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의 산문과 고문운동(고대문학)
페이지 정보
작성자 :admin| 작성일 :11-08-11 08:44|본문
육조의 귀족사회에 의해 완성된 변려문은 중당에 이를 때까지 문장의 주류적 지위를 유지해 왔다. 조칙(詔勅)·상주문(上奏文) 등 공적인 성격을 가진 문장은 변려문으로 작성되었으며, 그 밖에 서문(序文)·묘지명(墓誌銘) 등도 변려문으로 쓰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문학작품으로 여겨진 문장은 변려문에 한했으니, 문장에 대한 육조시대의 관념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변려문이란 형식상의 미를 추구하는 문장이다. 형식상의 미란, 대구와 전고의 교묘한 운용, 음률의 조화, 자구의 아름다움, 표현의 화려함 등에 의해 구성된다. 따라서 변려문은 내면적인 사상보다는 외면적인 표현의 미가 중시되어, 내용은 공허하게 되었다.
이러한 형식에 구애받는 변려문을 개혁하여, 자유스럽게 표현하려는 신문체 주장이 일어났는데, 이를 "고문운동(古文運動)"이라고 부른다. 이 운동은 한유(韓愈)와 유종원(柳宗元)을 중심으로 주도되었다. 이 고문운동이 지향하는 목표는 경서를 중심으로 하는 고대문장으로의 복귀, 유교의 도덕을 밝히고 유교사상을 선전하는 내용의 글을 지어야 한다는 데 있다.
당대에 고문운동이 일어난 것은 문학발전상 필연적인 추세였으며, 한편 당시의 사회상황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건안부터 초당까지 몇 백년 동안 중국문학은 유미주의로 흘렀는데, 이러한 경향은 순수문학이 독립적인 생명과 지위를 얻게 하는 데에는 공헌이 있었지만, 단점으로는 문학이 인생과 사회를 이탈하여 형식미만을 추구하는 폐단이 생겨났다. 이러한 사조가 극단으로 흐르면 자연히 반동이 발생하게 마련이니, 고문운동이 곧 이러한 현상이다. 또한 사회적으로 볼 때, 당은 안사의 난 이후 모든 면에서 심각한 퇴조를 보였다. 외족의 빈번한 침략, 지방군벌의 할거 등 정치적 위기뿐만 아니라, 사상적으로도 불교와 노장사상이 성행하여 상대적으로 유교사상은 쇠미했다. 이에 위기의식을 가진 일부 지식인은 이러한 형세를 만회하려 했다. 한유는 불교·노장사상을 배격하고 유교를 제창하여, 공맹(孔孟)의 도로 당시의 사회질서와 사상을 바로 잡으려 했다.
☞ 한유·유종원 이전의 고문운동
문학에 있어서 수사주의·유미주의가 성행하던 육조시대에 이미 수사편중의 태도에 반대하는 의견이 있었다.
① 양(梁)의 배자야(裵子野)
<조충론(雕蟲論)>에서 당시의 문학사조를 비판.
② 북조(北朝) 서위(西魏)의 소작(蘇綽)
화려한 변려문에 반대하고 전아한 고문을 써야 한다고 주장. <서경>의 문체를 모방하여 <대고(大誥)>를 지었으나, 문체가 고색창연하고 난해하여 이러한 문체가 행해질 수 없었다.
③ 수(隋) 문제(文帝)
모든 공사의 문서는 부화한 문체를 없애고 질박한 문체를 써야 한다는 조칙을 발포.
④ 이악(李악)
<상수문제논문체경박서(上隋文帝論文體輕薄書)>를 올려 당시의 문장이 화려함만을 다투고 경박한 기교에 빠져 교화에 해가 된다고 격렬하게 비난하였다. 그러나 변려문에 반대하는 주장들은 이론으로만 그쳤고, 변려문을 대신하는 새로운 문체를 제시하지 못했다. 이악의 건의문 자체도 변려문으로 작성된 것을 보면, 고문을 주장한 사람들의 한계를 알 수 있다.
⑤ 수(隋)말의 왕통(王通)
≪중설(中說)≫에서 "글을 논하면서 도리를 논하지 않는 것은 천하에 글이 없다는 것이다. 왕도는 어디로부터 일어난단 말인가?"라고 하여 시문에 있어서 의리(義理)와 도덕성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변려문을 공격하였다. 더욱이 ≪중설≫의 문체는 ≪논어≫와 양웅(揚雄)의 ≪법언(法言)≫의 문체를 모방하여 고문으로 썼기 때문에 왕통은 이론과 실천을 일치시켰다.
