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한국청년의 중국사업 '실사구시' 성공스토리
페이지 정보
작성자 :운영자| 작성일 :11-01-31 04:11|본문
어느 한국청년의 중국사업 '실사구시' 성공스토리
중국사업을 생각하면서 늘 의식하게 되는 것은 바로 ‘실사구시(实事求是)’의 정신이다. 일을 사실적, 실제적으로 살펴 진리를 구한다는 뜻이다. 청나라 때 고증학파의 학문방법론으로, 이들은 송, 명대의 관념적인 공리공론(空理空论) 사변을 철저히 배격했고, 그 이후 박제가, 박지원 등 조선 후기 우리나라의 실학파에도 큰 영향을 미친 바 있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미술시간, 그림 그리기할 때 집을 그린답시고 내가 그린 순서는 긴 마름모꼴 지붕부터였다. 몸체는 그 다음이었다. 그렇게 기본 얼개를 짠 다음 삭막하다 싶어 네모꼴의 창틀을 추가로 그리고 속을 열십자로 채운 다음 다시 지붕으로 옮겨 반원형을 연결한 나선 문양을 소위 기와랍시고 그렸다. 그게 내 머리 속을 지배한 집이란 것의 전부였다. 그림솜씨가 없었던 내가 그 이후 집을 그릴 일은 전혀 없었지만, 아마 그 이후 어느 때쯤 다시 그리라 했어도 여전히 그리 그렸을 것이다. 즉 집에 관한 한 내 머릿속 그림은 나이와는 무관하게 변함없이 초등학생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랫 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던 집 그림의 그리기 순서를 두고 신영복님께서 머리를 밝게 해 주셨다. 냉전 이데올로기 시절에 지조를 굽히지 않아 무려 20여 년의 옥살이를 겪으신 분으로, ‘감옥에서의 사색’을 비롯해 ‘나무야 나무야’, ‘더불어 숲’ 등 깊은 내적 성찰을 거친 저서를 통해 많은 이들에게 감명을 주신 바 있다. 소주 브랜드 ‘처음처럼’의 휘호도 그의 작품이고, 또 그걸로 받은 보수의 전액을 장학금으로 내 놓기도 했다.
그분의 저서 어디쯤엔가 나오는 이야기다. 기나긴 옥살이 도중 어느 날 그가 알고 있는 옥살이 동료 목수 양반 한 분께서 무언가 설명하던 중 땅바닥에 집을 그리기를, 먼저 주춧돌을 그린 연후 기둥, 도리, 들보, 서까래, 지붕의 순서로 그리더라는 것이다. 그걸 보고선 아차! 관념적 추론과 현실적 실제의 차이를 느꼈다고 한다. 그 목수는 그저 자기가 하던 대로 그린 것일 뿐이었지만 어디까지나 그게 맞는 것이고, 그때까지 신영복님의 의식 속 집그림과 내가 예전에 무심히 그렸던 것은 허공에 떠 있는 실제적이지 아니한 집이었던 것이다. 그림 하나를 그리는데도 이처럼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고 거기에 정확히 근거를 둔 가운데 그려야 제대로 된 그림이 나와지는 걸 알 수 있다.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또 있다. 사람의 머리부분에서 눈이 전체의 한가운데 있다는 것, 승용차의 운전석이 차량 전체길이의 중간에 위치해 있다는 걸 처음 알았을 때도 그랬다. 그전까지는 막연한 느낌으로 얼굴의 중간보다 위쪽, 그리고 차체의 중간보다 앞쪽에 있는 줄로 착각했었다. 실제를 겪지 않은 가운데 선입견 또는 추론에 의거해 대충 그런 양 알고 지내다가 어떤 일을 기화로 그걸 깨닫거나 들통났을 때의 낯뜨거움이란 참으로 필설로 형용하기가 어렵다.
실제적인 것의 가치와 관련해 소개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어느 한국 젊은이가 있었다. 실업계 고등학교를 나오고 군 복무를 마쳤다. 한동안 작은 회사에서 기능공 생활을 했다. 그러한 생활도 잠시 장인의 길에 그다지 뜻이 없었던 그는 곧 따분함을 느꼈다. 마침 한국에 중국 열풍이 불고 있던 때였다. 그는 지체없이 중국 동북지역에 와서 이곳저곳을 다니며 그가 할 만한 일이 없을까 하며 현장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국어 구사능력은 물론 특별히 경쟁력 있는 능력이나 기술을 갖추지도, 일정한 자본력도 갖추지 못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없어 보였다. 열심히 쏘다녀 볼수록 현실의 벽은 높아 보여 실망과 좌절의 깊이만 갈수록 커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숙소에서 우연히 만난 옆방 조선족 아줌마가 물어 왔다. 한국 총각 그대는 뭐 하러 여기까지 왔느냐고… 그래서 이참저참해서 오게 되었으며, 이러고 있노라니 별 뾰족한 수가 없고 매우 답답해서 그러잖아도 돌아가려는 참이라고 대답했다. 한탄과도 같은 그의 이야기를 들은 아줌마가 다소 생뚱맞은 제안을 했다. 그러지 말고 자기 고향에 같이 가서 사업을 하자는 것이었다.
