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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읽는 중국이야기] 오뚝이가 이끌어가는 나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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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12-04-15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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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읽는 중국이야기- 오뚝이가 이끌어가는 나라 (1)       
인물에 따라 신중국(新中國)을 2개의 역사로 나누어보자. ‘마오쩌둥의 시대’와 ‘덩샤오핑의 시대’로 구분하는데 주저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건국의 아버지가 마오라면, 부국(富國)의 아버지는 단연 덩이다.

덩샤오핑. 키 작은 사람들의 희망이다. 150cm밖에 되지 않은 작은 키가 특징이어서 ‘5척단구’(1척은 30cm 가량)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붙는 덩샤오핑은 매운 요리로 유명한 중국 중부 쓰촨(四川)성 출신이다. 중국 요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조그맣고 붉은 사천고추의 지독히도 매운 맛에 오히려 중독성 매력을 느껴보았을 것이다. ‘작은 고추가 맵다’라는 속담은 덩샤오핑에게 딱 어울리는 표현이다. 그것도 맵디매운 사천 고추다. 땅딸막한 작은 키로 13억 중국인을 호령하며 과감히 개혁개방의 실험장으로 이끌어갔고, 1987년 천안문 사건 때에는 학생 시위대를 탱크로 밀어버림으로써 “과연 쓰촨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만큼 맵차다는 뜻이다. 

▮ 덩샤오핑 ; 매서운 쓰촨 사람

덩샤오핑은 1904년 쓰촨성 시골마을의 객가(客家, Hakka) 출신으로 태어났다. 객가인들은 원래 중원에 살던 한족들로, 2천 년 전부터 이민족의 침입을 피해 중국 각지로 흩어져 살고 있는 한족들이다. 멀리 산골지역으로 도망을 가서, 그곳에서도 토착민들과 어울리지 않고 자신들만의 언어와 풍습을 유지하며 살아왔는데, 그래서 객가인들의 언어는 고대 중국어의 원형(原形)에 비교적 가깝다고 한다. 토착민들과 섞이지 않기 위해 집도 독립적이고 폐쇄적으로 지어놓고 자기들끼리 모여 살았다. ‘와호장룡(臥虎藏龍)’같은 중국 무술영화에 보면 원형이나 사각형의 3~4층짜리 커다란 성채 같은 집이 등장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토루(土樓)’라고 불리는 객가인들의 독특한 건축양식이다. 객가인들은 이런 커다란 집 하나에 일가친척 모두가 옹기종기 모여 살며 자기들만의 생활공동체를 형성했다. 

물론 모든 지역의 객가인들이 토루에 사는 것은 아니지만 - 토루는 주로 푸젠(福建)성 객가인들에게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 이러한 토루의 형태만 보아도 객가인들의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다. 오랑캐들과는 상대하지 않겠다, 우리는 정통 한족이다, 라는 우월의식 또는 독립의지가 자자손손 심어져 내려왔을 것이다. 객가인들은 한족의 전통예법을 지키면서 자녀 교육에 유독 열정을 쏟았고, 교직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객지로 쫓겨나 살다보니 토지를 갖기도 힘들었는데, 그래서 객가인들은 농사를 짓지 못하고 일찍부터 장사에 눈을 떠 주로 상공업이나 유통업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이들을 ‘동방의 유태인’이라 부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객가인에 대해 살펴보면 역사적인 경험이나 특성이 유태인과 여러모로 비슷해 놀라울 정도이다.

‘정통 한족’이라는 자부심이 강해서 그런지 청나라 말기 반란세력 가운데 객가인이 많았다. 알다시피 청나라는 만주족이 세운 나라, 그러니까 한족의 입장에서는 오랑캐들의 나라이다. 객가인들의 입장에서는 청나라 치세 기간 내내 울분이 끓어올랐을 것이다. 멸만흥한(滅滿興漢 ; 만주족을 멸망시키고 한족의 세상을 만든다)의 깃발을 앞세운 태평천국 운동의 지도자 홍수전(洪秀全)이 바로 객가인이다. 중국공산당 초기 핵심간부 중에도 객가인들이 많았는데, 공산당 창립멤버 가운데 절반 이상이 객가인이었다고 주장하는 자료가 있을 정도이고, 국민당 좌파 가운데에도 객가인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중국과 타이완 양쪽 모두에서 국부(國父)로 숭상받는 신해혁명의 지도자 쑨원(孫文)이 객가 출신이고, 쑨원과 함께 신해혁명을 주도했던 허쯔위안(何子渊) 역시 객가 출신이다. 쑨원의 부인 쑹칭링(宋慶齡),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 은행재벌 쿵샹시(孔祥熙)의 부인인 쑹아이링(宋霭龄) 등 중국 대륙을 주름잡은 송씨 집안 3자매도 객가 출신이다. 중국공산당의 모태가 된 군대 홍군(紅軍)의 실질적인 창시자인 주더(朱德)가 객가이며, 주더와 함께 중국 인민해방군 역사상 오로지 10명만 존재하는 이른바 ‘10원수’ 가운데 한 명인 예졘잉(叶剑英) 또한 객가이다. 예졘잉은 사인방을 몰아내고 덩샤오핑이 실권을 장악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인물로 꼽힌다. 장제스와 정치적 라이벌로 맞서다 암살된 국민당 좌파의 거두 랴오중카이(廖仲恺)도 객가이고, 중국의 대문호이자 항일운동에도 앞장섰던 궈모뤄(郭沫若) 역시 객가이다. 

