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임시정부 유적지, 상하이와 한국 100년 인연의 ‘산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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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19-01-31 21:22|본문
상하이 임시정부 유적지, 상하이와 한국 100년 인연의 ‘산증인’
상하이시 황푸구 마당로 306로 4호에 위치한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는 1993년 개방 이후 수많은 관광객을 맞이했다. 사진/ 완취안(萬全)
상하이(上海)의 마당로(馬當路)는 역사와 현실이 교차하는 곳이다. 한편엔 고층빌딩이 즐비하고 차량 행렬이 길게 이어지지만, 다른 한편엔 옛 상하이의 전통주택 양식이 잘 살아있는 스쿠먼(石庫門) 건축이 있다. 붉은 벽돌로 된 외벽, 검은 칠을 한 나무문, 서양 스타일의 문 장식이 유구한 역사를 말해준다. 이곳에는 중국 근대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도 이곳에 있다.
1926년 12월 14일, 김구가 임시정부 지도자로 당선되자 그가 거주하던 마당로 푸칭리(普慶里) 4호는 임시정부 활동의 중심이 됐고 1932년 상하이에서 철수할 때까지 계속됐다. 이곳은 한국 독립운동이 굴곡과 고난을 겪은 곳이다. 노무현 한국 전 대통령은 이곳을 ‘한국 정부의 법통이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설립 100주년을 맞아 본지는 임시정부 유적지를 방문해 한국 지사들의 독립운동사를 되돌아보고 중·한 수교 이후 신시대를 맞은 상하이와의 교류 과정을 취재했다.
중·한 혁명 우의를 간직한 곳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에서 우리는 이 곳의 책임자를 만났다. 그녀는 우리에게 임시정부 설립 배경을 자세하게 소개해주었다.
중국 근대사에서 상하이는 강제 개방된 1차 항구 중 하나였다. 20세기 초 상하이는 발전을 거듭하면서 명실상부한 ‘자유의 땅’이 되고 ‘모험가의 낙원’이 되어 세계 각국의 사업가, 정치가, 문화 인사, 탐험가들이 몰려들었다. ‘십리양장(十裏洋場, 상하이)’은 순식간에 세계 문화의 큰 전시장이 됐다.
1910년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자 독립운동에 투신한 한국 지사들이 상하이로 건너왔고, 조직을 구성해 활동을 시작했다. ‘3·1운동’ 얼마 뒤인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됐고, 이후 임시정부는 1926년 지금의 자리로 이전해 업무를 시작했다. 임시정부 유적지 전시관에서 우리는 임시정부 초기 지도자들의 활동 모습을 담은 영상 자료를 볼 수 있었다.
한국에서 온 혁명지사 외에 한국의 문화계 인사와 유학생도 상하이에서 많이 생활했고 적극 활동했다. 한국 문인들은 <동방의 애인>, <황혼> 등 상하이 지역의 중국인과 다양한 인종을 주인공으로 한 기록류 산문과 소설, 시가 작품을 썼다.
1932년 이후 중국 당국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간의 공적 협력이 날로 긴밀해졌다. 당시 임시정부 지도자인 김구는 중국을 침략한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일본군 총사령관 암살을 계획했다. 그는 윤봉길에게 상하이 훙커우(虹口)공원에서 이를 시행하도록 했다. 이 사건으로 임시정부는 이름을 날렸지만 일본 측의 대대적인 수색이 시작됐고 체포 명령이 떨어졌다. 압박이 심해지자 임시정부 지도자들은 상하이를 떠났다.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 전시실 내부 사진/위자(于佳)
중·한 수교로 생기 되찾은 임시정부 유적지
1945년 일본이 투항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해산했고 구성원들도 한국으로 떠났다. 임시정부 사무실도 방치되다가 이후 주민들의 거주지가 됐다. 상하이와 한국의 연락도 소원해졌다.
1978년 중국이 개혁개방을 시작하자 중·한 양국간 경제 왕래가 점차 회복됐다. 중국의 ‘외자도입’ 정책의 영향으로 한국 투자자들이 속속 중국을 찾았다. 하지만 당시 한국 투자자는 대부분 산둥(山東)성과 랴오닝(遼寧)성에 투자했다. 1990년 중국이 상하이 푸둥(浦東) 개방을 결정하자 과거 한국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던 상하이에 다시금 한국인의 관심이 쏟아졌다.
1993년 중·한 수교 이듬 해 상하이시는 한국의 부산시와 ‘자매도시’ 결연을 맺었다.
이는 중국과 한국의 지방정부가 최초로 진행한 도시 외교였다.
1994년 3월 김영삼 당시 한국 대통령이 중국 방문 기간 동안 특별히 상하이 푸둥신구를 참관하면서 한국인들의 푸둥 투자 서막이 열렸다. 한국측 투자 자료에 따르면 2000년까지 한국 기업이 상하이에 투자한 금액은 4억7000억 달러에 달했다.