사업은 무슨? 당시 그가 보유한 자금이랬자 기껏 한화 300만 원 남짓했기에 그걸로 도대체 무슨 사업이 가능하겠느냐고 되물었다. 그랬더니 자기도 그 정도의 자금 밖에 없지만 두 사람이 가진 모든 힘을 합쳐 한식당을 차려 보자는 것이었다. 작은 중소도시인데다 아직은 한식당이 하나도 없는 만큼 분명 희소가치가 있고, 따라서 도전해 볼 만한 가능성이 충분히 있을 거라고 하면서… 그리고는 자기 역시 총각처럼 여지껏 한식을 만들어 본 경험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총각이 한국에서 한식 요리책을 구해다 주면 그걸 보고 시도해 보겠노라며 의지를 펼쳐 보였다.
젊은이는 용기를 얻었고,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곧장 실행에 들어갔다. 자본력에 맞춘 그야말로 조그마한 구멍가게 수준의 점포를 얻었고, 간판도 약소하게나마 달았다. 그리고 곧장 한국에서 공수해 온 요리책을 들여다 보며 김치찌개와 된장찌개를 비롯한 한식 만들기가 시도되었다. 만들어진 요리는 한족 현지인들에게 시식을 시켰다. 그들이 맛있다고 하면 그대로, 맛이 없다고 하면 조리방법을 바꿔 다시 조리를 해 가며 수정했다. 그 한식당만의 하나하나의 음식 레시피가 차츰 정형화되기 시작했다. 레시피 결정과정이 그러했던 만큼 요리란 요리는 결론적으로 대부분 무늬만 한식일 뿐 맛깔은 철저히 현지인의 입맛에 부합된 것들이었다.
그랬던 만큼 그 한식당은 조용한 가운데도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마침내 비교적 짧은 시간 내에 좁은 공간에 발 디딜 틈도 없이 손님들로 북적대기 시작했다. 그러던 차 또 하나의 계기가 찾아왔다. 고급 공무원들의 단체 회식이 이루어진 것이다. 작은 도시였으니 색다른 음식점이 귀했고, 급기야 지역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맛집 기행 끝에 거기까지 왔던 것이다. 그 이후 소문은 더욱 날개를 달았고, 한식 아닌 한식은 한식의 탈을 쓰고 한류를 전파했으며, 식당은 날이 갈수록 번창일로를 달렸다.
성공사례가 된 요즘 그 젊은 사장이 하루에 하는 일과 중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일까? 늦저녁 장내를 휘 한 바퀴 둘러 본 후 당일 매출을 가장 많이 기록한 테이블에 서비스요리를 선정하고 이를 직접 전달하는 일이란다. 직접 만들지도 않은 요리를 들고 가는 건 그의 몫이지만, 조선족 아줌마 경리가 손님에게 너스레를 떤다고 한다. 이 분은 한국에서 오신 사장님이자 주방장이신데 오늘 특별히 여러분께 고마움을 전하고자 하는 거라고… 물론 이때 그는 당연히 중국어가 아닌 한국어로 고마움을 표해야 한다. 즉석 통역이 이루어지는 등 그래야 분위기에 더욱 어울리기 때문이다. 손님도 즐겁고 식당측도 즐거운 한마당이다. 바로 지린성의 어느 작은 도시에 있는 한식당의 역사이다.
내가 직접 현장답사를 거친 게 아니라 그 지역 한국인회에서 봉사하는 분에게서 전해 들은 이야기이기에 다소 각색된 부분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인 이야기의 흐름에 왜곡된 부분은 없으니 등장인물들에게 충분히 양해를 구할 수 있으리라 본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난 가벼운 흥분과 함께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그건 수많은 한국 매체에서 중국 이야기를 쏟아낼 때도, 뭇 사람들이 해박한 지식과 풍부한 경험의 바탕 위에서 중국과 중국사업을 거론할 때도 느끼지 못했던, 더구나 그저 중국과 한국을 들락날락하며 값싼 비평을 해 대는 사람들에게서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작은 감동이었다. 낯설고 물선 곳에서 가진 것 없이 그저 몸 하나 던져 오늘을 일군 그는 분명 작은 거인이었고, 난 아낌없이 박수를 보낸다. 그는 진정 ‘실사구시’를 온몸으로 실천한 사람이었다.