유태인이 전 세계 정치와 경제, 과학, 예술, 문화 등 많은 분야에 두루 걸출한 인재를 배출하였듯, 객가인도 유명인물을 꼽으라면 정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정치 쪽을 더 이야기해보자.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알리는 개국대전 행사에서 주석단에 앉은 인사들 가운데 절반이 객가인들이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것은 약간 과장되어 보이지만 여하튼 신중국의 성립과정에도 객가인들은 큰 역할을 하였던 것이 사실이고, 공산당에 쫓겨 섬으로 달아난 타이완 정권에도 객가인들은 함께 했다. 덩후이(李登辉) 총통이 객가 출신이다. 중국 대륙과 섬 모두를 객가인들이 꽉 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객가인의 힘은 중국을 뛰어넘는다. 싱가포르의 경제기적을 만들어낸 리콴유 총리(李光耀)도 푸젠성에 뿌리를 둔 객가인이고, 심지어는 필리핀 민주화 운동의 상징인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까지 객가의 후손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깜짝 놀랄 것이다.

경제계에 객가인들의 활약은 더욱 두드러진다.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 최고의 재벌로, "홍콩에서 1달러를 쓰면 5센트는 이쟈청의 호주머니로 들어가는 셈"이라는 리쟈청(李嘉誠) 회장이 객가이고, 샹그리라호텔로 유명한 샹그리라그룹을 이끌고 있는 말레이시아 화교재벌 궈쉐녠(郭鹤年)을 비롯하여 세계 경제를 주름잡고 있는 화교 재벌들은 거의 객가인의 후손이라고 보면 된다. 태국재벌 천여우한(陳有漢), 인도네시아 재벌 린샤오량(林紹良), 대만재벌 왕융칭(王永慶), 호랑이뼈로 만든 연고로 재벌이 된 홍콩재벌 후원후(胡文虎), 전부 다 객가 출신이다. 객가인들은 이렇게 중국 본토와 대만, 홍콩뿐 아니라 세계로 뻗어나가 객가인의 명성을 드러내고 있다. 한국 사람들에게 친숙한 이름인 중국 연예인 리밍(黎明), 요절한 장궈룽(张国荣)도 객가인으로 분류된다. 

이제 다시 ‘객가인’ 덩샤오핑으로 돌아와보자. 어렸을 때부터 아이들을 강하게 키우는 객가인들의 전통에 따라 덩샤오핑 또한 13세에 고향을 떠나 기숙사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날 이후 죽을 때까지 다시는 고향땅을 밟지 않았다. 출장길에 우연히 고향 근처를 지나가게 되어도 한 번도 고향 마을은 들러보지 않았고, 말년에 국가 최고지도자가 되어 주위에서 “요양도 할 겸 고향을 한번 방문해 보시라”고 권하여도 금의환향을 끝까지 거절하였다. 심지어는 자녀들의 고향 방문도 허락하지 않았다. 공연히 동네사람들에게 폐를 끼칠 것이 염려되어 그랬다고 한다. 고향집 생가도 사후 4년만인 2001년에야 복원되었고, 지금은 고향마을에 커다란 동상이 세워져 덩샤오핑이 태어난 곳임을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참고 : 덩샤오핑은 스스로 객가 출신이라 말한 적이 없으며, 그의 딸이 아버지를 회고하는 책을 통해 고향마을이 객가의 혈통이라고 소개한 바 있다.)

17살에 당시 유행하던 근공검학(勤工俭学 ; 해외에 나가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며 실력을 쌓자는 운동)의 흐름을 타고 프랑스로 건너갔다. 자동차공장, 철강회사, 기관차 화부 등으로 막일을 하며 대학을 다녔다. 그러던 중 당시 청년들 사이에 유행병처럼 번지던 좌파 경향에 도취되어 19살에 일찌감치 공산주의자가 되었고, 21살에 프랑스에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프랑스에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는 말에 의아할 사람들이 있겠지만 당시 공산주의자들은 국적보다는 계급을 중요시하는 국제주의자들이었다. 23살에는 소련으로 건너갔다. 모스크바 중산(中山) 대학에서 공산주의 이론을 공부하였고, 이듬해에 중국으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중국 혁명에 뛰어들었다. 지하공작을 하기 위해 이름도 샤오핑(小平)으로 바꿨다. 원래 이름은 셴셩(先圣)과 시센(希贤)이었다. 간단치 않은 청년시절이다. 

▮ 덩샤오핑 ; 다시 일어서는 오뚝이

일생에 덩샤오핑은 세 번의 숙청 또는 실각을 경험했다. 1차 실각은 일찌감치 1933년 그가 29세 때의 일로, 도시폭동을 강조하는 소련파의 노선에 반대해 농민봉기를 주장하는 마오쩌둥의 편을 들었다가 모든 직책에서 미끄러졌다. 당시 마오쩌둥 노선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던 네 사람의 성씨를 따라 ‘덩(邓)-마오(毛)-셰(谢)-구(古)’ 사건이라 불리는 이때의 숙청 와중에 아내에게 일방적으로 이혼을 당했다. 아내는 덩의 곁을 떠나자마자 당시 소련파 실권자였던 공산당 조직부장의 품에 안겼다. 그날 이후 덩이 죽을 때까지 누구도 감히 덩의 앞에서 그 여자의 이름 석 자를 꺼내지도 못했다고 한다. 쓰라린 아픔을 겪었지만, 이 때문에 몇 년 뒤 중국공산당의 1인자가 된 마오쩌둥의 두터운 신임을 얻는다. 속된 말로 ‘줄을 잘 탔다’고 이야기할 사람도 있겠지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끝까지 소신을 굽히지 않는 덩샤오핑의 ‘고집’을 이때부터 엿볼 수 있을 것이다.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에서 명성을 날린 덩샤오핑은 1949년 46세의 젊은 나이로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알리는 천안문 광장의 개국대전(开国大典) 행사 무대에 오른다. 열아홉 어린나이에 혁명에 뜻을 품은 지 30년 만에 동지들과 함께 ‘꿈’을 현실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후 중국공산당 서남국 제1서기로 일하다가 1952년 약관 48세의 나이로 중국 대륙의 재정과 경제문제를 총괄하는 부총리로 임명된다. 1954년 마오쩌둥의 후계자 자리를 노리며 반란을 획책했다는 이른바 까오강(高岗)-라오슈스(饶漱石) 사건을 잘 처리해 마오쩌둥의 더욱 큰 신임을 얻게 된 덩샤오핑은 1956년 마침내 중국공산당 총서기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당시 마오쩌둥은 덩샤오핑을 총서기에 추천하며 “비교적 일을 잘하고 주도면밀한 인물이다, 공정하고 아량이 있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권력서열로는 4위! 바로 위로 자신이 감히 넘볼 수 없는 ‘동방의 태양’ 마오쩌둥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로서 덩샤오핑은 자신이 올라갈 수 있는 최대치까지 올라간 것이다. 

