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황도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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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dmin| 작성일 :11-09-26 09:01|본문
태초에 우주는 한 개의 알이었다. 이 알이 쪼개져 반은 하늘이, 또 다른 반은 땅이 됐다. 땅에서는 최초의 인간인 반고(盤古)가 태어나 만8천년을 살다 죽었다. 반고의 머리는 쪼개져 해와 달이 됐고, 그의 피는 강과 바다를 채웠으며, 그의 머리칼은 숲과 초원을 이루었다. 또한 그의 땀은 비로, 숨결은 바람으로, 목소리는 천둥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의 몸에 있던 벼룩이 중국인의 조상이 됐다.
-중국 신화 중에서
이 중국 신화는 조물주가 창조해낸 최고의 걸작은 자연일 뿐, 인간은 실로 미미한 존재로서, 자연과 조화하고 합일하는 일이야말로 인간 최고의 덕목임을 깨닫게 해준다. 중국의 빼어난 건축물과 예술품은 바로 이같은 조화의식의 표출이다.
원나라의 뒤를 이었던 명나라 3대 황제 영락제(永樂帝)가 1417년 남경에서 북경으로 천도하면서 건립하기 시작해 3년후 완공한 이래, 명·청 25명의 황제가 5백년간 집정했던 황성이자 현존하는 중국 최대 건축군인 자금성(紫禁城, 故宮)에도 이같은 조화의식이 담겨 있다. 신생 중국의 상징인 천안문에서 북쪽으로 백미터쯤 들어가면 붉은 성벽으로 에워싸인 오문(午門)과 마주친다. 이 오문을 선두로 조정의 주요한 의식이 베풀어졌던 3대 전각인 태화전·중화전·보화전이 일렬로 서 있고, 그 뒤로 다시 황제와 그 가족이 거주했던 3대 후궁인 건청군·교태전·곤녕궁이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 바로 이 3대 전각과 3대 후궁을 꿰는 중축선을 중심으로 해서 그 좌우에 60여 채의 크고 작은 전각들이 조화롭게 배치돼 하나의 소우주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이 건축군의 정전(正殿)은 태화전(太和殿), 정·종 일품부터 9품까지의 문무백관이 도열한 가운데 조의(朝議)를 열거나 황제의 즉위식과 혼례식 그리고 생일 축하의식이 베풀어졌던 곳이다. 오행설(五行說) 에서 중심을 상징하는 노란색 유리기와를 얹은 지붕에 오색칠한 현란한 천장을 금박기둥들이 떠받치고 있는 이 전각 중앙에는 나무에 용을 새겨 금도금한 보좌가 놓여 있고, 그 좌우로는 장수와 길상을 상징하는 학이며 거북상 그리고 향로와 크고 작은 촉대 등이 배치돼 황제의 권위와 황실의 영화를 전해준다.
가장 내밀한 곳은 침궁인 건청궁(乾淸宮). 왕위를 둘러싼 암투가 끊임없었던 비극의 무대이다. 명나라 15대 태창제가 등극한 지 한달만에 궁녀들이 바친 붉은 알약을 먹고 숨졌던 이른바 홍환사건(紅丸事件)이 일어난 곳이자, 20여 년 후인 1644년 잦은 당쟁과 조정의 가혹한 수탈을 견디지 못해 반란한 이자성(李自成)이 자금성을 짓밟자 17대 숭정제가 자결해 명나라 280년의 역사를 마감했던 곳이다. 그후 청대에 와 이 건청궁은 3대 문치제 대부터 다시 침궁으로 쓰여졌고, 5대 옹정제 때에는 '정대광명(正大光明)'이라는 편액을 걸고 정무를 보기 시작했으며, 선대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건저갑이라는 상자에 황제 계승자의 이름을 써두었다고 전해진다.
자금성의 건축물이 돋보이는 것은 아기자기함보다는 지붕들에서 볼 수 있듯이 단순하고 거침없는 선과 구조의 웅대함 때문이다. 이 건축군의 기본구조는 주대(周)에, 도읍지 건설은 한 변이 9리(里)인 방형(方形)으로 하고 천자는 반드시 3개의 전각을 짓고 통치하도록 규정했던 문헌인《주례(周禮)》와, 큰 건축물을 빨리 완성하고 자재를 절약하기 위해 북송(北宋)대에 편찬한《궁조방식(宮造方式)》이라는 문헌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이 건축군은 평범한 장방형인데다 단조로워 한·송대의 건축물에 비해 상상력이 결여돼 있고, 또 외양을 지나치게 치장한 나머지 처마에 불필요한 목조를 너무 무겁게 겹쳐붙여 그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건축역학에 맞지 않게 많은 기둥을 세운 것이 흠이라는 지적이 있다.
