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의 태자 결정 방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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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12-04-02 02:30|본문
淸나라의 太子密建法
□ 太子密建法 – 雍正황제가 창시한 淸나라 황태자 결정제도
- 太子密建法이란 황제가 태자로 결정한 아들의 이름을 공개하지 않고 비밀리에 적어 상자에 넣고 밀봉한 뒤, 乾淸宮의 正大光明이라고 쓴 편액 뒤에 놓아두었다가 황제가 죽은 후 꺼내 후계자를 발표하는 방식
- 雍正황제가 康熙황제한테서 왕위를 물려받으며 겪었던 수많은 문제와 국정의 혼란을 생각하며, 이런 문제점을 없애기 위해 만들어 낸 방법
□ 乾隆은 本 제도에 의한 최초의 상속자
- 雍正황제가 죽은 5일 후, 太子密建法에 의하여 유서가 발표되었고 이에 근거하여 25세의 乾隆황제가 즉위
- 그 뒤에도 줄곧 황위 세습은 太子密建法에 의해 이루어 졌고, 文宗황제 이후 慈喜태후가 황권을 잡으면서 폐지됨
□ 太子密建法의 장점
- 雍正황제 이후에는 왕위를 위해 혈육들이 다투는 비극이 발생한 적 없음
·역사상 타 왕조들은 백치황제, 갓난아이 황제, 폭군 등이 수없이 많았고, 궁정 내란도 아주 심했음
·다른 왕조에는 유능한 황제가 2~3명 뿐인 수준이지만 淸나라의 12명 황제 中 유능한 황제로 꼽히는 이가 7명이나 되는 이유는 바로 이 제도와 무관하지 않음
- 환관들이 제멋대로 날뛸 수 없었음
·太子密建法은 특별히 환관이 득세할만한 근거를 주지 않았음
·당시 환관들은 자신이 지지하는 황태자를 황위에 올리려고 모든 음모를 자행했었던 바, 심지어 결정 상태인 황태자를 살해하기도 했었음
·그러나 本 제도는 누가 진정으로 황제의 신임을 얻고 있는 지를 알 수도 없었고, 모든 황태자들이 발표되기 전까지 일종의 ‘무한경쟁’을 벌이게 됨
□ 太子密建法의 단점
- 실제로 이 제도는 뛰어난 황태자를 뽑는다고는 하였으나, 그 대상은 어머니가 만주족 출신인 황태자에 한정 됨
- 후계자는 절대 비밀이라고는 하지만 황태자로 지목될 만한 사람은 前 황제 생전에 이미 두각이 드러난 경우가 많았음
- 이 제도는 전적으로 황제의 눈에만 의존하기 때문에, 지나치게 황제의 개인적인 성향에 의해 후계자가 결정되는 단점
·대표적으로 文宗 咸豊과 恭親王 中 국사에 더 뛰어났던 恭親王을 밀어내고 咸豊이 즉위한 사건
□ 太子密建法 – 雍正황제가 창시한 淸나라 황태자 결정제도
- 太子密建法이란 황제가 태자로 결정한 아들의 이름을 공개하지 않고 비밀리에 적어 상자에 넣고 밀봉한 뒤, 乾淸宮의 正大光明이라고 쓴 편액 뒤에 놓아두었다가 황제가 죽은 후 꺼내 후계자를 발표하는 방식
- 雍正황제가 康熙황제한테서 왕위를 물려받으며 겪었던 수많은 문제와 국정의 혼란을 생각하며, 이런 문제점을 없애기 위해 만들어 낸 방법
□ 乾隆은 本 제도에 의한 최초의 상속자
- 雍正황제가 죽은 5일 후, 太子密建法에 의하여 유서가 발표되었고 이에 근거하여 25세의 乾隆황제가 즉위
- 그 뒤에도 줄곧 황위 세습은 太子密建法에 의해 이루어 졌고, 文宗황제 이후 慈喜태후가 황권을 잡으면서 폐지됨
□ 太子密建法의 장점
- 雍正황제 이후에는 왕위를 위해 혈육들이 다투는 비극이 발생한 적 없음
·역사상 타 왕조들은 백치황제, 갓난아이 황제, 폭군 등이 수없이 많았고, 궁정 내란도 아주 심했음
·다른 왕조에는 유능한 황제가 2~3명 뿐인 수준이지만 淸나라의 12명 황제 中 유능한 황제로 꼽히는 이가 7명이나 되는 이유는 바로 이 제도와 무관하지 않음
- 환관들이 제멋대로 날뛸 수 없었음
·太子密建法은 특별히 환관이 득세할만한 근거를 주지 않았음
·당시 환관들은 자신이 지지하는 황태자를 황위에 올리려고 모든 음모를 자행했었던 바, 심지어 결정 상태인 황태자를 살해하기도 했었음
·그러나 本 제도는 누가 진정으로 황제의 신임을 얻고 있는 지를 알 수도 없었고, 모든 황태자들이 발표되기 전까지 일종의 ‘무한경쟁’을 벌이게 됨
□ 太子密建法의 단점
- 실제로 이 제도는 뛰어난 황태자를 뽑는다고는 하였으나, 그 대상은 어머니가 만주족 출신인 황태자에 한정 됨
- 후계자는 절대 비밀이라고는 하지만 황태자로 지목될 만한 사람은 前 황제 생전에 이미 두각이 드러난 경우가 많았음
- 이 제도는 전적으로 황제의 눈에만 의존하기 때문에, 지나치게 황제의 개인적인 성향에 의해 후계자가 결정되는 단점
·대표적으로 文宗 咸豊과 恭親王 中 국사에 더 뛰어났던 恭親王을 밀어내고 咸豊이 즉위한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