하지만 2차 실각은 그렇게 자신을 키워줬던 마오쩌둥에게 뒤통수를 맞았다. 그것도 처참하게 얻어맞았다. 1960년대 초반부터 마오쩌둥의 경제노선 상의 실책을 비판하며 미운털이 박혀 있다가 - 유명한 흑묘백묘(黑猫白猫)의 이야기도 이때에 했다 - 1966년 문화혁명이 일어나자 국가주석이었던 류샤오치(劉少奇)와 함께 주자파(走資派 ; 자본주의를 따르는 세력)의 두목으로 몰려 모든 실권을 빼앗긴 채 자택에 연금되었다. 사회주의 국가의 국가주석과 공산당 총서기가 모두 반역자로 체포되는 황당무계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1969년에는 장시(江西)성 시골의 트랙터 공장으로 쫓겨나 용접공으로 일하며 이른바 ‘노동개조’를 받았다. 건국 1등 공신 가운데 한 사람이며 공산당 총서기의 자리까지 올라갔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일반노동자로 강등되어 오전에는 공장 일을 하고, 오후에는 채소밭을 가꾸며 3년 4개월동안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치욕의 시간을 겪었다. 그의 나이 66세 때의 일이다. 

그나마 죽음은 면하였으니 감옥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은 류샤오치보다는 나았을지 모르지만, 큰아들이 홍위병에게 린치를 당하다 하반신 불구자가 되는 가슴 아픈 시련을 겪었다. 첫 실각에서는 아내를 빼앗기고, 두 번째 실각에서는 큰아들의 인생을 빼앗겼다. 당시 북경대학 원자핵물리학과에 재학중이었던 큰아들 펑푸팡(邓朴方)은 아버지의 죄를 고백하라는 홍위병들의 구타와 고문에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버티다, 방사능으로 오염된 실험실에 감금되자 4층 창문을 열고 뛰어내려 평생 장애인으로 살게 되었다. 덩샤오핑의 다른 자녀들도 ‘주자파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여기저기 끌려다니며 온갖 수모를 당했다. 덩샤오핑의 동생 덩슈핑(邓蜀平)은 박해를 견디다 못해 자살했다. 숙청의 기간 중에 덩샤오핑은 매일같이 불구자가 된 아들을 목욕시키고 척추마사지를 해주었다고 한다. 촌구석의 벽돌집에서 자신 때문에 불구자가 된 아들의 몸을 씻겨주었던 아비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나중에 나카소네 일본 수상이 덩샤오핑에게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이 언제였냐”고 묻자 덩샤오핑은 문화혁명 기간이라고 했다. 덩푸팡은 현재 중국장애인협회 명예회장으로 재직 중이다.

중국 현대 역사는 ‘죽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있으면 언젠가는 한가닥 희망의 날이 비칠 것’이라는 역설의 행복을 가르쳐준다. 덩샤오핑의 인생도 그랬다. 밑바닥에 추락하여 도저히 회복이 불가능할 것 같았던 그의 인생에도 1973년 날벼락과 같은 행운이 다가왔다.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자타가 공인하였던 린뱌오(林彪)가 엉뚱하게도 쿠데타를 모의하다 발각되어 소련으로 도주하던 중 비행기가 추락,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린뱌오 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나자 중앙정부를 이끌어나갈 만한 사람이 부족했다. 이때다 싶었던 저우언라이(周恩來)가 덩샤오핑의 복권을 건의했다. 마오쩌둥이 이를 추인했다. 병 주고 약 준 것이다. 갑자기 “북경으로 오라”는 소식에 덩샤오핑도 어안이 벙벙했다. 덩샤오핑 문선(文選)에 보면 마오쩌둥의 부름을 받고 북경행 열차에 올라타면서 “지금 북경에 가는 길이 죽으러 가는 것인지 살러 가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당시의 심정을 회고하는 대목이 나온다. 부총리 직위를 회복하고 중국공산당 중앙위원, 중앙군사위 부주석으로 화려하게 복귀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중국 현대 역사에서 1976년은 죽음의 해이다. 1월 8일 저우언라이가 세상을 떠났다. 7월 6일에는 백전노장(百戰老將) 주더(朱德), 9월 9일에는 마오쩌둥이 죽었다. 경제-군사-정치의 3대 거두가 연달아 숨을 거둔 것이다. 그해 7월에는 진도 7.8의 탕산대지진이 일어났다. 중국 정부의 공식에 따른 사망자만 24만 명에 이르렀다. 그런 와중에 덩샤오핑은 또 한 번 미끄러졌다. 저우언라이가 죽고, 그를 추모하는 행사가 4월 5일 천안문광장에서 열렸는데 갑작스레 마오쩌둥과 4인방을 비난하는 구호가 제창되면서 정치시위로 변질되었다. 시위군중을 진압하는 과정에 충돌이 일어났다. 4인방은 덩샤오핑을 ‘시위의 배후세력’으로 지목했다. 덩샤오핑에게 회의 일정을 통보하지도 않고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소집되어, 곧바로 모든 직위를 박탈시켰다. 자택에 연금되어 다시 1년 3개월 동안 바깥공기를 들이마실 수 없었다. 인생에 있어 세 번째 실각이다.