북경의 중심부에 이처럼 화려한 건축물이 들어설 때 북경 외곽에서도 대규모 토목공사가 진행된다. 만리장성의 증·개축이다. 인간의 손으로 축성한 최장의 성이자 달에서도 볼 수 있는 유일한 구조물인 장성의 지도상의 총연장거리는 2천7백킬로미터, 그러나 실제로는 6천킬로미터가 넘을 것이라는 게 통설이다.
현존하는 장성은 명대에 구축된 것. 명나라가 이 장성을 쌓은 까닭은 명에 의해 멸망한 원의 잔존세력인 몽골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였다. 남경에서 북경으로 천도한 뒤 명이 줄곧 겪어야 했던 고난은 경제의 중심권인 중부 황하유역과 남부 양자강 유역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과, 북경 가까이까지 습격해 들어오는 몽골족과의 잦은 마찰이었다. 그래서 명조는 동쪽 발해만의 산해관(山海關)으로부터 영토의 서쪽 끝이었던 가욕관에 이르는 장성을 증·개축하고 장성지대를 9개 관구로 나누어 백만명에 가까운 병력을 배치했다.
현재의 장성은 기원전 221년 중국을 최초로 통일했던 진시황이 흉노족을 막기 위해 130만명의 군병과 농민을 동원해 춘추시대 제나라로부터 전국시대의 연·조·위·초 나라가 각각 쌓았던 성벽을 잇고 증·개축했던 장성보다 남쪽으로 내려와 있다. 그러나 현재의 장성은 20여 왕조가 2천여 년에 걸쳐 축성하면서 얻어낸 기술과 방어술을 바탕으로 증·개축했기 때문에 더 견고하고 정연하며 그 길이 또한 길다.
초기의 축성재료는 야산에서 얻은 바위와 흙으로 빚어 햇볕에 말린 벽돌이었으나, 명대에 와서는 견고한 화강암과 전(塼) 곧 흙을 구워 만든 벽돌로 대체된다. 성벽의 높이는 6~9미터에 외벽과 내벽의 너비는 5미터 안팎. 말 5필이 나란히 지나거나 병사 10명이 일렬횡대로 걸을 수 있는 폭이다. 외벽과 내벽 사이에는 너비가 한 뼘쯤 되는 배수로를 놓고, 내벽 쪽을 좀 낮게 기울게 해서 비가 오거나 눈이 녹을 때 흘러내리게 돼 있다.
축성술은 이처럼 비교적 단순하다. 그러나 장성이 지나는 지역이 전략상의 요충지로서 대부분 해발 천미터가 넘는 산악지역인데다 운반수단이라곤 들것밖에 없었던 당시 이같은 대역사를 어떻게 인력으로 해낼 수 있었을까 하는 점에서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여겨진다.
만리장성은 외침을 용납치 않겠다는 중국 절대군주들의 강한 자존심과, 그를 떠받든 백성들의 끈질긴 인내심이 결합돼 촉조된, 땀과 눈물의 결정인 셈이다. 그런 축성 인부로 징용돼 목숨을 잃은 남정네가 몇 명이나 되는지 헤아릴 길 없다. 무너진 성벽 아래서 남편의 시신을 찾으며 통곡했던 진나라 맹강녀 설화를 비롯한 수많은 민담과 기록들은 웅대한 장성 뒤쪽으로 보이지 않는 통곡의 강이 흐르고 있음을 일러주고 있다.
그러나 만리장성은 만주족이 세운 청대에 와서는 군사적인 의의를 잃고 만다. 만주족에 의해 북방민족이 모두 토벌됐기 때문이다. 그후 장성은 중국 본토와 만주 그리고 몽골지역을 나누는 행정적인 경계선이 되고 있다.
그럼 만리장성이 중국사나 세계사에 미친 영향은 없었을까 생각해본다. 만리장성은 흉노족이며 몽골족 등 북방유목민족을 스텝지역으로 내몰아 중국의 전통적인 집약농업이 목축업과 결합해 혼합경제체제를 갖출 수 있는 계기를 막았다. 또 장성 외곽으로 내몰린 유목민족들은 기후가 나빠 스텝지역의 농업 생산성이 떨어질 대마다 로마까지도 진출했고 급기야는 유럽민족의 대이동을 몰아와 유럽의 역사를 바꾸어놓았다는 학설도 있다.