⑥ 초당(初唐)의 왕발(王勃)·진자앙(陳子昻)·유면(柳冕) 등
문장의 수식보다는 내용을 중히 여기고, 내용은 충효를 권장하고 인의를 훈도하는 도덕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공통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문체의 개혁을 창도하기는 하였지만, 이들의 문학주장은 단편적이었고 재주와 역량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광범한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특히 유면은 문학의 예술적 가치보다는 교화와 윤리에 입각한 유교적인 문학론과 "재도(載道)의 문학론"을 주장했다. 그는 문학과 교화가 일치하는 것이 이상적인 문장이며, 백성의 교화와 상관없는 문장은 문학이 아니라는 이론을 펼쳤다. 유면의 이론은 후에 고문운동의 중심이론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유면은 한유나 유종원처럼 유명하지 못하였으니, 그의 문장능력이 그의 이론을 뒤쫓을 수 없어서 실제 작품창작에 연결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 한유·유종원의 고문운동
① 한유
이제까지의 고문가의 이론을 집대성하고, 그의 우수한 창작능력과 선천적인 선전가의 능력을 발휘하여 고문운동을 전개하였다. 맹자(孟子) 이후로 단절된 성인의 도를 계승할 사람이 자기라고 자부한 한유에 있어서는, 고문을 주장하는 것은 옛 성인의 도를 주장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한유는 문학을 도를 밝히는 도구로 보았으며, 유교의 도덕을 담지 않은 문장은 가치가 없고, 세상의 교화와 관계없는 문학은 쓸모가 없다고 했다. 문장은 도를 밝히는 수단이어야 하며, 자신이 고문을 배우고 쓰는 것은 옛 도, 즉 유가의 도를 배우고 밝히는 데에 목적이 있다고 했다.
한유는 이러한 문학론에 의거하여 독창성이 풍부한 산문작품을 창작해 냈다. 한유의 산문작품 가운데 많은 부분이 사물의 이치를 논한 것인데, 예를 들면 <원도(原道)>는 유가사상을 논한 것이고, <원훼(原毁)>는 자기 자신을 책하는 데는 엄격해야 되며 남을 책하는 데는 관대해야 한다는 도리를 변화있게 반복 설명했다. 또 <쟁신론(爭臣論)>·<간영불골표(諫迎佛骨表)>·<사설(師說)> 등의 문장도 조리가 근엄하고 언어가 생동하며 힘이 있어 설득력이 강하다.
<장중승전후서(張中丞傳後敍)>는 서사문 가운데 걸작으로 장순(張巡)을 비롯한 인물들의 형상화에 뛰어난 솜씨를 발휘했고, 조리있게 사건을 서술하면서 의론과 서정을 한데 섞어 넣었다.
<송이원귀반곡서(送李愿歸盤谷序)>·<송맹동야서(送孟東野序)> 등은 서정성이 농후한 작품으로, 상대방을 전송하면서 자신의 불평을 토로하거나 명리를 탐하는 속인을 풍자하였다.
<제십이랑문(祭十二郞文)>은 제문 중에 명작으로, 조카에 대한 자신의 애도의 뜻을 잘 나타내었다.
이 밖에 고관을 풍자한 <오자왕승복전(오者王承福傳)>, 붓을 의인화하여 해학적인 필법으로 사회현상을 조소한 <모영전(毛穎傳)>, 스승과 제자의 대화로 이루어진 <진학해(進學解)>, 유종원의 전기라고 할 수 있는 <유자후묘지명(柳子厚墓誌銘)> 등 모두 체재와 풍격이 다르지만 뛰어난 작품이다.
한유는 삼대(三代)·양한(兩漢)의 문장을 제창하였지만, 당시의 구어도 흡수하여 어휘를 풍부하게 했으며, 육조의 변려문을 배척하였지만, 변려체의 구법을 적당하게 이용하여 문장의 기세를 증가시켰다. 한유의 문장풍격은 웅건하고 기세가 힘차며, 또 한편으로는 명쾌하고 날카롭다. 황보식(皇甫湜)은 한유의 문장풍격을 평하여 "마치 장강(長江)이 맑은 가을에 천리를 흐르며 바람을 헤치고 격랑을 일으키며 호탕하게 흐르는 것 같다"라고 했다.
② 유종원
유종원의 문학론은 기본적으로는 한유와 일치하고 있다. 즉 문학의 목적은 도를 밝히는 데 있다고 했다. 그러나 한유가 도에 편중된 문학론을 주장한 것에 비하여 유종원은 도와 함께 文 자체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즉 그는 문사를 빌리지 않고는 도가 전해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문장에서 내용으로서의 도와 형식으로서의 문채가 모두 중요하다고 보았다. 사상면에 있어서, 한유는 유가의 도통을 자기가 계승하겠다고 자처하여 다른 사상을 반대했으나, 유종원은 유교에 근간을 두면서도, 불교·노장사상 및 제자의 학설에도 취할 것이 있다고 했다.