▮ 덩샤오핑 ; 거인의 빛과 그늘

중국 인권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덩샤오핑은 어쩌면 마귀와 같은 존재다. 개혁개방을 통해 민주화의 토양을 마련한 것은 나름대로 평가를 하지만 천안문 시위를 총칼로 진압하여 민주주의의 싹을 완전히 짓밟아버린 것은 덩샤오핑의 짓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천안문 시위는 1989년의 시위를 말한다. 

덩샤오핑에게 천안문은 빛과 그늘의 두 가지 느낌으로 다가올 것이다. 중국 현대 역사에 발생한 두 번의 천안문 사건에 모두 덩샤오핑이 연관되어 있다. 한쪽 천안문에서 덩샤오핑은 ‘시위군중을 배후 조종한 사람’으로 찍혔고, 다른 천안문에서 덩샤오핑은 ‘시위군중을 살해하도록 지시한 사람’으로 찍혔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천안문과의 첫 번째 악연은 저우언라이의 사망을 추모하는 집회로 시작한 1976년의 천안문 사건이다. 당시 시위대는 문혁으로 국가를 도탄에 빠뜨린 4인방의 축출을 주장했고, 덩샤오핑을 비롯한 개혁파들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 때문에 덩샤오핑은 시위를 배후에서 조종하였다는 오해를 받았고 겨우 되찾은 실권을 모두 빼앗긴 채 연금되었다. 

천안문과의 두 번째 악연은 후야오방(胡耀邦)의 사망을 추모하는 집회로 시작한 1989년의 천안문 사건이다. 당시 시위대는 민주개혁에 지지부진한 덩샤오핑에 실망하여 작은 병을 깨뜨리는 것으로 불만을 표출했다. 중국어로 작은 병(小瓶 ; 샤오핑)이 덩샤오핑의 이름과 발음이 같기 때문이다. 한달이 넘도록 지속되었던 학생들의 점거농성에 무기력하게 대처하고 있는 당시 공산당 총서기 자오쯔양(赵紫阳)에게 덩샤오핑을 비롯한 원로들은 강력한 불만을 표시했고, 결국 국가주석 양상쿤을 통해 계엄령을 선포해 천안문 광장을 탱크로 밀어버리도록 지시한다. ‘배후의 시위 조종자’가 10년 뒤에는 ‘배후의 진압 지도자’로 돌변하는 아이러니한 순간이다. 그때에 천안문에서 몇 명이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이럴 때 애매하게 표현하는 상투어대로 ‘수십 명에서 수백 수천 명이’ 죽었던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후야오방과 자오쯔양, 그리고 덩샤오핑의 관계를 살펴보면 권력의 세계는 참으로 비정하구나 하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후-자오 두 사람은 원래 덩샤오핑의 왼팔, 오른팔과 같은 존재였다. 1984년 나까소네 총리와의 회담에서 덩샤오핑은 “하늘이 무너져도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이 있는 한 문제가 없다”고 자랑을 했다. “인생에 있어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기는 문화혁명 때”라고 말했던 바로 그 회담에서 했던 말이다. 그런 사람들을 덩샤오핑은 미련없이 자기 손으로 잘라내버렸다.

후야오방은 덩샤오핑과 마찬가지로 문혁 때 실각하여 역시 시골로 노동개조를 떠났던 사람이다. 항일전쟁 때에는 덩샤오핑과 같은 부대에서 한솥밥을 먹었고, 문혁의 시련기에도 함께 실각했다가 비슷한 시기에 함께 복권되었다. 평생의 동지라고 볼 수 있다. 마오쩌둥의 뒤를 이어 집권한 국가주석 화궈펑(華國鋒)의 이른바 양개범시(兩个凡是 ; 마오쩌둥의 정책과 지시는 모두 옳다는 주장)에 맞서 “실천만이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잣대”라는 유명한 말을 인용하여 ‘진리표준논쟁’을 이끌어냄으로써, 이제 막 복권하여 당내의 지지기반이 튼튼하지 않았던 덩샤오핑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던 인물이 후야오방이었다. 그런 후야오방을 덩샤오핑은 공산당 조직부장으로 추천하였고, 나중에는 화궈펑을 밀어내고 공산당 총서기의 자리에까지 올려놓았다. 어떤가? 마오쩌둥이 덩샤오핑을 밀어주던 이야기와 비슷하지 않은가?

그런 후야오방을 덩샤오핑이 과감히 쳐낸 이유는 부르조아 자유주의 바람에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학생들의 시위를 방치하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1987년 후야오방은 사임을 강요당해 총서기직에서 밀려났고, 1989년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죽음을 맞았다. 후야오방은 언론의 자유와 개인 자유의 신장, 법치주의, 당내 민주화 등을 주장한, 개혁개방의 뒤를 이은 정치적 민주화의 아이콘이었다. 중국 각지를 직접 시찰하며 기층 인민들의 손을 잡고 위로하여 대중적 지도자로서의 인기 또한 높았다. 특히 대학생들이 그를 많이 추앙하였다. 그런 후야오방이 죽자 천안문광장으로 사람들이 몰려든 것이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다. 