여기서 우리는 기원전으로부터 그들이 써온 중국 그리고 중화라는 단어 속에 담긴 뜻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중국이란 세계의 한가운데 있는 나라라는 뜻이며, 중화란 세계 한가운데서 가장 빛나는 곳이라는 뜻으로 가장 선진한 문화민족이라는 그들의 자부심이 만들어낸 단어이다. 사실 이같은 문화유적들을 접할 때 그들의 문화가 그 기원 이래 지금까지 독자적이고 수준 높은 것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중국 신화 중에서
이 중국 신화는 조물주가 창조해낸 최고의 걸작은 자연일 뿐, 인간은 실로 미미한 존재로서, 자연과 조화하고 합일하는 일이야말로 인간 최고의 덕목임을 깨닫게 해준다. 중국의 빼어난 건축물과 예술품은 바로 이같은 조화의식의 표출이다.
원나라의 뒤를 이었던 명나라 3대 황제 영락제(永樂帝)가 1417년 남경에서 북경으로 천도하면서 건립하기 시작해 3년후 완공한 이래, 명·청 25명의 황제가 5백년간 집정했던 황성이자 현존하는 중국 최대 건축군인 자금성(紫禁城, 故宮)에도 이같은 조화의식이 담겨 있다. 신생 중국의 상징인 천안문에서 북쪽으로 백미터쯤 들어가면 붉은 성벽으로 에워싸인 오문(午門)과 마주친다. 이 오문을 선두로 조정의 주요한 의식이 베풀어졌던 3대 전각인 태화전·중화전·보화전이 일렬로 서 있고, 그 뒤로 다시 황제와 그 가족이 거주했던 3대 후궁인 건청군·교태전·곤녕궁이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 바로 이 3대 전각과 3대 후궁을 꿰는 중축선을 중심으로 해서 그 좌우에 60여 채의 크고 작은 전각들이 조화롭게 배치돼 하나의 소우주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이 건축군의 정전(正殿)은 태화전(太和殿), 정·종 일품부터 9품까지의 문무백관이 도열한 가운데 조의(朝議)를 열거나 황제의 즉위식과 혼례식 그리고 생일 축하의식이 베풀어졌던 곳이다. 오행설(五行說) 에서 중심을 상징하는 노란색 유리기와를 얹은 지붕에 오색칠한 현란한 천장을 금박기둥들이 떠받치고 있는 이 전각 중앙에는 나무에 용을 새겨 금도금한 보좌가 놓여 있고, 그 좌우로는 장수와 길상을 상징하는 학이며 거북상 그리고 향로와 크고 작은 촉대 등이 배치돼 황제의 권위와 황실의 영화를 전해준다.
가장 내밀한 곳은 침궁인 건청궁(乾淸宮). 왕위를 둘러싼 암투가 끊임없었던 비극의 무대이다. 명나라 15대 태창제가 등극한 지 한달만에 궁녀들이 바친 붉은 알약을 먹고 숨졌던 이른바 홍환사건(紅丸事件)이 일어난 곳이자, 20여 년 후인 1644년 잦은 당쟁과 조정의 가혹한 수탈을 견디지 못해 반란한 이자성(李自成)이 자금성을 짓밟자 17대 숭정제가 자결해 명나라 280년의 역사를 마감했던 곳이다. 그후 청대에 와 이 건청궁은 3대 문치제 대부터 다시 침궁으로 쓰여졌고, 5대 옹정제 때에는 '정대광명(正大光明)'이라는 편액을 걸고 정무를 보기 시작했으며, 선대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건저갑이라는 상자에 황제 계승자의 이름을 써두었다고 전해진다.
자금성의 건축물이 돋보이는 것은 아기자기함보다는 지붕들에서 볼 수 있듯이 단순하고 거침없는 선과 구조의 웅대함 때문이다. 이 건축군의 기본구조는 주대(周)에, 도읍지 건설은 한 변이 9리(里)인 방형(方形)으로 하고 천자는 반드시 3개의 전각을 짓고 통치하도록 규정했던 문헌인《주례(周禮)》와, 큰 건축물을 빨리 완성하고 자재를 절약하기 위해 북송(北宋)대에 편찬한《궁조방식(宮造方式)》이라는 문헌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이 건축군은 평범한 장방형인데다 단조로워 한·송대의 건축물에 비해 상상력이 결여돼 있고, 또 외양을 지나치게 치장한 나머지 처마에 불필요한 목조를 너무 무겁게 겹쳐붙여 그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건축역학에 맞지 않게 많은 기둥을 세운 것이 흠이라는 지적이 있다.
북경의 중심부에 이처럼 화려한 건축물이 들어설 때 북경 외곽에서도 대규모 토목공사가 진행된다. 만리장성의 증·개축이다. 인간의 손으로 축성한 최장의 성이자 달에서도 볼 수 있는 유일한 구조물인 장성의 지도상의 총연장거리는 2천7백킬로미터, 그러나 실제로는 6천킬로미터가 넘을 것이라는 게 통설이다.