유종원은 한유의 문학집단에 속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이론으로서 한유의 주장에 호응했고, 특히 실제적으로 작품을 창작하여 한유의 고문운동을 후원했다. 그의 산문은 설리문(說理文)·전기문(傳記文)·우언문(寓言文)·유기문(遊記文)으로 나눌 수 있는데, 우언문과 유기문이 더욱 훌륭하다.
변려문이란 형식상의 미를 추구하는 문장이다. 형식상의 미란, 대구와 전고의 교묘한 운용, 음률의 조화, 자구의 아름다움, 표현의 화려함 등에 의해 구성된다. 따라서 변려문은 내면적인 사상보다는 외면적인 표현의 미가 중시되어, 내용은 공허하게 되었다.
이러한 형식에 구애받는 변려문을 개혁하여, 자유스럽게 표현하려는 신문체 주장이 일어났는데, 이를 "고문운동(古文運動)"이라고 부른다. 이 운동은 한유(韓愈)와 유종원(柳宗元)을 중심으로 주도되었다. 이 고문운동이 지향하는 목표는 경서를 중심으로 하는 고대문장으로의 복귀, 유교의 도덕을 밝히고 유교사상을 선전하는 내용의 글을 지어야 한다는 데 있다.
당대에 고문운동이 일어난 것은 문학발전상 필연적인 추세였으며, 한편 당시의 사회상황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건안부터 초당까지 몇 백년 동안 중국문학은 유미주의로 흘렀는데, 이러한 경향은 순수문학이 독립적인 생명과 지위를 얻게 하는 데에는 공헌이 있었지만, 단점으로는 문학이 인생과 사회를 이탈하여 형식미만을 추구하는 폐단이 생겨났다. 이러한 사조가 극단으로 흐르면 자연히 반동이 발생하게 마련이니, 고문운동이 곧 이러한 현상이다. 또한 사회적으로 볼 때, 당은 안사의 난 이후 모든 면에서 심각한 퇴조를 보였다. 외족의 빈번한 침략, 지방군벌의 할거 등 정치적 위기뿐만 아니라, 사상적으로도 불교와 노장사상이 성행하여 상대적으로 유교사상은 쇠미했다. 이에 위기의식을 가진 일부 지식인은 이러한 형세를 만회하려 했다. 한유는 불교·노장사상을 배격하고 유교를 제창하여, 공맹(孔孟)의 도로 당시의 사회질서와 사상을 바로 잡으려 했다.
☞ 한유·유종원 이전의 고문운동
문학에 있어서 수사주의·유미주의가 성행하던 육조시대에 이미 수사편중의 태도에 반대하는 의견이 있었다.
① 양(梁)의 배자야(裵子野)
<조충론(雕蟲論)>에서 당시의 문학사조를 비판.
② 북조(北朝) 서위(西魏)의 소작(蘇綽)
화려한 변려문에 반대하고 전아한 고문을 써야 한다고 주장. <서경>의 문체를 모방하여 <대고(大誥)>를 지었으나, 문체가 고색창연하고 난해하여 이러한 문체가 행해질 수 없었다.
③ 수(隋) 문제(文帝)
모든 공사의 문서는 부화한 문체를 없애고 질박한 문체를 써야 한다는 조칙을 발포.
④ 이악(李악)
<상수문제논문체경박서(上隋文帝論文體輕薄書)>를 올려 당시의 문장이 화려함만을 다투고 경박한 기교에 빠져 교화에 해가 된다고 격렬하게 비난하였다. 그러나 변려문에 반대하는 주장들은 이론으로만 그쳤고, 변려문을 대신하는 새로운 문체를 제시하지 못했다. 이악의 건의문 자체도 변려문으로 작성된 것을 보면, 고문을 주장한 사람들의 한계를 알 수 있다.
⑤ 수(隋)말의 왕통(王通)
≪중설(中說)≫에서 "글을 논하면서 도리를 논하지 않는 것은 천하에 글이 없다는 것이다. 왕도는 어디로부터 일어난단 말인가?"라고 하여 시문에 있어서 의리(義理)와 도덕성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변려문을 공격하였다. 더욱이 ≪중설≫의 문체는 ≪논어≫와 양웅(揚雄)의 ≪법언(法言)≫의 문체를 모방하여 고문으로 썼기 때문에 왕통은 이론과 실천을 일치시켰다.