후야방 실권 뒤에 공산당 총서기의 바통을 이어받은 자오쯔양 역시 덩샤오핑의 강력한 지지를 바탕으로 그 자리에 올랐다. 자오쯔양도 문혁 기간 중 실각하여 5년간 현직에서 물러나 있다가 1972년에야 복권되었다. 철저한 개혁개방의 신념이 덩샤오핑의 눈에 띄어 중앙정계로 진출,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이라는 것을 들고 나오며 덩을 이론적으로 보필했다. 덩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부총리, 총리를 거쳐 중국공산당 총서기로까지 뛰어올랐다. 그러나 1989년의 천안문 시위에 온건하게 대응하다가 오히려 시위대에 동조하는 모습까지 보여줌으로써 실각하여 자그마치 15년 동안 자택에 연금된다. 아무나 만나지 못하고, 허가를 받아야만 외출이 가능했다. 끝까지 명예를 회복하지 못하고 2005년 베이징의 한 병원에서 쓸쓸하게 숨을 거둔다. 

2009년 자오쯔양의 회고록이 출판되었다. 뭇 사람들이 어리둥절하게도 미국에서 영문으로 가장 먼저 선을 보였다. 제목은 , 한국어로는 2010년에 <국가의 죄수>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되었다. 중국어판으로는 홍콩에서 <개혁역정(改革歷程)>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지만 대륙에서의 판매는 금지되었다. 대만에서도 <국가의 죄수(國家的囚徒>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지만 역시 대륙에서는 만날 수가 없다. 

회고록은 맞는데, ‘비밀’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회고록이다. 왜일까? 그 배경이 사람들의 가슴을 찡하게 만든다. 자택연금 중에 자오쯔양이 인생을 회고하며 몰래 녹음하였던 내용을 자오쯔양 비서의 아들이 미국으로 반출하여 출판한 것이다. 감시를 피하기 위해 손자들의 동요테이프에 덮어서 녹음하였고, 장난감들 사이에 아무렇게나 방치하듯 보관하여 늘 서재를 청소하였던 며느리는 물론 가족들 누구도 테이프의 존재를 몰랐다고 한다. 그렇게 몰래 녹음한 30시간 분량의 회고담이 책을 엮인 것이다. 아무도 없을 때에 주위를 살피며 소곤소곤 자신의 일생을 녹음하였을 자오쯔양의 모습을 상상할 때면 가슴이 아린다. 비록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심정이었겠지만 덩샤오핑 자신도 문화혁명의 기간에 그렇게 처절하게 연금과 박해의 치욕을 겪고도 스스로 발탁한 후배 동지들을 숙청하고 연금시켜놓은 ‘돌고 도는’ 역사를 지켜보자면 깊은 한숨이 나올 따름이다. 2011년 3월에 열린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에서 덩샤오핑의 아들 덩푸팡과 후야오방의 아들 후더핑(胡德平)이 나란히 정협 부주석에 당선되었다. 이 무슨 역사의 장난인가.

▮ 덩샤오핑 ; 그가 만든 '시스템'

1989년 천안문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일단 일자별로 간략하게 사건을 정리해보자.