현존하는 장성은 명대에 구축된 것. 명나라가 이 장성을 쌓은 까닭은 명에 의해 멸망한 원의 잔존세력인 몽골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였다. 남경에서 북경으로 천도한 뒤 명이 줄곧 겪어야 했던 고난은 경제의 중심권인 중부 황하유역과 남부 양자강 유역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과, 북경 가까이까지 습격해 들어오는 몽골족과의 잦은 마찰이었다. 그래서 명조는 동쪽 발해만의 산해관(山海關)으로부터 영토의 서쪽 끝이었던 가욕관에 이르는 장성을 증·개축하고 장성지대를 9개 관구로 나누어 백만명에 가까운 병력을 배치했다.
현재의 장성은 기원전 221년 중국을 최초로 통일했던 진시황이 흉노족을 막기 위해 130만명의 군병과 농민을 동원해 춘추시대 제나라로부터 전국시대의 연·조·위·초 나라가 각각 쌓았던 성벽을 잇고 증·개축했던 장성보다 남쪽으로 내려와 있다. 그러나 현재의 장성은 20여 왕조가 2천여 년에 걸쳐 축성하면서 얻어낸 기술과 방어술을 바탕으로 증·개축했기 때문에 더 견고하고 정연하며 그 길이 또한 길다.
초기의 축성재료는 야산에서 얻은 바위와 흙으로 빚어 햇볕에 말린 벽돌이었으나, 명대에 와서는 견고한 화강암과 전(塼) 곧 흙을 구워 만든 벽돌로 대체된다. 성벽의 높이는 6~9미터에 외벽과 내벽의 너비는 5미터 안팎. 말 5필이 나란히 지나거나 병사 10명이 일렬횡대로 걸을 수 있는 폭이다. 외벽과 내벽 사이에는 너비가 한 뼘쯤 되는 배수로를 놓고, 내벽 쪽을 좀 낮게 기울게 해서 비가 오거나 눈이 녹을 때 흘러내리게 돼 있다.
축성술은 이처럼 비교적 단순하다. 그러나 장성이 지나는 지역이 전략상의 요충지로서 대부분 해발 천미터가 넘는 산악지역인데다 운반수단이라곤 들것밖에 없었던 당시 이같은 대역사를 어떻게 인력으로 해낼 수 있었을까 하는 점에서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여겨진다.
만리장성은 외침을 용납치 않겠다는 중국 절대군주들의 강한 자존심과, 그를 떠받든 백성들의 끈질긴 인내심이 결합돼 촉조된, 땀과 눈물의 결정인 셈이다. 그런 축성 인부로 징용돼 목숨을 잃은 남정네가 몇 명이나 되는지 헤아릴 길 없다. 무너진 성벽 아래서 남편의 시신을 찾으며 통곡했던 진나라 맹강녀 설화를 비롯한 수많은 민담과 기록들은 웅대한 장성 뒤쪽으로 보이지 않는 통곡의 강이 흐르고 있음을 일러주고 있다.
그러나 만리장성은 만주족이 세운 청대에 와서는 군사적인 의의를 잃고 만다. 만주족에 의해 북방민족이 모두 토벌됐기 때문이다. 그후 장성은 중국 본토와 만주 그리고 몽골지역을 나누는 행정적인 경계선이 되고 있다.
그럼 만리장성이 중국사나 세계사에 미친 영향은 없었을까 생각해본다. 만리장성은 흉노족이며 몽골족 등 북방유목민족을 스텝지역으로 내몰아 중국의 전통적인 집약농업이 목축업과 결합해 혼합경제체제를 갖출 수 있는 계기를 막았다. 또 장성 외곽으로 내몰린 유목민족들은 기후가 나빠 스텝지역의 농업 생산성이 떨어질 대마다 로마까지도 진출했고 급기야는 유럽민족의 대이동을 몰아와 유럽의 역사를 바꾸어놓았다는 학설도 있다.
여기서 우리는 기원전으로부터 그들이 써온 중국 그리고 중화라는 단어 속에 담긴 뜻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중국이란 세계의 한가운데 있는 나라라는 뜻이며, 중화란 세계 한가운데서 가장 빛나는 곳이라는 뜻으로 가장 선진한 문화민족이라는 그들의 자부심이 만들어낸 단어이다. 사실 이같은 문화유적들을 접할 때 그들의 문화가 그 기원 이래 지금까지 독자적이고 수준 높은 것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