중국사업을 생각하면서 늘 의식하게 되는 것은 바로 ‘실사구시(实事求是)’의 정신이다. 일을 사실적, 실제적으로 살펴 진리를 구한다는 뜻이다. 청나라 때 고증학파의 학문방법론으로, 이들은 송, 명대의 관념적인 공리공론(空理空论) 사변을 철저히 배격했고, 그 이후 박제가, 박지원 등 조선 후기 우리나라의 실학파에도 큰 영향을 미친 바 있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미술시간, 그림 그리기할 때 집을 그린답시고 내가 그린 순서는 긴 마름모꼴 지붕부터였다. 몸체는 그 다음이었다. 그렇게 기본 얼개를 짠 다음 삭막하다 싶어 네모꼴의 창틀을 추가로 그리고 속을 열십자로 채운 다음 다시 지붕으로 옮겨 반원형을 연결한 나선 문양을 소위 기와랍시고 그렸다. 그게 내 머리 속을 지배한 집이란 것의 전부였다. 그림솜씨가 없었던 내가 그 이후 집을 그릴 일은 전혀 없었지만, 아마 그 이후 어느 때쯤 다시 그리라 했어도 여전히 그리 그렸을 것이다. 즉 집에 관한 한 내 머릿속 그림은 나이와는 무관하게 변함없이 초등학생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랫 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던 집 그림의 그리기 순서를 두고 신영복님께서 머리를 밝게 해 주셨다. 냉전 이데올로기 시절에 지조를 굽히지 않아 무려 20여 년의 옥살이를 겪으신 분으로, ‘감옥에서의 사색’을 비롯해 ‘나무야 나무야’, ‘더불어 숲’ 등 깊은 내적 성찰을 거친 저서를 통해 많은 이들에게 감명을 주신 바 있다. 소주 브랜드 ‘처음처럼’의 휘호도 그의 작품이고, 또 그걸로 받은 보수의 전액을 장학금으로 내 놓기도 했다.
그분의 저서 어디쯤엔가 나오는 이야기다. 기나긴 옥살이 도중 어느 날 그가 알고 있는 옥살이 동료 목수 양반 한 분께서 무언가 설명하던 중 땅바닥에 집을 그리기를, 먼저 주춧돌을 그린 연후 기둥, 도리, 들보, 서까래, 지붕의 순서로 그리더라는 것이다. 그걸 보고선 아차! 관념적 추론과 현실적 실제의 차이를 느꼈다고 한다. 그 목수는 그저 자기가 하던 대로 그린 것일 뿐이었지만 어디까지나 그게 맞는 것이고, 그때까지 신영복님의 의식 속 집그림과 내가 예전에 무심히 그렸던 것은 허공에 떠 있는 실제적이지 아니한 집이었던 것이다. 그림 하나를 그리는데도 이처럼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고 거기에 정확히 근거를 둔 가운데 그려야 제대로 된 그림이 나와지는 걸 알 수 있다.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또 있다. 사람의 머리부분에서 눈이 전체의 한가운데 있다는 것, 승용차의 운전석이 차량 전체길이의 중간에 위치해 있다는 걸 처음 알았을 때도 그랬다. 그전까지는 막연한 느낌으로 얼굴의 중간보다 위쪽, 그리고 차체의 중간보다 앞쪽에 있는 줄로 착각했었다. 실제를 겪지 않은 가운데 선입견 또는 추론에 의거해 대충 그런 양 알고 지내다가 어떤 일을 기화로 그걸 깨닫거나 들통났을 때의 낯뜨거움이란 참으로 필설로 형용하기가 어렵다.
실제적인 것의 가치와 관련해 소개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어느 한국 젊은이가 있었다. 실업계 고등학교를 나오고 군 복무를 마쳤다. 한동안 작은 회사에서 기능공 생활을 했다. 그러한 생활도 잠시 장인의 길에 그다지 뜻이 없었던 그는 곧 따분함을 느꼈다. 마침 한국에 중국 열풍이 불고 있던 때였다. 그는 지체없이 중국 동북지역에 와서 이곳저곳을 다니며 그가 할 만한 일이 없을까 하며 현장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국어 구사능력은 물론 특별히 경쟁력 있는 능력이나 기술을 갖추지도, 일정한 자본력도 갖추지 못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없어 보였다. 열심히 쏘다녀 볼수록 현실의 벽은 높아 보여 실망과 좌절의 깊이만 갈수록 커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숙소에서 우연히 만난 옆방 조선족 아줌마가 물어 왔다. 한국 총각 그대는 뭐 하러 여기까지 왔느냐고… 그래서 이참저참해서 오게 되었으며, 이러고 있노라니 별 뾰족한 수가 없고 매우 답답해서 그러잖아도 돌아가려는 참이라고 대답했다. 한탄과도 같은 그의 이야기를 들은 아줌마가 다소 생뚱맞은 제안을 했다. 그러지 말고 자기 고향에 같이 가서 사업을 하자는 것이었다.