▪ 1989년 4월 15일 후야오방이 사망한다. 
▪ 4월 16일, 베이징대를 비롯한 각 대학에 후야오방을 추모하는 대자보가 나붙기 시작한다. 점차 언론자유와 정치개혁, 부패척결 등을 요구하는 정치성 짙은 대자보들이 가세한다.
▪ 4월 18일, 5만 명의 시위대가 천안문 광장에 모여 후야오방 명예회복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인다. 이날부터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천안문 광장에서 매일 이어진다. 
▪ 4월 22일, 중국공산당의 공식적인 후야오방 추도대회를 맞아 20만 명이 천안문광장에 운집한다. 덩샤오핑을 비난하는 구호도 등장한다.
▪ 4월 24일, 베이징대를 비롯한 16개 대학이 동맹휴학에 들어간다.
▪ 4월 26일, 당기관지인 <인민일보>가 천안문의 시위를 동란(動亂)으로 규정하는 사설을 발표한다. 사설의 제목은 ‘선명한 기치로 동란에 반대하자’. 천안문광장에서 진행되고 있는 학생시위를 “비합법조직에 의한 계획된 음모 및 동란”이라고 비판했다.
▪ 4월 29일, 국무원 대변인 위안무(袁木) 등 4명이 학생대표 45명을 만나 시위대 해산을 권유했으나 거절당한다.
▪ 4월 23~30일, 자오쯔양은 북한을 방문 중이었다. 일정을 앞당겨 급히 돌아와보니 시위대는 훨씬 격앙되어 있었다. 
▪ 5월 4일. 한국의 3 ․ 1절에 비교되는 5 ․ 4운동 기념일을 맞아 대대적인 민주화 시위가 열린다. <인민일보> 기자 200여명도 시위대열에 합류한다.
▪ 5월 4일. 자오쯔양이 아시아개발은행 연설에서 “학생시위는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이고, 중국에서 내란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학생들의 요구사항은 정부 역시 지향하는 것들이라며 시위대를 두둔하는 듯한 뉘앙스로 발언한다.
▪ 5월 10일. 중국공산당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자오쯔양이 4월 26일자 <인민일보> 사설을 철회하고 시위대를 다독이자고 주장한다. 이밖에도 고위간부의 재산을 공개하자는 등의 정치개혁안을 제안한다.
▪ 5월 13일, 학생시위대 2000여명이 천안문 광장에 천막을 치고 단식 연좌농성에 들어간다. 1백만 명의 시민들이 함께 시위를 벌인다.
▪ 5월 13일, 완리(萬里) 전인대 상무위원장이 미국을 방문한다. 완리는 자오쯔양 지지파였다. 완리가 미국에 가있는 사이 자오쯔양은 중국공산당 최고지도부의 표결에서 1표를 잃은 셈이다. 
▪ 5월 15일, 고르바초프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중국을 방문한다. 1천 여명의 외국 기자들이 중국에 집결하고 전 세계인이 북경을 주목하는 때에 시위대는 대대적인 시위행진을 벌인다. 천안문광장을 비롯하여 북경 시내중심가 전역이 시위대로 뒤덮인다. 
▪ 5월 17일,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들이 모여 대책을 논의한다. 계엄령을 발동하자는 의견이 제출된다. 자오쯔양와 후치리(胡启立)가 이에 반대한다. 5명의 표결에서 계엄령에 대해 2명이 찬성, 2명이 반대, 1명이 기권을 하자 최종결정을 덩샤오핑에게 맡기기로 한다. 자오쯔양은 총서기직 사임 의사를 밝힌다.
▪ 5월 17일, 리펑 총리가 학생대표들을 인민대회당으로 불러 이대로 가면 강경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다고 엄포를 놓았다.
▪ 5월 18일 밤과 19일 새벽 사이, 자오쯔양이 리펑과 함께 천안문 시위 현장을 방문한다. 자오쯔양은 메가폰을 쥐고 “학생 여러분, 우리가 너무 늦게 왔습니다. 학생 여러분에게 미안합니다. 여러분이 우리를 꾸짖고 비판하는 것은 모두 당연한 일입니다.”라고 연설을 시작한다.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농성을 중단하고 학교로 돌아가 줄 것을 호소한다. 연설도중 자오쯔양은 눈물을 글썽인다. 리펑은 냉랭한 어조로 짤막하게 “빨리 학교로 돌아가라”고만 말한다. 
▪ 5월 19일 아침, 덩샤오핑을 비롯한 8명의 원로와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들이 만나 계엄령 선포를 최종 결정한다. 이 자리에 자오쯔양은 참석하지 않는다. 이날부터 자오쯔양은 모든 정치무대에서 사라진다. 
▪ 5월 20일, 베이징 일대에 계엄이 선포된다. 시위대는 천안문 광장에 9m 높이의 ‘민주의 여신상’을 세우면서 계엄령에 저항한다.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된다.
▪ 6월 2일, 리펑을 비롯한 정치국 상무위원 3명이 덩샤오핑 등 원로들을 만나 진압작전을 최종 모의한다. 
▪ 6월 4일 새벽, 천안문 광장의 시위대에 대한 무력진압이 시작된다. 중국인민해방군 제27군 탱크부대가 동원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6월 6일, 천안문광장에서의 진압작전이 종료된다. 외신들은 최소 300명에서 최대 3000명까지 사망자를 추정하는 보도를 내보낸다.
▪ 6월 9일, 덩샤오핑이 진압부대 지휘관들을 불러 격려한다.
▪ 6월 10일, 베이징시 공안국이 468명의 반혁명 시위자들을 체포했다고 발표한다. 20일 발표에서는 체포된 인원이 831명, 30일에는 1130명이라고 발표한다. 
▪ 6월 17일, 시위참가자 8명에게 사형이 선고된다.
▪ 6월 24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자오쯔양이 총서기직을 공식적으로 박탈당한다.
▪ 1990년 7월 10일, 중국 공안부가 국무원에 제출한 보고에 따르면, 민간인 사망자 875명, 부상자 약 14,550명. 군인 사망자 56명, 부상자 7,525명.

이상이 ‘2차 천안문 사건’이라 불리는 1989년 천안문 사건의 대략적인 진행 과정이다. 천안문 사건은 중국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의 관심있는 연구의 대상이고 여러 가지 흥미로운 논쟁거리를 제공한다. 

앞에 정리한 진행 과정에서 중국공산당 원로들과 정치국 상무위원들의 회의와 관련된 사항은 2001년 미국에서 발행된 ‘천안문 페이퍼’(Tiananmen Papers)의 내용을 참고하였다. 천안문 사태가 진행되고 있을 당시 중국공산당 지도부의 각종 회의록과 전화 통화 녹취록 등 1만5천 페이지에 달하는 ‘특급 보안 자료’를 참고하였다는 천안문 페이퍼는 그 진위 여부를 둘러싸고 논쟁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책자가 발간되자 중국 정부는 곧장 날조된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천안문 사건 당시 홍콩 언론 등에 보도되었던 내용을 짜깁기 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반면 자료의 구체성과 방대한 분량, 적확성 등에 비추어볼 때 ‘만들어낸 작품’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 중국 현대사 연구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천안문 사건의 내면을 들여다보자. 일련의 과정들을 살펴보면 계엄령 발동에 반대하고 평화로운 해결을 바랐던 자오쯔양의 애타는 행보가 보인다. 자오쯔양 역시 자신의 비밀 회고록에서 “어찌 되었든 간에 군대를 동원해 학생을 진압한 당 총서기가 되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한다. 나아가 “후야오방(胡耀邦) 추도식이 끝난 이후 학생 시위가 수그러들고 있었다. 그러나 4·26 사설이 발표되자마자 상황이 급변하면서 대립이 격화됐다. 학생들은 사설에서 풍기는 태도와 정치적 낙인에 매우 분노했다. 학생들은 그동안 무슨 ‘반당·반사회주의’라거나 ‘계획적’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학생 시위가 그렇게 커지고, 그렇게 사태가 혼란스러워진 것은 바로 4·26 사설 때문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즉, 사태의 발단은 4월 26일 인민일보의 성급한 사설에 있었고, 그것이 시위대를 자극하여 문제를 더욱 꼬이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물론 군대를 동원하여 인명을 살상했던 행위는 쉽게 용납하기 어렵다. 그렇더라도, ‘자오쯔양 = 착한 사람’, ‘4.26 사설을 지지하고 계엄령을 발동했던 세력 = 나쁜 사람들’이라는 이분법적 등식이 쉽게 성립될 수 있을까? 역사와 정치가 과연 그렇게 단순한 것일까?