⑥ 초당(初唐)의 왕발(王勃)·진자앙(陳子昻)·유면(柳冕) 등
문장의 수식보다는 내용을 중히 여기고, 내용은 충효를 권장하고 인의를 훈도하는 도덕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공통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문체의 개혁을 창도하기는 하였지만, 이들의 문학주장은 단편적이었고 재주와 역량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광범한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특히 유면은 문학의 예술적 가치보다는 교화와 윤리에 입각한 유교적인 문학론과 "재도(載道)의 문학론"을 주장했다. 그는 문학과 교화가 일치하는 것이 이상적인 문장이며, 백성의 교화와 상관없는 문장은 문학이 아니라는 이론을 펼쳤다. 유면의 이론은 후에 고문운동의 중심이론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유면은 한유나 유종원처럼 유명하지 못하였으니, 그의 문장능력이 그의 이론을 뒤쫓을 수 없어서 실제 작품창작에 연결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 한유·유종원의 고문운동
① 한유
이제까지의 고문가의 이론을 집대성하고, 그의 우수한 창작능력과 선천적인 선전가의 능력을 발휘하여 고문운동을 전개하였다. 맹자(孟子) 이후로 단절된 성인의 도를 계승할 사람이 자기라고 자부한 한유에 있어서는, 고문을 주장하는 것은 옛 성인의 도를 주장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한유는 문학을 도를 밝히는 도구로 보았으며, 유교의 도덕을 담지 않은 문장은 가치가 없고, 세상의 교화와 관계없는 문학은 쓸모가 없다고 했다. 문장은 도를 밝히는 수단이어야 하며, 자신이 고문을 배우고 쓰는 것은 옛 도, 즉 유가의 도를 배우고 밝히는 데에 목적이 있다고 했다.
한유는 이러한 문학론에 의거하여 독창성이 풍부한 산문작품을 창작해 냈다. 한유의 산문작품 가운데 많은 부분이 사물의 이치를 논한 것인데, 예를 들면 <원도(原道)>는 유가사상을 논한 것이고, <원훼(原毁)>는 자기 자신을 책하는 데는 엄격해야 되며 남을 책하는 데는 관대해야 한다는 도리를 변화있게 반복 설명했다. 또 <쟁신론(爭臣論)>·<간영불골표(諫迎佛骨表)>·<사설(師說)> 등의 문장도 조리가 근엄하고 언어가 생동하며 힘이 있어 설득력이 강하다.
<장중승전후서(張中丞傳後敍)>는 서사문 가운데 걸작으로 장순(張巡)을 비롯한 인물들의 형상화에 뛰어난 솜씨를 발휘했고, 조리있게 사건을 서술하면서 의론과 서정을 한데 섞어 넣었다.
<송이원귀반곡서(送李愿歸盤谷序)>·<송맹동야서(送孟東野序)> 등은 서정성이 농후한 작품으로, 상대방을 전송하면서 자신의 불평을 토로하거나 명리를 탐하는 속인을 풍자하였다.
<제십이랑문(祭十二郞文)>은 제문 중에 명작으로, 조카에 대한 자신의 애도의 뜻을 잘 나타내었다.
이 밖에 고관을 풍자한 <오자왕승복전(오者王承福傳)>, 붓을 의인화하여 해학적인 필법으로 사회현상을 조소한 <모영전(毛穎傳)>, 스승과 제자의 대화로 이루어진 <진학해(進學解)>, 유종원의 전기라고 할 수 있는 <유자후묘지명(柳子厚墓誌銘)> 등 모두 체재와 풍격이 다르지만 뛰어난 작품이다.
한유는 삼대(三代)·양한(兩漢)의 문장을 제창하였지만, 당시의 구어도 흡수하여 어휘를 풍부하게 했으며, 육조의 변려문을 배척하였지만, 변려체의 구법을 적당하게 이용하여 문장의 기세를 증가시켰다. 한유의 문장풍격은 웅건하고 기세가 힘차며, 또 한편으로는 명쾌하고 날카롭다. 황보식(皇甫湜)은 한유의 문장풍격을 평하여 "마치 장강(長江)이 맑은 가을에 천리를 흐르며 바람을 헤치고 격랑을 일으키며 호탕하게 흐르는 것 같다"라고 했다.
② 유종원
유종원의 문학론은 기본적으로는 한유와 일치하고 있다. 즉 문학의 목적은 도를 밝히는 데 있다고 했다. 그러나 한유가 도에 편중된 문학론을 주장한 것에 비하여 유종원은 도와 함께 文 자체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즉 그는 문사를 빌리지 않고는 도가 전해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문장에서 내용으로서의 도와 형식으로서의 문채가 모두 중요하다고 보았다. 사상면에 있어서, 한유는 유가의 도통을 자기가 계승하겠다고 자처하여 다른 사상을 반대했으나, 유종원은 유교에 근간을 두면서도, 불교·노장사상 및 제자의 학설에도 취할 것이 있다고 했다.
유종원은 한유의 문학집단에 속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이론으로서 한유의 주장에 호응했고, 특히 실제적으로 작품을 창작하여 한유의 고문운동을 후원했다. 그의 산문은 설리문(說理文)·전기문(傳記文)·우언문(寓言文)·유기문(遊記文)으로 나눌 수 있는데, 우언문과 유기문이 더욱 훌륭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