2001년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자 상하이의 매력은 한층 높아졌다. 상하이 시 정부 통계에 따르면 2016년 상하이의 외국인직접투자 계약액은 3840억3100만 달러였고, 이 가운데 한국측과 체결한 계약액은 46억7900만 위안(약 7605억원)으로 한국은 상하이의 7대 외자 도입국이 됐다.
중·한 수교 전후로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 복원 작업이 대대적으로 추진됐다. 1988년부터 1990년까지 중국과 한국의 무역 왕래가 점차 증가하면서 한국인의 상하이 방문도 늘어났다. 한국 혁명열사 후손들이 이 곳을 찾아왔으며, 중·한 양국의 전문가들도 역사 연구를 시작했다. 이후 중국 정부는 마당로 306로 4호를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로 확정했다.
1990년 10월 상하이시 루완(盧灣)구 정부는 쑹산로(嵩山路) 거리에 문물보호관리소를 설립하고 이 유적지를 역사문물로 보호했고, 1993년 3월 마당로 306로 4호를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 관리처’로 개명했다. 같은 해 4월 13일 수리를 거쳐 임시정부 유적지가 대외에 공식 개방됐다.
상하이시 중심인 황푸구 황푸강변의 와이탄(外灘) 서쪽. 다양한 스타일의 르네상스식 건물 52동이 늘어서 있어 ‘만국 건축 박람군’이라고 불린다. 상하이의 대표적인 건물이자 도시 역사의 상징이다.
다시 개방된 임시정부 유적지는 역사 전시관에 그치지 않고 중·한 민간 교류의 중요한 장이 됐다. 1997년 임시정부 유적지 관리처와 상하이 푸단(復旦)대학교 한국연구센터, 상하이기록보관소가 공동으로 ‘중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在中國)’ 학술 심포지엄을 개최해 한국 측의 주목을 받았다.
중·한 수교 이후 2018년 말까지 한국 대통령 총 6명이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를 방문하고 기념사를 남겼다. 주(駐)상하이 한국 총영사관 직원들은 이곳을 자주 찾는 ‘단골’이고, 한국인 관광객에게 임시정부 유적지는 꼭 방문해야 할 곳이 됐다.
그러나 많은 한국인이 상하이를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단순히 대한민국 정부 법통의 발원지이고 동서양 문화가 모이는 전시장이여서가 아니라, 개방을 확대하겠다는 결심과 세계를 포용하겠다는 상하이의 의지 때문이다.
2013년 중국은 상하이자유무역시험지구를 공식 설립했다. 자유무역지구 설립 다음 날 중국은 중국 최초의 외국인투자 진입 네거티브 리스트(2013년 버전)를 발표했다. 18개 업종을 분류하고 190개 외국인투자 특별관리 조치를 명시했다. 이로써 상하이는 새로운 개혁개방 단계로 진입했다. 상하이는 지난 5년 동안 자유무역지구 개혁을 중심으로 법치화·국제화·편리화된 경영환경 조성에 주력했고, 거래비용 인하를 계속했다.
5년 동안 상하이자유무역시험지구의 누적 신규등록 기업 수는 5만7000개, 신설 기업 수는 20년 전 이 지역 전체기업 수의 1.6배가 됐다.
이 가운데 신설 외자기업 수는 1만여 개로 자유무역시험지구 개장 초기의 5%에서 20% 정도로 증가했다. 외국인직접투자 누적액은 250억 달러에 달하고, 처리된 해외투자 프로젝트는 2200개가 넘는다.
상하이자유무역시험지구 설립은 한국 기업의 중국시장 진출에 편리한 문을 열어주었고, 다른 지역의 중·한 통상 협력에 참고할 경험을 제공했다.
2017년 12월 중국 국무원은 장쑤(江蘇)성 옌청(鹽城), 산둥(山東)성 옌타이(煙台), 광둥(廣東)성 후이저우(惠州)에 중·한 산업단지 설립을 비준 동의했다.
2018년 6월 12일 중·한(옌청)산업단지, 중·한(옌타이)산업단지, 중한(후이저우)산업단지가 동시에 문을 열었다. 신설된 3개 중·한 산업단지는 상하이 등 자유무역시험지구의 성공 경험을 적극 보급하고, 투자·무역 편리화 개혁에 박차를 가하며, 행정 심사제도와 행정 법집행 체제를 더욱 개혁해 프로젝트 시행과 기업 발전에 보다 양호한 제도적 환경을 마련할 것이다.
상하이는 외자 경영 환경을 개선해나가고 있고, 임시정부 유적지는 날로 늘어나는 한국인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얼마 전 개최된 중국국제수입박람회 기간 동안 임시정부 유적지는 중요한 방문객들을 맞았다.
2018년 수입박람회 기간 동안 주중 한국 대사가 중국 각 도시의 한국 총영사들과 함께 임시정부 유적지를 방문했다. 필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가 중국과 한국의 우의를 이어주는 다리라는 것을 확실하게 느꼈다.
글| 장진원(張勁文)