어떤 사람들은 천안문 사건 내내 보여줬던 자오쯔양의 우유부단한 성향을 비판한다. 자오쯔양이 실제로 꿍꿍이속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분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예를 들어 천안문의 학생시위가 계속되는 와중에 고르바초프가 중국을 방문했을 때, 자오쯔양은 “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를 처리할 때에는 덩샤오핑 동지가 최종적인 결단을 내린다. 이 사실은 여기에서 처음 공개하는 것이다”라는 폭탄 발언을 했다. 그것이 무에 ‘폭탄 발언’이냐고, 당시 덩샤오핑이 배후의 실세라는 사실은 세상에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지 않았느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겠지만, 외국의 국가정상에게 자기나라 권력 내부의 깊숙한 사정을 시시콜콜 이야기한 것도 부적절했지만, 특히나 미묘한 시기에 느닷없이 했던 말이라 자오쯔양의 이런 발언은 충분히 오해를 살만했다. 앞으로 발생할 끔찍한 사태를 예상하고 그것을 모두 덩샤오핑에게 덮어씌운 후 자신이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의심이 가능하다. 당시 자오쯔양은 덩샤오핑의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의 권한만 인수받으면 당과 군의 전권을 갖게 될 전망이었다.

물론 자오쯔양이 그렇게 치밀하게 전략적인 사람이었을까 하는 것에 대해 필자는 의견을 달리한다. 자오쯔양의 회고록에 보면 ‘당 총서기나 하거나 그냥 국무원 총리 정도나 하면서 경제개발에 기여할 걸 그랬다’고 후회하는 대목이 나온다. 자오쯔양은 그리 큰 야심을 가진 그릇은 아니었다. 천안문 페이퍼를 정리한 미국의 중국 전문가 앤드류 네이선 교수가 서문에서 자오쯔양을 평가하며 “영웅은 아니었지만 양심적인 인물이었다”고 표현한 대목은 적절해보인다. 고르바초츠 앞에서의 실언 사건에 대해 자오쯔양은 나중에 “샤오핑 동지가 은퇴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당내에서 영향력을 계속 행사하는 것이 합법적이라는 것을 세계에 더 명확히 이해시키기 위해서였다”라고 해명을 했다. 왠지 궁색해보인다. 

자오쯔양이 학생시위대를 직접 찾아가 연설을 했던 5월 18~19일의 사건에 대해서도 자오쯔양의 겸손한 인품과 민주주의적인 태도를 찬양하는 견해가 있는 반면, 수세에 몰리자 막판에는 군중의 힘에 의거하려고 했다고 평가절하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밖에도 그동안 무능의 대명사로 여겨졌던 리펑이 천안문 사건의 과정에는 일관되게 강경한 입장을 취했던 사실을 흥미롭게 관찰하면서, 총서기직 사임의사를 밝혔다가 다시 철회했다가, 계엄령에 반대했다가 다시 ‘다수의 의견에 따르겠다’고 했다가 하면서 우유부단했던 자오쯔양이 옳았는지, 어쨌든 시관일관 계엄령의 입장을 분명히 했던 리펑이 옳았는지 하는 것에 대한 논쟁도 있다. 

여하튼 정치학자들이나 중국 정치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의 이런 복잡한 이야기들은 뒤로 미뤄두고, 천안문 페이퍼를 넘겨가면서 우리는 중국 최고지도부가 의외로 평등(?)하다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 

흔히들 덩샤오핑이 경제에는 개혁적이었는지 몰라도 정치에는 보수적이었다고 비판하는 사람이 있지만, 덩샤오핑의 정치적 업적 가운데 사람들이 쉽게 간과하는 대목이 바로 중국공산당의 주석제를 폐지한 것이다. 현재 중국공산당은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9명이 최고 의사결정권을 갖는다.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 된다는 것은 공산당원이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지위다. 총서기는 비록 총(總)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지만, 당중앙의 결정을 집행하는 부서인 서기처의 서기들을 총괄하는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집행위원장 수준의 권한을 갖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 어쨌든 정치국 상무위원회 회의에 들어가면 총서기도 9명의 상무위원 가운데 한 사람일 따름이다. 물론 정치국 회의를 소집 ․ 주관하고 결정사항을 집행하는 기관의 수장으로서 다른 상무위원들에비해 약간의 영향력을 더 발휘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표결에서는 당서열 1위인 총서기이든, 당서열 9위의 상무위원이든, 똑같이 1표일 뿐이다. 천안문 페이퍼를 살펴보아도 이들은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를 자유롭게 지지하거나 비판하며 발언하고, 의견이 일치하지 않으면 표결로써 처리한다. ‘일단 결정된 사항은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 강조하는 대목도 발견할 수 있다. 공식 업무처리의 관계에서는 국무원의 리붕 총리가 중국공산당의 자오쯔양 총서기보다 아래에 있을지 몰라도, 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그냥 ‘자오쯔양 동지’, ‘리펑 동지’일 뿐이다. 

