인기글 ◑ 청(淸) 명(明)나라 이후 만주족(滿洲族) 누르하치[奴兒哈赤]가 세운 정복왕조(征服王朝)로서, 중국 최후의 통일왕조(1636∼1912). 중국의 근대사는 이 왕조 말기부터 시작된다. &lt;정치과정의 개관&gt;만주인은 수렵·어로를 주된 생업으로 하는 퉁구스족의 일파로서 본래 여진(女眞) 또는 여직(女直)이라 불리었다. 그 일부는 12세기에 화베이[華北]로 진출하여 금(金)왕조를 세웠으나, 만주에 잔류한 대부분은 점차 정착농업을 영위하였으며, 명조 말기에는 해서(海西)…(2011-07-25 08:56:12)
진나라(고대력사) 인기글 ◑ 진(秦) 중국 주(周)나라 때 제후국의 하나로 중국 최초로 통일을 완성한 국가(BC 221∼BC 207).중국역사상 최초로 통일 국가를 이룩한 진의 시황제는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제를 실시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였다. 그는 승상 이사에게 명하여 문자를 통일하고 도량형을 통일하는 등 모든 제도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장군 몽염에게 명하여 흉노를 토벌하고 만리장성의 대공사를 감독토록 하였다. 시황제는 자기의 정책을 반대하거나 비판하는 세력을 철저히 단속하기 위하여 역사상 유례없는 이른…(2011-07-25 08:54:12)
중국고대(고대력사) 인기글 ◑ 중국고대 아득히 먼 옛날 중국 대지에 살고 있었던 원시인 가운데 북경 원인이 가장 오래된 인류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지금까지의 생각은 1963년 고고학자들에 의해 섬서성( 西省)에서 남전(藍田) 원인이 발견됨으로써 새로운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섬서성에서 발견된 남전 원인의 추측 연대는 무려 1백만 년 전의 것으로 4,50만 년 전의 북경 원인보다 훨씬 옛날의 것이고, 그 다음 해 운남성(雲南省)의 원모(元謀) 분지에서 발견된 이빨 두 개는 감정 결과 지금으로부터 무려 170만 년 전의 …(2011-07-25 08:52:57)
주나라(고대력사) 인기글 ◑ 주(殷) 중국의 고대 왕조(BC 1122?∼BC 256).주(周)왕조는 기원전 12세기에서 기원전 249년까지 은(殷)나라에 이어 성립된 중국의 고대 왕조이다. 이전의 하(夏)·은과 더불어 삼대(三代)라 한다. 요(堯)·순(舜)의 시대를 이어 받은 이상(理想)의 치세(治世)라 일컬어진다. 처음에는 은나라에 귀속된 속국이었으나 문왕(文王)의 뒤를 이은 무왕(武王)이 은의 폭군 주(紂)를 몰아내고 건국했다. 주(周)는 은(殷)의 말기에 처음 시작된 봉건제도를 본격적으로 발전시킨 국가로서 봉건제에…(2011-07-25 08:51:48)
은나라(고대력사) 인기글 ◑ 은(殷)왕조 중국 고대의 왕조(?~BC 1100?). 수도의 이름을 따라 상(商)이라고도 한다. 하(夏)·은(殷)·주(周) 3대의 왕조가 잇달아 중국 본토를 지배하였다고 하나, 하왕조는 고전(古典)에만 기록되어 있을 뿐, 전설적인 존재에 불과하다. 이에 대하여 은왕조는 20세기에 들어서 그 수도에 해당하는 은허(殷墟)의 발굴이 진행됨에 따라서, 적어도 그 후기에는 당시의 문화세계였던 화북(華北)에 군림하였던 실재의 왕조였음이 판명되었다. 따라서 은나라는 중국 최고(最古)의 역사적 왕조라고 할…(2011-07-25 08:49:32)
위진남북조(고대력사) 인기글 ◑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중국 역사상 후한(後漢)이 멸망한 다음 해부터 수(隋)의 문제(文帝)가 진(陳)을 멸망시키기까지(221∼589)의 시대.진(秦)·한(漢)과 수(隋)·당(唐)의 두 통일기를 잇는 정치적 분열시기이고, 문화적으로는 다양하면서도 통일성이 있는 특유한 성격을 지닌 시대이다. 위(魏)는 촉(蜀)·오(吳)와 더불어 삼국이라 하며, 진(晉)은 뤄양[洛陽]에 도읍을 한 서진(西晉)과,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의 난으로 중원(中原)을 잃고 건강(建康:吳의 建業, 지금의 南京)에 도읍을 …(2011-07-21 09:41:22)
원나라(고대력사) 인기글 ◑ 원(元) 13세기 중반부터 14세기 중반에 이르는 약 1세기 사이, 중국 본토를 중심으로 거의 동(東)아시아 전역을 지배한 몽골족의 왕국(1271∼1368). &lt;개관&gt;13세기 초, 칭기즈칸에 의해 구축된 몽골제국(蒙古帝國)은 유러시아 대륙의 북방초원에 정치적 기지를 두고, 대륙남방의 농경지대를 그 속령(屬領)으로 삼아 지배한 유목국가(遊牧國家)로, 속령으로부터의 가혹한 수탈과 부정기적인 약탈로써 경제적 욕구를 충족하였다. 그러나 유목제왕(遊牧帝王)과 그를 둘러싼…(2011-07-21 09:40:06)
오대십국(고대력사) 인기글 ◑ 오대십국(五代十國) 중국에서 당(唐)나라가 멸망한 907년부터, 960년에 나라를 세운 송(宋)이 전중국을 통일하게 되는 979년까지의 약 70년에 걸쳐 흥망한 여러 나라와 그 시대. 그 중 5대는 화북(華北)의 중심지대를 지배하고 정통왕조(正統王朝)의 계열로 볼 수 있는 양(梁:後梁)·당(唐:後唐)·진(晉:後晉)·한(漢:後漢)·주(周:後周)의 5왕조인데, 사가(史家)들이 그 이전에 존재하였던 같은 이름의 왕조와 구별하기 위해 앞에 후(後)자를 붙였다. 10국은 화남(華南)과 기타 주변 각 …(2011-07-21 09:3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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