사업은 무슨? 당시 그가 보유한 자금이랬자 기껏 한화 300만 원 남짓했기에 그걸로 도대체 무슨 사업이 가능하겠느냐고 되물었다. 그랬더니 자기도 그 정도의 자금 밖에 없지만 두 사람이 가진 모든 힘을 합쳐 한식당을 차려 보자는 것이었다. 작은 중소도시인데다 아직은 한식당이 하나도 없는 만큼 분명 희소가치가 있고, 따라서 도전해 볼 만한 가능성이 충분히 있을 거라고 하면서… 그리고는 자기 역시 총각처럼 여지껏 한식을 만들어 본 경험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총각이 한국에서 한식 요리책을 구해다 주면 그걸 보고 시도해 보겠노라며 의지를 펼쳐 보였다.
젊은이는 용기를 얻었고,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곧장 실행에 들어갔다. 자본력에 맞춘 그야말로 조그마한 구멍가게 수준의 점포를 얻었고, 간판도 약소하게나마 달았다. 그리고 곧장 한국에서 공수해 온 요리책을 들여다 보며 김치찌개와 된장찌개를 비롯한 한식 만들기가 시도되었다. 만들어진 요리는 한족 현지인들에게 시식을 시켰다. 그들이 맛있다고 하면 그대로, 맛이 없다고 하면 조리방법을 바꿔 다시 조리를 해 가며 수정했다. 그 한식당만의 하나하나의 음식 레시피가 차츰 정형화되기 시작했다. 레시피 결정과정이 그러했던 만큼 요리란 요리는 결론적으로 대부분 무늬만 한식일 뿐 맛깔은 철저히 현지인의 입맛에 부합된 것들이었다.
그랬던 만큼 그 한식당은 조용한 가운데도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마침내 비교적 짧은 시간 내에 좁은 공간에 발 디딜 틈도 없이 손님들로 북적대기 시작했다. 그러던 차 또 하나의 계기가 찾아왔다. 고급 공무원들의 단체 회식이 이루어진 것이다. 작은 도시였으니 색다른 음식점이 귀했고, 급기야 지역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맛집 기행 끝에 거기까지 왔던 것이다. 그 이후 소문은 더욱 날개를 달았고, 한식 아닌 한식은 한식의 탈을 쓰고 한류를 전파했으며, 식당은 날이 갈수록 번창일로를 달렸다.
성공사례가 된 요즘 그 젊은 사장이 하루에 하는 일과 중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일까? 늦저녁 장내를 휘 한 바퀴 둘러 본 후 당일 매출을 가장 많이 기록한 테이블에 서비스요리를 선정하고 이를 직접 전달하는 일이란다. 직접 만들지도 않은 요리를 들고 가는 건 그의 몫이지만, 조선족 아줌마 경리가 손님에게 너스레를 떤다고 한다. 이 분은 한국에서 오신 사장님이자 주방장이신데 오늘 특별히 여러분께 고마움을 전하고자 하는 거라고… 물론 이때 그는 당연히 중국어가 아닌 한국어로 고마움을 표해야 한다. 즉석 통역이 이루어지는 등 그래야 분위기에 더욱 어울리기 때문이다. 손님도 즐겁고 식당측도 즐거운 한마당이다. 바로 지린성의 어느 작은 도시에 있는 한식당의 역사이다.
내가 직접 현장답사를 거친 게 아니라 그 지역 한국인회에서 봉사하는 분에게서 전해 들은 이야기이기에 다소 각색된 부분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인 이야기의 흐름에 왜곡된 부분은 없으니 등장인물들에게 충분히 양해를 구할 수 있으리라 본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난 가벼운 흥분과 함께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그건 수많은 한국 매체에서 중국 이야기를 쏟아낼 때도, 뭇 사람들이 해박한 지식과 풍부한 경험의 바탕 위에서 중국과 중국사업을 거론할 때도 느끼지 못했던, 더구나 그저 중국과 한국을 들락날락하며 값싼 비평을 해 대는 사람들에게서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작은 감동이었다. 낯설고 물선 곳에서 가진 것 없이 그저 몸 하나 던져 오늘을 일군 그는 분명 작은 거인이었고, 난 아낌없이 박수를 보낸다. 그는 진정 ‘실사구시’를 온몸으로 실천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