이러한 시스템은 과거에도 외형은 있었지만 덩샤오핑에 의해 더욱 확고하게 정착되었다. ‘프레지던트(president)’로 번역되는 중국의 주석(主席)이라는 직위는 해당 영역에서 거의 전권을 휘두르는 자리이다. 인사와 의사결정에 주도적 지위를 차지한다. 특히 무소불위의 마오쩌둥 시대가 보여주었던 1인 권력의 해악을 뚜렷이 목격하고, 과감히 집단지도체제를 도입한 것이다. 이것을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덩샤오핑 자신이 마오를 이어 주석직에 올라 전권을 행사하거나, 혹은 자신의 심복을 주석 자리에 앉혀놓고 손쉽게 배후조정하며 자기 마음대로 정국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었을 텐데, 어쩌면 스스로 권력을 쪼개어 나눔으로써 억척스레 불편한 길로 들어갔다. 가볍게 무시해서는 안되는 업적이다. (bitdori21@naver.com)
 
 작성자
곽대중의 차이나 폴리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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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 성인 1명만 숙박 가능한 캡슐여관 화제 인기글 상해서 성인 1명이 누울 수 있는 공간에 침구류와 매트리스만 갖춰진 이른바 캡슐여관(胶囊旅馆)이 등장해 화제가 되고 있다고 신화넷이 전했다.   상해 중산베이루(中山北路)에 위치한 이 호텔은 성인 1명만 누울 수 있는 공간으로 이뤄진 객실 68개가 갖춰진 채 영업을 준비 중이다.  길이 220cm, 높이 110cm의 객실은 일반 기차의 침대차와 같이 3층으로 나뉘어 있으며, 고객이 원할시 벽걸이 TV를 대여할 수 있고 무선 인터넷도 가능한 것으로 알려졌다.  캡슐여관 관계…(2012-04-26 05:5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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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폭리' 업종은? '바이주… 인기글 중국의 '폭리' 업종은? '바이주'가 최고 중국에서 가장 많은 폭리를 취하는 업종은 바이주(白酒)인 것으로 나타났다.충칭시(重庆市) 지역신문 충칭상보(重庆商报)의 8일 보도에 따르면 중국 A주 시장에서 2011년 실적보고를 마친 기업들 중 바이주 기업의 평균 이익율이 64.59%로 1위를 차지했으며, 호텔업 54.31%, 고속도로 업계 53.07%, 의약 44.18%, 부동산업 40.03% 순으로 나타났다.주…(2012-04-15 22:32:13)
중국 선물문화 - 싫어하는 품목과 색깔 인기글 중국에서는 선물을 주고 받는 문화가 아주 일상화 되어 있음.선물이라는 단어는 중국어로 예품(礼品), 예(礼)의 의미는 곧 의식, 예절 혹은 충효 등과 같은 도덕관념을 나타내며 품(品)은 물질적인 것을 뜻함.어원으로 볼 때 선물은 물질적인 선물만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규칙(예절)과 의식과도 관련되는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알수 있음. 예의가 담겨져 있지 않는 것은 그냥 물건은 될 수 있어도 선물이 될 수는 없는 것임.고대 역사를 볼 때 성의없는 선물을…(2012-04-15 22: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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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스마트폰 시장의 키워드는 '중저가', … 인기글  올해 중국 스마트폰 시장은 액정이 큰 중저가 스마트폰이 인기를 끌 것이라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중국 시장조사기관 중이캉(中怡康)은 최근 발표한 보고서를 통해 올해 중국 스마트폰 시장의 성장률은 지난해와 비슷한 수준인 104%를 유지해 총판매량이 1억4천만대를 돌파하며, 이 중 9천만대가 1천5백위안(27만원) 이하의 중저가 스마트폰이 차지할 것으로 전망했다.이같은 전망은 지난해 통계를 통해 신빙성을 얻고 있다. 중이캉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의 스마트폰 판매량은 7천만대로 중국 …(2012-04-15 22:07:44)
중국 부호들, 해외에 투자하는 이유는 '자녀교육&#… 인기글 중국 부호들이 해외에 개인 자산을 투자하는 주된 목적은 자녀교육인 것으로 나타났다.중앙재경대학 중국은행연구센터가 중신(中信)은행과 공동으로 발표한 '중국개인은행발전보고'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으로 투자가능자산 1천만위안(18억원) 이상의 자산가 118만5천명에 대해 해외투자 이유를 조사한 결과, 22.65%가 자녀교육을 꼽아 가장 많았다.분산투자와 자산안전성 제고가 19.6%로 두번째로 많았으며 다음은 투자이민(18.11%), 업무발전(16.83%), 좋은 환경(13,2…(2012-04-15 22:01:45)
충칭, 대규모 유혈시위…시정부 "보시라이와 무관 인기글 ▲ [자료사진] 웨이보에 게재된 충칭시 완성구 시위 현장 충칭시(重庆市)에서 대규모 유혈 시위가 발생해 수십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충칭시(重庆市) 인터넷매체 화룽넷(华龙网), 홍콩 남화조보(南华早报) 등의 13일 보도에 따르면 지난 10일 오후 충칭시 완성구(万盛区) 주민 수천여명이 행정구역 합병…(2012-04-15 22:00:03)
포브스 선정 中 중부지역 최적의 상업도시는? 인기글  중국 중부지역 최적의 비즈니스 도시는 후난성(湖南省) 성도 창사(长沙)인 것으로 나타났다.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 중문판이 13일 최초로 발표한 '중국 중부 상업도시 순위'에 따르면 도시 16곳 중 창사가 1위를 차지했으며, 후베이성(湖北省) 성도 우한(武汉), 허난성(河南省) 성도 정저우(郑州) 순으로 나타났다.이번에 선정된 도시는 포브스가 발표한 '2011 중국 최적의 상업도시 …(2012-04-15 21:5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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